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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보다 음악이 먼저다/도취의 세계가 ‘가상’이다

비극의 탄생/음악의 정신으로부터 비극의 탄생 6장

by 아란도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제6장 p56~61









아르킬로코스는 그리스인들의 일반적인 평가에서 ‘호메로스’와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유일한 지위가 부여되고 있다. 학자들의 연구가 밝힌 그의 업적은 ‘민요’를 문학에 도입한 것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아르킬로코스/고대 그리스 서정시인>

아르킬로코스는 그리스의 3대 서정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고대 그리스 3대 시인은 아르킬로코스(BC523~456), 소포클로스(BC497~406), 에우리피데스(BC480~406이다.

아르킬로코스에 대한 생몰연대가 'Daum 백과'는 ‘약 BC675~635년경’으로 나와 있고, 나무위키는 ‘BC523~456’으로 나와 있다. 소포클레스가 아르킬로코스의 제자가 되려면 생몰 년대가 일정 부분 겹쳐야 한다. 그러므로 ‘나무 위키’ 생몰 년대가 비교적 적합하여 그 생몰연대를 사용한다.

아르킬로코스가 주목한 부분은 '사회'이다. 소포클레스는 ‘개인’에 주목하였다고 하고, 에우리피데스는 ‘신’을 주목하였다고 한다. 아르킬로코스는 현실에서 모티브를 따온 작품들이 많다. 그가 페르시아 전쟁을 겪은 세대이고, 전쟁에 차전한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그는 전쟁을 전혀 영예로운 것으로 보지 않았다.

훗날 호라티우스가 모방하게 될 한 편의 시에서 그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방패를 던져버린 명예롭지 못한 행동에 대해 "상관없다, 방패는 또 구할 수 있으니까"라고 말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는 타소스 인들과 낙소스인들 사이에 벌어진 전투 중에 죽었다고 한다.

그는 비극 경연대회에서 13차례나 우승했고 생전 90여 작품을 발표했다고 전해지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7편뿐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불타면서 저작들이 유실되었다고 한다.

전하는 그의 작품으로는 『테베를 공격한 일곱 장군』 , 『탄원하는 여인들』 ,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 『페르시아인』 , 『아가멤논』 ,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 『자비로운 여신들』이 있다.





도취 상태란 무엇인가? 어디론가 스르륵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아폴론적인 ‘호메로스 서사시’와 대립하는 ‘민요’는 무엇인가?>


이것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결합”의 영원한 흔적이다. 민요는 항상 새로운 탄생을 통해 강화된다. 모든 민족들에게서 퍼져가는 민요의 엄청난 전파력은 우리에게 자연의 저 이중적 예술 충동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말해주는 증거다.
한 민족의 열광적인 운동이 그의 음악 속에 영원히 흔적을 남기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저 자연의 이중적 충동은 자신의 흔적을 민요 속에 남긴다. 민요가 풍미했던 모든 생산적인 시기와 동시에 디오니소스적 조류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디오니소스적 조류를 항상 민요의 토대이자 전제 조건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니체가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자면, 우리나라만 해도 충분히 차고 넘친다고 생각한다. 디오니소스적인 힘은 원초성인데, 우리나라 전체 역사의 굽이굽이마다 삶의 애환이 서려 있지 않은 흔적은 없다. 그 실존의 애환 속에서 솟아났고 전파되었던 민요는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결코 죽지 않는 영원한 주인처럼 그렇게 살아남아서 우리 곁에 있다. 이런 점에서 보아도 민요의 원동력은 심연에서 올라온 것이었나 보다. 그것이 바로 ‘서정성’ 일 것이다. 정서에 기대고 있고 도취에 기대고 있는 바로 그 세계로부터 온 것이다.








민요적 형태는 시대와 시대가 교감하며 계속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민요는 음악적인 ‘세계’ 거울이다>


민요는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세계 거울이다. 이제 자신에게 대응하는 꿈의 현상을 찾아 이 현상을 문학 속에서 표현하는 근원적인 “멜로디”다. 멜로디는 최초의 것이고 일반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멜로디는 여러 텍스트들 속에서 다양하게 객관화되는 것 자체를 견뎌낼 수 있다. 또한 멜로디는 민중의 소박한 가치 평가에서도 훨씬 더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이다.
멜로디는 스스로 문학을 낳는다. 그것도 거듭해서 새로운 것을 낳는다. 민요의 (단절單節/짝 없이 홑 마디) 형식은 우리에게 그 사실을 알려 준다. 니체는 이 단절 형식의 현상을 놀라워하며 관찰했다고 말한다. 소년의 ‘마적魔笛’ 같은 민요집을 이 이론에 비추어 본 사람은 수많은 사례를 발견하게 된다고 말한다.


“지속적으로 분만하는 멜로디가 자기 주변에 형상의 불꽃을 흩뿌리는” 여기서 나는 ‘지속적으로 분만하는 멜로디’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어왔다. 어떻게 여기에 ‘분만하는’이라는 표현을 쓸 생각을 했을까! 멜로디가 마구 퐁퐁 솟아나고 빠져나오는 광경이 그려졌다. 얼마 전에 인스타그램에서, 토끼가 끝도 없이 아기토끼를 분만하는 영상을 보았다. 반복 재생되니까 더 그렇게 보였지만 숫자가 많기는 했다. 멜로디가 분만하는 장면도 같이 연상되었다.


이 형상들은 그 다채로움, 급격한 변화, 미친 듯한 허둥거림 속에서 서사시적 가상이나 그 고요한 흐름과는 매우 이질적인 힘을 드러낸다. 서사시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서정시의 불균형하고 불규칙적인 형상 세계는 간단히 부정되어야 한다. 테르판드로스 시대에 아폴론 축제의 장엄한 서사적 음유 시인들이 이를 부정한 적이 있다.


<테르판드로스>

테르판드로스Terpandros/ BC 647년경 소아시아의 레스보스 섬에서 활동한 그리스의 시인·음악가. 리라와 비슷하게 생긴 7현 악기인 키타라 반주를 하며 노래하는 가수로 유명했는데, ‘키타라’는 그가 발명한 것이라고 한다. '기타'라는 말은 '키타라'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한 이 악기는 음악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스파르타에서 열린 제26차 올림피아기(BC 676/672)에서 음악상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Daum 백과>




민요와 판소리의 단장격 멜로디를 분만한 작곡가 & 가수 김정호! 김정호는 디오니소스적 예술가였다!

33세에 요절한 가수가 50여 곡을 썼다니..., 그의 멜로디는 심연에서 올라왔나 보다. 그리고 음악의 의지에 따라 가사들은 입혀졌다. 그의 노래를 듵어 본 이들이라면 그 즉시 그가 탁월했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그의 음악은 정말 달랐다. 그 심연은 민요와 판소리와 닿아 있었고 새로움으로 산출되었었나 보다. 김정호는 한국의 아르킬로코스라고 불려야 할지도.








똑같은 것일지리도 어떤 특정한 것을 반복하다 보면, 기묘해진다. 그때 어떤 세계에 진입하는 듯한 그런 느낌들이 있다.





<호메로스적 시 세계와 모순되는 ‘새로운 시 세계’가 아르킬로코스와 함께 시작된다>


민요의 시가詩歌에서 음악을 모방하기 위하여 강렬하게 긴장되어 있는 ‘언어’를 본다. 언어, 형상, 개념은 음악과 유사한 표현을 추구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미치는 음악의 힘을 감수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 민족의 언어 역사에서, “언어가 현상 및 형상 세계를 모방했는가? 아니면 음악 세계를 모방했는가? 에 따라서 두 가지 주요 흐름을 구분해도 될 것이다.

니체는 호메로스와 핀다로스에게서 나타나는 색채 통사적 구조와 어휘의 차이점에 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전반적인 문맥을 보아서 결코 니체가 이 두 시인에게 호의적인 표현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핀다로스(BC518?~438?)는 ‘에피니키온 송가’가 남아 있다. 니체는 베토벤의 교향곡에 대해서도 말한다.


“우리는 베토벤의 교향곡을 들으면 개개의 청중이 형상들의 언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음을 거듭 체험하게 된다. 어떤 악곡에 의해 산출된 다양한 현상 세계들이 함께 모이면 정말 환상적으로 다채롭게, 또는 모순적으로 보일 것이다.

빈약한 기지를 발휘하여 그것들을 조합하지만, 진정으로 설명할 가치가 있는 형상은 간과하는 것, 이것이 우리 미학의 방식에서는 정당한 것이다. 설령 작곡가 자신이 어떤 교향곡을 <전원>이라고 부르고, 어떤 악장을 ‘시냇가의 풍경’ 그리고 다른 악장을 ‘농부들의 즐거운 모임’이라고 이름 붙이는 방식으로 형상들을 통해 작곡에 관해 이야기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마찬가지로 ‘음악으로부터 탄생한 비유적 표상들’에 불과할 뿐이다.

모방되는 음악의 대상들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이 표상들은 음악의 디오니소스적 내용에 관한 어떤 측면도 우리에게 가르쳐줄 수 없다. 또한 다른 형상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독점적 가치도 가지고 있지 않다.

절로 나누어진 민요가 어떻게 생겨나고, 언어 능력 전체가 음악의 모방이라는 새로운 원칙에 의해 어떻게 자극되는지를 예감하기 위해서, 우리는 음악이 형상들 속으로 폭발적으로 표현되는 이 과정을 이제는 젊고 신선한 언어적으로 창조적인 어떤 민중들에게 적용해야만 한다.


니체는 베토벤의 표제음악을 비판하고 있는 듯하다. 니체의 책 구분은 1장, 2장 형태의 숫자만 있을 뿐 제목도 부재도 없다. 그리고 어쩌면 니체의 이런 미학적 사유도 그 자신의 심연에서 올라온 것이어서 음악적인 것을 모방한 것일 거다. 그러니 제목이 없는 것일 듯. 커다란 책 제목만 있는 것. 한 덩어리를 그저 숫자로만 장을 나눈 것. 그래서 니체의 책에서 한 꼭지의 주제를 뽑는 일은 머릿속이 복잡해지는가 보다 싶다. 니체의 문장은 몇 번을 읽어보고 니체의 의중을 파악해야 한다.


니체가 인용하는 부분들에 대하여 자칫하면 오해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니체가 인용하는 내용에 대해 반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니체는 모호한 언어표현인 비유적으로 대체해 버리기 때문이다. 니체가 취하는 모호함을 넘어서면 니체의 문장은 정말 명확하게 맥락을 연결시킨다. 심연에서 올라온 것들에 대하여 언어로 설명을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의 맥락을 오차 없이 연결시킨다는 것은 정말 고난도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책”은 예술이다.


니체는 호메로스도 핀다로스도 베토벤도 전반적으로는 현상 세계의 형상들을 보고 작곡하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니체는 현상 세계의 형상을 보고 음악을 작곡하는 것 역시 음악으로부터 탄생한 표상들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 표상으로는 음악의 디오니소적 내용에 관한 어떤 측면도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현상 세계로부터 온 음악은 ‘심연’에서 올라온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고, 관조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디오니소스적인 음악은 도취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형상들에서 음악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형상들 속으로 침투한다. 음악이 형상들 속으로 폭발적으로 표현된다.









사진을 찍을 때에도 도취는 가능할 것이다. 어떤 음악적 기분을 느낀다면 그때는 예술적 행위일 것이다.




<서정시인의 현상>


우리가 만약 ‘서정문학’을 ‘형상과 개념’을 통해 음악을 모방하는 불꽃으로 보아도 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음악은 형상과 개념의 거울 속에서 무엇으로서 나타나는가?” 그것은 ‘의지’로서 나타난다. 이 의지라는 낱말은 ‘쇼펜하우어’의 의미에서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음악은 미학적이고, 순전히 관조적이며, 의지가 없는 분위기의 대립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가능한 한 명확하게 ‘본질의 개념’을 ‘현상의 개념’과 구별할 것이다. 왜냐하면 음악은 그 본질상 의지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의지로서의 음악은 예술의 영역에서 완전히 추방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의지는 그 자체로는 미학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악은 의지로써 나타난다. 왜냐하면 음악의 현상을 형상 속에 표현하기 위해 ‘서정시인’은 애정의 속삭임으로부터 광기의 노여움에 이르기까지 온갖 ‘열정의 충동’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아폴론적 비유를 통해 음악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충동 하에서 서정시인은 자연 전체와 그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을 영원히 욕구하는 자, 갈망하는 자, 동경하는 자로 이해한다.
그러나 서정시인이 음악을 형상으로 해석하는 한, 음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그가 관조하는 모든 것이 그의 주위에서 급박하게 이리저리 격동하고 있을 지라도 “그 자신은 아폴론적 관조라는 고요한 바다에서 편히 쉰다.”
물론 그가 동일한 매개체를 통해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면, 불만족한 감정의 상태에 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에게 보일 것이다. 자신의 고유한 의욕, 동경, 신음, 환호가 그에게는, 그가 음악을 해석하는 데 사용하는 하나의 비유다. 이것이 서정시인의 현상이다. 그 자신은 의지의 욕구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순수하고 맑은 태양의 눈이지만, 아폴론적 수호신으로서의 그는 음악을 의지의 형상을 통해 해석한다.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무의시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맹목적인 의지이다. 니체는 여기서 의지를 쇼펜하우어적 입장에서의 의지라고 밝혔다. “음악은 미학적이고, 순전히 관조적이며, 의지가 없는 분위기의 대립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므로 음악은 무의식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맹목적인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서정시인이 음악을 형상으로 해석하는 한” 그리고 “그는 음악을 의지의 형상을 통해 해석한다.”에서 이 두 구절은 정말 해석하기 헛갈린다. 이런 함정에 빠진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차라리 이럴 때 나는 전체를 다시 일어 본다. 이럴 때는 정말 문장을 관조하듯이 바라보게 된다. 의자에 앉아서 꼼짝도 안 하고서.

여기서 전자는 관조로서 편히 쉬는 것이며, 후자는 그 자신의 충동이 개입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자신의 고유한 의욕, 동경, 신음, 환호가 그에게는, 그가 음악을 해석하는 데 사용하는 하나의 비유다” 의지가 개입하였기에 충동이 분출되는 것이며, 그 분출되는 기분에 의하여 음악은 해석된다.

“그 자신은 아폴론적 관조라는 고요한 바다에서 편히 쉰다” 니체는 여기서 이 문장을 ‘조소’의 표현으로 사용하였다. 쇼펜하우어의 이 문장을 니체는 계속 사용하고 있다. 아마도 ‘아폴론적 관조’에 대한 비유이기 때문일 것이다. 관조만 하면 어떤 비유적 표본이 산출되지 않는다. 그러면 자기 객관화를 생성할 수 없다. ‘열정의 충동’이 분출되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는 그저 풍경만 찍을까? 그때의 어떤 느낌을 찍고 그때의 어떤 느낌을 산출한다.




<서정시는 음악의 정신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 전체는, 음악 자체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완전한 무제약성’ 때문에, 형상과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것이 곁에 있는 것을 오직 참아내고 있다’고 할 정도로 ‘서정시’가 ‘음악의 정신’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견지하고 있다.
서정 시인의 문학은 엄청난 일반성과 타당성을 가지고 이미 음악, 즉 서정 시인으로 하여금 ‘형상의 언어를 떠올리도록 강요하는 음악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음악의 세계 상징”은 바로 그 때문에 언어로써는 어떤 방식으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음악은 ‘근원적 일자의 가슴속’에 있는 ‘근원적 모순’과 ‘고통과 상징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음악은 모든 현상의 위와 앞에 있는 ‘어떤 영역을 상징화’한다. 음악에 비하면 모든 현상은 오히려 비유에 불과하다.
현상들의 도구이자 상징인 언어는 결코 음악의 가장 깊은 내면을 외부로 돌려놓을 수 없으며, 음악을 모방하는 즉시 언어는 음악과의 피상적인 접촉 상태에만 머무르게 된다. 그러는 동안 음악의 가장 심오한 의미는 아무리 유려한 서정적 표현을 통해서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한 걸음도 가까이 다가올 수 없다.



음악은 직접적으로 마음을 흔든다. 음악은 매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소통한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의 세계 상징은 어떤 방식으로도 충분하게 설명될 수 없다. 아마도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표현하다고 하여도 언어로는 충분치 않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표현인 것 같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이미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과정’을 거친 후에 언어로 표현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리 따지면 언어가 불충분한 이유는 우리의 행위 자체가 어떤 충동을 거친 후에 일어난다는 의미일 것이다. 언어로 안 되는 것을 우리는 음악을 통해서 해소한다. 그런 행위도 어쩌면 구원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러한 구원도 음악의 ‘무제약성’에 의한 것일 거다.

음악이 이러하다면 언어는 현상들의 상징이자 도구이다. 언어는 음악의 가장 깊은 내면을 외부로 돌릴 수 없다. 언어가 음악을 모방하면 그 즉시 음악과의 피상적인 접촉 상태로만 머문다. 그 상태에서 음악의 가장 심오한 의미는 우리에게 한 걸음도 다가올 수 없다. 이 말의 의미는 음악이 우리에게 충동이 되지 않고 관조로만 머물게 된다는 의미일까.


서정 시인으로 하여금 “음악이 형상의 언어를 떠올리도록 강요하는 음악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고 니체는 말했다. 그렇다면 ‘포함되어 있는 것’만 말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결국 음악이 말하고자 하는 것만 말할 수 있다는 것.


의지는 음악에게 있었구나! 하나의 의지가 사라져야만 음악의 의지가 나타난다. 즉 전자의 의지는 실존하는 세계의 의지이고, 후자는 심연의 의지이다. 실존하는 세계의 주체가 사라져야 심연 속의 가상의 주체의 의지가 드러난다.


우리가 음악을 감상한다고 가정할 때, 우리의 의지가 사라져야 스르륵 음악 속에 빠져든다. 도취다. 그때 그 음악의 의지가 살아나서 자기 안의 무엇인가를 자극한다. 바로 거기에서 우리는 음악과 하나 되는 것일 것인지도. 그리고 그 음악의 환영에 의해 어떤 영감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는 표본을 산출하게 된다. “음악의 세계 상징”이라는 표현은 아마도 “가상 세계”를 의미하는 것. 도취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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