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음악의 정신으로부터 비극의 탄생 6장
아르킬로코스는 그리스의 3대 서정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고대 그리스 3대 시인은 아르킬로코스(BC523~456), 소포클로스(BC497~406), 에우리피데스(BC480~406이다.
아르킬로코스에 대한 생몰연대가 'Daum 백과'는 ‘약 BC675~635년경’으로 나와 있고, 나무위키는 ‘BC523~456’으로 나와 있다. 소포클레스가 아르킬로코스의 제자가 되려면 생몰 년대가 일정 부분 겹쳐야 한다. 그러므로 ‘나무 위키’ 생몰 년대가 비교적 적합하여 그 생몰연대를 사용한다.
아르킬로코스가 주목한 부분은 '사회'이다. 소포클레스는 ‘개인’에 주목하였다고 하고, 에우리피데스는 ‘신’을 주목하였다고 한다. 아르킬로코스는 현실에서 모티브를 따온 작품들이 많다. 그가 페르시아 전쟁을 겪은 세대이고, 전쟁에 차전한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그는 전쟁을 전혀 영예로운 것으로 보지 않았다.
훗날 호라티우스가 모방하게 될 한 편의 시에서 그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방패를 던져버린 명예롭지 못한 행동에 대해 "상관없다, 방패는 또 구할 수 있으니까"라고 말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는 타소스 인들과 낙소스인들 사이에 벌어진 전투 중에 죽었다고 한다.
그는 비극 경연대회에서 13차례나 우승했고 생전 90여 작품을 발표했다고 전해지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7편뿐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불타면서 저작들이 유실되었다고 한다.
전하는 그의 작품으로는 『테베를 공격한 일곱 장군』 , 『탄원하는 여인들』 ,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 『페르시아인』 , 『아가멤논』 ,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 『자비로운 여신들』이 있다.
이것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결합”의 영원한 흔적이다. 민요는 항상 새로운 탄생을 통해 강화된다. 모든 민족들에게서 퍼져가는 민요의 엄청난 전파력은 우리에게 자연의 저 이중적 예술 충동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말해주는 증거다.
한 민족의 열광적인 운동이 그의 음악 속에 영원히 흔적을 남기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저 자연의 이중적 충동은 자신의 흔적을 민요 속에 남긴다. 민요가 풍미했던 모든 생산적인 시기와 동시에 디오니소스적 조류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디오니소스적 조류를 항상 민요의 토대이자 전제 조건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민요는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세계 거울이다. 이제 자신에게 대응하는 꿈의 현상을 찾아 이 현상을 문학 속에서 표현하는 근원적인 “멜로디”다. 멜로디는 최초의 것이고 일반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멜로디는 여러 텍스트들 속에서 다양하게 객관화되는 것 자체를 견뎌낼 수 있다. 또한 멜로디는 민중의 소박한 가치 평가에서도 훨씬 더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이다.
멜로디는 스스로 문학을 낳는다. 그것도 거듭해서 새로운 것을 낳는다. 민요의 (단절單節/짝 없이 홑 마디) 형식은 우리에게 그 사실을 알려 준다. 니체는 이 단절 형식의 현상을 놀라워하며 관찰했다고 말한다. 소년의 ‘마적魔笛’ 같은 민요집을 이 이론에 비추어 본 사람은 수많은 사례를 발견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 형상들은 그 다채로움, 급격한 변화, 미친 듯한 허둥거림 속에서 서사시적 가상이나 그 고요한 흐름과는 매우 이질적인 힘을 드러낸다. 서사시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서정시의 불균형하고 불규칙적인 형상 세계는 간단히 부정되어야 한다. 테르판드로스 시대에 아폴론 축제의 장엄한 서사적 음유 시인들이 이를 부정한 적이 있다.
테르판드로스Terpandros/ BC 647년경 소아시아의 레스보스 섬에서 활동한 그리스의 시인·음악가. 리라와 비슷하게 생긴 7현 악기인 키타라 반주를 하며 노래하는 가수로 유명했는데, ‘키타라’는 그가 발명한 것이라고 한다. '기타'라는 말은 '키타라'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한 이 악기는 음악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스파르타에서 열린 제26차 올림피아기(BC 676/672)에서 음악상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Daum 백과>
“우리는 베토벤의 교향곡을 들으면 개개의 청중이 형상들의 언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음을 거듭 체험하게 된다. 어떤 악곡에 의해 산출된 다양한 현상 세계들이 함께 모이면 정말 환상적으로 다채롭게, 또는 모순적으로 보일 것이다.
빈약한 기지를 발휘하여 그것들을 조합하지만, 진정으로 설명할 가치가 있는 형상은 간과하는 것, 이것이 우리 미학의 방식에서는 정당한 것이다. 설령 작곡가 자신이 어떤 교향곡을 <전원>이라고 부르고, 어떤 악장을 ‘시냇가의 풍경’ 그리고 다른 악장을 ‘농부들의 즐거운 모임’이라고 이름 붙이는 방식으로 형상들을 통해 작곡에 관해 이야기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마찬가지로 ‘음악으로부터 탄생한 비유적 표상들’에 불과할 뿐이다.
모방되는 음악의 대상들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이 표상들은 음악의 디오니소스적 내용에 관한 어떤 측면도 우리에게 가르쳐줄 수 없다. 또한 다른 형상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독점적 가치도 가지고 있지 않다.
절로 나누어진 민요가 어떻게 생겨나고, 언어 능력 전체가 음악의 모방이라는 새로운 원칙에 의해 어떻게 자극되는지를 예감하기 위해서, 우리는 음악이 형상들 속으로 폭발적으로 표현되는 이 과정을 이제는 젊고 신선한 언어적으로 창조적인 어떤 민중들에게 적용해야만 한다.
우리가 만약 ‘서정문학’을 ‘형상과 개념’을 통해 음악을 모방하는 불꽃으로 보아도 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음악은 형상과 개념의 거울 속에서 무엇으로서 나타나는가?” 그것은 ‘의지’로서 나타난다. 이 의지라는 낱말은 ‘쇼펜하우어’의 의미에서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음악은 미학적이고, 순전히 관조적이며, 의지가 없는 분위기의 대립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가능한 한 명확하게 ‘본질의 개념’을 ‘현상의 개념’과 구별할 것이다. 왜냐하면 음악은 그 본질상 의지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의지로서의 음악은 예술의 영역에서 완전히 추방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의지는 그 자체로는 미학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악은 의지로써 나타난다. 왜냐하면 음악의 현상을 형상 속에 표현하기 위해 ‘서정시인’은 애정의 속삭임으로부터 광기의 노여움에 이르기까지 온갖 ‘열정의 충동’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아폴론적 비유를 통해 음악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충동 하에서 서정시인은 자연 전체와 그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을 영원히 욕구하는 자, 갈망하는 자, 동경하는 자로 이해한다.
그러나 서정시인이 음악을 형상으로 해석하는 한, 음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그가 관조하는 모든 것이 그의 주위에서 급박하게 이리저리 격동하고 있을 지라도 “그 자신은 아폴론적 관조라는 고요한 바다에서 편히 쉰다.”
물론 그가 동일한 매개체를 통해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면, 불만족한 감정의 상태에 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에게 보일 것이다. 자신의 고유한 의욕, 동경, 신음, 환호가 그에게는, 그가 음악을 해석하는 데 사용하는 하나의 비유다. 이것이 서정시인의 현상이다. 그 자신은 의지의 욕구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순수하고 맑은 태양의 눈이지만, 아폴론적 수호신으로서의 그는 음악을 의지의 형상을 통해 해석한다.
이러한 논의 전체는, 음악 자체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완전한 무제약성’ 때문에, 형상과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것이 곁에 있는 것을 오직 참아내고 있다’고 할 정도로 ‘서정시’가 ‘음악의 정신’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견지하고 있다.
서정 시인의 문학은 엄청난 일반성과 타당성을 가지고 이미 음악, 즉 서정 시인으로 하여금 ‘형상의 언어를 떠올리도록 강요하는 음악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음악의 세계 상징”은 바로 그 때문에 언어로써는 어떤 방식으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음악은 ‘근원적 일자의 가슴속’에 있는 ‘근원적 모순’과 ‘고통과 상징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음악은 모든 현상의 위와 앞에 있는 ‘어떤 영역을 상징화’한다. 음악에 비하면 모든 현상은 오히려 비유에 불과하다.
현상들의 도구이자 상징인 언어는 결코 음악의 가장 깊은 내면을 외부로 돌려놓을 수 없으며, 음악을 모방하는 즉시 언어는 음악과의 피상적인 접촉 상태에만 머무르게 된다. 그러는 동안 음악의 가장 심오한 의미는 아무리 유려한 서정적 표현을 통해서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한 걸음도 가까이 다가올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