brunch

에우리피데스의 경향과 소크라테스주의/ 두 번째 관객

비극의 탄생/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12장

by 아란도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제12장 p96~104






* 책 본문의 내용을 제 방식대로, 부분 요약 및 단락 정돈과 편집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대체로 본문 전체를 정리했는데, 그 이유는, 12장은 니체가 풀어놓은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더 이해하기에 수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에우리피데스의 경향>


니체는 에우리피데스의 희극에서 “우리의 습관이나 전통과 전혀 조화할 수 없었던 희극의 합창단과 비극적 주인공을 보면서 느꼈던 이질감”에 대해 생각해 보자고 말한다.


우리는 “이중성” 자체를 그리스 비극의 근원과 본질로 보아야 한다. 서로 얽혀 있는 두 가지 예술 충동,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표현으로 재발견할 때까지 말이다.


하지만 에우리피데스는 근원적이고 전능한 디오니소스적 요소를 비극에서 분리해 내었다. 순수한 형태로 비非디오니소스적 예술을 관습과 세계관 위에 새롭게 세우는 것이 바로 ‘에우리피데스의 경향’이다.


에우리피데스가 <바코스의 시녀들>로 자신의 경향이 실행되는 것을 저항했지만, 그러나 그 경향은 결국 실현되고 말았다. 그가 자신의 경향을 부인하려 했을 때는 이미 그 경향이 승리를 거둔 후였다.


디오니소스는 이미 비극 무대에서 쫓겨났다. 그것도 에우리피데스를 통해 악마적 힘에 의해 축출되었다. 하지만 어떤 점에서 보자면, 에우리피데스 역시 ‘가면’에 불과하다. 그를 통해 말하는 신은 디오니소스가 아니며 아폴론도 아니다. 그것은 새로 탄생한 마신魔神. 소크라테스라 불리는 마신이었다.


이는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소크라테스적인 것의 ‘새로운 대립’을 의미한다. 그리스 비극의 예술 작품은 이 대립으로 인해 멸망했다. 비록 에우리피데스가 자신의 경향을 철회함으로써 우리를 위로하고자 했지만, 그는 성공하지 못했다. 훌륭한 신전이 폐허가 되었는데, 파괴자의 비탄이나 “그것이 모든 신전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다”는 그의 고백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제 에우리피데스가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에 맞서 싸우고 결국 승리하는 무기가 되었던 ‘소크라테스적 경향’을 살펴보자.




<소크라테스적 경향>

연극을 비非디오니소스적인 것의 토대 위에 세우겠다는 에우리피데스의 의도가,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실현되었을 때, “그것으로 무슨 목적을 이룰 수 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그리고 ‘연극’이 ‘음악이라는 모태’로부터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신비스러운 어스름한 빛 속에서 탄생해서는 안 된다면, 어떤 형태의 연극이 가능하겠는가? 그것은 단지 “연극화된 서사시”만이 가능하다. 물론 이러한 아폴론적인 예술 영역에서는 ‘비극적 효과’는 기대할 수 없다.


서사적 아폴론적인 것의 힘은 너무나 강해 가장 무시무시한 사물에게도 가상에 대한 즐거움으로, 또 이 가상을 통한 구원으로 마법을 걸어 우리의 눈앞에서 변신시켜 버릴 정도다. 연극적 ‘서사시의 작가’는 서사적 ‘음유시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떠올리는 영상에 완전히 몰입할 수 없다.


그는 자기 앞에 놓인 형상을 언제나 움직이지 않고 먼 눈길로 관조하면서 바라본다. 이러한 ‘연극적 서사시의 배우’는 근본적으로 여전히 이야기하는 ‘음유시인’이다. ‘내면적 꿈’이라는 ‘영감’이 그의 모든 행위에 서려 있어서, 그는 절대로 완전한 배우가 될 수 없다.





<에우리피데스의 서사적 연극>


이러한 ‘아폴론적 연극의 이상’에 대해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그것은 ‘과거의 엄숙한 음유시인’에 대해 플라톤의 《이온》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본질을 서술하고 있는 ‘후세의 음유시인’이 취하는 태도와 같다.


“슬픈 이야기를 할 때면, 내 눈은 눈물로 가득 찬다. 그러나 내가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일을 이야기할 때면, 내 머리는 공포로 곤두서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여기서 우리는 ‘가상 속’에서 ‘서사가 상실되었다’는 어떤 흔적도, 진정한 배우의 무감각한 냉담도 찾아볼 수가 없다. ‘진정한 배우’는 최고의 연기 속에서 완전한 가상, 가상에 대한 기쁨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에우리피데스는 두근거리는 가슴과 곤두선 머리카락을 가진 배우인 것이다. 소크라테스적 사상가로서 그는 계획을 세우고, 열정적 배우로서 그것을 연기한다. 그러나 그는, 그의 계획에서도, 연기에서도 순수한 예술가는 못 된다.


이와 같이 “서사적 연극”은 냉담하면서 동시에 열정적인 것이 되고, 딱딱하게 굳을 수도 있고 활활 타오를 수도 있는 것이다. 연극이 이제 서사시의 아폴론적 효과를 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이 표현은 곧 살아 있을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즉 실존 상태 그대로를 연극에 도입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현실이지 더 이상 ‘가상’이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므로 아폴론의 효과 역시 죽었다는 의미가 된다.




<에우리피데스의 새로운 감동 수단/ 서곡의 신과 기계장치 신(데우스 엑스 마키나)>


에우리피데스는 이제 ‘새로운 감동 수단’이 필요해졌다. 이 감동 수단은 두 개의 유일한 예술 충동에 속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감동 수단의 하나는 아폴론적 관조 대신 ‘차가운 역설적 사상’이며, 또 다른 하나는 디오니소스적 무아경 대신 ‘불같은 격정’이다. 이것은 사실주의적으로 모방되기는 했지만, ‘예술의 에테르’ 속에 담겼던 “사상과 격정”은 아니다.


연극을 아폴론적 요소 위에만 세우려 했던 에우리피데스의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아폴론적 경향은 자연주의적이고 비예술적 경향으로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면, 이제 “미학적 소크라테스주의”로 한 걸음 더 접근해도 좋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주의의 최고의 법칙은 다음과 같다.

“아름답기 위해서는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소크라테스의 “아는 자만이 덕성을 가지고 있다”와 유사하다.


에우리피데스는 이 기준을 손에 들고 모든 것 하나하나를 측정했고, 이 원칙에 따라 언어, 성격, 연극적 구조, 합창 음악 등을 수정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과 비교하여,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을 문학적 결함과 퇴보로 간주하곤 했던 것은 바로 ‘철저한 비판 과정’ 때문이다. 즉 그토록 “과도한 사려의 산물”인 탓이다.

에우리피데스의 서곡은 합리주의적 방식이 가진 생산성의 한 사례가 된다. 에우리피데스의 연극에서 서곡만큼 우리의 무대 기술과 양립할 수 없는 것도 없다. “한 사람이 혼자 작품의 서두에 등장해, 자신이 누구이고, 앞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가장 먼저 어떤 이야기가 나올 것인지, 이제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작품의 진행 과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미리 이야기한다면, 근대의 희곡 작가라면 그것이 ‘긴장 효과’를 포기하는 용서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 이것은 요즘 말로 ‘스포일러’가 미리 되고 있다는 의미다. 어떤 영화를 아직 보지 않았는데, 과정과 결말을 누가 다 이야기해 버리면 김이 빠진다. 니체는 지금 바로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두 알고 있다. 누가 이 일이 실제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려 하겠는가? 여기에서는 ‘예언적 꿈’과 차후에 나타날 현실과의 흥미진진한 관계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대 비극의 ‘비극적 효과/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래스의 방식>


“비극적 효과”는 결코 서사적 긴장, 지금 여기 그리고 나중에 일어날 일에 대한 매혹적인 불확실성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위대한 수사학적, 서정적 장면들, 주인공들의 열정과 변증론이 거대하고 힘찬 강물처럼 펼쳐지는 장면들에 근거한다.


모든 것은 줄거리가 아닌 “격정”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격정을 준비하지 않는 것은 배척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런 장면을 즐기고 그것에 ‘몰입’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청중에게 부족한 ‘전후 맥락의 고리’, 과거사의 조직망에 나 있는 ‘구멍’인 것이다.

이런저런 인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여러 성향과 의도가 빚어내는 이런저런 갈등들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를 청중들의 머릿속에서 계산하는 한, 그들이 주인공의 고통과 행위 속으로 완전히 몰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또한 그와 함께 괴로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이스킬로스나 소포클레스의 비극은 1막에서 작품의 이해에 필요한 실마리들을 우연히 관객들의 손에 쥐어주는 재치 있는 기교를 사용한다.


“비극”의 이런 점은 ‘형식적이고 필연적인 것’에 ‘가면’을 씌워 ‘우연한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저 고상한 예술가적 재능을 입증하는 하나의 특징이다.



<에우리피데스의 서곡과 데우스 엑스 마키나>


어쨌든, 에우리피데스는 관객이 1막에서 지난 이야기의 계산에 열중하느라 동요할 것이며, 그래서 문학적 아름다움과 도입부의 열정을 놓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서곡”을 도입부 앞에 놓고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 낭독하도록 한 것이다.


이 서곡의 ‘신’은 종종 희극의 진행 과정을 청중에게 확실히 알려 주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화의 실재성’에 대한 모든 의혹을 잠재우는 역할을 맡았다. 이는 ‘데카르트’가 ‘경험 세계의 실재성’을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신의 진실성’에 호소하는 방법을 통해서만 입증할 수 있었던 것과 유사하다.

또한 에우리피데스에게는 ‘동일한 신적인 진실성’이 극의 마지막에 또 한 번 필요하다. 주인공들의 미래를 청중에게 보장하기 위해서다. 이것이 저 악명 높은 “기게 장치 신deux ex machina"인 것이다. ‘서사적 회고’와 ‘전망’ 사이에 ‘극적’이고 ‘서정적인 현재’, 즉 ‘원래의 연극’이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현대에서도 드라마에 이러한 장치적 요소가 있다면 그 드라마는 수준이 낮은 것으로 친다. 왜냐하면 재미와 예술성은 또 다른 차이가 있게 마련이니까. 서사적 연극 형태는 지나친 현실주의와 목가적 자연주의가 개입되었는가 보다. 원래의 연극은 아마도 ‘현실’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소크라테스 / Daum 백과




<에우리피데스의 ‘서곡’ 낭독은 시민들이 연설에서 활용했다>


시인으로서의 에우리피데스는 무엇보다 자신의 ‘의식적 인식’을 반영한 존재였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그리스 예술사’에서 그에게 ‘기념할만한 위치를 부여한 것’이다.


에우리피데스는 비판적이고 생산적인 자신의 작품 활동과 관련하여 종종 “아낙사고라스” 저서의 서두에 있는 말을 연극에 적용해보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 말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모든 것은 혼돈이었다. 그때 이성이 나타나 질서를 창조했다.”


아낙사고라스가 마치 온톤 술 취한 자들 가운데 최초의 말짱한 정신의 소유자처럼 자신의 “누스Nous"를 가지고 철학자들 사이에 등장했듯이, 에우리피데스도 다른 비극 작가들과 자신의 관계를 비슷한 이미지로 이해하고 싶었던 것 같다. * 여기까지 니체의 글들을 옮기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성’ 중심주의로 진행하는 그리스 사회가 문득 ‘오이디푸스 신화’와 겹쳐졌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 역시 그러한 것을 그가 사는 세상에서 얼핏 보았던 것이 아닐까. 모두 옳은 길이라고, 또는 과거를 멀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과거의 것을 더 이상 계승이나 전승하려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미래는 드러나고 있었다. 그 시대부터 현재까지의 진행 역사를 보자면 그러하다. 이러한 이성과 결합한 그리스적 명랑성이 ”기독교 초기 400여 년 동안 신에 대한 외경심에 가득 차 있던 명상적인 교인들을 그토록 격분시켰던 장본인이다"라는 니체의 말처럼, 모두 거대한 수동성의 운명의 굴레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는 바로 그런 느낌말이다. 그리고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소크라테스의 독배 사건’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 병은 어디에서 고대에 가장 아름답게 자라난 존재인 플라톤에게로 옮겨왔는가? 사악한 소크라테스가 그마저도 타락시켰던 것일까? 소크라테스야말로 청년들을 타락시킨 자가 아닐까? 그 스스로 독배를 받을 만했던 것은 아닐까? <인용/ 니체 『선악의 저편』 김정현 역(책세상, 2016), <서문> p11 5절>


소크라테스의 독배 사건에 대해서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 사회에서 ‘추방’ 정도면 되는 판결이었지, 소크라테스가 스스로 죽어야 하는 문제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그 자신을 변론하며 판관들로부터 ‘독배’를 이끌어 냈다. 왜 그랬을까? 그는 죽어서 영원히 살고자 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 영향은 젊은 플라톤에게로 그대로 옮겨졌다. 니체는 그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독배 자결은 결국 플라톤을 “새로 태어나게 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훗날 기독교와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천년의 중세 사회가 지속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모두 능동적이었지만, 거대한 수동성의 한복판으로 걸어가고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역사적 진행 과정이 ‘오이디푸스 신화’와 겹쳐지는 것이다. 소포클레스는 세상의 이러한 형태를 ‘오이디푸스 신화에 담아 놓은 것’이므로 ‘진리’를 다룬 것이 된다. 니체가 본 소포클레스도 그러할지도.



만물의 유일한 정리자요. 지배자인 ‘누스’가 예술 창작에서 배제되어 있는 한, 만물은 아직 원초적 혼돈 속에 있다. 에우리피데스는 이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최초의 ‘취하지 않은 자’로서, “술 취한” 시인들을 단죄할 수밖에 없었다. * 술 취한 시인들이란 ‘디오니소스적 예술가들’을 가리킨다. 즉 도취의 디오니소스적 서정시인들이다. 이를테면 아르킬로코스와 소포클래스다.

* 누스nous/ 이성, 지성, 정신, 영혼 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이다. 아낙사고라스는 세계는 누스가 지배하고 있어, 인간은 누스를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플로티노스는 만물은 1자로부터 유출한 누스의 기능에 의한다고 했다. 스토아학파에서는 로고스와 거의 동의로 이용된다. 이마누엘 칸트의 철학에서는, 이 말로부터 파생한 '누메논' (noumenon, 생각할 수 있던 것)이라는 말이 '물자체'와 동의로 이용된다. <출처/위키백과>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소크라테스의 대립/ 그리스 비극의 죽음/ 두 번째 관객 - 소크라테스>



소포클래스가 아이스킬로스에 관해했던 말, “그는 무의식적으로 일을 해도 올바로 한다”를 물론 에우리피데스가 이해한 말은 아니다. 에우리피데스는 아이스킬로스가 무의시적으로 창작하기 때문에 옳지 못한 것을 만들어낸다는 정도의 의미만을 주장했을 뿐이다.


신적인 플라톤도 ‘창조적인 능력’에 대해 대개는 ‘역설’적인 투로 말했다. 그것도 이 능력이 의식적인 통찰이 아닌 경우에 한해서 말하면, 그것을 ‘예언가나 해몽가의 재능과 동급’으로 취급한다. 즉 “시인이 시를 쓸 수 있으려면, 의식을 잃어 오성이 그의 내면에 전혀 남아 있지 않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에우리피데스는 플라톤이 그랬던 것처럼, “비이성적”인 시인과 대립되는 ‘시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모든 것은 아름답기 위해 의식적이어야 한다”라는 그의 미학적 기본 원칙은 “모든 것은 선하기 위해 의식적이어야 한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제에 상응하는 명제다. 따라서 에우리피데스를 “미학적 소크라테스주의”의 시인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고대의 비극’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에우리피데스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두 번째 관객”이다. 에우리피데스는 소크라테스와 동맹해서 새로운 예술 창조의 선구자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그리스 비극이 몰락’했다면, 미학적 소크라테스주의는 ‘살인 원칙’인 셈이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이 고대 예술의 디오니소스적인 면을 겨냥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에서 ‘디오니소스의 적’, 새로운 ‘오르페우스’를 인식하게 된다. 디오니소스에게 반기를 든 오르페우스, 아테네 법정에서 디오니소스 시녀들에게 갈기갈기 찢기게 될지라도 강력한 신조차 도망가게 만든 오르페우스를. * 아마도 니체가 오르페우스를 디오니소스의 적으로 간주한 니체의 생각을 추측해 본다면 이러하다. 디오니소스는 오르페우스의 연주를 좋아했었다. 하지만 바카이들이 그를 죽였고 디오니소스는 그 바카이들을 나무로 만들어버렸다. 후에 ‘오르페우스 밀교’가 생겼는데, 오르페우스와 디오니소스를 숭배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오르페우스 밀교가 ‘원죄' 개념과 ‘영혼의 구원’ 개념을 통하여 기독교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래서 니체는 오르페우스를 ‘디오니소스의 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오직 디오니소스만 ‘부활’의 신이기에 그러할 것이다.


귀스타브 모로의 <오르페우스>



* 오르페우스Orpheus/ 에우리디케를 저승에서 데려오지 못하고, 결국 혼자 지상으로 나온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음악을 듣고 찾아오는 다른 여자들의 구혼을 모두 거절하며 슬퍼하기만 하다가 그만 분노를 사서 몰매를 맞고 죽임을 당한다. 일부 판본에선 이 여자들이 디오니소스 의식으로 인해 광기에 찬 여자들인 '바카이(Bacchai)'였다고 묘사한다.

여자들이 돌을 던졌는데, 오르페우스가 리라를 연주하자 비껴가거나 도중에 땅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러자 여자들은 악을 쓰며 날카로운 소리를 질러서 리라 연주를 무효화시키고 돌팔이로 몰매를 해서 죽였다. 죽은 뒤에도 시체를 능욕당해 리라와 함께 강에 버려지고 말았다. 잘린 그의 머리는 오랜 기간 동안 신탁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시체는 오르페우스의 누이들인 오이아그리데스와 뮤즈들이 수습했다. 당연히 자신의 신도들이 대형사고를 쳤다는 사실에 분노한 디오니소스는 오르페우스를 죽인 여자들을 전부 나무로 만들어 버리는 벌을 내린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10권에서는 그가 사후에 낙원인 엘리시온에서 에우리디케와 재회해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오르페우스의 리라는 별자리가 되어 리라(Lyra) 자리가 되었다고 하고 오르페우스는 천국 엘리시온에서 신들을 위해 리라를 연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르페우스 - 나무위키 (namu.wiki)
<오르페우스 밀교>

오르페우스는 단순히 신화 속 영웅은 아니었다. 사람이 죽은 후 모든 장래를 극복하고 천상으로 오르는 법을 알아냈다고 해서 ‘오르페우스 종교’가 생겼다고 한다. 오르페우스의 제자와 추종자들이 보존해 전해 내려온 성서에는 태초에 ‘밤의 신 닉스’가 있었다. 닉스는 우주의 알을 만들어내었다. 그 알이 둘로 갈라져 하늘과 땅이 되고 세상의 모든 것들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기원전 8~5세기경 창시되었으며, 미트라교의 영향을 받았다. 오르페우스가 명계를 다녀오고 죽은 사람을 살릴 뻔했다는 것에 주목해 그를 섬기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이다. 오르페우스와 함께 명계를 다녀간 신인 페르세포네와 디오니소스 역시 같이 숭배했다. 이들은 디오니소스 탄생 설화인 ‘자그레우스 설화’ 속 티탄의 잔인함과, ‘아기의 순수’함을 바탕으로 ‘금욕적인 생활’을 통해, 티탄과 같은 인간 내면의 ‘폭력성’을 억제하여 ‘영혼의 구원’을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이들의 특징이라면 다른 ‘그리스 신화나 종교’와 다르게 ‘사후세계를 신앙의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우스가 티탄을 번개로 살해한 뒤 프로메테우스가 티탄의 재와 디오니소스의 재로 인간을 만들 때, 티탄의 폭력성과 디오니소스의 원초적 순수함이 합쳐져 인간이 태어났다. 디오니소스적 영혼이 ‘신성성과 불멸성’을 가져 인간의 영혼은 기본적으로 불멸한다고 본다.

티탄의 재로부터 만들어진 육체는 영혼을 구속해 인간의 <원죄>에 의해 슬픔의 고리인 윤회와 전생을 반복한다. 이들은 ‘금욕적인 생활’을 통해 ‘슬픔의 고리’로부터 벗어나 ‘영혼이 구원’ 받으면 신들과 교감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오르페우스교의 목적이 되었다. 이것은 오르페우스교만의 특징적인 점이다. 그리고 또 다른 밀교들과 구분되는 것은, 이들이 ‘파피루스나 황금판에 그들의 교리를 적은 문서를 남겼다는 것’이다. 이들은 교리에서 보이듯 ‘영혼의 정화’와 ‘디오니소스의 숭배’에 열성적이었다.

학자들 중에는 이들의 인간의 ‘원죄 개념’과 ‘영혼의 구원’ 등의 교리가 초기 기독교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오르페우스 - 나무위키 (namu.wiki)




<소크라테스주의에 의해 디오니소스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래서 디오니소스는 과거에 애도의 왕 리쿠르고스에게서 도망칠 때처럼 깊은 바닷속으로, 온 세상을 서서히 뒤덮는 ‘비밀 의식’의 신비스러운 물결 속으로 몸을 숨긴 것이다. * 이 표현들은 상징적이라고 생각된다. 불분명하지만, 리쿠르고스는 BC 7세기 경의 스파르타의 전설적인 입법자였다고 한다. 그의 엄격한 도덕적 체제로 인해, 스파르타는 성에 관해 엄격한 잣대를 유지했다. 그 후 기원전 4세기에 접어들어서 스파르타 시민들도 점차 경제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매춘부들과 접해지기 용이해졌다고 한다.


아테네에 기원전 600년경에 살라미스를 둘러싼 ‘메가라와의 항쟁’에서 승리하였다. ‘솔론’은 개혁을 추진하여 전반적인 산업구조 전체를 변혁시켰는데, 가격이 규제되는 국가 매춘업소를 만들었다고 한다. 반면에 스파르타는 가원전 4세기에 매춘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스파르타의 사창가는 헬레니즘 시대까지 타이게투스(Taygetus) 언덕의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Dionysus) 신전 근처에 존재했다고 한다.

아마도 니체가 상징적으로 표현한 의미들에서, 디오니소스가 ‘리쿠르고스’에게 도망쳤다는 표현은 디오니소스 숭배의 의식이 억제받았기에, 디오니소스 숭배가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는 의미라고 생각된다. 그 당시 신전들에 매춘을 하는 여성들 중에서 ‘헤타이라(고금 매춘/독립적)’가 고용되어 있었다고 한다. 아프로디테의 신전은 매우 부유해서 천 명이 넘는 헤타이라를 고용했다고 한다.


이러한 헤타이라들은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바쳐진 남성들과 여성들이었다. 당대의 많은 사람들이 아프로디테 신전의 헤타이라를 보기 위해 코린토스에 방문했고, 이로 인해 도시의 부는 증가되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사회가 매춘으로 도시의 부를 유지했다고 한다.


매춘은 합법적이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겨 일반적으로는 노예 취급을 하거나 ‘시민취급’을 하지 않았다. 이들은 고대 그리스의 문학작품 속에서도 등장한다. 그리스 희극은 시대별로 Old Comedy 희극인 ‘고기희극’부터, 중기희극을 거쳐 New Comedy ‘신기희극’으로 나누어진다.


고기희극은 주로 ‘정치적 주제들’과 관련되었지만, 신기희극은 개인적 주제들과 아테네 인들의 일상을 다루었다. 희극에서의 사회적 관습은 좋은 신분을 가진 여성들이 공개적으로 묘사되는 것이 금해졌기 때문에, 연극 내 무대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유일한 여성들은 필연적으로 매춘부들이었다고 한다. <출처/ [세계사, 4대 문명] 고대 그리스의 매춘 (tistory.com) >



에우리피데스가 그의 연극 무대에 올린 주제들은 주로 이방인 매춘 노예들과 잔혹한 여성들의 형태이었다. 그래서 여성혐오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고. 반면에 고귀한 행실의 여성과 고결한 남성들을 다루기도 하여 어느 한쪽으로 판단하기에는 모호하다는 평가도 있다. 이 당시에 여성과 남성은 차별이 있었고, 여성들 간에도 계급차별이 확연했다고 한다.


니체는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상 속의 인간이 그로 인해 관객석에서 무대 위로 떠밀려 나온 것이며, 예전에는 위대하고 대담한 윤곽들만 표현했던 ‘거울’이 이제 당혹스러울 만큼 충실하게 자연의 ‘실패한 선들’까지 그대로 ‘반사하는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