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 음악의 탄생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11장
아이스킬로스는 “합창과 낭송만으로 이루어진 초기의 극예술을 노래와 대사 및 행위가 어우러진 완전한 형태의 극예술로 끌어올렸다. 그는 그리스 연극에 별도의 역할과 대사를 가진 2번째 배우를 도입하여, 1명의 배우와 합창단만으로 연극을 꾸려나가는 관례를 바꾸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아이스킬로스가 '합창단의 역할을 줄이고 줄거리를 주인공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는 안무가의 도움을 마다하고 합창단을 직접 훈련시켰으며, 합창단이 연기할 새로운 무용 스텝을 직접 고안하기까지 했다. 그는 당시의 극작가들한테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관례에 따라, 대부분의 작품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고 보인다. 그의 작품은 웅장하고 극적인 무대 효과를 만들었다. 예를 들면 〈묶인 프로메테우스〉에서 등장인물들을 운반하는 기묘한 방식, 〈에우메니데스〉에서 코를 골며 잠자는 복수의 여신들의 활인화에서 이국적이고 무시무시한 가면과 의상으로 유명했다.” <참고자료/나무 위키 부분 발췌 및 요약>
“예술가의 지독한 자부심, 바로 이것이 아이스킬로스의 문학의 내용이자 진수다. 반면에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 속에서 성자의 승전가를 즉흥적으로 연주한다. 그러나 이이스킬로스의 신화 해석으로 이 신화가 지닌 놀라운 공포가 다 측량된 것은 아니다.”
소포클레스는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아이스킬로스가 배우 1인을 추가하여 2인으로 만들고, 합창단을 12명으로 축소하였듯이, 배우 1인을 추가하여 3인 구성으로 하였고 합창단은 더 축소하였다. 그는 전통적인 비극 형식을 부분적으로 변화시키면서, 응집력과 지속적 긴장감을 지닌 상황 속에서 다양한 성격묘사와 의미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1시간 남짓한 ‘복합극’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는 아테네에서 해마다 열리는 디오니소스 대축제에서 상연할 희곡을 쓰고, 연극에 삽입할 ‘음악과 무용’을 고안하고, 그의 연극에 출연할 모든 배우와 합창단원들을 ‘지휘’하고 ‘훈련’시켰으며, 때로는 직접 역을 맡아 연극에 출연하면서 생애의 마지막까지 65년을 보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 Poetics〉(BC 335경)에서 소포클레스를 다른 비극작가들보다 높이 평가하고 〈오이디푸스 왕〉을 그의 대표작으로 선정한 것은 바로 이처럼 완벽한 형식 때문이었다.
소포클레스의 우주관은 다원적(신성, 시간, 자연, 필연성 같은 다양한 힘의 상호작용, 또는 다양한 힘 사이에 생기는 긴장관계)이며, 이 우주는 근대적 관점에서 보면 '신적’인 동시에 '자연적’이고, '비개인적’인 동시에 '개인적’이다. 소포클레스가 쓴 비극의 주요 주제는 '시간과 고통 및 죽음’이다.
주인공은 줄거리 속에서 일찍 죽을 수도 있다. 주인공이 죽은 뒤, 희곡의 대부분은 그 죽음이 등장인물을 어떻게 정당화했으며, 그것이 남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새로운 인식을 가져오는지’를 보여준다. 또는 고통이 갑자기 출현하여 비극적인 결말을 맺을 때까지의 사건전개와 동기의 뒤섞임에 초점이 맞추어질 수도 있다.
또는 불행하게 지속되다가 마침내 잔인하지만 꼭 필요하고 정당한 행동으로 끝나는 과정을 보여줄 수도 있다. 대다수 주인공은 육체적으로 죽지만, 어떤 주인공들은 상징적으로 죽는다. 또는 상징적으로 죽는 동시에 육체적으로도 죽을 수 있다. 굴욕적으로 체면을 잃은 삶은 살 가치가 없어지지만, 자살을 통해 고귀해진다.
죽음의 형태가 어떠하든, '죽음’은 가장 의지가 확고한 등장인물의 예상도 초월하여 나타나는데, 이것은 진리와 보다 더 가깝게 접촉하여 ‘자아의 새로운 영역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방법에 있어서 죽음은 '삶의 포기'에 의해 더 진실한 인간, 보다 '더 본질적인 자아'를 뜻하는 것이며, 이것은 자아를 초월하여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한 '증거'가 된다.
오이디푸스와 아이아스 및 헤라클레스를 비롯한 여러 주인공들은 ‘불의 시련’을 겪는 ‘인류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 불 속에서는 모든 점에서 더 커진 인물이 나온다. 불의 시련을 이겨낸 사람은 더 사납고 더 부드러우며, 더 강인하고 더 복잡하고 더 잔인하고 더 고귀해진다. 그러나 이런 인물들은 사실상 실제보다 과장되어 있다. 그들은 ‘신화적 자아가 된 것’이다.
신들은 영원한 힘과 현실의 구조를 구현한 화신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인간은 이런 힘과 구조에서 차단되어 있고 시간과 변화 및 고통과 죽음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어두운 무지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우주의 질서와 확실하게 접촉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시간과 고통 및 죽음’을 통해서이다. 이것이 ‘소포클레스가 쓴 비극의 주요 주제’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에서 신화는 진리를 상징한다. 주인공은 자신의 삶 전체의 신화나 유형을 배우고 결국에는 받아들이게 된다. 관객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만 특정한 등장인물은 그 신화적 유형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 예언자들과 신탁은 모든 희곡에서 이 신화적 진실을 밝힌다. 우주의 작용은 그것의 신화적 유형과 동등하다. 소포클레스에게는 자유로운 결정과 우주의 필연성 사이에 ‘어떤 모순’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신성한 사회적 진리가 참신함과 다양성 및 개성으로 인해 희미해지는 것을 보는 대신, 번화한 도시 한가운데에서 영원히 새로운 그 진리의 의미를 재발견했다. 그의 우주는 결국 인간을 배제하지 않고 인간을 포함한다. 신이나 사실이 인간에게 아무리 이질적으로 여겨지고 잔인해 보일지라도, 그것의 진리는 인간 존재의 신비로운 책임을 가리키고 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은 몇 가지 다른 의미에서 '정치적'이다. 소포클레스의 희곡들이 지지하고 있는 것은 개인, 국내 관계, 정부와 사회, 그리고 우주의 전체 질서라는 유기적 통일체에 바탕을 둔 아테네 공동체와 민주주의의 정화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소포클레스는 똑같이 타당한 수많은 의견들을 ‘민주적으로’ 나열하는 대신, 대다수의 사람은 지혜가 부족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항상 무지와 착각 및 어리석음과 충돌하는 진리를 제시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포클레스는 힘없는 사람들의 비참함과 전쟁의 공포, 노예 상태, 폭정 및 배신의 공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평화주의자나 노예 제도 폐지론자가 아니었고 급진적 민주주의자도 결코 아니었다.
그의 희곡에는 생각과 계획, 결정 및 의사 전달의 결점과 실수를 극화한 장면이 많다. 이것은 대중이 정책을 결정하고 사법권을 행사하는 아테네 체제의 약점과 인간 지식의 한계를 암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포클레스는 힘없는 사람들의 비참함과 전쟁의 공포, 노예 상태, 폭정 및 배신의 공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평화주의자나 노예 제도 폐지론자가 아니었고 급진적 민주주의자도 결코 아니었다.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과 ‘연민 및 동정’ 따위의 ‘사회적 미덕’은 그의 희곡에서 가장 높이 평가되는 가치가 아니다. 그는 정치적 혁신을 통해 삶의 불행을 극복할 수 있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의 우주와 그가 쓴 비극은 BC 5세기의 그리스 세계와 마찬가지로 피할 수 없는 무자비한 권력투쟁, 인물과 국가의 예측할 수 없는 부침(浮沈), 그리고 행복은 논리적 계산으로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아테네의 디오니소스 축제는 비영리적이고 종교적인 행사였지만 경쟁이 치열했다. 그가 쓴 비극은 아이스킬로스나 에우리피데스의 일부 작품보다는 대중의 지지에 노골적으로 호소하지 않는 듯하다. 그의 작품은 '오락적'일뿐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교훈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예술로써 자연을 대체하거나 혼란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로 보지 않았다.
그 자신을 압도하는 우주적 질서의 산물로 여겼다. 그는 예언자나 신탁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뛰어넘는 ‘어떤 힘의 대변자’ 동시에 극작 기법에 관한 이론적 논문까지 쓴 ‘자유롭고 자율적인 대변자’였다. 그 ‘힘’은 그의 세계관을 완전히 표현하는 복잡하고 율동적이며 건축학적인 구조를 가진 언어로 표현되었다.
시에 대한 소포클레스의 개념에서 인간과 우주는 상호 의존적이다. 인간의 언어는 진리의 영역 속에서 살 수 있고, 세계의 질서를 파악하여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본질적 자아를 지적할 수 있다.
문헌에 기록된 소포클레스의 마지막 활동은 BC 406년에 디오니소스 축제가 열리기 전에 죽은 경쟁자 ‘에우리피데스의 공개 장례식’에서 합창단을 지휘한 것이었다. 이것은 참으로 소포클레스다운 일이었다. 소포클레스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시극에서 이룩한 업적만이 아니라 시극 자체에 대한 헌신을 강조했다.
그의 희곡들은 우주의 신성에 경의를 표한다. 극작가로서 그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종교(그리고 특히 디오니소스 숭배)에 봉사하고 있었다. 그가 평생 동안 종교의식에 헌신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고, 기록에 따르면 헤라클레스를 기리는 신전까지 세웠다고 한다.
그의 희곡들은 인간의 정의 및 미덕과 신의 관계가 갖는 모든 다의성을 극화하고 있다. 소포클레스는 근대 용어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고대 그리스 고유의 ‘포괄적 종교’에 몰두해 있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는 영원한 힘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살았지만, 그 힘 앞에 굴복하지는 않았다.
금욕주의자도 아니고 신비주의자도 아닌 소포클레스는 아테네라는 지역에 한정된 ‘자신의 삶 전체’로 ‘신성’을 인정했다. 그는 초자연적인 미지의 힘을 자신의 질서 정연한 우주 속에 받아들였다. 그는 이따금 완전하고 숭고한 조화를 낳는 삶과 죽음의 뒤틀린 엇갈림에 경의를 표했다. 숙명론자도 금욕주의자도 아니고 모든 것을 체념하지도 않았던 그는 잔인한 필연성 속에서 인간의 성취를 발견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에 드러나 있는 인간은 고대인과 현대인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상을 인상적으로 풍부하게 집대성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그의 희곡은 그가 ‘본래 긍정적인 인물’이라는 전통적 의견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희곡의 줄거리에는 ‘완전한 고통과 절망이 드러나 있어서, 그가 '정통파'라면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악덕에도 불구하고 그가 '강한 개인적 신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가 '평정'하다면, 그것은 죽음과 고통이 일으킬 수 있는 최악의 사태를 실제로 직면한 뒤에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평정함'이라는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