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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니소스적 광기는 "자기를 잊어버린 상태"를 의미한다

비극의 탄생/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2장

by 아란도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제2장 p35~39






아폴론적인 힘과 디오니소스적인 이 두 힘은 자연 자체로부터 인간(예술가)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솟아 나오는 힘이다. 자연의 예술 충동들은 이 힘들 속에서 처음으로, 직접적으로 충족된다.

세 가지 자연 예술 충동의 힘이 있다.


첫 번째로는 ‘꿈의 형상 세계’이다. 이 세계의 완전성은 개인의 지적 수준이나 예술가적 교양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세계이다. 여기에 관한 니체의 설명은 책 본문 1장에 드러나 있다. 나는 ‘연재 10화’에 이러한 내용을 올렸다.


두 번째로는 ‘도취적 현실’이다. 이 현실은 도취적 현실이다. 그러므로 이 도취적 현실은 ‘비현실적인 세계’이다. 이 도취적 현실은 개인을 존중하지 않으며, 개인을 파괴하면서 신비주의적인 일체감을 통해 개인을 구제하려고 한다. 이 말은 무엇인가? 책 본문(p39)의 “자기 포기의 높이에 도달해 있어야 한다”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개인을 존중하지 않고 파괴한다는 의미는 “자기 포기”와 관계된다. 자기 포기는 곧 “자기를 잊어버리는”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이 자기를 잊어버릴 때는 어떤 때인가? 그것은 “몰입” 또는 무엇과 “합일”된 상태에서만 그렇다.





플래시 몹 낭독회 1년 만에 '제라의 뜰'에서 모이다. 어쩌면 그 시간은 디오니소스적 시간의 또 하나의 변형일 것이며, 우리가 만든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여기에 니체가 표현한 “자기를 잊어버린 상태, 합일된 상태”를 표현한 단락을 옮기면 이러하다.


“이제 노예는 자유민이다. 이제 곤궁, 자의 혹은 ‘파렴치한 유행’이 인간들 사이에 심어놓은 완고하고 적대적인 모든 구분들이 부서진다. 이제 세계의 조화라는 복음에서 각자는 자신의 이웃과 결합되고, 화해하고, 융해되어 있음을 느낄 뿐만 아니라, 마치 마야의 베일이 갈가리 찢어져 신비로운 ‘근원적 일자一者’ 앞에서 조각조각 펄럭이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이웃과 하나가 됨을 느낄 것이다. 인간은 노래하고 춤추면서 보다 높은 공동체의 일원임을 표현한다. 그는 걷는 법과 말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춤추며 허공으로 날아오르려 한다. 그가 마법에 걸려 있음이 그의 몸짓에 나타난다. 이제 짐승이 말을 하고 대지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것처럼, 그로부터도 초자연적인 것이 울려 퍼진다. 그는 스스로를 신으로 느끼며, 마치 꿈속에서 신들이 소요하는 것을 본 것처럼 그 자신도 황홀해지고 고양되어 돌아다닌다. 인간은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다. 그는 예술작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근원적 일자의 최고의 환희를 위하여 전체 자연의 예술적 힘은 여기 도취의 소나기 아래서 스스로 나타난다. 여기서 가장 고귀한 점토가 가장 값진 대리석, 즉 인간이 반죽되고 , 다듬어진다. 디오니소스적 세계 예술가의 끌 소리에 맞춰 엘레우시스의 비밀 종교의식의 외침이 울려 퍼진다. 수백만의 사람들이여, 그대들은 무릎을 꿇는가? 세계여, 너는 창조주를 예감하는가?” - 1장 p34~35 -



“그것이 바로 고통이 쾌락을 불러일으키고 환희가 가슴으로부터 고통에 가득 찬 소리를 자아내는 현상이다. 최고의 기쁨으로부터 경악의 외침이나 혹은 보상할 수 없는 상실을 갈망하는 탄식이 울려 나온다. 마치 자연이 개체들로 분할되는 것을 후회하는 것처럼, 저 그리스의 축제에서는 또한 자연의 감상적인 특성이 솟아 나온다. 그처럼 이중의 기분을 지닌 열광자의 노래와 몸짓 언어가 호메로스적인 그리스 세계에는 새로운 것이었고 전대미문의 것이었다. 디오니소스적 음악은 특히 그들에게 공포와 전율을 불러일으켰다.” - 2장 p38 -



"디오니소스적 주신가에서 인간은 자신이 가진 모든 상징적 능력을 최고로 고양시키도록 자극을 받는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 마야의 베일을 파괴하고 종족의, 즉 자연의 수호신으로서 ‘하나로 존재한다는 느낌’이 표현되기 위하여 밀려 나온다. 이제 자연의 본질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새로운 상징의 세계가 필요하다. 우선 입, 얼굴, 말의 상징적 표현뿐만 아니라 몸의 모든 부분을 율동적으로 움직이는 춤의 몸짓까지도. 그다음에는 다른 상징적 힘들, 즉 리듬과 강약과 화음을 통한 음악의 상징적 힘들이 갑자기 격렬하게 솟아오른다. 모든 상징적 힘들의 이러한 총체적 발산을 파악하려면, 인간은 이미 저 힘들 속에서 상징적으로 스스로를 표현하고자 하는 ‘자기 포기의 높이에 도달해 있어야 한다.’ 열광적 송가를 부르는 디오니소스 숭배자는 오직 자신과 같은 동류의 사람들에게만 이해된다. 아폴론적 그리스인은 얼마나 놀라서 그를 바라보아야만 했던가! ”





'제라의 뜰' 모닥불









세 번째로는, 바로 ‘아폴론적 꿈의 예술가’ 이거나 혹은 ‘디오니소스적 도취’의 예술가이다. 자연의 이러한 ‘직접적 예술 상태’에 대하여 모든 예술가는 “모방자”다. 예술가는 디오니소스적 도취와 신비주의적 자기 포기의 상태에서 열광하는 합창단으로부터 동떨어져 홀로 쓰러진다. 이내 아폴론적 꿈의 영향을 통해 자신의 독특한 상태, 즉 세계의 가장 내면적인 근거와 하나가 된 자신의 상태가 이제 비유적인 꿈의 형상 속에서 그에게 나타난다.


이러한 일반적인 전제조건과 대조에 따라 우리는 이제 그리스인들에게 다가가, 저 ‘자연의 예술 충동들’이 ‘어느 정도’ 그리고 ‘어떤 수준’까지 그들에게서 전개되었는지를 인식하여야 한다. 니체는 여기에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인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 글의 목표의식이자 방향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 방향성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 예술가’가 조각한 근원적 형상, 즉 “원형原形과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에 따르면 “자연의 모방”을 더 깊이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인들의 단호하고 확실한 그들 눈의 조형 능력과 그들의 밝고 솔직한 색채 감각을 생각한다면, 그리스인들의 꿈에서도 선과 윤곽, 색채와 배열의 논리적 인과성, 즉 최고의 부조와 유사한 장면의 연속성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인과성과 장면 연속의 완전함에 비추어 꿈꾸는 그리스인들을 ‘복수의 호메로스’라 부르고, 호메로스를 ‘한 명의 그리스인’으로 부를 만도 하다. 여기서 복수의 호메로스는 “다수의 또는 여러 명”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 말인즉슨 서로 호환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복수의 호메로스’와 ‘한 명의 그리스인’은 결국 같은 것이며,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 명의 그리스인이 공동체의 집단 무의식에 접속하면 이미 하나가 되기 때문이며, 이러한 예술적 체험은 개별적 한 사람으로 다시 분화되어 예술로 표현되어 나타난다.










자장과 모닥불 그리고 이야기, 하늘에는 별이 총총 빛났고, 어둠은 우리만의 공간에 장막을 쳐 주었다. 그때 와인은 필수다.





디오니소스적 그리스인과 디오니소스적 야만인을 가르는 기준에서, 엄청난 심연이 발견된다.

로마에서 바빌론에 이르는 고대 세계의 모든 구석구석에서 우리는 디오니소스 축제의 실존을 증명할 수 있다. 이 축제의 전형과 그리스인 축제의 전형의 관계는 기껏해야 숫염소에서 이름과 속성을 부여받은 수염 난 ‘사티로스’와 디오니소스의 관계와 같다.


디오니소스 축제가 열리는 거의 모든 곳에서 일어난 사건적 핵심은 바로 “과도한 성적 방종”이었다. 이 방종의 물결은 범람하여 ‘모든 가족 제도’와 ‘신성한 법규’를 휩쓸고 지나갔다. 바로 자연의 가장 야만적인 야수들이 풀려나서 “음욕과 잔인”의 저 ‘역겨운 혼합’에까지 이르렀다. 니체는 이 “혼합”을 진정한 “마녀의 음료”로 본다.


디오니소스 축제의 열정과 격정을 품은 풍문은 모든 육로와 해로를 통하여 그리스인들에게 밀려왔다. 당당하게 우뚝 서 있는 아폴론의 형상은 그리스인들을 오랫동안 완전히 보호하고 보장했던 것처럼 보인다. 아폴론이 메두사의 머리를 내세워 대항했던 것 가운데, 상을 찌푸린 꼴사나운 디오니소스적 힘이 ‘가장 위험한 힘’이었다. 위엄 있게 거부하는 아폴론의 태도를 영원히 표방하는 예술이 바로 “도리스 예술”이다.

마침내 그리스적인 것의 가장 깊은 뿌리로부터 “유사한 충동”이 뚫고 나오자, 이 저항은 의심스러워졌다. 심지어 더 이상 거부는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이제 불가사의한 신의 작용은 올바른 시기에 “화해를 체결”함으로써, 거대한 힘을 지닌 상대방으로부터 파괴적 무기를 빼앗는 일에 국한한다. 이 “화해”는 그리스 제식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계기다. 근본적인 변화는, 엄격하게 지켜야 하는 경계선을 분명하게 긋고, 주기적으로 명예의 선물을 보낸 ‘두 적수의 화해’였다.


둘을 갈라놓은 심연은 근본적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저 평화협정의 압력을 받고 디오니소스적 힘이 어떻게 현현하는가를 바라본다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인들의 디오니소스적인 광란의 축제에서 세계 구원의 축제와 변용의 날이 지니는 의미는 바로 “합일”이다. 그처럼 “이중의 기분”을 지닌 열광자의 노래와 몸짓 언어가 호메로스적인 그리스 세계에는 새로운 것이었고, 전대미문의 것이었다.

니체의 이러한 전개는 그의 문장 “저 바빌로니아의 사카이엔족의 인간이 호랑이나 원숭이로 타락해 버리는 것과 비교하여 인식하게 한다”와 대조된다. 즉 디오니소스적인 야만성은 아폴론적 그리스인을 만나서 합일된 결과 ‘디오니소스적 그리스인을 탄생시켰다. 반면 바빌로니아 사카이엔족은 호랑이나 원숭이로 타락해 버렸다. 아마도 거기서는 디오니소스 축제의 본질이 변질되었을까? 어쩌면 우상숭배나 토템신앙이 되었을까? 그 부분은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여기까지만 쓴다.










다음날 봄볕같은 햇살을 만끽하며 카모마일 차를 마시고..., 앞산과 마을을 바라보며 우리는 관객이 되었다. 디오니소스적 무대의 변형은 이미 우리 삶 안에 있었다.




“디오니소스적 그리스인과 디오니소스적 야만인을 가르는 엄청난 심연” 이 문장은 조금 해석하기가 난해했다. 반면 뒤의 문장들을 읽어나가면서, ‘디오니소스적 그리스인’이 가리키는 의미가 “아폴론적 + 디오니소스적 = 디오니소스적 그리스인”이라고 생각되었다. 니체는 디오니소스 축제의 광기(음욕과 잔인)는 이 두 가지가 혼합된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혼합을 ‘마녀의 음료’로 부른다. 물론 상징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이 혼합액이 그리스로 흘러와 그리스인들이 마신 것이라고 비유해 볼 수 있다. 마침내 아폴론적 그리스인들은 디오니소스적 광기와 혼합되었다.


“그 광란의 축제에서 자연은 비로소 자신의 예술가적 환희에 도달하고, 그 축제에서 ‘개별화의 원리’의 파열이 ‘예술가적 현상’이 되었다. 육욕과 잔인함으로 이루어진 저 혐오스러운 마녀의 술은 여기서 효능을 잃는다. 디오니소스적 열광자의 정서 속의 신비한 혼합과 이중성만이 마녀의 술을 생각나게 한다. 마치 약이 치명적인 독을 생각나게 하는 것처럼. ” - 2장 p38 -



결국 디오니소스의 광기가 아폴론적 그리스인과 결합하자 그리스인들에게는 ‘약’이 되었다는 의미라고 여겨진다.








디오니소스 축제는 그때의 ‘아폴론적인 도리스 예술’에게는 이방의 것이 된다. 디오니소스 축제는 이방인의 축제였고, 그리스 사회에는 배척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문화접변 상태의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도리스 예술에 디오니소스 축제라는 이異문화의 침범이기도 하였다고 보인다. 배척과 배타가 요동치는 가운데 디오니소스는 그리스인들의 내면에 스며들어갔다.


니체가 기원전과 기원후를 가르는 예수탄생 시점에서 더 거슬러 그리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고, 또한 그리스 시대에서도 소크라테스 이전의 시기로 더 거슬러 올라가고, 그 이전 시대에서 디오니소스 축제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이러한 일련의 상승은 결국 역사의 확장이라고 보인다. 인간의 역사가 역사시대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시작되며, 신화의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라고 보인다. 그것은 신화로 서사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지만, 그것은 모두 인간 실존의 이야기이다. 인간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멀고 오래된 문화로부터 파생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니체는 거기에서 인간의 실존을 바탕으로 한 ‘삶’을 보고 있는 것이지 않을까.





* 사진 풍경은 지난 주말에 낭독회 친구들과 '제라의 뜰'에서 '바깥을 잊어버리고 우리에게 집중하여 노는 풍경' 사진을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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