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려면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책을 읽으면 특히 철학이나 과학책, 그에 연동되는 자료조사가 필요하다. 그리고 자료조사를 통하여 얻은 정보의 압축이 필요하다. 그 압축은 그 자신의 정신에 스며든다. 그리고 그 자신에 맞게 변형되며 이내 사유의 뿌리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글의 씨앗이며 글을 쓸 수 있는 밑바탕이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반복적으로 실행한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 ‘자기비판의 시도’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역사를 공부하게 한다. 동시에 우리가 지각하고 있는 또는 기준점으로 보는 고대의 그 너머의 고대를 감각하게 한다. 이 영역은 상상의 영역이지만 우리가 사유를 통하여 감각하면서 느껴야 하는 지점이다. 그러므로 어떤 하나의 세계가 고대의 역사에는 항상 덧 씌워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잘 보이지 않는 그 미세한 막을 호메로스의 작품을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이며, 고대위에 겹쳐진 막 안의 사이를 통하여 고대 이전의 고대를 보게 되는 것이지 않을까. 그렇게 우리의 사유방식은 바로 그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 니체는 우리를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바로 비도덕적인 삶의 방식을 비역사적으로 인식하는 방법이다.
티치아노 베체리오의 '안드로스 섬의 바쿠스 축제'
아래는 책 본문을 옮긴 것이며, 그 아래는 《반시대적 고찰》 2부에서 ‘비역사적’이란 무엇인가? 에 대하여 발췌한 내용을 옮긴 것이다.
예술은, 도덕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본래의 형이상학적 활동으로 설정된다. 책 ‘비극의 탄생’ 안에서도 ‘세계의 실존’은 오로지 ‘미적 현상’으로만 정당화된다는 풍자적 명제가 여러 번 반복된다. 실제로, 이 책 전체는 오직 모든 사건의 배후에 있는 ‘예술가-의미와 예술가-배후 의미’만을 다룬다.
사람들이 원한다면, 하나의 ‘신’만을 다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 신은 전혀 걱정하지 않는 ‘비도덕적인 예술가-신’으로서 파괴에서뿐만 아니라 건설에서도, 악에서뿐만 아니라 선에서도 자신의 변함없는 쾌락과 독재를 느끼고자 한다.
그는 세계들을 창조하면서 풍요와 과잉의 궁핍으로부터, 자신의 내면에서 억압된 대립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 오직 ‘가상’ 속에서만 스스로를 구원할 줄 아는 가장 고통받는 자, 가장 대립적인 자, 가장 모순적인 자의 영원히 변전하고 영원히 새로운 환영인 세계는 매 순간 성취된 신의 구원이다.
사람들은 이 예술가-형이상학 전체를 자의적이고, 무용하고, 환상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본질적인 것은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실존의 도덕적 해석과 의미 함축에 저항했던 어떤 정신이 이 예술가-형이상학을 통해 이미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 여기서 ‘어떤 정신’은 자유주의 정신일 것이다. 니체는 자유주의 정신에 대해서 다른 책에서도 줄곧 말하고 있으니까.
여기서는 아마도 처음으로 “선악의 저편에 있는” 어떤 염세주의가 자신을 예고하고 있으며, 여기서는 쇼펜하우어가 이보다 앞서서 지칠 줄 모르고 분노의 저주와 번개를 퍼부었던 저 “정신 태도의 전도”가 서술되고 정식화된다. 이것은 감히 ‘도덕 자체’를 현상의 세계 속으로 옮겨놓고 끌어내리려는, 다시 말하자면 관념론적 용어의 의미에서의 “현상들” 아래로 뿐만 아니라, 가상, 망상, 오류, 해석, 치장, 예술의 아래로 끌어내리려는 철학이다.
어쩌면 이러한 반도덕적 경향의 깊이는 이 책 전체에서 기독교를 다룰 때 보이는 태도, 즉 조심스럽고 적대적인 침묵에서 가장 잘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를 이제까지 인류가 귀 기울여온 도덕적 주제의 극단적 구체화로서 다루고 있다.
실제로, 이 책이 가르치는 바와 같은 순수하게 심미적인 세계 해석과 세계-정당화에 대해 기독교적 교리보다 더 커다란 대립도 없다. 기독교적 교리는 오로지 도덕일 뿐이며 도덕적이고자 한다. 그리고 절대적 척도로써, 예를 들면 그것이 주장하는 ‘신의 진실성’으로써 예술을, 모든 예술을 거짓의 영역으로 추방한다. 즉 부정하고, 저주하고, 유죄 판결을 내린다.
그것이 실질적이고자 하는 한 예술에 대해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그와 같은 종류의 사고방식과 가치평가 방식의 배후에서 나는 오래전부터 또한 삶에 적대적인 것과 원한으로 가득 차고 복수심에 불타는 ‘삶에 대한 적의’를 느꼈다.
--> 니체는 도덕의 가치평가 방식이 오히려 예술에 적대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도덕은 삶에도 적대적이다. 왜 그럴까? 삶은 본래 비도덕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도덕은 망각하지 못하게 한다.
삶은 가상, 예술, 기만, 광학, 관점적인 것과 오류의 필연성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본질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삶에 대한 삶의 구토와 권태였다. 이것은 “다른” 혹은 “더 나은” 삶에 대한 믿음으로 단지 위장되고, 은폐되고, 치장되었을 뿐이다.
“세계”에 대한 증오, 감정에 대한 저주, 아름다움과 감성에 대한 두려움은 현세를 보다 잘 비방하기 위하여 내세를 만들어냈는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허무, 종말, 휴식, “안식일 중의 안식일”에 대한 열망이다.
이 모든 것이 내게는, 오직 도덕적 가치만을 타당한 것으로 통용시키려는 기독교의 무조건적 의지와 마찬가지로, “몰락에의 의지”의 모든 가능한 형식들 중에서 가장 위험하고 가장 무시무시한 형식으로 여겨지며, 적어도 삶에 대한 가장 깊은 질병, 피로, 불만, 고갈, 가난의 표시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도덕, 특히 기독교적인 무조건적인 도덕 앞에서 삶은, 삶이 본질적으로 비도덕적인 까닭에 늘 어쩔 수 없이 부당한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삶은 경멸과 영원한 부재의 무게에 짓눌려 갈망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무가치한 것으로 느껴져야만 한다.
도덕 자체는 어떠한가? 도덕은 “삶의 부정에의 의지”, 감추어진 파괴 본능, 몰락과 비난과 비방의 원리, 종말의 시작이 아닌가? 그리고 결과적으로 위험들 주의 위험이라고 한다면?
그리하여 나의 본능은, “삶을 옹호하는 본능”으로서, 당시 이 의심스러운 책을 씀으로써 ‘도덕에 대항’하여 도덕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나이 본능은 삶에 대한 근본적인 반대 이론과 반대 평가, 즉 ‘순수하게 예술가적이고 반기독교적인 반대 이론과 반대 평가’를 생각해 냈다.
그것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 문헌학자이자 낱말의 전문가로서 나는 그것을 어는 정도 자유롭게, 한 그리스 신의 이름으로 명명했다. 나는 그것을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 불렀다.
-->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비도덕적이며 비역사적인 것이다.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 2부에서 ‘비역사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부분을 옮겨 본다.
가장 작은 행복에서도, 또 가장 큰 행복에서도 행복을 행복으로 만드는 것은 언제나 하나다. ‘잊을 수 있다는 것’, 또는 학문적으로 표현한다면, 자신이 지속되는 동안 비역사적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과거의 것이 현재의 것의 무덤을 파지 않으려면, 과거의 것이 잊혀야 할 한도와 한계를 결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한 인간, 한 민족과 한 문화의 조형력이 얼마나 큰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조형력이란 스스로 고유한 방식으로 성장하고, 과거의 것과 낯선 것을 변형시켜 자기 것으로 만들며, 상처를 치유하고 상실한 것을 대체하고 부서진 형식을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이 힘을 거의 소유하고 있지 않아 단 한 번의 체험으로도, 단 하나의 고통으로도, 종종 단 하나의 연약한 불의로도, 단 하나의 조그만 상처로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피를 흘리는 사람이 있다.
다른 한편 가장 거칠고 끔찍한 삶의 재난이나 자신의 악한 행위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아, 그 와중이나 그 직후에도 평상시의 건강과 일종의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 한 인간의 가장 깊은 천성의 뿌리가 강할수록, 그가 과거로부터 습득하거나 갈취하는 것은 더 많아진다. 가장 강력하고 거대한 천성이 있다고 상상한다면, 그것을 식별할 수 있는 특성은 역사적 의미가 너무 무성해서 유해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한계가 그 천성에는 없다는 점이다. 이 천성은 자기 것이든 가장 낯선 것이든 과거의 모든 것을 끌어당기고 집어삼켜서 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소화 그리고 흡수). 그런 천성은 정복하지 못하는 것을 망각할 줄 안다. 정복하지 못하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지평은 닫혀 완전하며, 동일한 인간의 저편의 열정, 학습과 목표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단지 지평 안에서만 건강하고 강하고 생산적일 수 있다는 것은 보편적 법칙이다.
하나의 지평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길 능력이 없거나, 낯선 지평 안에 자신의 관점을 포함시키기에는 너무 이기적이라면, 그것은 지치거나 급격한 몰락으로 시들어갈 것이다. 명랑함, 양심, 즐거운 행위, 다가올 것에 대한 신뢰 이 모든 것은, 개인이나 민족에게서, 한눈에 개괄할 수 있는 것과 밝은 것을 밝힐 수 없는 것과 어두운 것으로부터 구분하는 하나의 선이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우리가 제때에 기억하는 것처럼 제때에 잊을 줄 아느냐, 우리가 힘찬 본능을 가지고 언제 역사적으로 느껴야 하고 언제 비역사적으로 느껴야 할지 감지해내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바로 이것이 독자들에게 한번 고찰해 보라고 권하고 싶은 명제다. 즉 비역사적 것과 역사적인 것은 한 개인이나 한 민족 그리고 한 문화의 건강에 똑같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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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인이 가진 역사적 지식과 감각은 아주 제한적이고 그의 지평은 알프스 골짜기의 주민처럼 매우 협소하며, 그는 얼마든지 부당한 판단을 내릴 수 있고, 자신이 모든 경험에서 최초의 경험자라는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 모든 부당함과 오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우 건강하고 씩씩하게 살고 있으며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해 준다. 반면 그의 바로 옆에는 그보다 훨씬 정의롭고 학식 있는 사람이 병약하고 쇠약한 상태로 있다. 그것은 그의 지평에 보이는 선들이 불안하게 항상 이동하기 때문이며, 그는 훨씬 더 부드러운 자신의 정의와 진리의 그물망에서 빠져나와 억센 의지와 욕망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반면 우리는 동물을 본다. 동물은 완전히 비역사적이며 거의 하나의 점과 같은 지평 속에서 산다. 그러나 동물은 적어도 권태와 왜곡이 없는 행복 속에서 살아간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어느 정도 비역사적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을 더 중요하고 더 원초적인 능력으로 간주해야만 할 것이다. 즉 올바르고 건강하고 위대한 것,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이 자라날 수 있는 토대가 그 안에 있는 한 그렇다.
비역사적인 것은 무언가를 감싸는 분위기와 비슷하다. 그 안에서 삶은 스스로 생성되고, 이 분위기의 파괴와 더불어 다시 사라진다. 인간이 사유하고 숙고하고 비교하고 분리하고 결합하면서 저 비역사적인 요소를 제한함으로써, 또 저 에워싸는 안개구름 안에서 밝은 섬광이 발생함으로써, 그리고 삶을 위해 과거를 사용하고 이미 일어난 것에서 다시 역사를 만드는 힘을 통해 비로소 인간은 인간이 된다.
그러나 역사의 과잉 속에서 인간은 다시 인간이기를 중지한다. 비역사적인 것의 껍질이 없다면 인간은 결코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며 감히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모두 사실이다. 인간이 먼저 비역사적인 것의 안개층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할 수 있는 행동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비극의 탄생’에서 대립하고 있는 것들>
기독교 vs 반기독교적인 것
도덕 vs 반도덕
소크라테스주 vs 디오니소스적인 것
낭만적 염세주의 vs 비극적 염세주의
삶의 부정에의 의지/감추어진 파괴 본능/몰락과 비난과 비방의 원리/종말의 시작
vs
삶의 긍정/가상/예술/기만/광학/관점적인 것과 오류적인 것/생성의 시작
구토/권태/허무/종말/휴식 vs 가상/망상/오류/해석/치장/예술
삶에 대한 깊은 질병/피로/불만/고갈/가난 vs 쾌락/독재
원한/복수/적대적/유죄/부정 vs 긍정/변전/영원/환영/성취/구원
아름다운 감성에 대한 두려움 vs 예술가-형이상학
감정에 대한 저주/감성에 대한 두려움/ 세계에 대한 증오/내세 vs 감성/아름다움/현세
* 사진 설명/ 아스펜도스 극장은 튀르키예의 안탈리아 동쪽에 위치한 고대 로마 시대 극장으로 현재는 유명한 관광지이다. 이 극장은 AD 2세기에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위해 건설되었으며, 1만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돌계단을 갖춘 웅장한 건물이다.
아스펜도스 극장은 세계에서 가장 잘 보존된 고대 로마 극장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 극장은 이오니아 양식의 벽과 무대, 대기실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아스펜도스 극장은 콘서트, 발레, 오페라 등 다양한 퍼포먼스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 상석 부분에 열 형태의 갤러리로 둘러싸여 있으며, 무대 양쪽의 갤러리를 통해 상석에 오를 수 있다. _나무 위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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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용한 글들은 전반적으로 나무위키 자료를 사용하였다. 가져 오기에도 용이하고, 내가 읽은 니체철학 책 느낌과 큰 충돌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