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제3장 p40~44
<아폴론 문화/그리스인의 아폴론적 의식>
열광적 송가를 부르는 ‘디오니소스 숭배자’는 오직 자신과 같은 동류의 사람들에게만 이해된다. 상대적으로 아폴론적 그리스인은 이 광경을 얼마나 놀라서 그를 바라보아야만 했다. 이 놀라움은 디오니소스 숭배자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본래는 자신에게 그렇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는 데서 오는 ‘놀라움’이었다. 자신의 “아폴론적 의식”은 하나의 베일처럼 이 디오니소스 세계를 은폐하고 있을 뿐이라는 “공포의 전율”이 한데 뒤섞일 때 이 ‘놀라움’은 더욱더 증폭된다. - 2장 p39,16~22 -
먼저 이러한 그리스인의 아폴론적 의식을 파악하려면, ‘아폴론적 문화’의 정교한 건축물을 해체하여 그 건축물을 받치던 토대를 보아야만 한다. 고대 그리스 신전의 합각머리 위에 서 있는 올림포스 신들의 장려한 형상을 살펴보면, 올림포스 신들의 행동은 훌륭한 부조에 조각되어 그 건축의 띠를 장식을 하고 있다. 여기에 아폴론이 다른 신들과 나란하게 서 있는 개별적인 신이고, 제 일인자의 지위를 주장하지 않은 채 다른 신들 사이에 서 있다고 할지라도, 이런 수평 관계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파르테논 신전/아테나 신전/3D 복원 영상화면/ 다음백과, 나무위키 *** 다시 살펴보니, 니체가 3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신전은 아폴론 신전이 아니라 '파르테논 신전'과 더 적합하여, 이 부분을 '사진 교체'하여 정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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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아폴론 속에 구체화된 그 충동이야말로 올림포스 전체 세계 전체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폴론을 올림포스 세계의 아버지로 여겨도 된다. 니체가 아폴론을 ‘올림포스 세계를 탄생시킨 존재’로 보는 이유는 아폴론이 바로 ‘미적 충동’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올림포스 신들의 사회를 ‘훌륭한 사회’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내 올림포스 사회를 낳은 “거대한 욕구”는 무엇이었을까? 에 대하여 의문을 품는다.
니체는 다른 종교를 품고 올림포스를 바라본다면 그들은 곧 불쾌해지고 실망하여 돌아설 것이라고 말한다. 올림포스 신들의 사회는 그 무엇에서도 금욕, 정신성, 의무를 상기시키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오직 거만하고 의기양양한 존재만이 우리에게 말한다. 이 존재 안에서 존립하는 모든 것은 그것의 선악에 상관없이 “신격화”되어 있다.
만약 이 올림포스 사회를 관찰하는 이가 있다면, 그 관찰자는 이 “환상적인 삶의 충만”에 놀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도대체 몸 안에 어떤 마법의 술이 있기에 이 거만한 자들이 어느 쪽을 쳐다보아도, 그들 존재의 이상적 형상인 헬레나가 그들에게 미소로 화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삶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인가?” 니체는 이 관찰자에게 등을 돌리지 말고 “그리스인의 명랑성”과 그리스인의 “민족적 지혜”에 대해 더 들으라고 말한다.
델포이 아폴론 신전/위키백과
<실레노스의 지혜와 올림포스 신들의 삶으로의 유혹 그리고 그리스인들의 실존 자각>
*반인반수 종족의 사티로스족의 실레노스. 하지만 사티로스는 실레노스와 동일한 표현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젊게 등장하면 사티로스로 부르고, 나이 든 노인 형태로 등장하면 실레노스라고 부른다. 여기서 '실레노스의 지혜'는 나이 든 현자 실레노스를 가리킨다.
‘미다스 왕’은 오랫동안 디오니소스의 시종인 현자 실레노스를 찾았다. 마침내 실레노스를 찾았을 때, 왕은 “그에게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 가장 훌륭한 것은 무엇이냐?”라고 물었다. 왕의 강요에 실레노스는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가련한 하루살이여, 우연의 자식이여, 고통의 자식이여, 왜 하필 듣지 않는 것이 그대에게 가장 복될 일을 나에게 말하라고 강요하는가? 최상의 것은 그대가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것이네. 태어나지 않은 것, 존재하지 않는 것, 무無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네. 그러나 그대에게 차선인 것은 지금 바로 죽는 것이네”
그렇다면 올림포스 신들은 이 ‘실레노스의 지혜’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니체는 "그것은 고문받는 순교자의 ‘황홀한 환상’이 그의 고통을 대하는 태도"와 같다고 말한다.
니체는 올림포스 신들이 실레노스의 지혜에 대하여, 삶을 계속 살아가라고 유혹하는 것으로 맞섰다고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순교자의 황홀한 환상”은 바로 그리스인과 올림포스 신들을 의미한다. 순교자는 그리스인이고, 황홀한 환상은 올림포스 신에 대입된다. 이로써 올림포스는 자신의 뿌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먼저 그리스인은 실존의 공포와 경악을 알고 있었으며 느꼈다. 그리스인은 살 수 있기 위하여 그 공포와 경악 앞에 올림포스 신이라는 꿈의 산물을 세워야 했다.
그리스인들의 실존 자각은 바로 이러한 사례들이다.
“자연의 거대한 힘에 대한 저 엄청난 불신, 모든 인식 위에 무자비하게 군림하는 저 운명의 여신 모이라, 인간의 위대한 친구 프로메테우스를 공격하는 저 독수리, 현명한 오이디푸스의 저 무서운 운명, 오레스테스로 하여금 어머니를 살해하도록 강요한 아트레우스 일가에 대한 저 생식의 저주, 우울한 에트루리아 인들이 파멸에 이르도록 한 저 숲의 신의 철학 전체와 그들의 신화적 사례들”
이 모든 시련은 올림포스 신들의 저 “예술가적 중간 세계”를 통해 그리스인에 의해서 끊임없이 새롭게 극복되고, 은폐되고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리스인들은 무엇 때문에 올림포스 신들을 창조해야만 했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살아야 하는 필연성”에 의해서이다. 그리스인들을 “살려고” 올림포스 신들을 창조한 것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경악을 했다. 그렇구나! 살아야 하는 것만큼 더 절실한 것은 없었던 것이다. 니체는 그리스인들이 신들을 창조하는 과정을 우리가 머릿속에서 그려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과정은 이러하다. 원래부터 있던 거대한 공포 즉 신의 질서가 저 “아폴론적 미의 충동”을 통하여 서서히 변화를 겪었다. 그 완만한 변화는 “올림포스의 환희의 질서”로 점진적으로 발전되었다. 마치 장미꽃이 가시덤불에서 피어나는 것처럼.
‘실존’이 보다 높은 영광에 둘러싸여 그리스 신들 속에 표현되어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민감하고 그렇게 격렬하게 탐하고 유일하게 고뇌하는 능력을 가진 그 민족이 실존을 달리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겠는가!
이 문장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실존이 ‘보다 높은 영광’에 둘러 싸여 꽁꽁 숨겨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 신들 속에 실존이 표현되었다는 의미다. 그리스인들에게 신들의 실존이 보인 것이다. 신들의 실존이 그대로 드러났기에, 민감하고 격렬하게 탐하고 유일하게 고뇌하는 능력을 가진 그리스인들이 실존을 견뎌낼 수 있었다는 것.
그리스 신들의 실존은 그리스인들에게 계속 살아가도록 유혹한다. ‘실존의 보완과 완성으로서의 예술’을 삶으로 불러들이는 ‘충동’이다. 또한 이 충동이 올림포스의 세계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리스적 의지>
니체는 바로 이 세계 안에서 “그리스적 의지”는 ‘아름답게 변용시키는 거울’을 앞에 두고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의 의미는, 신들의 실존세계와 인간의 실존세계는 바로 ‘중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들의 세계는 바로 ‘거울에 비친’ 그리스적 의지이다.
신들은 스스로 인간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이간의 삶을 정당화한다. 이것은 충분히 ‘변신론’이다.
‘변신론辯神論’은 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이론을 가리킨다. 이 이론은 신이 전능하면서도 선하다고 한다면 어째서 이 세상에 고통이 존재하는가를 묻는 물음에 대한 다양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신에게 고통을 막을 수 있는 능력(전능)과 의지(선함)가 있다고 한다면 그럼에도 왜 신은 고통을 허용하는가의 문제를 설명하려는 것.
호멜로스의 일리아스Ilias/다음백과
<실레노스의 지혜를 뒤집다>
신들의 밝은 햇살 아래에서 ‘실존’은 그 자체로 그리스인들에게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호메로스적 인간의 본래적 고통’은 ‘삶으로부터의 분리와 관계’가 있다. 여기서 니체는 ‘실레노스의 지혜’를 뒤집어 그리스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들에게 가장 나쁜 것은 죽는 것이고, 그다음으로 나쁜 것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탄에 한번 울려 퍼지면, 그것은 단명한 아킬레우스에 관해서도, 나뭇잎과 같은 인간의 변화무상에 관해서도, 영웅시대의 종말에 관해서도 다시 울릴 것이다. 설령 날품팔이로서라도 더 살아남기를 동경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영웅에게도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폴론적 단계에서 “의지”는 이러한 “실존”을 격렬하게 갈망하고, 호메로스적 인간은 이러한 ‘실존과 하나 됨’을 느껴서 슬퍼하고 탄식하는 “비탄” 자체가 자신의 찬가가 된다. 호메로스적 인간은 현세를 동경한다. 생의 의지가 만렙이다.
<그리스인의 '소박성'>
근대인들이 그토록 동경하던 “조화”, 즉 인간과 자연의 통일에 대해, 실러는 ‘소박하다naiv(자연 그대로의, 본래적인, 단순한, 가식 없는, 소박한, 천진난만한, 악의 없는, 순진한 )’라는 예술 용어를 관철시켰다.
이 용어의 의미에 대해 니체는 이렇게 반론한다.
우리 문화의 모든 입구, 즉 인류의 낙원에서 마주 칠 수밖에 없는 몹시 단순하고, 스스로 발생하는 불가피한 상태가 결코 아니다. 루소의 에밀을 예술가로 생각하려 했고, 또 호메로스에게서 자연의 품 안에서 교육받은 예술가 ‘에밀’을 발견했다고 ‘잘못 생각한 시대만’이 이런 것을 믿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실러’의 소박함의 의미는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실러의 소박함은 ‘목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루소의 『에밀』의 교육관 역시 목가적이었다. 니체가 볼 때, 실러도 루소도 ‘자연 상태’그대로에 대한 이해가 약했다. 니체는 그의 저서 곳곳에서 루소를 비판했다. 나약한 민주주의를 표방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자연 상태 그 자체는 루소가 생각한 방식 또는 인간이 자연을 감상하는 그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이어가고 있다.
예술에서 “소박한 것”과 마주치게 되는 곳에서 우리는 ‘아폴론적 문화’의 ‘최고의 작용’을 인식해야만 한다. 아폴론적 문화는 항상 먼저 ‘거인 왕국’을 무너뜨리고 ‘괴물’을 죽여야 하고, 강력한 ‘광기의 기만’과 ‘즐거운 환영’들을 통해 세계관의 ‘무서운 깊이’와 ‘민감한 고통의 능력’을 ‘이겨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소박한 것’, 즉 ‘가상의 아름다움’에 저처럼 아름답게 얽혀 있는 상태는 얼마나 “성취”하기 ‘힘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개별적인 꿈의 예술가’가 ‘민족과 자연의 꿈의 능력과 맺는 관계’와 마찬가지로 ‘한 개인으로서 저 아폴론적 민족 문화와 관계를 맺는 호메로스’는 얼마나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숭고’한가! 호메로스의 “소박성”은 오로지 ‘아폴론적 환영’에 대한 ‘완전한 승리로 파악’되어야만 한다.
이 말은 어떤 의미인가? 아폴론적 문화는 항상 ‘거인 왕국’을 무너뜨리고 ‘괴물’을 죽여야 한다는 의미는 ‘고난’이자 넘어서야 할 ‘그 자신의 산’을 우선 의미할 것이다. 일종의 '테스트test'이면서 '퀘스트quest'이다. 그리고 ‘강력한 광기의 기만’은 ‘그 자신의 깊은 심연’ 일 것이며, ‘즐거운 환영’은 그 자신의 민감한 고통의 능력이 감지한 또 하나의 가상일 것이다. 민감한 그 자신이 보거나 만들어 낸 세계이다. 즉 창작의 고통을 이기고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술에 소박성과 가상의 아름다움이 아름답게 얽혀 있는 상태는 성취하기 어려운 단계이다. 그것은 고통을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니체는 ‘호메로스의 성취’는 숭고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호메로스의 ‘소박성’은 오로지 ‘아폴론적 환영’에 대한 ‘완전한 승리로 파악’되어야만 한다.”
첨가>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여기서 니체가 말한 "호메로스의 소박성"은 정말 소박하다라는 의미로도 다가온다. 어찌보면 이때까지의 그리스 세계는 반쪽의 세계였을 수도 있다. 민감함과 심연에서 도피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민감함과 심연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에는 정말 필요한 것들이다. 그런데 호메로스적 그리스인에게는 이것이 억압된 또는 잠복된 상태로만 있다. 있지만 드러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아직 발견되지 못한 상태다.
<아폴론적 환영>
아폴론적 환영은 자연이 자신의 의도들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주 사용하는 것과 같은 환영이다. 진정한 목표는 ‘병적인 환상’에 의해 가려진다. 우리는 이 환상을 잡으려고 손을 뻗고, 자연은 우리를 속임으로써 진정한 목표를 성취한다.
예컨대 우리가 어떤 것을 하려고 그것에 대해 꿈을 꾸거나 목표를 정하거나 할 때, 때로는 ‘이것이 진짜로 내가 원하는 것인가?’라고 묻고 싶을 때가 있다. 그때는 그러했지만 지나 보면 아닐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퀘스트를 하나씩 깨듯이 어떤 것들은 또 실현되어 있기도 하다. 이쪽을 원했는데 저쪽이 충족되었다고나 할까. 어쩌면 자연은 자연 그 자신의 의도들을 성취하려고 인간을 ‘병적인 환상’에 사로잡히게 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갈망이나 염원’ 같은 것을 만들어서 인간을 그것에 사로잡히게 만들면, 인간은 그것을 얻기 위하여 그쪽으로 매진한다. 그러면 인간은 그 기간의 고통을 감내한다. 그리고 이내 어느 순간 그 자신이 생각하지도 못한 그 자신이 서 있거나 전혀 상상하지 못한 예술이 창작되거나 하는 순간이 온다. 자연이 우리를 개고생 시키는 이유는 그것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의 목표는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호메로스의 소박성’은 바로 그러한 최초의 사례일 것이다.
<그리스인의 거울 영상>
그리스인들 속에서 “의지”는 두 가지 방식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고자 했다. 하나는 “수호신"이고, 또 하나는 '예술 세계의 미화'이다. 자신을 찬양하기 위해서는 '의지의 피조물들'도 스스로를 찬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느껴야만 했다. 그들은 보다 높은 영역에서 재회해야 했지만, 이렇게 완성된 '관조의 세계'는 명령이나 혹은 비난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이것은 아름다움의 영역이었고, 그 속에서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거울 영상'인 올림포스적인 것을 보았다.
그리스의 “의지”는 이 아름다운 거울을 가지고 ‘예술가적 재능과 상관관계’에 있는 ‘고통을 받는 재능’, 즉 ‘민감함’과 그리고 고통의 지혜에 이르는 재능, 즉 ‘심연’에 맞서 싸웠다. 민감함과 심연은 신체적으로 그 자체로 고통이며 강요이기도 하다. 민감함과 심연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에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실존하는 인간이 그 자신의 생을 살아가는 어떤 순간에서는 극복되어야 할 것이기도 하다.
첨가> 그리스인들이 자연과 맞서며 살아가는 그 순간에는 그 자신의 민감함과 심연의 괴물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 더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고대의 자연은 너무나 강력했고 살벌했으며 공포스러웠을 것이다. 인간이 자연을 보는 눈이 현재와는 정말 달랐을 것이다. 고대인에게 자연은 공포이면서도 동시에 숭배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리스인은 상대적으로 인간적인 신들을 창조했다. 신들의 실존 방식은 무겁지 않았다. 인간의 실존은 무거웠다. 올림포스 신들은 인간처럼 세속적이었다. 너무나 인간적인 신들이었다. 그리스인은 이런 신들을 두려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신들을 경배하였다. 그들이 신들을 경배한 이유는 그들도 신들처럼 되고 싶었고 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 신들은 명랑하고 다혈질적이다. 진지하지 않다. 고대인은 그런 신들의 실존 방식을 그 자신들의 삶에 투사하였을 것이다. 호메르스적 그리스인은 이 투사된 세계를 갈망하였을 것이다. 하여 호메르스적 그리스인은 생을 갈망하였다. 고통스러우면 한탄했으며 일찍죽으면 슬퍼하였고, 이러한 것들 자체가 그들에게는 '찬가'가 되었다.
호메로스 약 기원전 800년 ~ 기원전 750년경/ 나무위키
<호메르스의 소박성 / 그리고 단순성>
3장은 아폴론적 예술가인 호메로스에 대한 찬가라고 생각된다. 올림포스 신들의 삶에 강한 동경을 가진 호메로스적 그리스인들은, 실존에 대해 강한 동경 역시 가지고 있다.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인이 아폴론적 환영을 가지고 사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아직 그 이면을 발견한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해서 “소박한 호메로스”에 대해 나는 “소박한”이 지닌 의미를 더 풀어보고자 한다. 니체는 그의 여러 저서에서 “단순함”에 대해서 자주 언급한다. 아마도 니체는 여기서의 ‘소박함’을 다른 책에서는 ‘단순함’으로 표기하는 것일 거다. 고대 사회는 그렇게 나이브란 사회가 아니었다. 자연환경 역시 호락호락한 시대가 아니었다. 자연은 고대인에게 거대한 공포이자 두려움이며 숭배의 대상이었다. "살아야 하는" 호메로스적 그리스인에게 올림포스는 판타지 그 자체였다. 그 판타지를 그 자신들의 삶에 투영시킨 것이 바로 호메로스적 세계관이다.
아마도 실러의 '소박함nive'의 의미를 니체가 사용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소박함’은 단순함으로 바꾸어 보면, 영어로는 simple/humble/modest/austere가 있다. 그리고 독일어로는 /Simplex 일방향/ einfältig 단순, 간결, 질박, 무의미/ Einfache 간단한 것, 단순한 것이 있다. 독일어는 잘 모르겠고 영어로 의미를 추론해 본다. 어쨌든 ‘나이브’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먼저 내가 생각하는 ‘단순성’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면 이러하다.
“소박하다”의 의미에는 ‘심플-단순한’, ‘험블_소박한’, ‘모드스트_수수한’, ‘아스티어_엄격한_검소한’의 뜻을 가지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단순성’은 이 4가지의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 전체를 포괄할만한 의미는 프랑스어 “단순성simplicité”이다.
니체가 《선악의 저편》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들 ‘단순함, 엄격함’은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라고 생각한다. 결국 귀족적인 것은 '심플한 것'이며 단순성에 있는 것이다. 이 단순함은 무엇보다도 ‘엄격함’과 관련된다. 단순함을 표현하려면 그것은 엄격함을 지켜야 한다. 이 엄격함은 순서와 질서이며 규칙이며 곧 진지함이다. 그리고 엄격함은 숙련된 것이다. 숙련된 것은 섬세함이 살아있는 것이다. 그 섬세함은 민감함에 의해 포착된다. 이 과정을 성취하기는 쉽지 않다. 그 과정에 고통이 따른다. 귀족적인 것은 단순하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끝단처리와 마감처리가 깔끔하다. 결국 마감이 깔끔해야 단순함이 드러난다.
어쩌면 호메로스적 세계관의 모순은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 그들 자신의 세계에 '민감함과 진지함'이 파고들어 있는데도 "그들은 환영에 침잠하여 바다 한가운데서 흔들거리는 조각배 위에 고요히 앉아" 있기만 했던 것일지도. 다른 이면을 발견하지 않은 것이다.
<호메로스의 편집된 세계>
이러한 전체에서 보자면 ‘호메로스의 작품들은 편집된 세계관’으로 알려져 있다. 그 자신이 부각하고자 하는 것만을 부각했다. 그 외의 것은 모두 소거하였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세계관을 크게 해치지 않고 상상력을 가동하며 연결시킨다. 이러한 호메로스의 편집방식은 인상적인 총체성의 방식이다. 어디로든 이어낼 수 있고, 어디든 잘라낼 수 있다. 나는 호메로스의 소박성을 호메로스의 편집기법이라고 여기며, 이것은 어떠한 창작에도 적용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단, 그것은 성취하기가 쉽지 않다. 니체가 그리스 신들과 그리스인의 의지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아폴론적 환영이 적용된 가상의 드러남이다.
그리스인의 거울 영상은 바로 요즘 시대의 영화처럼 세상을 보는 하나의 창이었다. 상상은 언제나 단편 영화이며, 그 단편 영화는 파편적이다. 부분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곧 편집된 형태로 이어 붙인 형태다. 호메르스적인 영상이다.
그리스인이 그 가상을 창조한 이유는 “살기 위해서”였다. 실존의 고통을 극복하며 살아내야 했고, 올림포스 신들의 실존을 통해 그리스인은 현세를 동경하였기 때문이다. 그들 삶의 의미는 여기 차안의 세계, 이편의 세계에 있다. 거울 세계의 신들의 세계는 그리스인들에게 살아보고픈 욕망을 부추기는 “그리스적 의지” 그 자체였다.
니체는 이 관찰자에게 등을 돌리지 말고 “그리스인의 명랑성”과 그리스인의 “민족적 지혜”에 대해 더 들으라고 말한다.
호메르스적 그리스인은 '명랑'하다. 그 원인은 '아폴론적 환영'에 있다. '실레노스의 지혜'를 뒤집어 오히려 현세를 더 동경하는 것도 '아폴론적 환영'에 있다. 즉 '미'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아폴론적 아름다움을 느낄 때, 대상과 합일된다. 그리고 또 '미'는 '쾌'상태이며, 즐거움을 준다. 여기서 그리스인의 '명랑성' 나타난다. 그리스인의 "민족적 지혜"는 '미'와 '실존'에 있었다.
이에 대한 더 세부적인 전개는 4장에 있다.
터키 안탈리아 '아폴론 신전/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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