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장은, 8장 전문을 내 방식대로 문장을 수정하면서 내가 읽기에 좋고 이해하기 쉽도록 문장을 조금씩 정돈하는 형태로 썼다. 그리고 책 내용의 진행에 맞게 차례대로 번호를 붙여서 읽기에 좋도록 소제목을 달고 단락을 나눴다. 계속 이렇게 풀어쓰기와 내해석을 병행해서 해야 할까? 에 대한 갈등이 8장에서는 물밀듯이 밀려오지만, 책을 읽다 보면 이 방법으로 저절로 가게 되어서 어쩔 수가 없다. 이것도 그냥 순리에 맡겨야 할 듯하다.
1.
<고대 사티로스와 근대 전원적 목자의 대립>
- 사티로스 합창단 - 확고함. 대담성. 보다 실제적, 현실적, 완전하게 실존을 모사 - 실존적 염세주의
- 현대인 - 유약함. 섬세하고 연약한 피리 부는 목자, 달콤한 형상 - 도피적 낭만주의
고대의 사티로스와 근대의 전원적 목자는 모두 근원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향한 동경의 산물이다.그러나 고대의 사티로스와 근대의 전원적 목자가 취한 방식은 달랐다. 고대 그리스인은 확고하고 대담한 손길로 숲 속 인간인 ‘사티로스’를 붙잡았다. 반면 현대인은 얼마나 부끄럽고 유약하게 ‘섬세하고 연약한 피리 부는 목자’의 달콤한 형상과 더불어 시시덕거렸던가! 사티로스와 근대 전원적 목자의 차이는 이러하다. 사티로스 합창단은, 대체로 자기 자신을 유일한 현실로 생각하는 문화인에 비해, 보다 실제적이고, 보다 현실적이며, 보다 완전하게 ‘실존’을 모사하기 때문이다.
<사티로스는 ‘인간의 원형’이다>
그리스인은, 아직 어떤 인식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속에서 어떤 문화의 빗장도 아직은 열리지 않은 자연을 ‘사티로스’ 안에서 보았다. 그리스인에게 사티로스는 ‘인간의 원형’이었다. 인간이 가진 최고의 것이자 가장 강렬한 감동의 표현이었다.
그는 신이 가까이 있는 것에 황홀해하는 감격한 열광자이며, 그 안에서 신의 고통이 반복되기 때문에 함께 괴로워하는 동지였다. 또한 자연의 가장 깊은 가슴에서 나오는 진리의 '예고자'이었다. 그리스인이 흔히 외경적인 놀라움으로 바라보곤 했던 자연의 생식적 전능의 상징이었다.
사티로스는 어떤 숭고한 것이었고 신적인 것이었다. 특히 고통으로 상처받은 ‘디오니소스적 인간’의 눈에는 그렇게 여겨졌음에 틀림없다. 치장한 허위의 목자라면 그의 감정을 상하게 했을 것이다. 그의 눈은 위장되지 않았고 위축됨이 없이 웅대한 자연의 필체 위에 숭고한 만족을 느끼며 머물렀다.
여기서 ‘문화의 환영’은 ‘인간의 원형’에 의해 지워졌고 ‘진정한 인간’, 즉 자신의 신에게 환호하는 수염을 기른 ‘사티로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앞에서 문화인은 ‘허위의 풍자화’로 위축되었다.
<실러의 ‘성벽/성곽’>
“비극 예술의 ‘시원’에 관해서도 실러는 옳았다. 합창단은 밀어닥치는 현실에 대항하는 살아 있는 성벽이다.”
<시의 영역>
시의 영역은, 시인의 두뇌가 만들어 놓은 환상적인 불가능성으로서, 세계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시는 바로 그와 정반대의 것을 추구한다. 그것은 진리의 ‘꾸밈없는 표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문화인’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저 현실의 거짓투성이의 가식’을 ‘떨쳐’ 버려야 한다. 이러한 ‘본래의 자연 진리’와 ‘유일한 현실인 체하는 문화 거짓말’의 대조는, 사물의 영원한 핵심인 ‘물자체’와 ‘전체 현상’ 사이의 대조와 유사하다.
현상들이 지속적으로 몰락해 가는 가운데서 ‘형이상학적 위안’을 지닌 ‘비극’이 실존의 핵심의 ‘영원한 삶’을 가리키듯이, ‘사티로스 합창단의 상징성’은 이미 하나의 비유 속에서 ‘물 자체’와 ‘현상’ 사이의 저 ‘근원적 관계’를 말해준다. 현대인의 저 전원적 목자는 그에게는 자연으로 간주되는 교양이라는 환상들 전체를 모사한 것에 불과하다. 디오니소스적 그리스인은 진리와 최고의 힘을 발휘하는 자연을 원한다. 그는 마법에 걸려 사티로스로 변한 자신의 모습을 본다.
현대인의 저 전원적 목자는 그에게는 자연으로 간주되는 교양이라는 환상들 전체를 모사한 것에 불과하다. 디오니소스적 그리스인은 진리와 최고의 힘을 발휘하는 자연을 원한다. 그는 마법에 걸려 사티로스로 변한 자신의 모습을 본다.
이러한 ‘분위기와 인식 상태’ 아래 도취한 ‘디오니소스적 시종의 무리들’은 환호한다. 그들의 ‘힘’은 그들 스스로를 자신들의 눈앞에서 ‘변화’하게 만들어서, 그들은 자신에게서 다시 ‘부활’한 자연의 정령인 ‘사티로스’를 보고 있다고 망상한다. 훗날 이루어진 비극 합창단의 구성은 바로 이러한 “자연적 현상의 예술적 모방”
시의 영역은 시인의 두뇌가 만든 환상적인 불가능성이다. 이 불가능성은 세계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내’에 있다. 시는 이와 정반대의 것인 ‘진리의 꾸밈없는 표현이다. 이 말인즉슨, 시의 영역은 시인의 두뇌가 만든 환상적인 불가능성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문화인은 그것을 유일한 현실로 받아들여 모사하는 것이다. 여기서 ‘유일한 현실’이란 바로 ‘유일한 현실인 체 하는 문화의 거짓말’이다. 현대인의 전원적 목자는 ‘교양이라는 환상’을 자연으로 간주하여 모사한다.
니체는 이러한 것은 ‘시’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문화인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저 현실의 거짓투성이의 가식을 떨쳐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본래의 자연 진리와 유일한 현실인 체하는 문화 거짓말의 “대조”는, 사물의 영원한 핵심인 ‘물자체’와 ‘전체현상’ 세계 사이의 대조와 유사하다.
요약/ 현대인은 ‘문화적인 교양’을 자연으로 생각하여 유일한 현실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한 시대의 전유물이면서 또한 현실의 거짓투성이인 가식에 불과하다. 위선적인 모사일 따름이다. 이러한 현상은 지속적으로 몰락해 간다. 이와는 반대로 형이상학적 위안인 비극이 실존의 핵심인 ‘영원한 삶’을 가리키듯이, 사티로스 합창단의 상징성은 물자체와 현상 사이의 근원적인 관계를 말해준다. 이로부터 이루어진 비극 합창단의 구성은 바로 “자연적 현상의 모방‘이다.
<사물의 영원한 핵심인 ‘물자체’와 ‘전체현상’ 세계 사이의 대조와 유사/도식화>
형이상학적 위안을 지닌 비극은 실존의 핵심인 영원한 삶을 가리킨다.
->
현상/몰락 VS /실존/영원한 삶
사티로스 합창단의 상징성은 이 둘의 근원적인 관계를 말해준다.
->
현상 VS 물자체
디오니소스적 그리스인 -> 진리와 최고의 힘을 발휘하는 “자연”을 원한다.
-> 그는 마법에 걸려 ‘사티로스’로 변한 자신의 모습을 본다/변신
디오니소스적 그리스인 ===> 사티로스
형이상학적 변화
* 여기서의 “자연”은 전원적인 목자적인 풍경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근원적인 힘의 주체로서의 진리를 말한다. 즉 원리이다. 우리가 분으로 보는 풍경적 자연이 아닌, 그 자연을 돌리는 ‘힘’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심연의 근원적인 일자는 영원히 고통받는 자이며 모순에 가득 차 있는 자이다. 왜 고통받는가? 민감하기 때문이다. 예민한 센서 같기 때문이다. 왜 모순인가? 충족하지만 동시에 불만족 때문이다. 쾌와 불쾌를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통과 환희를 동시에 가지기 때문이다. 고통받는데 충만이다. 영원히 이 과정은 반복된다. 시지프스처럼. 이 힘으로 자연은 돌아간다. 그리고 이 힘이 미적 충만을 일으킨다. 미적 현상만이 정당한 이유이다.
2.
<디오니소스 관객과 디오니소스의 도취자 = 청중과 합창단 사이의 대립은 없었다>
이 과정에서 디오니소스적 관객과 디오니소스적 도취자의 구별이 필요하다.
“아티케 비극의 관객”은 극장 주악석의 합창단에게서 자신을 재발견하고, 결국 ‘근본적으로 청중과 합창단 사이의 대립이 없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춤추고 노래하는 사티로스의 사람들로 이루어지거나 혹은 이 사티로스에 의해 대변되는 사람들로 구성된 ‘거대하고 숭고한 합창단’이기 때문이다.
슐레겔의 말은 우리에게 ‘심오한 의미로 해명’되어야 한다. 합창단은 그것이 ‘유일한 관객’인 무대의 환상 세계의 관객인 한에서 “이상적인 관객”이다.
<자기반영의 현상과 디오니소스 극장 구조>
지금까지 관객으로서의 청중은 그리스인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다.
“관객석이 하나의 중심을 향해 내려가는 ‘반원형 계단식 구조’로 된 그들의 극장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기 주변의 전체 문화 세계를 완전히 간과했다. 그리고 무대를 만족스럽게 내려다보면서 자기 자신이 합창단원이 되었다고 오인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러한 ‘통찰’에 따라 ‘원시 비극’의 ‘원시적 단계의 합창단’을 “디오니소스적 인간의 자기반영”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자기반영의 현상은 배우들의 과정을 통해 가장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배우는 정말 재능이 있을 경우, 자신에 의해 서술되어야 하는 ‘배역의 상’이 자기 눈앞에서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하게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사티로스 합창단은 무엇보다도 디오니소스적 대중의 환영이며, 무대 위의 세계는 다시금 사티로스 합창단의 환영이다. 이 환영의 힘은 “현실”이 주는 인상에 대항한다. 즉 주위 관람석에 자리 잡고 앉은 ‘교양인들’에 대항하여, 시선을 둔화시키고, 무감각하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강렬하다.
그리스 극장의 형태는, 호젓한 숲 속의 골짜기를 연상케 한다.
무대의 건축은, 산 위에서 도취하여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바코스 신자들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빛나는 구름의 모습처럼 보이며, 그 한가운데에 디오니소스의 모습이 나타나는 액자처럼 보인다.
3.
<연극과 디오니소스적 합창단>
시인은, 자신이 자신 앞에 살아 움직이는 여러 형태들에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하고, 그 형태들의 가장 내적인 본질을 통찰하는 한에서만 “시인”이다. 이 사실은 보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현대적 재능’이라는 ‘특이한 약점’으로 말미암아 미적 근원 현상을 너무 복잡하고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
은유는 ‘진정한 시인’에게는 수사학적 형상이 아니라, ‘그의 눈앞에서 어떤 개념을 대신’하여 ‘실제로 움직이고 있는 대표적 형상’이다.
인물은 ‘진정한 예술가’에게는 주워 모은 개개의 특징들로부터 합성한 전체 같은 것이 아니고, ‘그의 눈앞에서 끈질기게 살아가는 인격’이다.
이 인물이 지속적으로 계속 살아가고 계속 활동한다는 점에서만, 화가가 그린 동일한 환영과 구별된다.
호메로스가 모든 시인들보다 훨씬 더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그만큼 더 많이 관조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나쁜 시인’이기 때문에 시에 관해 그토록 추상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미적 현상은 단순하다. 단지 지속적으로 살아 있는 유희를 바라보아야 한다. 항상 정령의 무리들에 둘러싸여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져 보라. 그러면 시인이 될 것이다.단지 스스로 변신하여 다른 사람의 몸과 영혼으로 말하려는 충동을 느껴보라. 그러면 극작가가 될 것이다.
<디오니소스적 격정과 변신>
디오니소스적 격정은, 이와 같은 정령들에 둘러싸여 있다. 또한 그들과 내면적으로 하나임을 알고 있는 이러한 예술적 재능을 전체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비극 합창단의 근원적 현상이다.
비극 합창단의 근원적 현상은, 바로 자신 앞에서 스스로 변신한 것처럼, 생각하고, 마치 실제로 다른 사람의 몸으로, 다른 인물 속으로 들어간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 과정이 ‘연극’ 초기에 일어났다.
이러한 현상에는, 자신의 형상들과 융합되지 못하는 화가들 그리고 관찰하는 눈으로 그것들을 자신의 바깥에서 바라보는 음유시인과는 또 다른 그 무엇이 있다. 바로 여기에는 이미 다른 존재 속으로 ‘몰입’을 통한 ‘개체의 포기’가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전염병처럼 번져 나간다. 전체 무리는 자신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마법’에 걸린 것처럼 느낀다. 이러한 이유로 “디오니소스 송가”는 ‘다른 모든 합창 가요들’과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반면, ‘다른 모든 합창 가요들’은 월계수 가지를 손에 들고 장엄하게 ‘아폴론 신전’으로 나아가는 처녀들은 여전히 그들의 본래 모습대로 남아 있으며, 그들의 시민적 이름을 간직한다.
디오니소스 송가의 합창단은, ‘변신한 사람들’로 구성된 합창단이며, 이들에게는 그들의 시민적 과거와 사회적 지위가 완전히 망각된다. 그들은 모든 사회적 영역의 밖에서 생활하며 시간을 초월한 디오니소스 신의 시종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스인들의 ‘다른 모든 합창 서정시’는 ‘아폴론적 가수 개인’의 ‘거대한 감정 고양’에 불과하다. 반면, 디오니소스 송가에서는 의식이 없는 배우들로 구성된 한 공동체이다. 그들은 서로 ‘변신’ 했다고 생각한다.
“마법”은 모든 극예술의 전제 조건이다. 마법의 힘 속에서 디오니소스적 도취자는 스스로를 ‘사티로스’로 본다. 그리고 그는 사티로스로서 다시금 “신”을 본다. 그는 자신의 변신을 통해 자기 밖에서 ‘새로운 환영’을 본다. 그 새로운 환영을 ‘자신의 현 상태에서의 아폴론적 완성’으로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 의하여, ‘그리스 비극’은 아폴론적 형상의 세계 속에 스스로를 늘 새롭게 표출시키는 “디오니소스적 합창”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비극과 밀접하게 묶여 있는 저 합창단은 전체 대화이며, 전체 무대 세계이다. 따라서 “연극 전체의 모태”라고 말할 수 있다.
‘비극적 근원’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분출’ 속에서 ‘연극의 환영’을 투사한다. 이 환영은 전적으로 “꿈의 현상”이라는 점에서 ‘서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디오니소스적 상태의 객관화’라는 점에서, 가상 속에서의 ‘아폴론적 구원’과는 차이가 있다. 오히려 정반대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바로 ‘개체의 파괴’와 ‘근원적 존재와의 합일’을 서술한다.
따라서 연극은 ‘디오니소스적 인식’ 및 ‘효과’가 ‘아폴론적으로 구체화’된 것이며, 마치 무한한 심연이 벌어지듯 그렇게 ‘서사시와 분리’된다.
4.
<사티로스/함께 고통을 겪는 자로, 현자, 세상의 심장으로부터 널리 진리를 전하는 자. 사티로스는 자연의 모사이며 자연의 강력한 충동의 모사>
그리스 비극의 합창은 ‘디오니소스처럼 흥분한 전체 대중을 상징’한다. 현대인은, 현대의 무대의 합창단, 즉 오페라 합창단이 하는 역할과 위치에 익숙해져 있다. 현대의 합창단과 고대의 비극 합창단을 같은 선상에 놓고 취급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비극 합창단이 그렇게 분명하게 전승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비극 합창단은 더 오래되고, 더 근원적이며, 더 중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또한 현대인은, 왜 비극 합창단이 처음에는 항상 봉사적이고 신분이 낮은 존재들인 ‘산양 같은 사티로스들’로만 구성되어야 하는 것인지, 그럼에도 왜 그들에게 원래부터 그렇게 높은 의미와 근원적 성격을 부여하는지 동의할 수 없었다. 아울러 무대 앞에 위치한 오케스트라는 우리에게 항상 수수께끼였다.
하지만 여기서 깨닫게 되는 것은, ‘행위를 포함한 모든 장면’은 원래 본질상 ‘하나의 환영’으로만 간주되었다. “유일한 현실”은 이 환영을 생산하는 합창단, 즉 춤과 음, 말의 상징을 모두 사용하여 이 ‘환영에 관해 말해주는 합창단’이었다는 것이다.
합창단은 ‘환영’ 속에서 ‘자신들의 주인’이며 ‘스승’인 ‘디오니소스’를 바라본다. 그렇기에 그들은 ‘영원히 봉사하는 합창단’인 것이다. 합창단은 환영 속에서 어떤 고통을 겪는지, 어떤 영광을 누리는지를 본다. 그래서 그 스스로는 행동하지 않는다. ‘신에게 봉사하는 위치에 있는 합창단’이 바로 ‘자연의 가장 숭고한 표현’ 그 자체인 ‘자연의 디오니소스적 표현’인 것이다. 그러므로 ‘합창단’은 자연처럼 도취 상태의 신탁과 지혜를 말한다.
그는 함께 고통을 겪는 자로서 동시에 현자이며, 세상의 심장으로부터 널리 진리를 전하는 자다. 그렇게 하여 현명하고 열광적인 ‘사티로스’라는, 환상적이지만 혐오스러운 모습의 ‘인물’이 탄생한 것이다. 그는 신과는 반대로 “말 못 하는 인간”인 것이다. 그는 ‘자연의 모사’이다. 즉 ‘자연의 강력한 충동의 모사’다. 그렇다. 그는 ‘자연의 상징’인 동시에 ‘자연의 지혜’와 ‘예술의 선포자’다. ‘음악가와 시인’, ‘무용가와 예언자’가 합쳐 ‘한 사람이 된 것’이다.
<좁은 의미의 연극의 ‘시작’과 비극 합창단에게 주어진 ‘과제’>
이러한 인식과 그리스 전승에 의하며, 원래의 무대 주인공이며 환영의 중심인 디오니소스는, 비극의 초창기에는 실제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되었을 뿐이다. 즉 원래 비극은 “합창”이었을 뿐, “연극”은 아니었다.
신을 실제 인물로 보여주고 또 환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둘러싼 후광과 함께, 모두의 눈에 보이도록 묘사하게 된 것은 나중에 가서였다. 이로써 좁은 의미의 “연극”이 시작된다.
이때 ‘주신 송가’를 부르는 합창단에게 주어진 ‘과제가 있다. ‘비극의 주인공’이 무대에 등장하면, 청중의 눈에 꼴사납게 가면을 쓴 인간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황홀경 속에서 탄생한 환영이 보이는 정도까지 ‘무아지경’에 이르도록 ‘청중의 분위기’를 ‘고취시키는 것’이었다.
무아지경의 관중들에서, ‘이미 신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고 있는 관중들’이, 무대 위로 걸어오는 “신”을 보았을 때, 가졌을 법한 감정을 여기서 유추할 수 있다. 관중은 무의식적으로 마법에 걸린 듯, 자신의 영혼 앞에서 떨고 있는 “신의 형상”을 저 가면 쓴 인물에게 ‘투사’해 ‘그의 실재성’을 ‘유령 같은 비현실성’으로 ‘해체’해버린다. 이것이 바로 “아폴론적 꿈의 상태”다.
그 안에서 낮의 세계는 ‘베일’에 싸이고, 그보다 더 분명하고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며, 더 감동적이지만, 더 비현실적인 새로운 세계가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면서 우리 눈앞에서 나타난다. *이 베일은 하나의 경계 즉 ‘막이다. 막은 ’ 사이‘를 의미하기도 하며, 마코프 블랭킷적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세계와의 경계는 이 ’ 막‘에 의해 만들어진다. 비유일 수도 있고 실제로 그럴 수도 있다. 우리의 실재적 경험은 바로 그런 느낌을 주니까 말이다. 나는 이것을 ’ 중첩‘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로 인해 비극 속에서 항상 ‘철저한 양식적 대립’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합창단의 디오니소스 서정시 속에서 전개되는 언어, 색채, 율동성, 말의 역동성은, 무대 위의 아폴론적 꿈의 세계에서 나타날 때와는 마치 ‘서로 다른 완전히 분리된 표현 영역’처럼 달라진다.
디오니소스가 객체화되어 있는 아폴론적 현상은, 합창단의 음악처럼 “끝없는 바다, 변화무쌍한 움직임, 작열하는 삶”도 아니고, 또 단지 느껴질 뿐 형상이 되지 못한 힘, 감동한 디오니소스의 시종이 신의 존재를 가까이에서 느끼는 그런 힘도 아니다.
이제 무대에서 ‘서사적 형상화의 명료성과 견고성이 그에게 말을 건다. 이제 디오니소스는 힘을 통해서가 아니라, 서사적 주인공으로서 호메로스의 언어로 말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패턴을 복제한 방식이 “비극”이다. 비극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리스 비극은 3단 변형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 디오니소스 축제를 통해 광기를 이끌어내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2)이 광기를 만들어내는 방식과 아폴론적인 방식이 결합하여 ‘서정시’를 만들어 냈다. 3) 서정시를 통하여 합창단은 무아지경을 형성하며, 다시 아폴론적 현상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다시 서사를 형성한다. 이렇게 서사는 서정시에 압축된 인간의 고통과 모순을 다시 풀어내는 작업이다. 어쩌면 이것은 ‘한풀이 또는 살풀이’와 비슷하다고 보인다. 호메로스 시대에 1단에서 서사시를 진행하던 방식에서 디오니소스 비극은 3단까지 변형되었고, 그로써 완성된 것이다. 예술의 원리다.
이제 무대에서 서사적 형상화의 명료성과 견고성이 그에게 말을 건다. 이제 디오니소스는 힘을 통해서가 아니라, 서사적 주인공으로서 '호메로스의 언어로 말을 하는 것'이다.
이제 이미 변신하였으므로, 힘(음악/서정시)이 아니라, 서사적 주인공으로서, 호메로스적 언어로 말을 한다. 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무대 위의 가면 쓴 인간에게 관중의 아폴론적 환영이 투사된다. 그리고 그 가면 쓴 인간은 그 순간 디오니소스로 화하게 된다. 그는 디오니소스로 변신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디오니소스의 이야기를 하는 것, 즉 디오니소스가 말을 하는 것과 같은 것. 디오니소스가 그 자신의 말을 하게 되는 것. 하나의 객체, 개별화가 되었음. 신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
그러므로 여기서 니체가 하고자 하는 말은, 호메로스는 이미 이 단계를 거쳤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호메로스 역시 서정시인들의 시를 서사시로 엮은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이미 그것이 우리 눈에 그대로(혹은 역사의 전승에서도) 비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서정시가 먼저이고 서사가 나중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신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그리스인들은 신들의 일상을 그 자신에게로 가져왔다. 그리고 니체는 현대인들도 그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호메로스가 참고한 서정시들도 이미 디오니소스 과정을 거쳤다는 의미가 된다. 왜냐하면 서정시를 거친 후에 “호메로스의 말”로 말을 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즉 서사가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니체는 아르킬로소스의 서정시를 통하여 그 이전의 서정시들에 관하여 추적한 셈이 된다. 서사가 나오려면 서정시가 먼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호메로스는 아르킬로소스보다 더 먼저 살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사가 먼저고 서정시가 나중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니체는 전승된 그리스 비극의 원형을 아르킬로코스에서 찾았고, 이 원형을 통하여 기원과 근원을 파악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원형을 탐구하는 이유는 기원을 찾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 장에서, 그 다음장에서 또 어떻게 뒤집히는 반전이 일어날지 모르므로, 여기까지만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