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 자기비판의 시도 7장(완결)
그러나 여보시오. 그대의 책이 낭만주의가 아니라면 도대체 낭만주의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대의 예술가-형이상학에서 이루어진 것 이상으로 “현재”, “현실”, “현대적 이념들”에 대한 더 깊은 증오심을 나타낼 수 있는가? 그대의 예술가-형이상학은 “지금”보다는 오히려 무無를, 악마를 더 믿지 않은가?
그대의 대위법에 기초한 음성 예술과 귀를 현혹하는 기술 밑에서는 분노와 파괴 욕망의 기본 저음이 울리고 있지 않은가?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분노를 터트리는 결의, 실천적 허무주의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하나의 의지가 울리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 의지는 “만약 당신들이 정당하다면, 만약 당신들의 진리가 정당성을 획득한다면, 오히려 아무것도 진실인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염세주의자 예술 숭배자인 그대여, 그대는 스스로 귀를 열고 그대의 책 속의 선택된 어느 한 대목에 귀를 기울여보라. 젊은 귀와 가슴에 유혹의 함정처럼 들릴지도 모르는 용龍 정복자에 관한 유창한 대목을 보라. 어떠한가? 그것은 1850년의 염세주의가 가면을 쓴 1830년의 낭만주의자의 진정한 고백이 아닌가? 이 고백의 뒤에서는 이미 낭만주의자의 통상적인 마지막 악장이 울리기 시작한다. 좌절, 붕괴, 낡은 믿음과 낡은 신 앞으로의 회귀와 굴복이.
어떠한가? 그대의 염세주의자 책은 그 자체로 반反그리스주의와 낭만주의이며, 그 자체로 “도취시키기도 하며 몽롱하게 하는 것”이고, 아무튼 마취제이며 게다가 한 편의 음악 독일적인 음악이지 않은가?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듣는다.
바그너의 1950년대의 주요 작품들로는, 후기 단계를 포함하고 있는 작품들로서,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1859)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장인 가수/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1867)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다음 네 개의 악극으로 구성된다), ‘반지 사이클’, ‘바그너의 반지’, 또는 간단히 ‘반지’라고 부른다. 1848년부터 1874년까지 약 26년이 걸렸으며 바그너 혼자 대본을 쓰고 음악을 작곡했다.
1) 라인의 황금(Das Rheingold/1854)
2) 발퀴레(Die Walküre/1856)
3) 지크프리트(Siegfried/1871)
4) 신들의 황혼(Götterdämmerung/ 원재는 ‘지크프리트의 죽음Siegfrieds Tod/1874)
바그너의 초기 단계의 작품들
혼례(Die Hochzeit/1832/미완성)
요정(Die Feen/1833)
연애금지(Das Liebesverbot/1836)
리엔치, 마지막 호민관 (Rienzi, der Letzte der Tribunen/1837)
대담한 시선으로 무시무시한 것을 향해 영웅적으로 행진해 가는 자라나는 다음 세대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이 용 정복자들의 당당한 걸음을 생각해 보고, 완전하고 충만한 가운데 ‘결연하게 살아가기 위하여’ 모든 낙천주의의 나약한 교리들에 등을 돌리는 과감성을 생각해 보자. 이러한 문화의 비극적 인간이 진지함과 두려움을 향해 스스로를 교육해 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새로운 예술, 즉 형이상학적 위안의 예술, 다시 말해 자신에게 어울리는 헬레나로서의 비극을 갈망하며 파우스트처럼 다음과 같이 외쳐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나는 그래서는 안 되는가? 가장 커다란 동경의 힘으로
오직 하나뿐인 인물에 생명을 부여해서는? -> <파우스트가 한 말로 추정>
<니체가 인용한 내용인데, 어느 책(또는 수필), 혹은 어느 작품을 인용한 것인지는 잘 모름>
“그것이 꼭 필요하지 않겠는가?” 아니다, 재삼 아니다! 그대들 젊은 낭만주의자들이여, 그것이 꼭 필요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렇게 끝나는 것, 그대들이 그렇게 끝나는 것, 다시 말해 그대들이 그렇게 씌어 있는 것처럼 “위로받고”, 진지함과 두려운 것을 향한 온갖 자기 교육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적으로 위로받는 것”, 간단히 말해 낭만주의자들이 기독교적으로 끝나는 것은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아니다! 그대들은 우선 차안此岸의 현세적 위로의 예술부터 배워야 한다. 그대들이 이와는 달리 전적으로 염세주의자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면, 나의 젊은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웃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러면 아마도 그대들은 언젠가 모든 형이상학적 나부랭이를 악마에게, 특히 형이상학을 제일 먼저 던져주게 될 것이다! 혹은 차라투스트라로 불리는 저 디오니소스적 괴물의 언어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가슴을 들어 올려라. 높이, 더 높이!
그리고 다리도 잊지 말아라! 그대들의 다리도 들어 올려라, 그대들, 춤을 멋지게 추는 자들이여, 그대들이 물구나무를 선다면 더욱 좋으리라!
웃는 자의 이 왕관, 이 장미 화환의 관, 나는 이 왕관을 스스로 머리에 썼다. 그리고 나 스스로 나의 웃음을 신성한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나는 그렇게 할 만큼 충분히 강한 다른 자를 보지 못했다.
춤추는 자, 차라투스트라, 날개로 신호하는 가벼운 자 차라투스트라, 모든 새들에게 신호를 보내면서 날아오를 준비가 되어 있는 자, 준비가 끝난 자, 축복받은 가벼운 자.
예언자 차라투스트라, 참된 웃음을 웃는 자, 성급하지 않은 자, 무조건적이지 않은 자, 도약과 탈선을 좋아하는 자, 나는 스스로 이 왕관을 머리에 썼다.
웃는 자의 이 왕관, 이 장미 화환의 관, 내 형제들이여, 나는 이 왕관을 그대들에게 던졌다! 나는 웃음이 신성하다고 말했다. 그대들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내게 배워라, 웃음을!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4부, 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