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바치는 서문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바치는 서문〉
이 저서 속에 통합되어 있는 사상들이 독특한 성격을 지닌 우리의 심미적 여론에 야기할 모든 가능한 우려와 흥분과 오해들을 멀리 떨쳐버리기 위하여, 그리고 훌륭하고 감격적인 시간들의 화석처럼 이 책의 한 장 한 장마다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명상적 환희를 지니고 이 책의 머리말을 쓸 수 있기 위하여 나는 무척 존경하는 친구인 당신이 이 책을 받아 보실 그 순간을 마음속에 그려봅니다.
당신이 아마도 겨울 눈 속의 저녁 산책을 끝낸 후 책 표지에 그려진 쇠사슬에서 풀려난 프로메테우스를 보고, 내 이름을 읽고, 그리고 곧 이 책에 무엇이 쓰여 있든 간에 저자는 무엇인가 진지하고 절실한 것을 말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마찬가지로 저자가 생각해 낸 모든 것이 당신과 마치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대화하여 오로지 이 대화에 해당하는 것만을 적어 넣은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는 그 순간을 말입니다.
이 과정에서 당신은 내가 베토벤에 관한 당신의 훌륭한 기념 논문이 나온 것과 같은 시기에, 즉 때마침 터진 전쟁의 공포와 감격 속에서 이 사상에 집중했다는 점을 상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집중과 관련하여 애국적 흥분과 미적 탐닉의 대립, 용기 있는 진진함과 명랑한 유희의 대립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오류를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이 글을 실제로 읽게 되면, 오히려 그들은 얼마나 진정으로 독일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가를 분명히 알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
독일적 문제는 우리에 의해 독일이 품고 있는 희망의 한가운데에 하나의 소용돌이와 전환점으로 제기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술 속에서 “실존의 진지함”에 대한 재미있는 첨가물 또는 없어도 무방한 요란한 방울소리 이상의 것을 인식할 능력이 없는 경우에는 미적인 문제가 그렇게 진지하게 다루어진다는 것을 보는 것이 대체로 불쾌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마치 아무도 그런 “실존의 진지함”과의 이러한 대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모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당신의 정신에 따라 예술이 삶의 최고 과제이며 진정한 형이상학적 활동이라고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진지한 독자들을 계몽하는 데 기여할 것입니다. 여기서 나는 이러한 길을 앞서 나간 고상한 투사인 당신에게 이 책을 헌정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1871년 말 바젤에서.
*시오니즘
시오니즘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조산의 땅이었던 팔레스타인 지방에 유대인의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민족주의 운동이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되면서 실현되었다. ‘시온Zion'은 원래 예루살렘 시가지 내의 언덕 이름이다. 예루살렘 또는 이스라엘인의 당을 의미한다. 시온주의라고도 부른다. 시오니즘이란 단어 자체는 1893년 빈의 유대인 학생 지도자 나탄 비른바움(1864~1937)에 의해 만들어졌다.
19세기 민족주의 열풍이 불면서 시오니즘도 유대인 사회에서 새로운 근대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유대계 오스트리아 기자 ‘테오도르 헤르츨’은 ‘드레퓌스 사건’에 깃들어 있는 반유대주의를 목격하고서, 국제 시오니즘 협회‘를 창설하게 된다. 그때부터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의 이주를 원하는 이들이 늘기 시작했다.
유대인 좌파 노조들을 중심으로 메시지가 확산되었다. 동유럽 유대인들은 생존을 담보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대규모 민족 이동을 시작했다. 수십 년에 걸친 이민의 결과 1920년경에는 상당한 규모의 유대인 이민자 사회가 팔레스타인에 형성되었다. 이때부터 아발과 영국 식민 당국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중부 유럽의 유대인 분트Bund 집단은 사회당-공산당의 유대인 조직 및 사회주의에 깊게 심취한 좌파였고, 시오니즘 또한 원래는 좌파의 이데올로기로 시작했다. 시온주의 초기 이론가들은 동시대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이었다.
이스라엘 건국 이후, 시오니스트들 중에서 벨 에포크의 낙관적 계몽주의에 기반하여 시오니즘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현실의 벽과 맞닥뜨리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름대로 호소력이 컸다. 이들은 아랍인들과의 반목을 생각하지 않았고 평등한 이웃으로 살 줄 알았다. 하지만 우파 시오니스트들은 기본적으로 아랍인, 무슬림을 야만인, 이교도 취급했다.
초기 시오니스트들이 아랍인에 대한 시각은 제각각이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좌파민족적이고 친노동적 성향이 강했다. 그러다 나치 홀로코스트와 이스라엘 건국, 그로 인한 전쟁 등을 통해 점차로 우경화되었다. 1980년 신보수주의가 세계화되면서 그 이후에는 아예 대놓고 이스라엘 내에서도 우파들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21세기에 와서는 사실상 진보적 색채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사실상 시오니즘은 우파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로 변하였다. 시오니즘은 보수화가 빠르게 진행된 셈이다.
시오니즘은 유대인과 유대교를 찬양하는 주의이며, 아랍을 침공하여 잃어버린 유대국의 영토를 수복한다는 뜻이 담겨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제외한 아랍 대부분은 시오니즘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
시오니즘은 유대교가 아니라, 철저한 세속주의적 현실론적 민족주의였다.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태오도르 헤르츨, 다비드 벤구리온 등은 확고한 무신론 시오니스트(민족주의자)들이었다.
이미 이차 대전 이전부터 상다수의 유대인들은 유대교를 관습적인 차원에서만 따를 뿐, 실생활에서는 세속적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고, 내세나 초자연적인 주제들에 대해 관심이 없다시피 하였다. 실제로 현재의 이스라엘의 종교 분포를 보면, 국민의 75% 정도가 유대교인이지만 이들 중 반은 철저한 세속주의적 유대교인이며, 나머지 절반 정도반이 전통적 의미의 유대교도이다. 그 외에 이스라엘 국민의 18% 가까운 사람들은 무슬림이며, 나머지는 기독교, 무교 등이다.
바그너의 오페라와 음악극은 그의 대표적 예술적 유산이며 시기별로 세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초기 단계
(1832) 혼례(Die Hochzeit) (완성 전에 포기)
(1833) 요정 (Die Feen)
(1836) 연애금지 (Das Liebesverbot)
(1837) 리엔치, 마지막 호민관 (Rienzi, der Letzte der Tribunen)
중기 단계
(1843)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Der fliegende Holländer)
(1845) 탄호이저 (Tannhäuser)
(1848) 로엔그린 (Lohengrin)
후기 단계
(1859)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
(1867)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장인 가수) (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는 다음 네 개의 악극으로 구성됨:
-(1854) 라인의 황금"(Das Rheingold)
-(1856) 발퀴레(Die Walküre)
-(1871) 지크프리트(Siegfried) (이전에 젊은 지크프리트(Jung-Siegfried, Der junge Siegfried)로 제목을 붙였음)
-(1874) 신들의 황혼(Götterdämmerung) (원래는 지크프리트의 죽음(Siegfrieds Tod)으로 제목을 붙였음)
마지막 작품
(1882) 파르지팔(Parsif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