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음악의 정신으로부터 비극의 탄생 4장
삶의 두 절반, 즉 ‘깨어 있는 반쪽’과 ‘꿈꾸는 반쪽’ 중에서 우리는 전자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선호하고, 더 중요하고, 더 가치가 있고, 더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 요컨대 진정으로 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겉보기엔 온통 ‘모순’처럼 보일지라도(이 본질의 현상이 바로 우리다) 우리 본질의 저 비밀스러운 근거를 위해서 ‘꿈에 대한 정반대의 가치평가’를 주장하고 싶다.
내가 자연 속에서 저 ‘강력한 예술 충동’을 감지하고 이 충동들 속에서 ‘가상’에 대한, 다시 말해 ‘가상을 통한 구원’에 대한 열정적인 ‘갈망’을 인식하면 할수록, 나는 점점 더 다음과 같은 ‘형이상학적 가정’을 하지 않을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
‘진정으로 존재하는 자, 근원적인 일자一者’는 ‘영원히 고통받는 자’와 ‘모순에 가득 차 있는 자’로서 ‘자신의 지속적인 구원’을 위하여 “동시에” ‘매혹적인 환영’과 ‘즐거운 가상’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그 속에 갇혀 있고, 우리가 그것으로 이루어져 있는 그 ‘가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진정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 즉 ‘시간과 공간과 인과율’ 속에서 이루어지는 지속적인 생성, 다른 말로 표현하면 “경험적 실재”로 느껴야만 했다.
우리가 한번 우리의 고유한 “실재”를 잠깐 동안 도외시하고 우리의 ‘경험적 실존’을 ‘세계 일반의 실존’처럼 ‘매 순간 만들어진 근원적 일자의 표상’으로 파악하면, 우리는 이제 꿈을 ‘가상의 가상’으로, 가상에 대한 근원적 욕망의 보다 ‘고차원적인 충족’으로 여겨야 한다.
바로 이와 동일한 근거에서 ‘자연의 가장 내면적인 핵심’은 ‘소박한 예술가’ 그리고 “가상의 가상”에 지나지 않는 ‘소박한 예술 작품’에 대해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욕망’을 느낀다.
“진정으로 존재하는 근원적인 ‘일자一者’는 ‘영원히 고통받는 자’와 ‘모순에 가득 차 있는 자’이다. 그 존재는 ‘자신의 지속적인 구원’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매혹적인 환영’과 ‘즐거운 가상’을 통해서이다.”
우리는 이미 가상 속에 있고, 우리는 가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진정으로 존재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과 인과율’ 속에서 이루어지는 지속적인 생성을 “경험적인 실재”로 느낀다.
우리가 ‘세계일반의 실존’에서 비롯되는 “고유한 실재”를 잠깐 밀어 놓고, ‘경험적 실존’을 ‘매 순간 만들어진 근원적 일자의 표상’으로 파악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제 꿈을 ‘가상의 가상’으로 보아야 한다. 즉 가상에 대한 근원적 욕망의 보다 높은 차원인 ‘고차원적인 충족’으로 여겨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근거를 갖고 있는 ‘자연의 가장 내면적인 핵심’은 ‘소박한 예술가’와 “가상의 가상”에 지나지 않는 ‘소박한 예술 작품’에 대해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욕망’을 느낀다.
미친 소년, 절망하는 운반자들, 어찌할 줄 모르고 겁에 질린 사도들의 모습을 담은 하반부는 영원한 근원적 고통, 세계의 유일한 근거를 반영한다. “가상”은 여기서 영원한 모순, 즉 만물의 아버지의 반영이다. 이 가상으로부터 이제 감미로운 향기처럼 환영 같은 새로운 가상 세계가 솟아오른다.
첫 번째 가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 세계에 관해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그것은 가장 순수한 환희와 커다란 눈에서 나오는 고통 없는 관조 속에서 빛을 발하며 떠다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최고의 예술 상징을 통해 저 ‘아폴론적 아름다움의 세계’와 그 ‘토대’, 즉 실레노스의 무서운 지혜를 눈앞에 보게 되고, 직관을 통하여 그들의 상호 필연성을 파악하게 된다.
그러나 아폴론은 우리에게 다시금 ‘개별화의 원리’의 신격화로 나타난다. 이 개별화의 원리 속에서만 근원적 일자의 영원히 성취된 목표, 즉 가상을 통한 자신의 구원이 실행된다. 그는 ‘숭고한 몸짓’으로 고통의 세계 전체가 얼마나 필요한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또 이 세계로 인해 개개인은 자신을 구원할 환영을 어쩔 수 없이 만들어 내고 이 환영의 관조에 침잠하여 바다 한가운데서 흔들거리는 조각배 위에 고요히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별화된 신격화’를 만약 명령하고 규정을 지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면, 그것은 오로지 하나의 법칙에 의해서이다. “개인 즉 개체의 경계를 준수할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적 의미의 절도節度다.
윤리적 신인 아폴론은 자신의 신도들에게 절도를 요구하고, 이 절도를 준수할 수 있기 위하여 ‘자기 인식’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의 미학적 필연성 외에도 “너 자신을 알라”와 “너무 지나치지 말라!”라는 요구가 나란히 생겨난다.
영국 사상가 에드먼트 버크(1765~1795)는 1757년 그의 미학 논문 《숭고와 아름다움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에서 아름다움과 숭고에 관해 말했다.
이 논문은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각각 논리적인 범주로 구분하는 최초의 완벽한 철학적인 설명이다. 이 논문은 ‘드니 디드로’와 ‘이마누엘 칸트’로부터 관심을 끌었다.
에드먼트 버크에 의하면 아름다움이란 형식이 잘 되어 미적으로 즐거움을 주는 것(미/쾌)이며, 숭고함이란 우리를 강제하며 파괴하는 능력(고통/불쾌)을 갖고 있다고 하였다. 숭고함이 아름다움을 우선하는 것은 신고전파 시대에서 낭만주의 시대로 변화하게 만들었다. 버크는 미와 숭고함이라는 관념의 기원은 인과 구조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쾌와 불쾌는 절대적인 쾌(미)와 상대적인 쾌(고통)로 나뉜다. 절대적인 쾌는 미/사랑/정열/미로부터 얻는 즐거움은 대상과의 일치감을 나타내므로 사회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이다. 상대적인 쾌는 외경심이나 공포감이 드는 대상에 대하여 안전한 상태에서 그것들을 관조할 수 있으면 이 대상들은 숭고한 것으로 체험된다. 그렇지 않고 물리적 위해가 된다면 고통이 된다. 숭고에 대한 체험은 단순히 거대한 자연이나 거대한 작품을 관조하는 형태도 있지만, 직접 참여하여 고통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숭고를 느끼기도 한다. 요즘의 익스트림Extreme 스포츠는 그에 해당할 것이다. <내용 추가함>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과 형이상학에 의하면 아름다움의 형태적 원인은 사랑에 대한 열정이고, 물질적 원인은 작음, 부드러움, 섬세함 등의 어떤 물체의 성질들에 관한 것이며, 유효한 원인은 우리의 신경을 안정시키는 것이고, 마지막 원인은 신의 섭리이다.
반면에 숭고함의 형태적 원인은 두려움, 특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위한 열정이고, 물질적 원인은 광대함, 무한함, 웅장함 등의 어떤 물체의 성질에 대한 것이며, 유효한 원인은 우리의 신경을 긴장시키는 것이고, 마지막 원인은 사탄을 창조하고 싸우는 신이다. 이것은 존 밀턴의 실낙원에 표현되어 있다. <위키백과 부분 참조>
역으로, 아폴론적 개별화에 반대되는 것은 비非아폴론적 영역에 속한다. 자만과 과도함 그리고 본래 적대적인 악령들로 아폴론 이전 시대인 ‘거인 시대’와 아폴론 이외의 세계인 ‘야만 세계’의 특성은 비非아폴론적 영역에 해당한다.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프로메테우스는 독수리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져야만 했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 정도로 과도한 지혜를 가진 오이디푸스는 범행의 어지러운 소용돌이에 빠져들어야만 했다.
델포이의 신은 그리스의 과거를 이렇게 해석했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영향도 아폴론적 그리스인에게는 ‘거인적’이고, ‘야만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아폴론은 그 자신도 내면적으로는 파멸한 거인들과 영웅들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숨길 수 없었다. 그는 그 이상을 느껴야 했다.
아폴론의 전체 실존은 온갖 아름다움과 절도를 갖추고 있음에도 저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통해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된 고통과 인식의 은폐된 토대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거인적인 것’과 ‘야만적인 것’은 결국 아폴론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필연성”이다.
가상과 절도 위에 세워져 인공제방으로 둘러싸인 아폴론적인 세계 속으로 디오니소스 축제의 황홀한 소리가 더 유혹적인 마법의 멜로디로 흘러들 때, 쾌락과 고통과 인식 속에 드러나는 자연의 과도함이 폐부를 관통하는 절규가 될 정도로 커졌던 것일까.
“가상”예술의 뮤즈들은, “도취” 속에서 진리를 말하는 예술 앞에서는 창백해졌다. 온갖 경계와 절도를 지닌 개인은 여기서 디오니소스적 상태의 자기 망각 속에서 몰락해 갔다. 아폴론적 규준들을 망각되었다. ‘과도함’이 진리로서 모습을 드러냈고, 고통에서 탄생한 환희라는 모순이 자연의 가슴으로부터 자신을 알렸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관통해 간 곳에서는 어디서나 아폴론적인 것이 지양되고 파괴되었다.
그러나 비아폴론적인 특성의 첫 번째 공격을 버텨낸 곳에서는 델포이 신전의 주인인 아폴론의 명성과 위엄이 예전보다 더 견고하고 위압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계속되는 전쟁에서 ‘도리스 국가’와 ‘도리스 예술’은 아폴론적인 거의 진영이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거인적이고 야만적인 본질에 끊임없이 저항함으로써 성벽을 둘러싸고 예술, 그토록 전투적이며 준엄한 교육, 그토록 잔인하고 가차 없는 국가 조직이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 4장 p47~48, 부분 발췌 및 요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