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 자기비판의 시도 6장
* 프리드리히 니체에게 1888년은 그의 생애에서 그의 활동이 거의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때이다. 글을 정리하다 보니 문득 '아...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비판의 시도'를 읽을 때 받았던 어떤 긴박한 느낌은 실제로 니체에게 자신의 삶에서 가장 긴박하던 순간이었을지도. 자기의 기획을 정돈하는 글을 쓰던 시기. 문득 이 글을 쓰면서 '1888년, 그때의 니체'에게 애도를 표하고 싶어 졌습니다.
6장(책세상/p19:7~20:22)
1) 니체는 이 책으로 어떤 과제를 다루려고 했을까?
2) 니체는, 이 책을 쓴 후 16년이 지난 그때에 이런 생각을 하였다. 그 자신이 ‘비극의 탄생’을 쓰던 그 시점을 회고하면서 “모든 점에 있어서 그토록 고유한 직관과 시도들을 위해 스스로에게 고유한 언어를 허용할 용기를 가지지 못했던 것을 몹시 유감”스럽게 생각하였다.
3) 니체는 쇼펜하우어와 칸트의 정식들을 가지고 그토록 힘들고도 낯선 새로운 가치 평가들을 표현하려고 했지만, 그것들은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정신과 취향과는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것이었다.
4) 쇼펜하우어가 비극에 대해 생각하는 바는 어떠했는가?
쇼펜하우어는 그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2권 495쪽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비극적인 것에 감정을 고양시키는 독특하게 영감을 부여하는 것은, 세계와 삶은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을 줄 수 없고, 따라서 우리가 그것에 집착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인식의 열림이다. 여기에 비극적 정신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비극적 정신은 체념으로 인도한다.”
=> 위의 문장을 내 이해를 돕고자 내가 다시 고친 문장은 이러하다.
“모든 비극적인 것에 우리의 감정이 고양되도록 독특한 영감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세계와 삶’은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을 줄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그것에 집착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인식의 열림’이다. 여기에 비극적 정신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비극적 정신은 체념으로 인도한다.”
=> 이 문장이 의미하는 것은, 비극적인 것에 우리의 감정이 고양되도록 영감을 부여하는 것은 ‘세계와 삶'으로부터 인데, 비극적 정신을 통하여 거기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목적(인식의 열림)이라는 의미인 듯하다. 고로 비극의 지닌 정신은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것에 '체념하도록' 가르친다는 의미인 듯하다. 쇼펜하우어는 비극에 대해 니체와는 다른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대립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5) 오! 디오니소스는 나에게 얼마나 다르게 말해주었는가! 오. 바로 이 체념주의 전체가 당시의 나에겐 얼마나 먼 것이었던가!
6) 그러나 이 책에는 쇼펜하우어의 공식을 가지고 디오니소스적인 예감을 애매하게 만들고 망쳐놓았다는 것보다도 ‘니체 자신이 더욱 유감스러워하는 훨씬 나쁜 것’이 있다.
“내가 인식한 '웅대한 그리스적 문제'를 현대적 사태와 혼합해 버림으로써 부패시켜 버렸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희망할 수 없는 곳, 모든 것이 너무나 명백하게 종말을 가리키는 곳에서 희망을 걸었다는 것! 내가 독일의 본질이 마치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재인식하기나 한 것처럼 독일의 최근 음악을 근거로 ‘독일적 본질’에 관해 헛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는 것! 그것도 바로 얼마 전에야 비로소 유럽을 지배할 의지와 유럽을 지도할 힘을 가지게 된 독일 정신이 유언을 남기며 마침내 퇴임해 버리고, 제국건설이라는 허울 좋은 구실 아래 평범화와 민주주의로, 그리고 ‘현대적 이념들’로 이행해 가버린 바로 그 시기에 그랬다! <자기비판의 시도 6장에서>
=> 니체는 그때의 현재에서 지난 시간이 어떻게 지나왔는지를 16년 동안 목격하였던 그 시간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보인다. 변화무쌍하게 바뀌던 그 시대에서 니체는 그 자신이 추앙했던 가치들의 가치가 변질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것은 ‘현재적 이념들’ 및 현존재들에 대한 구토이었는지도. 그 자신의 것은 현재적 이념들에 끼워 맞출 수 있는 가치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그 자신의 젊은 혈기에 의해 ‘현존재가 추구하는 현재의 이념’에 ‘그리스적 문제’를 무차별적으로 대입해 버렸다는 것이 니체 스스로를 몸부림치게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니체는 이러한 사태에 대해 무척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니체는 반유대주의자들을 비판했으며, 제국주의라는 구실로 평범화된 민주주의 노선으로 흐르는 것 역시 비판했다. 아마도 ‘빌헬름 2세의 행보’를 비판한 것이었으리라. 세기말적인 '데카당스적decadence' 분위기가 사회 전반을 잠식하고 있던 때에, 니체는 그 자신이 인식한 웅대한 고대 그리스적 문제를 이런 현시대에 바로 적용시켰다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었다. 수천 년의 시간 속에서 묵은 고대 그리스는 망각을 거쳐 왔기에 거기에 그대로 있다. ‘망각된 시간을 통하지 않은 현재적 사태는 그래서 허무한 것’이다. 현재는 계속 변화하니까. 그것은 니체가 16년이 지난 그때에 회고를 통하여 얻은 깨달음이 아니었을까.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 제2부 p289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에게 고통스러운 느낌을 불러일으켰던 경험은 대부분 나 자신에게서 왔으며, 단지 비교를 위해 다른 이들로부터 일부 얻었다는 점을, 그리고 부담을 덜기 위해 현대의 자식인 내가 나 자신에 대해 그토록 반시대적인 경험을 했다는 점에서 내가 옛 시대의, 특히 '그리스 시대의 자식'이라는 점을 숨기지 않아야 할 것이다.”
니체는 고전문헌학이 ‘반시대’를 ‘시대와 대립’한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어쨌든 니체는 그 자신의 전공인 고전문헌학을 평생 가지고 간 것이다. 중간에 회의도 있었으나 그는 고전문헌학에 기초해서 그의 사상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할 때, 그 중심 테마가 자리 잡고 있어야 하고 그것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예술가적이고 학자적이고 장인적인 시간을 투여할 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해서도 그의 여러 저서에서 밝히고 있다.
어찌 보면, 니체가 시대와 대립하는 시간에서 니체의 관점으로 보자면, 니체는 그때의 현대 시대 자체가 반시대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반시대’는 현대가 된다. 따라서 니체는 시대적이고 그 시대가 시대에 역행한 반시대가 된다. 시대에 대립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시대를 만들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다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니체가 《반시대적 고찰》 제2부에서 ‘역사적 교양’이 삶에 봉사하는 방식을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1888년은 니체가 거의 그 자신의 마지막 활동 시기이다. 그는 이때 그의 저작들을 어느 어느 정도 정돈하고 서문들도 추가로 써넣었던 것 같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그때의 독일에서의 ‘최근 음악’이란 아마도 바그너 음악을 가리키는 것이 우세할 것이다. 《비극의 탄생》은 1872년에 출간되었고, 이 책과 같이 묶여 있는 《반시대적 고찰》은 1873~1874년에 쓰여졌다. 그 후 16년(책 12쪽 참조)이 지난 시점에 니체는 이 책에 서문(서곡)을 다시 썼다.
니체는 그때 《비극의 탄생》에 새로 쓴 글 「자기비판의 시도」를 추가하면서도 1888년 6월 26일에 라이프니츠의 나우만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기 시작하였고, 이 원고들을 다시 새롭게 정리하기를 반복하였다. 그리고 그해 9월 중순경에 『바그너의 경우』 초판이 발행된다. 어쩌면 니체는 그 자신의 건강상으로 마음이 급했을 수도 있고 초조함도 있었을 것이다. 무엇인가 마무리해야 하는 그 긴박함이 있었을 것이다.
1888년은 우리나라로서는 고종 25년이고, 독일은 ‘프리드리히 3세’가 독일제국 제2대 황제이자 프로이센 왕국의 제8대 국왕으로 취임하는 해였다.
그 해에 자유주의 정치사상을 가진 프리드리히 3세가 후두암으로 사망하자, 그의 아들 ‘빌헬름 2세’가 29세의 나이로 제위에 오른다. 빌헬름 2세는 개인통치를 주장하며, 해외로 적극적인 진출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비스마르크와는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빌헬름 2세의 목표는 대영제국에 버금가는 독일을 만드는 것이었다.
사회주의자법에 관해서 황제와 제상 비스마르크 간의 의견 불일치는 1890년에 비스마르크 해임으로 이어졌다. 여러 재상을 거친 후 카프리비 재상과 황제는 계속 진보정책을 추진하였는데, 보수당의 반발을 샀고 종내는 자유주의 세력의 반발로 확산되자 제상 카프리비의 퇴임으로 이어졌다. 신노선 정책은 중단되었고, 사회민주당의 약진에 황제는 크게 놀라서 황제는 사민당에 적대적으로 변했다.
빌헬름 2세 시기는 전반적으로 경제적으로 최전성기에 접어들었다. 이때의 외교정책은 비스마르크가 추진했던 평화적 노선을 포기하고 주변국들을 모두 적대시했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식민지 팽창에 나선다. 하지만 이미 독일제국이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을 때는 이미 영국과 프랑스 등이 모두 땅을 차지한 후였다. 결국 독일제국이 땅을 차지하려면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를 뺏는 방법뿐이었다. 이러한 대립은 ‘제1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경제적 팽창과 별개로 ‘세기전환기’로 불리는 빌헬름 2세 시기의 사회적 분위기는 퇴폐적이고 비관적인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세기말로 불리는 19세기 후반 유럽의 전반적인 경향이었다. 이 경향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와 함께 양가감정으로 공존하고 있었다. 이 시기 독일인들은 급속한 국력의 성장에 대한 자부심과 더불어 산업화가 가져온 급격한 사회변화가 초래한 노동문제 및 도시 문제 그리고 각종 사회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위기감과 불안감은 학문 및 예술 철학에도 반영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니체 철학, 데카당스 문학, 예술 등에 염세주의와 낭만주의가 반영되었다.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을 제1제국(첫 번째 라이히Reich), 바이마르공화국을 지나서 프•프 전쟁 후 독일 제국을 제2제국(두 번째 라이히Reich), 독일 나치를 제3제국(세 번째 라이히Reich)으로 불렀다. 그 후 독일은 ‘라이히Reich’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출처/나무위키에서- 독일역사,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제1차 세계대전에서 부분 발췌>
7) 실제로, 그동안 나는 아무런 희망도 가지지 않은 채 가차 없이 이 ‘독일 본질’에 관해 생각하는 법을 배웠으며, 철저하게 낭만주의이며 모든 예술 형식들 중에서 가장 비그리스적인 형식인 지금의 독일음악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독일음악은 신경을 가장 망가뜨리는 것이었고, 술 마시기 좋아하고 불명료함을 미덕으로 찬양하는 민족에게 황홀하게 만들고 동시에 몽롱하게 만드는 마취제로서 이중적 성격을 지닌 음악은 곱으로 위험한 것이었다.
=> 니체는 그 당시에 세기말적 현상인 ‘데카당스 예술’에 대해 반대했다. 그렇다면 데카당스는 비극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데카당스적인 현상은 고통의 현실을 바로 보지 않고 현실 도피를 한다는 것이다. 퇴폐와 쇠락을 상징하는 데카당스는 그 자체로 이상세계로의 도피이자 예술 안으로의 도피일 것이다. 당연하게 병약한 사회 현상이 생겨난다.
이에 반해 니체가 말하는 비극예술은, 아폴론적인 정신(이성)과 디오니소스적인 정신(광기)의 합일이다. 현실을 반영하는 디오니소스적 광기가 아폴론적 이성에 의해 조화롭게 포장된 것'이 그리스 비극이다.
아폴론적 이성은 디오니소스적 광기가 스스로 파멸로 빠지는 것을 막으며, 디오니소스적 광기는 아폴론적 이성이 현실의 삶을 외면하는 것을 막는다. 즉 밸런스balance 효과를 주는 것이다. 조화는 단순히 기계적 균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이며, 자율조절 시스템이기도 하다.
우리는 비극을 통해서 우연성, 한계성, 불합리성 등을 통해 논리적 이성으로는 도저히 건드릴 수 없었던 삶의 생생한 고통을 마주 볼 수 있으며, 또한 이것에 도취되어 하나가 됨으로써 우리의 정신을 보다 더 높은 단계로 고양시킬 수 있다.
따라서 삶의 고통에 대한 묘사는 바로 삶의 대한 찬미이며, 이를 보여주는 예술이야말로 자기긍정의 자양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폴론적 이성만을 중시하여 디오니소스적 광기를 제거한 ‘소크라테스’를 거치면서 디오니소스적 광기는 시들어버렸다. 그렇게 그리스 비극은 몰락했으며, 이를 계승한 기독교 전통에서 예술은 더욱더 상징화되고 관념화되면서 현실의 삶과는 상당히 멀어져 버렸다.
니체는 데카당스적 예술 또한 지나치게 낭만주의로 흐르면서 ‘비극 예술’을 왜곡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그리스 비극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의 건강했던 삶을 다시 되돌려놓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니체는 이러한 비극의 모습을 바그너의 초기 음악작품 속에서는 발견했지만, 점차로 바그너의 음악은 신학적으로 흐른다고 보았다. 오페라 <파르지팔>이 대표적이다.
비극을 접한 인간의 마음은 애도의 상태를 지나게 된다. 그리스인들은 ‘아킬레우스’가 일찍 죽은 것을 비통해한다. 비극은 어쩌면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애도’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애도를 통하여 현세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며, 열정과 고통의 대비에서 자연의 속성이 드러난다. 방식이다. 고통을 직시하는 것은 그만큼 더 강렬하게 생을 찬양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데카당스는 겉으로는 낭만적이지만 속은 허무이며 죽음이다. 아무 의욕이 없는 것이다. 반면 염세주의는 겉으로는 비극이지만 속은 긍정이며 삶이다. 니체는 데카당스적 낭만주의야말로 허무주의이며 부정적 염세주의라고 본 것이며, 역으로 비극적 예술은, 비극적 염세주의이며, 긍정적 염세주의라고 본 것이다. 이러한 대립은 겉으로 보면 반대로 보이지만 뒤집어 보면 제대로 보이게 된다. <나무위키와 내 생각 혼합>
8) 나는 가장 현재적인 것을 사용함으로써 나의 첫 번째 책을 망쳤는데, 이 현재적인 것에 대한 너무 성급한 희망과 잘못된 응용들과는 상관없이, 이 책에서 제기된 거대한 디오니소스적 물음은 음악에 관해서도 계속 적용된다.
9) 독일 음악과 같은 낭만주의적 기원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은, 즉 디오니소스적 기원을 가진 음악은 어떤 성질을 지녀야 하는가?
=> 비극적 염세주의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인간이 어떤 것을 감각하는 것은 ‘감수성’과 관계가 있다. 그런데 그 감수성의 균형의 정도에 따라 비역사성을 직관하는 초역사적인 인간의 정도가 결정되는 거라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