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바그너적 영감은 '판타지'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바치는 서문

by 아란도




서문을 읽으면서 니체의 신선하게 흥분된 마음이 산들바람처럼 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서 생각한다. 니체 그 자신이 격하게 감정 이입하였던 대상들을 통해서 받았던 환희의 크기만큼 니체는 그만큼의 절망의 고통을 경험하는 것 같다. 빛이 크면 어둠도 그만큼 크다는 말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아서 마음은 못내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하였다. 대철학자에게 ‘짠하다'라고 말하지는 못하겠고, 그만큼의 인생 경험과 시대의 경험이 니체를 만들었던 것 같다. 니체의 시대와 니체가 거론하는 이들에 대한 자료조사를 통해서 그냥 정보로 읽고 지나가는 것과는 어떤 확연한 차이를 느낀다. 어떤 이야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듯이 그 당시의 시대상과 사람들이 살아 움직이듯이 동영상적으로 다가왔다. 니체의 시선으로 본 그 당시와 역사는 참으로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니체 철학은 니체의 글과 사상 자체로 완성된 것이지 누구에게 대입되거나 어떤 대상과 또는 한 시대의 모의와 부합해서가 아니다.


니체가 그 당시의 바그너라는 거대한 산을 뚫고 나오는 데는 '다어너마이트'가 필요했을 것이다. 니체는 그래서 그 자신을 다이너마이트 철학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아래에 바그너의 일대기를 정돈하면서 느낀 점은 그 당시와 사후에 바그너의 영향력은 정말 굉장했다는 것이다.


비체는 그 거대한 산을 뚫고 그 자신의 철학을 바로 세웠던 것이다. 사람이 그 자신의 산을 무너뜨리고 그 자신의 산을 다시 세우는 일은 정말 무엇이란 말인가? 니체의 담대한 그 깊은 고래와 같은 숨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거 같은 시간이다.


니체의 철학이 실존에 있었다면 바그너의 영감은 환상(판타지)에 있었다고 보인다. 이 둘은 인간의 삶에서 어쨌든 항상 붙어 있다. 어디에 더 주안점을 두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결국 니체와 바그너는 서로 갈라졌지만 따로 떼어서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어쩌면 니체 역시 그랬기에 '바그너'에 대해서 그토록 글을 썼던 것은 아닐까!


아래는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바치는 서문〉 전문이다. 원문 전체만 읽어도 그 당시 니체가 《비극의 탄생》을 어떤 관점에서 썼고, 어떤 심경에서 이 책을 바그너에게 헌정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고 본다.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바치는 서문〉
이 저서 속에 통합되어 있는 사상들이 독특한 성격을 지닌 우리의 심미적 여론에 야기할 모든 가능한 우려와 흥분과 오해들을 멀리 떨쳐버리기 위하여, 그리고 훌륭하고 감격적인 시간들의 화석처럼 이 책의 한 장 한 장마다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명상적 환희를 지니고 이 책의 머리말을 쓸 수 있기 위하여 나는 무척 존경하는 친구인 당신이 이 책을 받아 보실 그 순간을 마음속에 그려봅니다.

당신이 아마도 겨울 눈 속의 저녁 산책을 끝낸 후 책 표지에 그려진 쇠사슬에서 풀려난 프로메테우스를 보고, 내 이름을 읽고, 그리고 곧 이 책에 무엇이 쓰여 있든 간에 저자는 무엇인가 진지하고 절실한 것을 말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마찬가지로 저자가 생각해 낸 모든 것이 당신과 마치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대화하여 오로지 이 대화에 해당하는 것만을 적어 넣은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는 그 순간을 말입니다.

이 과정에서 당신은 내가 베토벤에 관한 당신의 훌륭한 기념 논문이 나온 것과 같은 시기에, 즉 때마침 터진 전쟁의 공포와 감격 속에서 이 사상에 집중했다는 점을 상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집중과 관련하여 애국적 흥분과 미적 탐닉의 대립, 용기 있는 진진함과 명랑한 유희의 대립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오류를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이 글을 실제로 읽게 되면, 오히려 그들은 얼마나 진정으로 독일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가를 분명히 알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

독일적 문제는 우리에 의해 독일이 품고 있는 희망의 한가운데에 하나의 소용돌이와 전환점으로 제기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술 속에서 “실존의 진지함”에 대한 재미있는 첨가물 또는 없어도 무방한 요란한 방울소리 이상의 것을 인식할 능력이 없는 경우에는 미적인 문제가 그렇게 진지하게 다루어진다는 것을 보는 것이 대체로 불쾌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마치 아무도 그런 “실존의 진지함”과의 이러한 대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모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당신의 정신에 따라 예술이 삶의 최고 과제이며 진정한 형이상학적 활동이라고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진지한 독자들을 계몽하는 데 기여할 것입니다. 여기서 나는 이러한 길을 앞서 나간 고상한 투사인 당신에게 이 책을 헌정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1871년 말 바젤에서.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만달로리안




=> 아래는 바그너의 생애와 그의 작품들 그리고 바그너가 시대에 미친 영향에 관한 정리이다. 재정리는 '나무 위키에서 '바그너'를 참조하였고, 정리된 글을 내가 다시 축약 및 요약하였다.


내 생각에는 바그너의 악극의 힘은 ‘판타지’에 있는 것 같다.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와 바젤동크 부인에게서 영감을 취했듯이 바그너주의자들도 바그너의 음악을 영감의 원천으로 활용했다. 긍정적인 영향도 있고 부정적인 영향도 있었다. 그러나 영감을 받은 것은 모든 각자가 그 자신이 받은 영감을 활용하기 나름이므로, 히틀러가 영감을 받아서 바그너 음악을 활용한 것 역시 바그너 탓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한번 세상에 나오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다. 상상의 세계가 현실이 되어버리는 것 역시 ‘판타지’를 구현하려는 인간의 의지에서 기인한 것이다. 환상이 없이 어찌 인간이 살겠는가? 다만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는 그 자신이 결정해야만 한다. 이슬도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



바그너의 영향에서 음악 이외에서는 '반지의 제왕' 가장 탑일 것이다. 존 로널드 로웰 톨킨 역시 바그너리안이었다. 추상미술가 '바실리 칸딘스키' 역시 바그너 신봉자였다.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를 작곡하는데 오래 걸린 이유는 서사를 전체적으로 구성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바그너는 그 자신만의 판타지 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호메로스의 신화적 세계관처럼.


바그너가 그의 사후 후대에게 끼친 영향은 새로운 세계의 창조에 있었지 않을까. 이야기로서 세계를 확장하는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어떤 하나의 세계관에 머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바그너는 니체의 비판처럼 몽상가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현대의 문화가 펼쳐지는 양상을 보면, 바그너는 '가상'을 다룰 줄 알았던 사람이라고 보인다. 가상의 가상의 세계인 판타지의 세계는 새로운 포문을 열었던 것이지 않을까. 바그너는 자기의 세계를 열고 싶은 이들에게 무한한 영감을 제공했던 것인지도.


바그너가 '니벨룽의 반지'에 사용한 방식은 영화 제작을 예로 들자면, 시퀄Sequel과 프리퀄Prequel 방식의 사용이었다. 그리고 이 방식을 통하여 시리즈로 제작하였다는 것이다. 바그너의 이러한 방식은 독보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시퀄은 원작의 후속 편을 이야기한다. 원작 다음으로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 구성이다. 시퀄은 원작의 현재에서 시간이 더 흐른 상태를 다루며, 미래를 다루기도 한다. 시점 설정은 어떻게 설정하는가? 의 따라 다르다.


반면 프리퀄은 원작 이전의 배경과 상황을 다룬다. 원작을 보충하거나 원작에서 왜 그렇게 시작되었는지를 동기를 풀어낸다. 프리퀄은 바로 전 상황을 다룰 수도 있고 한참을 더 거슬러 올라가는 상황을 다룰 수도 있다. 그러므로 원작 이전의 과거를 다룬다.


보통 '스타워즈' 시리즈가 원작에서 원작 이전과 원작 이후를 다루면서 하나의 '스타워즈 세계관'을 형성하는 기법으로 광범위하게 활용하였다. 요즘은 거의 모든 시리즈 물이 이 기법을 다 사용하는 것 같다.


이러한 기법의 최초의 저작자는 '호메로스'일 것이지만, 그 형태를 제대로 사용한 것은 '바그너'인 모양이다. 그리고 그 기법은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사용되었다. 영화로 제작된 '반지의 제왕' 역시 이 기법을 사용하였다. 이렇게 살펴보면 '바그너'는 영화 제작에도 영향을 상당히 미쳤다고 보인다. 현대로 가는 길목에서 바그너는 그 자신이 상업주의화 된 유대인의 예술을 비판하였지만, 정작 현대 상업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바그너 자신이었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이것은 실질적인 '산업' 형태와 연관이 있는 것이었고, 바그너 자신이 극장 '바이로이트'를 구축한 것과도 역시 극장 산업과 연계가 있다.


이러한 일련의 형태는 바그너 그 자신의 지향이기도 하였다. 바그너는 작곡가 겸 엔터테인먼트 대표이기도 하였다. 그가 '종합예술'을 지향한 점도 현대적인 형태와 맞닿아 있었다고 보인다.
















1871년의 리하르트 바그너






리하르트의 바그너의 일생(1813~1883)

*바그너의 인생 시기는 유년 및 청년기(1813–1842), 드레스덴 시기(1842–1849), 취리히 시기(1849–1858), 루트비히 2세의 후원기(1859–1871), 바이로이트 시기(1872–1881), 말년으로 구성된다.


유년 및 청년기(1813–1842)

리하르트 바그너는 1813년 5월 22일에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바그너 출생 후 여섯 달 만에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1814년 8월에 그의 어머니는 재혼을 했다. 바그너는 9세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 후 청년 리하르트 바그너는 극작가 되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었다. 1831년에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했다. 그의 음악에 영향을 준 인물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었다.


1832년 19세 때 첫 교향곡인 교향곡 C장조를 작곡했다. 1833년 스무 살의 바그너는 그의 첫 완성된 오페라인 ‘요정’을 작곡했다. 이 오페라는 ‘칼 마리아 폰 베버의 양식’을 모방한 것이었다. ‘요정’은 반세기 넘게 상연되지 않았으며, 초연은 그의 죽음 직후인 1883년에 뮌헨에서 있었다.

그 후 바그너는 마그데부르크와 쾨니히스베르크의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서 약식 계약을 맺었다. 그 무렵에 그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기초한 두 번째 오페라 ‘연애금지’를 썼다. ‘연애금지’는 1836년에 마그데부르크에서 상연되었지만,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1836년 11월 24일에 바그너는 "미나"라고 불리는 여배우 '크리스티네 빌헬미네 플라너'와 결혼했다. 미나와의 결혼은 미나의 가출 반복이 거듭되는 동안에도 유지되었다. 바그너는 훗날 미나와의 이혼 후에도 생활비를 대주었다.


미나와의 결혼생활 중에 바그너는 빚쟁이들을 피해 도주해야만 했다. 그들은 영국으로 가는 항로에서 폭풍우를 만났는데 이 경험이 그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영감을 제공했다. 바그너는 파리에서 여러 해를 보내며 작곡을 하였다.


_________


드레스덴 시기(1842–1849)

바그너는 그의 세 번째 오페라 《리엔치》를 1840년에 썼다. 독일의 작센의 드레스덴 왕립 극장이 이 오페라를 공연하기로 했다. 1842년에 바그너 부부는 드레스덴으로 이사했으며, 리엔지는 성공했다. 바그너는 드레스덴에서 여섯 해를 보냈으며, 결국 30세에 작센 왕립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그의 첫 두 중기 오페라인 《방황하는 네덜란드인》과 《탄호이저》를 쓰고 상연했다.

바그너의 ‘드레스덴 체류’는 바그너의 ‘좌익 정치의 가담’으로 끝나 버리고 말았다. 그때의 ‘국가주의 운동’은 독일 내 연방 국가들에서 힘을 얻고 있었다. 주권이 미약한 주들을 한 나라로 통일하는 것에 대한 열망이었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이 운동에 매우 열성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작센 정부에 대한 널리 퍼진 불만은 1849년 4월에 작센의 왕 프레데릭 아우구스투스 2세가 국회를 해산하고 사람들이 그에게 요구했던 새 헌법을 거부하면서, 5월 혁명이 발발했다. 혁명은 초기에 작센과 프로이센 연합 병력에 의해 단시간에 진압되었다. 혁명 주도자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다. 바그너는 처음에는 파리로, 또 취리히로 도망해야 했다. 뢰켈(Röckel)과 바쿠닌(Bakunin)은 도망치는 데에 실패했고 오랜 기간의 수감 생활을 감수해야 했다.



_________


취리히 시기(1849–1858)

바그너는 그로부터 12년을 망명 생활로 보내야 했다. 그는 드레스덴 봉기 이전에 ‘로엔그린’을 완성했다. 그의 스승 프란츠 리스트에게 그가 없는 상태에서 그것이 상영되도록 간절한 편지를 썼다. 리스트는 1850년 8월에 바이마르에서 ‘로엔그린’ 초연을 지휘했다.


초연 공연에도 불구하고 바그너는 극심한 개인적 궁핍에 시달렸다. 독일 음악계에서는 고립되었고 아무런 경제적 소득은 없었다. 그 무렵 그가 쓰고 있던 음악 단편은 나중에 거대한 작품인 《니벨룽의 반지》로 성장할 것이었지만 당시에 공연될 가망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의 아내 미나는 그가 《리엔치》 이후에 써 나간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았고 우울증은 깊어져 갔다. 바그너 역시 단독(피부병의 일종)을 앓았고, 작곡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취리히에서의 처음 몇 해 동안 바그너는 일련의 주목할 만한 수필을 썼다. 바그너는 "미래의 예술-작품(1849)"에서 음악, 노래, 춤, 시, 시각 예술, 무대 기술 등이 종합된 개념인 "총체예술(종합예술작품, Gesamtkunstwerk)"로 오페라의 비전을 설명했다. 또한 "음악 속의 유대주의(1850)"는 유대인 작곡가를 반대하여 겨냥한 반유대주의 작품이다. 그리고 "오페라와 드라마(1851)"는 그가 ‘반지 사이클에서 사용하고 있던 미학 개념’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다.



<바그너의 영감의 원천 두 가지>

몇 년 동안 바그너는 ‘두 개의 독립적인 영감의 원천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들이 그의 유명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창작으로 이끌었다.

첫 원천은 1854년에 그의 시인 친구였던 게오르그 헤베그(Georg Herwegh)가 그에게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저작을 소개한 것이다. 바그너는 나중에 이를 그의 생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얘기하였다. 그의 개인 환경은 인간 조건에 대한 깊이와 비관적인 관점인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쉽게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운이 한결 나아진 후에도 남은 생애 동안 쇼펜하우어의 신봉자로 남았다.

<영감 1 -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음악은 예술 가운데에서 최고의 지위를 점하며, 이는 음악이 물질계와 연관되지 않은 유일한 예술이라는 이유 때문”이라고 하였다. 바그너는 이 주장을 환영했다. 바그너는 "오페라와 드라마"에서 쇼펜하우어 철학과 직접적으로 상반되는 주장을 폈었다. 즉, ‘오페라의 음악이 드라마의 원인에 따라가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럼에도 바그너는 쇼페하우어 철학에 강한 공명을 이루었다. 바그너 학자들은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영향이 바그너로 하여금 그의 반지 사이클의 뒤쪽 절반을 포함하는 후기 오페라에서, 음악이 더 강한 명령을 하는 역할을 맡도록 했다는 주장을 했다.

여러 측면에서 ‘쇼펜하우어적 사상’은 바그너의 대본에서 발견된다. 예컨대 ‘마이스터징거’에 나오는 구두장이 시인 한스 작스는 일반적으로 바그너가 자신을 가장 많이 반영하는 인물로 간주된다. 이 인물은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적인 창조의 전형’이다.

<영감 2 - 마틸데 베젠동크>

바그너의 두 번째 영감의 원천은, 비단 상인 오토 폰 베젠동크의 아내 시인 마틸데 베젠동크였다. 바그너는 베젠동크 부부를 취리히에서 1852년에 처음 만났다. 오토는 바그너 음악의 팬이었다. 바그너의 뜻에 따라 자신의 땅에 작은 집을 세워 주었다. 1857년까지 바그너는 마틸데에게 푹 빠져버렸다. 마틸데는 그의 애정에 일부 답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녀는 그녀의 결혼을 위험에 빠뜨릴 의도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애정 행각은 기사 트리스탄과 이미 결혼한 귀부인 이졸데의 사랑 이야기에 기초한 ‘트리스탄과 이졸데’ 작업을 시작하게 했다.


1861년에 바그너에 대한 정치적인 추방이 해제되었다. 그는 프로이센의 비브리히에 머무르면서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작업’을 시작했다. 주목할만한 사실은 이 오페라가 그의 작품 가운데에 가장 밝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1862년에 바그너는 결국 미나와 이혼했지만, 그는 그녀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1866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했다.


_________

루트비히 2세의 후원기(1859–1871)

바그너의 행운은 1864년에 바이에른 왕국의 루트비히 2세가 나이 19세로 즉위하면서 극적인 계기를 맞았다. 젊은 왕은 어린 시절부터 바그너의 오페라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그는 바그너의 상당한 빚을 해결해 주었고 그의 새 오페라가 상연될 계획을 세웠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뮌헨 왕립 극장에서 1865년 6월 10일에 큰 성공을 거두며 초연되었다.


그때 바그너는 또 다른 애정 행각을 벌이게 된다. 이번에는 바그너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트리스탄 초연의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의 아내인 ‘코지마 폰 뷜로’였다. 코지마는 바그너보다 24살 연하였다. 리스트는 바그너와 친분이 있었지만, 그의 딸이 바그너를 보러 다니는 것을 금했다.


코지마는 결국 한스 폰 뷜로를 설득해 이혼했다. 리하르트와 코지마는 1870년 8월 25일에 결혼했다. 그 해 크리스마스에, 바그너는 코지마의 생일 선물로 ‘지크프리트 목가’를 선사했다. 코지마와의 결혼은 바그너의 생애 마지막까지 지속되었다. 그들은 딸인 이졸데와 에바와 아들인 지크프리트를 두었다.



<니체와 바그너의 조우>

트립쉔Triebschen에서 ‘1869년’에 바그너는 ‘프리드리히 니체’와 만났고, 곧 두 사람은 굳은 친구가 되었다. 바그너의 사상은 니체에게 주요한 영향을 주었다. 그때 니체는 25세의 청년이었고 바그너는 56세의 장년이었다. 니체의 첫 책인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ödie, 1872)는 바그너에게 헌정되었다. 둘 사이의 관계는 니체가 점점 바그너의 생각이 평화주의와 반유대주의로 기울어지자 환상이 깨지면서 결국 멀어졌다.


"바그너의 경우" (Der Fall Wagner, 1888)와 "니체 대 바그너" (Nietzsche Contra Wagner, 1889)에서, 니체는 바그너를 퇴폐하고 타락한 것으로 비난했다. 심지어 그 자신의 이른 시절의 미숙한 시야에 대해서도 자기 비판했다. ----> *훗날 니체는비극의 탄생에 ‘자기비판의 시도’를 삽입하였다.





바이로이트에서의 바그너와 리스트



___________

바이로이트 시기(1872–1881)

바그너는 그의 새 가정에 안착하여, 그의 에너지를 반지 사이클을 완성하는 데 집중했다. 바그너는 반지 전곡 사이클이 이 작품을 위해 특별히 설계된 새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후원자인 루트비히 2세가 전곡의 완성될 때까지 참을 수 없어 그의 명령에 따라 사이클 중 이미 완성된 첫 두 작품인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온’은 뮌헨의 "특별 시사회"에서 초연되었다.


1871년에, 그는 작은 마을인 바이로이트를 그의 새 오페라 극장의 위치로 선정했다. 바그너 일가는 그다음 해에 이주하였고,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초석이 놓였다. 공사를 위한 자금 조달을 위해, "바그너 협회"가 각 도시에 결성되었고, 바그너 자신도 독일 전역에 콘서트 여행을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루트비히 2세가 또 다른 거액의 보조금을 1874년에 지원한 후에야 충분한 자금이 모였다. 다음 해에, 바그너 일가는 바이로이트에 리하르트가 반프리트(독일어로 "미혹과 광기로부터의 평화와 자유")라고 이름 붙인 빌라를 그들의 영구적인 집으로 삼아 이주를 마쳤다.


<바이로이트 극장>

축제극장은 결국 1876년 8월에 《반지》 사이클의 초연과 함께 문을 열었고, 그때부터 현재까지 계속 바이로이트 축제의 개최지로 남았다. ***1876-1869 = 니체가 바그너를 알게 된 지 7년 되던 해, 니체는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바그너 추종자들을 참을 수 없이 역겨워 축제 장소를 떠났다.

1877년에 바그너는 그의 최후의 오페라인 ‘파르지팔’에 대한 작업을 시작했다. 작곡에는 4년이 걸렸으며, 그동안에 그는 또한 일련의 종교와 예술에 대한 수필을 썼다.



__________




1882년 바이로이트에서 열린 파르지팔 초연





말년(1882–1883)

바그너는 '파르지팔'을 1882년 1월에 완성했는데 이 작품을 오페라라 하지 않고 '신성한 무대용 축전극'이라 하였다. 바그너는 악보에 "무대신성제전극(Bühnenweihfestspiel)"이라고 썼다. '파르지팔은 '바이로이트 축제"를 위하여 특별히 작곡하였다.


그 해 여름 파르지팔을 초연하기 위해 두 번째로 바이로이트 축제가 열렸다. 바그너는 이때에 심하게 아팠으며, 점점 심한 협심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바그너는 평소 협심증이 있었는데 이 때는 상태가 심해졌다. 파르지팔은 총 16회 상연되었는데, 마지막 공연날인 8월 29일에는 지휘자 헤르만 레비가 아팠기 때문에 3막이 연주되는 도중에 바그너 본인이 비밀리에 오케스트라 피트에 들어가 지휘자 헤르만 레비로부터 지휘봉을 받아서 작품의 종결부에 이르기까지 공연을 지휘했다.

이 축제 이후에, 바그너 가족은 베니스로 요양을 하기 위하여 여행을 떠났다. 1883년 2월 13일, 리하르트 바그너는 심장마비로 베니스 대운하 위의 Palazzo Vendramin에서 향년 7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바이로이트로 되돌아와 반프리트의 정원에 묻혔다.






바그너의 영향과 사후의 사건들

바그너의 생애는 기념비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바그너는 음악사에 있어서 뿐 아니라 문학사에서도 많은 영향을 준 독보적 예술가이다. 음악사에서는 초기 낭만파의 뒤를 이어 낭만파 음악을 대성한 음악인이며, 문학사에서는 신낭만파의 희곡 영역에 있어서의 거봉이었다. 바그너는 니체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또한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 염세주의, 종교적인 신비주의, 탐미주의적인 경향의 작품을 썼다. 이로써 19세기말 낭만주의 부흥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바그너의 음악적인 양식은 종종 서양 고전음악의 낭만파 시기의 축약으로 간주되는데, 이는 전례가 없는 ‘감정적 표현에 대한 탐구’ 때문이다.


그의 오페라와 음악 이론에 대한 수필에 걸쳐, 바그너는 오페라라는 매체에 대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바그너가 자신의 오페라를 "악극"이라고 부른, 이유는 ‘음악과 드라마의 요소를 모두 함께 융합한 새로운 오페라 형태’이었기 때문이다. 대본 작성 작업을 직접 하지 않은 다른 오페라 작곡가들과 달리, 바그너는 그의 오페라를 위한 대본을 직접 썼으며 자신은 그것을 "시"라고 지칭했다. 그의 작품의 줄거리 대부분은 북유럽 신화와 전설에 기초해 있다.


거기에 더해, 바그너는 오케스트라의 역할이 가수의 그것과 동등한 작품 양식을 개발해 냈다. 오페라의 드라마에 대한 오케스트라의 역할에는, 특정한 인물, 장소, 줄거리 요소를 알려 주는 음악 주제인 유도동기의 연주가 포함된다. 유도동기가 서로 복잡하게 얽히고 진화해 나가는 양상이 드라마의 발전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화성과 음악 형식에 있어서 새로운 생각을 소개했으며, 여기에는 ‘극단적인 반음계법’이 포함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그는 전통적인 조성 체계의 한계를 탐구하여 조와 화음을 각각 인물과 동일시하는 방법으로, 20세기의 무조성으로의 길을 가리켰다. 몇몇 음악 사학자는 현대 서양 고전음악의 시작을, 소위 트리스탄 화음이라고 불리는 트리스탄의 첫 음표들로 보고 있다.

__________

바그너의 유럽 예술과 문화에 기여한 바는 부인할 수 없으며 ‘기념비적’이다.

=> 니체는 기념비적인 역사를 <반시대적 고찰>에서 비판한다. 아마도 바그너에 대한 비판인 듯싶다.

그의 생전과 사후 여러 해 동안, 바의 다수의 애호가들 사이에서 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들 사이에서는 거의 신과 같은 지위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의 음악인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특히 중요한 새 지평을 열었다. 이후 여러 해 동안 많은 작곡가들은 바그너 편에 서거나 바그너에 반대하는 편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안톤 브루크너와 휴고 볼프는 그에게 특히 많은 빚을 졌으며, 세자르 프랑크, 앙리 뒤팍, 에르네스트 쇼송, 쥘 마스네,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 한스 피츠너 등등의 수많은 음악가들 또한 그러하였다. 구스타프 말러는 "오직 베토벤과 바그너만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클로드 드뷔시와 아르놀트 쉔베르크의 이십 세기 화성 혁명은 트리스탄 화음으로부터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최초로 어떤 드라마적인 공연 동안에 불빛을 희미하게 해야 한다고 처음 요구했던 사람이 바그너였다. 처음으로 관현악단 피트(바이로이트에서는 관중석과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를 바이로이트 극장에서 사용했던 것도 그였다. 바그너는 그의 작품이 청중들의 상상 속에서 경험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극장"을 꿈꿨다. 오디오 기기의 발달로 이 꿈은 현실이 되었다.


_________

바그너의 문학과 철학, 미술에 대한 영향 또한 분명하다.

《비극의 탄생》의 저자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처음에 바그너를 숭배했는데, 그의 음악에서 유럽 정신이 다시 젊어지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니체는 《파르지팔》 이후에 바그너와 결별했다. 그는 《파르지팔》을 기독교에 영합하는 표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20세기에, W. H. 오든은 한때 바그너를 "아마도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했던 천재"로 불렀으며,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 그리고 ‘마르셀 프루스트’도 바그너에게 크게 영향을 받아 그들의 소설에서 바그너를 논했다. T. S. 엘리엇의 《황무지》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바그너이며, 그의 오페라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반지의 제왕 작가 ‘존 로널드 로웰 톨킨’은 바그너와 그의 음악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톨킨 자신이 옥스퍼드의 고대영어 교수이었기에 북구 신화와 사가에는 정통했었고, 따라서 북구 신화를 차용한 바그너의 작품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또한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C.S. 루이스가 열렬한 바그네리안이었다. 20세기 초의 유럽 문화계의 풍토를 보아도 바그너에 대한 자기만의 관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상태였었다. 게다가 톨킨은 C.S. 루이스와 함께 종종 바그너 공연을 보러 갔었으며, 한때는 C.S. 루이스와 함께 <니벨룽의 반지>의 2부 발퀴레를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는 바그너를 즐겨 들었고 또 열심히 연구를 했다.

스테판 말라르메, 폴 베를렌느, 그리고 샤를르 보들레르는 바그너를 숭배했다. 사랑과 죽음(에로스와 탄토스)의 관계에 대한 것 등 그의 음악 속의 많은 발상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의한 정신 분석을 예고했다.

추상미술의 아버지 ‘바실리 칸딘스키’는 바그너 신봉자이기도 했다.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음악을 들으면서 색을 보는 공감각을 경험했다. 그 후 칸딘스키는 음악이 그림이 될 수 있고, 또 그림이 음악이 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의 그림들은 대상에 연연하지 않는 추상화로 바뀌게 된다. 또 칸딘스키는 '로엔그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바그너의 음악에서 바이올린, 베이스, 관악기의 울림, “나의 마음속에서 나의 모든 빛깔을 보았다. 야성적이며 미친 것 같은 선들이 내 앞에 그려졌다. 회화는 음악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었다.”라고 말했다




니벨룽의 반지



__________

바그너의 영향이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한 때, 독일 음악계는 ‘바그너 지지자’와 ‘요하네스 브람스’ 지지자의 두 파로 나뉘었다.

브람스 지지파는 강력한 비평가인 ‘에두아르트 한 슬릭’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는 전통 형태를 최고로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바그너식 혁신에 반대’하는 보수파를 이끌었다.

클로드 드뷔시는 바그너를 심하게 비판했던 사람이지만 ("그 오래된 중독자"), 바그너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작곡자 중 한 사람임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사실 드뷔시는 바그너의 영향을 의심할 여지도 없이 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바그너와 결별할 필요가 있었던 많은 작곡가들 중에 한 명이었다.








바그너 음악

바그너의 음악은 강한 반응을 계속 일으켰다. 후기작에서 바그너는 긴 시간과 깊은 맥박을 만들어내어 음악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청자들이 바그너의 시간 개념에 완전히 익숙해지기를 요구하는 그런 음악을 만들어 냈다.


바그너의 음악에 대해 로시니("바그너는 굉장한 순간과 진절머리 나는 15분을 가지고 있다")를 포함해 많은 저항이 있었다. 반면 로시니 자신의 "Guillaume Tell(빌헬름 텔)"은 프리드리히 실러의 희곡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네 시간 이상의 긴 시간의 작품이었고, 어떤 바그너 작품 하나보다도 긴 시간을 요구했다. 브람스파 한슬릭은 “오페라에 새로운 시대가 왔다”라고 격찬하였다. 로시니의 전기를 쓴 ‘스탕달’역시 로시니의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했다. <다음 백과 ‘로시니’ 참조>

_____

바그너의 이상

바그너의 이상은, 지크프리트의 "금발의 괴물" 영웅주의로부터, 그의 열성적인 쇼펜하우어에 대한 오독과 더불어 죽음과 신격화에 대한 매혹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심하게 유행에 뒤떨어져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오페라는 계속 강한 추종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바그너는 나폴레옹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그에게 자극받은 이차 문학의 양이 많은 역사적 인물로 꼽히고 있다.

그렇게 그는 ‘계속적으로 많은 찬반 논란과 존경을 동시에 받’고 있다. 그 원인이 그의 음악의 뿌리에 있는 능가할 자 없는 숭고함, 힘, 장엄함, 그리고 때때로 위험한 초월적인 아름다움 때문이다.






바그너의 반유대주의

바그너의 종합적인 음악 표현유도동기의 사용20세기의 영화음악에 강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바그너는 극도로 찬반이 엇갈리는 평가를 받는 인물인데, 이는 ‘그의 음악과 드라마에 대한 혁신’으로 인한 것뿐만 아니라, 그의 ‘반유대인적 시각’에서도 기인한다.


20세기 동안, 바그너에 대한 공공의 이해에는 그의 반유대주의가 점점 더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는 대부분 그렇듯이 작곡가의 죽음 뒤에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다. 1930년대에 그의 음악을 나치 당이 전용(專用) 한 것이다.


바그너의 반유대주의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논란이 많다.

특히 쟁점은 그의 반유대주의적 진술들이 어느 정도까지 유대교, 종교 전반 그리고 당시의 정체에 대한 본인의 입장을 대변하는지, 혹은 그의 주위로부터의 영향을 반영하는 것인지 이다.

바그너는 그가 접해 온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기독교적 반유태관 그리고 초기 반유대주의적 사상들을 수용하였다. 이 중에는 유태인에 관한 ‘마르틴 루터’의 글들에서 접한 것도 있다.

바그너의 주위 인물들 사이에서는 반유대주의를 옹호 및 지지하는 분위기가 전반적이었으며, 특히 바그너의 아내인 ‘코지마’가 극심한 반유대주의자였기 때문그녀와의 결혼생활 동안에 이러한 분위기는 더욱 강했다.


하지만 바그너는 사회적으로 널리 만연해 있던 반유대주의적 발언들을 받아들이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이들을 대변하기도 하였으며 "음악 속의 유대주의"("Das Judenthum in der Musik")와 같은 글을 통해 피력하기도 했다.

_______

바그너는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유대인 작곡가가 독일의 해로운 외래 요소라고 비난했다.

그의 반유대인 수필 중 처음이자 가장 찬반 논란이 큰 것은 1850년에 "K. Freigedank"("자유로운 생각")이라는 필명으로 Neue Zeitschrift für Musik에서 출판한 "음악 속의 유대주의"였다.

이 수필은 유대인 작곡가, 가령 바그너의 동시대인이자 경쟁자였던 ‘펠릭스 멘델스존’이나 ‘지아코모 마이어베어’와 같은 유대인 작곡가들이 어떻게 "대중적인 비선호" 되는지에 관한 설명이다.

바그너는 유대인들은 그들의 이질적인 외모와 행동 때문에 독일인들에게 불쾌감을 주고 있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우리는 항상 본능적으로 그들과의 실질적인 접촉에 불쾌감을 느낀다"라고 썼다. 그는 “유대인 음악가들은 얕고 인공적인 음악만 쓸 줄 알며, 이는 그들이 민족의 참 정신과의 연결을 전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수필의 결론에서, 그는 유대인에 대해 "너희들이 너희들의 저주라는 짐으로부터 정화될 방법은 단 하나다. 아하수에로(방랑하는 유대인, 전설의 인물)의 정화 - 복종하는 것!"이라고 썼다.

이것이 실제적인 물리적 소멸을 의미하기 위해 취해진 것이지만, 수필의 문맥상 그것은 유대주의의 박멸을 가리킨다. 근본적으로, 바그너는 유대 문화의 포기와 유대인을 독일 문화계로 흡수시키기를 부르짖고 있는 것이었다.

이 글의 첫 출판은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바그너는 그 자신의 이름을 걸고 소책자로 1869년에 재출판하여,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공연 시에 여러 대중적 항의를 야기시켰다. 바그너는 비슷한 시각을 여러 다른 글, 가령 "독일인이란 무엇인가?" (1878) 등에서 반복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 ‘로버트 구트만’ 같은 학자들은 바그너의 반유대주의가 그의 글에 국한되지 않고 오페라 또한 숨겨진 반유대주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주장을 발전시켰다. 가령, 반지의 미메(Mime)나 마이스터징어의 직스투스 베크메서(Sixtus Beckmessere)와 같은 인물은, 비록 유대인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반유대적인 전형적인 인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은 논란이 많다. 그런 식으로 가정된 "숨은 메시지"는 종종 복잡하게 얽혀 있고, 편견 어린 과대해석의 결과일 수도 있다. 바그너는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엄청난 양의 자신의 모든 측면(자기 자신의 오페라, 자신의 유대인에 대한 관점, 기타 태양 아래에 있는 실질적인 모든 다른 주제까지)을 분석하는 글을 써 왔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런 가정된 반유대인 메시지는 전혀 언급된 바가 없다.

바그너 자신의 종교에 대한 관점은 독특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했지만, 그는 유대인이 아닌 그리스 혈통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간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이스라엘의 신은 예수의 아버지인 그 신과 다르고, 십계명은 기독교의 교훈에 있는 자비와 사랑을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너는 또한 불교에 매료되었고, 여러 해 동안 불교 오페라인 "승리자"(Die Sieger)를 구상했고, 이것은 ‘붓다의 마지막 여행’을 비유한 Sârdûla Karnavadanaan사르둘라 카르나바다나안에 기초할 계획이었다.

"승리자"의 면면은 결국 ‘파르지팔’에 흡수되어, 기독교의 바그너화된 기묘한 판을 그려낸다. 가령 성찬식에서의 화체설(포도주와 빵이 그리스도의 피와 살도 된다는 설)은 미묘하게 재해석되어, 뭔가 기독교적인 것보다는 이교도의 이식에 더 가깝게 되었다.

그의 매우 공공연한 반유대주의적인 시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는 유대인 친구와 동료의 광범위한 망을 갖고 있었다. 이들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이, 그의 마지막 오페라인 파르지팔의 초연을 지휘하도록 고른 유대인 지휘자 ‘헤르만 레비’였다.


바그너는 처음에, 아마도 오페라의 종교적인 내용 때문에 그러했겠지만, 파르지팔을 지휘하기 전에 레비가 세례를 받기를 원했지만, 나중에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레비는 바그너와의 가까운 우정을 계속 이어갔으며, 작곡가의 장례식에서 운구를 부탁받았다.







나치에 의한 바그너 음악 전용

바그너의 죽음 무렵에, 유럽의 국가주의자 운동은 1848년의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인류 평등주의를 상실하고 있었고, 군사주의적 공격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것은 비스마르크의 정권 교체 및 ‘1871년 독일의 통일’이 적지 않은 부분 영향을 주었다. 1883년, 바그너의 죽음 후에, 바이로이트는 신화와 오페라에 끌린 ‘우파 독일 국가주의자’의 초점이 되어갔으며, 이들은 ‘바이로이트 모임’이라고 불렸다.

이 모임은 ‘코지마’의 공인을 받았는데, 그녀의 반유대주의는 바그너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복잡했고 더 악의에 찬 것이었다. 이 모임의 한 사람은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으로, 나치라면 읽어야 했던 수많은 철학적 저술의 저자였다. 체임벌린은 바그너의 딸인 ‘에바’와 결혼했다.

바그너의 두 번째 아내였던 코지마와 아들인 지크프리트가 1930년에 사망한 후, 축제의 운영권은 지크프리트의 미망인이었던, 영국 태생의 ‘비니프레트’에게 넘어갔는데, 그녀는 아돌프 히틀러와 개인적 친분이 있었다.


히틀러는 바그너 음악의 숭배자였다. 히틀러는 바그너의 음악과 독일인 국가(1871년 이전에는 형식적인 정체성이 없었던 국가)에 대한 히틀러 자신의 영웅적인 신화를 융합할 길을 물색했다.

예를 들어, 나치의 뉘른베르크 집회는 매번 마이스터징거 서곡 연주로 문을 열었다. 히틀러는 바그너의 원본 악보 다수를 가지고 있었다. 바그너의 손자인 빌란트 바그너가 이러한 소중한 문서를 잘 보존해 달라고 탄원했음에도 불구하고 2차 세계대전 동안에 그 자신의 베를린 벙커에 보관했다. 그 악보들은 전쟁의 최후의 순간에 히틀러와 함께 사라졌다.


_________

몇몇 학자들은 바그너의 시각, 특히 그의 반유대주의가 나치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해 왔지만, 이런 주장은 찬반 논란이 많다.


바그너의 작품은 나치 식의 영웅주의와 별로 상통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반지 사이클의 표면상의 "영웅"인 지크프리트는 얕고 별로 호소력 없는 시골뜨기일 뿐이다. 바그너의 공감은 분명히 염세적이고 여성 같은 ‘보탄’에게 있었다. 바그너의 개인 철학의 많은 측면은 분명히 나치에게 별로 호소력이 없었을 터인데, 가령 그의 평화주의와 유대인과의 동화와 같은 것이 그러하다. 예컨대,괴벨스’는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39년에 ‘파르지팔’ 상영 금지’를 했는데, 이는 오페라 전체에 평화주의적 목소리가 넘쳤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에 대해 후세의 다른 사람이 그에 대해 가진 관점을 가지고 비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히틀러의 바그너에 대한 숭배는 되돌려질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바그너는 ‘1889년 4월 20일’에 죽었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태어나기 6년 전이다.


정치 철학자 레오 슈트라우스히틀러가 좋아한 것은 무조건 싫어해야 한다는 느낌 (혹은 정반대의 상황)은 불합리한 것이라고 쓴 바가 있다. 그는 이러한 것을 ‘Reductio ad Hitlerum/리닥시오 아드 히틀레움’이라고 명명하였다. 히틀러가 관련되었다는 것으로 돌리면 그건 무조건 틀린 게 된다는 뜻으로 ‘Reductio ad absurdum/리닥시오 아드 압수르둠’ 즉, 부‘조리한 말을 귀담아듣다’는 의미로서 ‘귀류법의 패러디’라고 말했다.


________

바그너의 곡은 유대인 대학살 생존자들에 의해 저지되어 오고 있다.

바그너의 작품은 이스라엘에서 사실상 연주 금지되어 왔다. 그리고 극히 적은 수의 공연이 행해지기는 했으나 엄청난 찬반 논란을 일으켰다. 바그너의 곡은 사실 공영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국에서는 흔히 방송되고 있지만, 공공 공연으로 무대에 올리려는 시도는 반대 시위, 특히 유대인 대학살 생존자들에 의해 저지되어 오고 있다.


바그너와 그의 음악이 일으키는 반응의 복잡함을 반영하는 수많은 역설 중 하나는, 현대 시오니즘의 창시자인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e Herzl’이 바그너의 작품에 대한 열렬한 숭배자였다는 것이다.

*시오니즘
시오니즘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조산의 땅이었던 팔레스타인 지방에 유대인의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민족주의 운동이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되면서 실현되었다. ‘시온Zion'은 원래 예루살렘 시가지 내의 언덕 이름이다. 예루살렘 또는 이스라엘인의 당을 의미한다. 시온주의라고도 부른다. 시오니즘이란 단어 자체는 1893년 빈의 유대인 학생 지도자 나탄 비른바움(1864~1937)에 의해 만들어졌다.

19세기 민족주의 열풍이 불면서 시오니즘도 유대인 사회에서 새로운 근대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유대계 오스트리아 기자 ‘테오도르 헤르츨’은 ‘드레퓌스 사건’에 깃들어 있는 반유대주의를 목격하고서, 국제 시오니즘 협회‘를 창설하게 된다. 그때부터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의 이주를 원하는 이들이 늘기 시작했다.

유대인 좌파 노조들을 중심으로 메시지가 확산되었다. 동유럽 유대인들은 생존을 담보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대규모 민족 이동을 시작했다. 수십 년에 걸친 이민의 결과 1920년경에는 상당한 규모의 유대인 이민자 사회가 팔레스타인에 형성되었다. 이때부터 아발과 영국 식민 당국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중부 유럽의 유대인 분트Bund 집단은 사회당-공산당의 유대인 조직 및 사회주의에 깊게 심취한 좌파였고, 시오니즘 또한 원래는 좌파의 이데올로기로 시작했다. 시온주의 초기 이론가들은 동시대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이었다.

이스라엘 건국 이후, 시오니스트들 중에서 벨 에포크의 낙관적 계몽주의에 기반하여 시오니즘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현실의 벽과 맞닥뜨리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름대로 호소력이 컸다. 이들은 아랍인들과의 반목을 생각하지 않았고 평등한 이웃으로 살 줄 알았다. 하지만 우파 시오니스트들은 기본적으로 아랍인, 무슬림을 야만인, 이교도 취급했다.

초기 시오니스트들이 아랍인에 대한 시각은 제각각이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좌파민족적이고 친노동적 성향이 강했다. 그러다 나치 홀로코스트와 이스라엘 건국, 그로 인한 전쟁 등을 통해 점차로 우경화되었다. 1980년 신보수주의가 세계화되면서 그 이후에는 아예 대놓고 이스라엘 내에서도 우파들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21세기에 와서는 사실상 진보적 색채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사실상 시오니즘은 우파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로 변하였다. 시오니즘은 보수화가 빠르게 진행된 셈이다.

시오니즘은 유대인과 유대교를 찬양하는 주의이며, 아랍을 침공하여 잃어버린 유대국의 영토를 수복한다는 뜻이 담겨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제외한 아랍 대부분은 시오니즘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
시오니즘은 유대교가 아니라, 철저한 세속주의적 현실론적 민족주의였다.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태오도르 헤르츨, 다비드 벤구리온 등은 확고한 무신론 시오니스트(민족주의자)들이었다.

이미 이차 대전 이전부터 상다수의 유대인들은 유대교를 관습적인 차원에서만 따를 뿐, 실생활에서는 세속적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고, 내세나 초자연적인 주제들에 대해 관심이 없다시피 하였다. 실제로 현재의 이스라엘의 종교 분포를 보면, 국민의 75% 정도가 유대교인이지만 이들 중 반은 철저한 세속주의적 유대교인이며, 나머지 절반 정도반이 전통적 의미의 유대교도이다. 그 외에 이스라엘 국민의 18% 가까운 사람들은 무슬림이며, 나머지는 기독교, 무교 등이다.







바그너의 오페라와 음악극은 그의 대표적 예술적 유산이며 시기별로 세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초기 단계
(1832) 혼례(Die Hochzeit) (완성 전에 포기)
(1833) 요정 (Die Feen)
(1836) 연애금지 (Das Liebesverbot)
(1837) 리엔치, 마지막 호민관 (Rienzi, der Letzte der Tribunen)

중기 단계
(1843)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Der fliegende Holländer)
(1845) 탄호이저 (Tannhäuser)
(1848) 로엔그린 (Lohengrin)

후기 단계
(1859)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
(1867)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장인 가수) (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는 다음 네 개의 악극으로 구성됨:
-(1854) 라인의 황금"(Das Rheingold)
-(1856) 발퀴레(Die Walküre)
-(1871) 지크프리트(Siegfried) (이전에 젊은 지크프리트(Jung-Siegfried, Der junge Siegfried)로 제목을 붙였음)
-(1874) 신들의 황혼(Götterdämmerung) (원래는 지크프리트의 죽음(Siegfrieds Tod)으로 제목을 붙였음)

마지막 작품
(1882) 파르지팔(Parsifal)





여담/ 바그너의 숫자 13


바그너는 13이란 숫자와 관계가 많다. 그가 태어난 해는 1813년이고 여기에 사용된 숫자들을 모두 합하면 13이다. 그가 죽은 날도 2월 13일이며 그의 오페라 개수도 13개이다. 그의 이름의 철자도 13자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