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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론적 꿈과 가상/미와 숭고

비극의 탄생/음악의 정신으로부터 비극의 탄생 4장

by 아란도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제4장 p44~49






<아폴론적 꿈과 가상>

“이건 꿈이야, 나는 이 꿈을 계속 꾸고 싶어”라고 외치는 어떤 꿈꾸는 사람을 그려보며, 니체는 이로부터 ‘꿈 관조가 깊은 내면적 쾌락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추론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소박한 예술가”에 관한 유추가 가르쳐주는 방식이기도 하다. 나는 소박한 예술가를 '연재 12화'에서 “단순함의 예술가 = 편집의 예술가”라고 생각한다고 이미 말하였다. 여기서 니체가 예시를 들고 있는 “소박한 예술가”는 바로 '호메로스'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호메로스의 단순성은 바로 편집된 방식에 있고, 이 조각으로 구성된 일화들은 다양한 촉수를 가지고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 단순함은 바로 불필요한 것들은 가지치기를 통하여 전부 소거하게 되는데 이는 바로 섬세하고도 엄격한 방식의 가지치기이다. 이 방식을 거치고 나면 단순해지며, 거기서는 또 하나의 촉수이자 생장점이 생겨나게 된다. 호메로스는 이 방식으로 그의 서사시를 구성했다고 생각된다. 호메로스의 세계관은 아폴론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므로, 조화와 균형, 완전성, 그것을 다 포괄하는 '절도節度'는 곧 편집방식에 적용되었을 것이다.


니체는 먼저 꿈 관조가 깊은 내면적 쾌락을 가져다주는 것을 추론할 때, 이러한 내면적 쾌락을 가지고 꿈꿀 수 있기 위해 대낮과 대낮의 끔찍하고 귀찮은 일들을 완전히 망각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이 모든 현상들’에 대해서 ‘해몽가 아폴론’의 지도를 받아서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해석하여도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아폴론과 님프들





<삶의 두 절반, 즉 ‘깨어 있는 반쪽’과 ‘꿈꾸는 반쪽’>


삶의 두 절반, 즉 ‘깨어 있는 반쪽’과 ‘꿈꾸는 반쪽’ 중에서 우리는 전자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선호하고, 더 중요하고, 더 가치가 있고, 더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 요컨대 진정으로 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겉보기엔 온통 ‘모순’처럼 보일지라도(이 본질의 현상이 바로 우리다) 우리 본질의 저 비밀스러운 근거를 위해서 ‘꿈에 대한 정반대의 가치평가’를 주장하고 싶다.

니체는 삶의 두 절반에서 인간은 깨어 있는 쪽을 진정으로 선호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깨어 있는 것이 “산 것”이라고 인간은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니체는 이를 뒤집어 ‘꿈에 대한 정반대의 가치평가’를 주장한다. 이러한 정반대의 가치 평가는 비록 겉보기에는 ‘모순’처럼 보일지라도 우리 본질의 비밀스러운 근거라는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모순된 본질의 현상이 바로 “우리”라고 말하고 있다.



<꿈에 대한 정반대의 가치 평가>

니체의 “꿈에 대한 정반대의 가치 평가”는 다음과 같다.

내가 자연 속에서 저 ‘강력한 예술 충동’을 감지하고 이 충동들 속에서 ‘가상’에 대한, 다시 말해 ‘가상을 통한 구원’에 대한 열정적인 ‘갈망’을 인식하면 할수록, 나는 점점 더 다음과 같은 ‘형이상학적 가정’을 하지 않을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

‘진정으로 존재하는 자, 근원적인 일자一者’는 ‘영원히 고통받는 자’와 ‘모순에 가득 차 있는 자’로서 ‘자신의 지속적인 구원’을 위하여 “동시에” ‘매혹적인 환영’과 ‘즐거운 가상’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그 속에 갇혀 있고, 우리가 그것으로 이루어져 있는 그 ‘가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진정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 즉 ‘시간과 공간과 인과율’ 속에서 이루어지는 지속적인 생성, 다른 말로 표현하면 “경험적 실재”로 느껴야만 했다.

우리가 한번 우리의 고유한 “실재”를 잠깐 동안 도외시하고 우리의 ‘경험적 실존’을 ‘세계 일반의 실존’처럼 ‘매 순간 만들어진 근원적 일자의 표상’으로 파악하면, 우리는 이제 꿈을 ‘가상의 가상’으로, 가상에 대한 근원적 욕망의 보다 ‘고차원적인 충족’으로 여겨야 한다.

바로 이와 동일한 근거에서 ‘자연의 가장 내면적인 핵심’은 ‘소박한 예술가’ 그리고 “가상의 가상”에 지나지 않는 ‘소박한 예술 작품’에 대해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욕망’을 느낀다.

니체는 자연 속에서 “강력한 예술 충동”을 감지했다. 그리고 이 충동들 속에서 “가상을 통한 구원”에 대한 “열망적인 갈망”을 인식하였다. 니체는 이에 대해 ‘형이상학적 가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형이상학적 가정>

“진정으로 존재하는 근원적인 ‘일자一者’는 ‘영원히 고통받는 자’와 ‘모순에 가득 차 있는 자’이다. 그 존재는 ‘자신의 지속적인 구원’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매혹적인 환영’과 ‘즐거운 가상’을 통해서이다.”

우리는 이미 가상 속에 있고, 우리는 가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진정으로 존재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과 인과율’ 속에서 이루어지는 지속적인 생성을 “경험적인 실재”로 느낀다.

우리가 ‘세계일반의 실존’에서 비롯되는 “고유한 실재”를 잠깐 밀어 놓고, ‘경험적 실존’을 ‘매 순간 만들어진 근원적 일자의 표상’으로 파악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제 꿈을 ‘가상의 가상’으로 보아야 한다. 즉 가상에 대한 근원적 욕망의 보다 높은 차원인 ‘고차원적인 충족’으로 여겨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근거를 갖고 있는 ‘자연의 가장 내면적인 핵심’은 ‘소박한 예술가’와 “가상의 가상”에 지나지 않는 ‘소박한 예술 작품’에 대해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욕망’을 느낀다.



<위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가상과 가상의 가상/ 고유한 실재와 경험적인 실재>


근원적인 일자는 고통받는 자이면서 모순에 가득 차 있는 자이다. 이는 바로 자연의 본래 모습이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자연도 인간도 모두 모순에 가득 차있지만, 바로 그 ‘모순’의 힘에 의해 묘하게도 세상은 유지되고 있다. 고통과 모순은 매 순간 구원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구원은 환영과 가상을 필요로 하게 된다.


시간과 공간의 인과율은 어찌 보면 허상이다. 하지만 이 안에서 우리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게 된다. 그것을 ‘경험적인 실재’라고 말한다. 경험적인 실재가 ‘고유한 실재’는 아니다. 경험적인 실재는 경험적인 실존을 체험하게 한다. 고유한 실재는 세계 일반의 보편적 모습이다. 인간은 고유한 실재보다는 경험적인 실재를 통하여 구원받고자 하는 열망이 강하다. 니체는 이 경험적인 실재를 ‘가상의 가상’이라고 부른다. 즉 이미 우리는 ‘시공의 인과율’이라는 “가상”안에 존재하고 있고, 그 가상에서 ‘꿈’을 꾼다. 가상 안에서 꾸는 꿈을 니체는 “가상의 가상”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상 세계에서 ‘경험적 실존’을 ‘매 순간 만들어진 근원적 일자의 표상’으로 파악하는 일은 보다 높은 ‘고차원적인 충족’을 지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 역시 같은 방식으로 소박한 예술가와 소박한 예술작품을 욕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도 자연도 같은 방식으로 어떤 욕망을 충족하고 있다. 자연에게는 인간 세상이 1차 가상이며, 인간이 2차 가상인 ‘가상의 가상’ 일 것이다. 즉 자연에게는 사람 자체가 가상의 가상이 되므로 ‘예술 작품’이 된다.









라파엘로 산치오(1483~1520) <그리스도의 변용>



니체는 ‘라파엘로’의 〈그리스도의 변용〉을 예시로 든다.


<아폴론적 작품 감상 방식>

미친 소년, 절망하는 운반자들, 어찌할 줄 모르고 겁에 질린 사도들의 모습을 담은 하반부는 영원한 근원적 고통, 세계의 유일한 근거를 반영한다. “가상”은 여기서 영원한 모순, 즉 만물의 아버지의 반영이다. 이 가상으로부터 이제 감미로운 향기처럼 환영 같은 새로운 가상 세계가 솟아오른다.

첫 번째 가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 세계에 관해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그것은 가장 순수한 환희와 커다란 눈에서 나오는 고통 없는 관조 속에서 빛을 발하며 떠다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최고의 예술 상징을 통해 저 ‘아폴론적 아름다움의 세계’와 그 ‘토대’, 즉 실레노스의 무서운 지혜를 눈앞에 보게 되고, 직관을 통하여 그들의 상호 필연성을 파악하게 된다.

그러나 아폴론은 우리에게 다시금 ‘개별화의 원리’의 신격화로 나타난다. 이 개별화의 원리 속에서만 근원적 일자의 영원히 성취된 목표, 즉 가상을 통한 자신의 구원이 실행된다. 그는 ‘숭고한 몸짓’으로 고통의 세계 전체가 얼마나 필요한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또 이 세계로 인해 개개인은 자신을 구원할 환영을 어쩔 수 없이 만들어 내고 이 환영의 관조에 침잠하여 바다 한가운데서 흔들거리는 조각배 위에 고요히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술작품 감상과 환영의 공간>

이 작품은 하반부에서 상반부로 상승하는 구도를 취하고 있다. 인간의 감정 고양의 진행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생로병사의 영원한 고통과 절망이 드러나고 실존의 공포를 느낀다. 그리고 더 위를 올려다보면 그리스도가 공중에 떠 있다. 하늘과 땅의 세계의 그 중간 공중에서 가상으로 전환된다. 공중에서의 ‘숭고한 몸짓’과 고통의 세계 전체가 대비된다. 개개인은 자신을 이 세계에서 구원할 환영을 만들어 낸다. “이 환영의 관조에 침잠하여 바다 한가운데서 흔들거리는 조각배 위에 고요히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문장은 니체가 ‘쇼펜하우어’ 문장을 인용한 것이다. 반면 니체는 이 문장에서 '오디세우스'를 떠올렸는지도. 아폴론적 아름다움을 마음을 고양시키는 데 있다. 아름다운 것은 열정을 일으킨다. 델포이 사회가 호전적인 사회가 되었던 이유일 것이다. 미로 고양시키고 숭고로 구원받는다.

여기서 니체는 아폴론적인 세계와 아폴론적인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그 토대인 ‘실레노스의 지혜’를 눈앞에서 보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직관’을 통하여 이 두 개의 ‘상호 필연성’을 파악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실레노스의 지혜는 바로 ‘무無'로 존재하는 것이고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 의미는 세계는 고통이라는 것이고, 태어남은 고통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인은 실존을 갈구한다. 그리스인은 이 열정을 희구한다. 그리고 그들은 모험을 떠난다. 그리고 여기에 바로 필연적으로 그 무엇이 필요하다. 바로 '구원'이다. 고통받는 일자는 매 순간 구원을 필요로 한다. 그것이 담보될 때 거센 바다 한복판에서도 태연해질 수 있는 호연지기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폴론적인 세계는 ‘예술의 세계 즉 가상의 세계’이다. 가상 세계의 토대는 바로 '무無'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 무와 가상의 상호 필연성은 직관을 통하여 연결된다. ‘직관’을 통해서만 그것을 감각할 수 있는 것이다. 무의 공간에서만 가상은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 스러지고 다시 재생되고 그것이 ‘진정으로 존재하지 않은 시공의 인과율’ 일 것이다.





터키 안탈리아 '아폴론 신전'


<개별화된 신격화 / 숭고함>


‘개별화된 신격화’를 만약 명령하고 규정을 지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면, 그것은 오로지 하나의 법칙에 의해서이다. “개인 즉 개체의 경계를 준수할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적 의미의 절도節度다.

윤리적 신인 아폴론은 자신의 신도들에게 절도를 요구하고, 이 절도를 준수할 수 있기 위하여 ‘자기 인식’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의 미학적 필연성 외에도 “너 자신을 알라”와 “너무 지나치지 말라!”라는 요구가 나란히 생겨난다.

‘절도節度’는 조화와 완전을 지향하는 그리스 정신에서 일반적인 준거가 되는 도덕률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中庸을 이룬다.(Daum 사전 참조).


아폴론적인 아름다움은 조화와 균형이므로, 여기서의 절도는 어딘가에 치우치지 않는 단정함에 있을 것이다. ‘너무 지나치지 말라’는 중용을 지키라는 의미일 것이다. 개체의 경계를 준수하는 일은 선을 넘지 말라는 것이므로, ‘개인과 개인의 거리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이므로 규준을 지키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적용은 아폴론의 신상을 인간이 참배할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거대한 신상을 보며 느꼈을 압도감, 그리고 외경심, 여기에서 비롯된 공포감은 인간을 떨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내 아폴론적 규준에 의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외경심을 가지고 올려다보는 아폴론의 신상은 아름다웠을 것이다. 환희감이 차오르고 신과의 일치감은 그대로 열정으로 변환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개별화된 신격화는 ‘숭고’로 나타난다. 이것은 인간이 거대한 자연을 관조할 때와 마찬가지의 감정이다. 또 하나의 예술을 감상하는 방법일 것이며, 그것은 반드시 단독자로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일대일이다. 그 숭고함이 드러나는 환영의 공간은 그 자신만 들어갈 수 있고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 체험은 그 자신만이 겪는 것이기 때문이다. 숭고함도 그 자신만이 느낀다.



<숭고>


영국 사상가 에드먼트 버크(1765~1795)는 1757년 그의 미학 논문 《숭고와 아름다움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에서 아름다움과 숭고에 관해 말했다.

이 논문은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각각 논리적인 범주로 구분하는 최초의 완벽한 철학적인 설명이다. 이 논문은 ‘드니 디드로’와 ‘이마누엘 칸트’로부터 관심을 끌었다.

에드먼트 버크에 의하면 아름다움이란 형식이 잘 되어 미적으로 즐거움을 주는 것(미/쾌)이며, 숭고함이란 우리를 강제하며 파괴하는 능력(고통/불쾌)을 갖고 있다고 하였다. 숭고함이 아름다움을 우선하는 것은 신고전파 시대에서 낭만주의 시대로 변화하게 만들었다. 버크는 미와 숭고함이라는 관념의 기원은 인과 구조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쾌와 불쾌는 절대적인 쾌(미)와 상대적인 쾌(고통)로 나뉜다. 절대적인 쾌는 미/사랑/정열/미로부터 얻는 즐거움은 대상과의 일치감을 나타내므로 사회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이다. 상대적인 쾌는 외경심이나 공포감이 드는 대상에 대하여 안전한 상태에서 그것들을 관조할 수 있으면 이 대상들은 숭고한 것으로 체험된다. 그렇지 않고 물리적 위해가 된다면 고통이 된다. 숭고에 대한 체험은 단순히 거대한 자연이나 거대한 작품을 관조하는 형태도 있지만, 직접 참여하여 고통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숭고를 느끼기도 한다. 요즘의 익스트림Extreme 스포츠는 그에 해당할 것이다. <내용 추가함>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과 형이상학에 의하면 아름다움의 형태적 원인은 사랑에 대한 열정이고, 물질적 원인은 작음, 부드러움, 섬세함 등의 어떤 물체의 성질들에 관한 것이며, 유효한 원인은 우리의 신경을 안정시키는 것이고, 마지막 원인은 신의 섭리이다.

반면에 숭고함의 형태적 원인은 두려움, 특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위한 열정이고, 물질적 원인은 광대함, 무한함, 웅장함 등의 어떤 물체의 성질에 대한 것이며, 유효한 원인은 우리의 신경을 긴장시키는 것이고, 마지막 원인은 사탄을 창조하고 싸우는 신이다. 이것은 존 밀턴의 실낙원에 표현되어 있다. <위키백과 부분 참조>










<비아폴론적인 특성이 아폴론적 영역을 침범하다>


역으로, 아폴론적 개별화에 반대되는 것은 비非아폴론적 영역에 속한다. 자만과 과도함 그리고 본래 적대적인 악령들로 아폴론 이전 시대인 ‘거인 시대’와 아폴론 이외의 세계인 ‘야만 세계’의 특성은 비非아폴론적 영역에 해당한다.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프로메테우스는 독수리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져야만 했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 정도로 과도한 지혜를 가진 오이디푸스는 범행의 어지러운 소용돌이에 빠져들어야만 했다.

델포이의 신은 그리스의 과거를 이렇게 해석했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영향도 아폴론적 그리스인에게는 ‘거인적’이고, ‘야만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아폴론은 그 자신도 내면적으로는 파멸한 거인들과 영웅들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숨길 수 없었다. 그는 그 이상을 느껴야 했다.

아폴론의 전체 실존은 온갖 아름다움과 절도를 갖추고 있음에도 저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통해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된 고통과 인식의 은폐된 토대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거인적인 것’과 ‘야만적인 것’은 결국 아폴론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필연성”이다.

가상과 절도 위에 세워져 인공제방으로 둘러싸인 아폴론적인 세계 속으로 디오니소스 축제의 황홀한 소리가 더 유혹적인 마법의 멜로디로 흘러들 때, 쾌락과 고통과 인식 속에 드러나는 자연의 과도함이 폐부를 관통하는 절규가 될 정도로 커졌던 것일까.

“가상”예술의 뮤즈들은, “도취” 속에서 진리를 말하는 예술 앞에서는 창백해졌다. 온갖 경계와 절도를 지닌 개인은 여기서 디오니소스적 상태의 자기 망각 속에서 몰락해 갔다. 아폴론적 규준들을 망각되었다. ‘과도함’이 진리로서 모습을 드러냈고, 고통에서 탄생한 환희라는 모순이 자연의 가슴으로부터 자신을 알렸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관통해 간 곳에서는 어디서나 아폴론적인 것이 지양되고 파괴되었다.

그러나 비아폴론적인 특성의 첫 번째 공격을 버텨낸 곳에서는 델포이 신전의 주인인 아폴론의 명성과 위엄이 예전보다 더 견고하고 위압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계속되는 전쟁에서 ‘도리스 국가’와 ‘도리스 예술’은 아폴론적인 거의 진영이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거인적이고 야만적인 본질에 끊임없이 저항함으로써 성벽을 둘러싸고 예술, 그토록 전투적이며 준엄한 교육, 그토록 잔인하고 가차 없는 국가 조직이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 4장 p47~48, 부분 발췌 및 요약 -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은 항상 서로 뒤이어 새롭게 태어났고 상호 강화시켜 나갔다. 그리고 이 방식으로 그리스의 본질을 지배하였다.

먼저 1) 거인들의 투쟁이 있었다. 그리고 2) 잔혹한 민족 철학을 지녔던 청동기 시대, 그 시대의 아폴론적 아름다움의 충동의 지배를 받고 호메로스가 세계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다시 3)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물결이 돌연 밀려와서 ‘소박한 장엄’을 삼켰다. 그러자 이 새로운 힘에 대항하여 4) 아폴론적인 것은 도리스 예술과 세계관의 굳건한 위엄으로 스스로를 고양시켰다.


이러한 방식으로 고대 그리스 역사는 적대적인 두 원리의 투쟁 속에서 ‘네 가지 커다란 예술 단계’로 분리되었다. 니체는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의문을 제시한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도달한 시기인 ‘도리스 예술의 시기’가 ‘예술 충동의 정점과 의도’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이러한 생성과 활동의 “마지막 계획”에 관해 계속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리스 예술의 숭고함이 예술 충동의 정점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숭고하고 높이 찬양받은 ‘아티케 비극’과 ‘연극적 디오니소스 주신 찬가’라는 예술 작품이 우리의 시야에 들어온다. 그것은 ‘두 충동의 공동 목표’인데, 앞서 진행된 오랜 싸움 끝에 이루어진 ‘두 충동의 비밀스러운 결혼’은 자신의 자식인 이 작품 속에서 예찬되었다. 그것은 ‘안티고네’이면서 ‘카산드라’다.


비밀스러운 결혼을 통하여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두 충동은 하나로 만나게 된 것이다. 카산드라는 멸망한 트로이의 왕녀다. 카산드라의 미모에 아폴론이 고백하였으나 카산드라는 인간과 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했다. 아폴론은 화가 나서 카산드라에게 주었던 예언하는 능력을 다시 아무도 이 예언을 믿지 않는 저주로 바꾸어 버렸다. 카산드라의 예언은 모두 맞았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카산드라의 예언을 믿지 않았다. 카산드라는 주로 광인으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여인이었나 보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의 딸이지만 가족사의 비극의 정점에 휘말리고 그 자신의 의지로 죽는다. 살았다는 전승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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