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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화가 악의 원초적 근거라는 관점

비극의 탄생/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10장

by 아란도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제10장 p84~88






1.


<비극의 무대 주인공은 언제나 ‘디오니소스’였다>

확고한 전승에 따라, 가장 오래된 그리스 비극은 디오니소스의 고통만을 대상으로 했다. 유일하게 존재하는 무대 주인공은 언제나 디오니소스였다. 에우리피데스에 이르기까지 디오니소스가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나 오이디푸스를 포함한 그리스 무대의 유명한 인물들은 모두 원래의 주인공 디오니소스가 가장한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가면 뒤에 신이 숨어 있다’는 사실은, 저 유명한 인물들이 늘 전형적인 “이상성”을 구현하려 했던 주요한 이유가 된다.


누가 주장했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개인은, 개인으로서는 우스꽝스럽다. 따라서 비극적이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 여기서 그리스인들은 개인이 ‘비극 무대’ 위에 나서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 ‘참을 수 없었다’에서 밀란 쿤테라가 생각났다. 니체의 문구들은 가히 하나의 소설을 일굴만하다고 보인다.


실제로 그리스인들은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이는 “이데아”를 “우상”과 “모상”으로 구분해 평가하는 ‘플라톤적 사고방식’이 그리스 본질의 기저에 깔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디오니소스 신화/개별화가 ‘악의 원초적 근거라는 관점’ >


플라톤의 용어를 사용하여 말한다면, 그리스 무대의 비극적 인물들을 이렇게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으로 실재하는 디오니소스가 다양한 인물들로 투사되어 투쟁하는 영웅의 가면을 쓰고, 마치 ‘개별적 의지의 그물망에 얽혀 있듯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등장하는 ‘디오니소스’는, 말하고 행동하면서 방황하고, 노력하고, 괴로워하는 개인을 닮아간다. 디오니소스가 이렇게 ‘서사적’으로 분명하고 확실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꿈의 해석자인 ‘아폴론의 영향’ 때문이다.


아폴론은 저 비유적 현상들을 통해 ‘합창단’에게 ‘자신의 디오니소스적 상태’를 말해준다. 하지만 실제로 주인공은 고통스러워하는 ‘비밀 의식’의 디오니소스이다. 디오니소스는 ‘개별화의 고통’을 몸소 겪고 있는 ‘신’이다.


디오니소스에 관한 불가사의한 신화들은 다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디오니소스는 소년 시절 거인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겼으며, 이런 상태에서 “자그레우스”로 숭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암시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렇게 “찢긴 신체”는 개별화의 상태에 대한상징이다. 디오니소스의 원초적 고통은 신체가 찢겨서 마치 공기, 물, 흙, 돌로 변하는 것과 같은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개별화의 상태”를 모든 고통의 원천이자 근원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개별화의 상태 그 자체를 비난받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 이 단락의 설명을 보자면, 이것은 “죽음”에 관한 것이다. 4대 원소로 흩어진 상태가 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디오니소스의 원천적인 고통은 죽음에 대한 고통이며 또한 신체 훼손에 대한 고통이다. 여기서 “개별화의 상태”는 그 자신이 흩어져서 다른 것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자신의 형상이 사멸한 것이다. 디오니소스의 고통은 자기 형상의 훼손에 대한 고통일 수 있다. 어쩌면 그리스인들의 실존에서 죽음을 극도로 혐오했던 것을 보자면, 이 디오니소스적 고통과 연관이 크다고 보인다.


* 이 글을 쓰는 동안 배우 이선균님의 안타까운 죽음 소식을 보았다.



이 디오니소스의 미소에서 올림포스의 신들이 탄생했고, 그의 눈물에서 인간이 생겨난 것이다. 찢긴 신으로서의 존재 속에서 디오니소스는, 한편으로는 잔인하고 거친 악마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부드럽고 온순한 통치자라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이게 된다.


에폭푸테스(관객/청중/추종자)들은 디오니소스 부활에 희망을 걸고 있고, 우리의 예감은 이제 그의 ‘부활’을 ‘개별화의 종말’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재림’하는 세 번째의 디오니소스에게 보내는 ‘에폭푸테스들’의 소란스러운 환호성이 울려 퍼진다. 이런 희망이 있어야만, 찢어져 개체들로 조각난 세계의 얼굴 위에 기쁨의 빛이 환하게 빛날 수 있다. *마지막 문장의 의미는 이러하다고 생각한다. 개별적인 것은 슬픔이고, 하나로 다시 모아진 것은 환희라는 것. 개인과 집단의 의미에서 보자면, “합창단”의 의미를 유추할 수 있을 듯하다. 개별화된 것들을 다시 하나로 모아서 “하나”화 시킨 것이 “합창단”일 것이다. 합창단은 “하나”라는 형태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이 신화는 ‘영원한 슬픔’에 잠긴 데메테르를 통해 구체화하고 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더 ‘디오니소스를 잉태할 수 있다는 말을 듣자 기뻐했다는 것’이다. * 디오니소스의 부활은 대지가, 생명이 다시 소생한다는 의미이며 대지의 여신인 데메테르와 연과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견해들 속에는 이미 심오한 “염세주의적 세계관”의 모든 구성 요소가 들어 있다. 여기에는 “비극의 신비스러운 가르침”이 들어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라는 근본 인식과 함께 개별화가 ‘악의 원초적 근거라는 관점’이다. 그리고 “미와 예술”은 기쁨을 주는 희망이며, 다시 도래할 “일치의 예감”이라는 것이다. * 그리스인에게 “죽음”만이 유일한 악이며, 실존은 기쁨이다. 흩어진다는 것은 곧 헤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만날지 모른다. 저승까지 가서 다시 살려 데리고 나오고픈 욕망은 그래서 생긴 것. 개별화가 원초적 악의 근거라는 관점은 '반대급부를 생'성한다. 바로 “하나”라는 인식이다. 흩어진 것이 모아져 다시 하나가 되는 그것이 “부활”일 것이다.

* 염세주의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의 염세주의인 것이다. 근원적 고통은 근원적인 슬픔을 야기시킨다. 어쩌면 우리의 근원적인 그리움은 "하나"에 대한 것일 것이다. 가슴이 텅빈 듯한 그런 느낌에서 오는 그 그리움은 또한 충일감으로 회복된다. 이러한 작용이 죽음과 부활에 대한 감각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둘러싸고 있는 막인 커다란 슬픔은 그 자체로 '정서'를 만들어 내는 것이며, 이 슬픔에도 이중성의 원리는 작용되어 커다란 슬픔은 곧 사람의 감정임을 일깨우는 것이라고 보인다.









2.

<디오니소스는 신화의 상징성의 의미>


호메로스의 시는 올림포스 문화의 시이며, 올림포스 문화는 이 ‘시의 힘’으로 ‘거인 전쟁’의 “공포”를 극복하는 ‘자신의 승전가’를 불렀다. 이제 ‘비극 문학’의 강력한 영향 아래서 ‘호메로스 신화들’은 새롭게 태어났다. 이러한 “윤회”를 통해 그동안 ‘올림포스 문화’마저도 ‘어떤 더 심오한 세계관’에 의해 “정복”당해버렸다.

반항적인 거인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올림포스의 박해자’에게 통고했다. 그가 만약, 적당한 시기에 자신과 화합하지 않을 경우, “박해자의 지배권은 언젠가 극도의 위험에 처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자신의 종말을 두려워하는 제우스’가 거인들과 동맹을 맺는 것을 ‘아이스킬로스’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로써 예전의 거인 시대가 저승에서 뒤늦게 다시 나와 빛을 보게 된다. *이러한 권력의 연합전선은 현실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게 된다. 여기서 제우스가 반드시 악이라는 관점보다는, 디오니소스의 신체찢김 사건이 자연에 역행하는 것이었고, 그 사건이 "원인"으로 작동 했다는 것일거다.


거칠고 황량한 자연철학이, 진리의 표정을 감추지 않고 춤추며 지나가는 호메로스적 세계의 신화들을 바라본다. 신화들은 이 여신의 번개 같은 눈앞에서 창백해지고 몸을 떤다. 결국, 디오니소스적 예술가의 강력한 주먹이 이 신화들에게 ‘새로운 신을 섬기라고 강요’한다. * 이 문장을 해석하자면, 이렇다고 생각한다. 데메테르의 슬픔이 모든 자연을 얼어붙고 말라버리게 하였다. 그리고 올림포스 신들을 바라본다. 그것은 슬픔에 찬 시선일 것이다. 그러자 아이스킬로스가 올림포스 신들에게 '죽음'에서 벗어나려면, 디오니소스의 부활을 찬양하라는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인다. 아이스킬로스는 역시 대범하다.


‘디오니소스적 진리’는 신화의 전체 영역을 ‘자신의 인식을 표현하는 ‘상징’으로서 넘겨받는다. 일부는 ‘비극’이라는 공공의 의식을 통해서이고, 다른 일부는 ‘극형식’의 신비스러운 제전을 비밀스럽게 거행함으로써 이다. 그리고 이때에는 항상 ‘옛 신화의 껍질’을 쓰고 자신의 인식을 나타낸다. * 옛 신화의 껍질을 쓰고 상징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원형에서 우리는 그 어떤 이중성의 세계를 감각하게 된다.



<음악의 헤라클레스적 힘>


프로메테우스를 독수리로부터 해방시키고, 신화를 ‘디오니소스적 지혜의 수단’으로 만들어버린 이것은 “어떤 힘”이었는가? 이것은 ‘음악의 헤라클레스적 힘’이다. 그것은 ‘비극 속에서 최고로 발현되는 힘’이며, 신화를 새롭고도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해석할 줄 아는 힘’이다.


앞에서 이미 이것을 ‘음악의 가장 강력한 능력’으로 서술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소위 ‘역사적 현실의 좁은 테두리’ 속으로 기어 들어가서, ‘그 어떤 후대’에 의해 ‘역사적 요청’을 지닌 “일회적 사실”로 다루어지는 것이 “모든 신화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 “일회적 사실”로 다루어지는 것의 의미는? 아마도 “공연”이나 연극을 의미하는 것일 듯하다. 신화적인 것을 재현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일회의 체험적 경험이며, 반복되어도 같은 체험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 비극의 연극 공연 형태처럼.





<종교가 사멸하는 방식>

그리스인들은 이미 그들의 ‘청년기의 신화적 꿈’ 전체를 명민하게 그리고 자의적으로 하나의 “역사적-실용적 청년기 역사”로 ‘새로 바꿔’ 버리는 과정에 들어서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종교들이 사멸하곤 하는 방식’이다. 종교의 신화적 전제 조건들이 ‘정통 신앙의 독단론’이 지닌 엄격하고 지성적인 눈길에 의해 이미 끝나버린 ‘역사적 사건들의 층계로 체계화되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신화의 신빙성을 소심하게 변호하면서도, 신화의 자연스러운 '연명'과 지속적인 '성장'에 대해서는 '거역'하기 시작한다. 이때에 신화에 대한 감각이 소멸하고, 그 대신에 '역사적 토대'에 대한 종교의 요청이 들어설 때, 종교들은 사멸한다.


이 죽어가는 신화를 이제 디오니소스적 음악의 새롭게 탄생한 수호신이 붙잡아준다. 그리고 신화는 그의 손아래에서 다시 한번 이제까지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색채를 띤다. 형이상학적 세계에 대해, 동경에 가득 찬 예감을 불러일으키는 향기를 내뿜으며 꽃을 피웠다. 이렇게 마지막으로 활짝 피어오른 뒤에 신화는 사그라진다. 그 잎은 시들어버리고, 곧 고대의 풍자적 루키아노스들이, 바람에 굴러다니는 퇴색하고 시들어버린 꽃송이들을 붙잡으려고 애쓴다. * 루키아노스/120년경의 풍자 작가


신화는 ‘비극’을 통해 ‘가장 깊은 내용에 도달’하고, ‘가장 표현력 있는 형식’을 얻게 된다. 신화는 다시 한번 상처 입은 영웅처럼 몸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죽어가는 자의 지혜로운 평온함과 함께 넘치는 힘이 그의 눈 속에서 ‘최후의 힘찬 빛’을 발하며 타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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