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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충동의 기원 그리고 꿈과 도취

비극의 탄생/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1장

by 아란도

* 이 글은 《비극의 탄생》 2부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1장의 전문 내용을 취사선택하여 글 전개를 재구성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줄 문장이 필요한 경우는 큰 따옴표로 인용하였고, 또는 '묶음'으로 인용하였습니다. '< >'이 표시는 글의 이해를 돕도록 소주제를 일부러 달아 놓은 것입니다.







<예술충동의 기원>

예술의 발전“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이중성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면서부터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메커니즘적’이다. “논리적인 통찰과 직관의 직접적 확실성”에 이르게 되는 것은 메커니즘의 형식을 발견할 때이다. 이로써 우리는 미학적인 소득을 얻을 수 있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이 명칭들은 그리스인들의 예술관에서 차용된 것이다. 그리스인들의 ‘예술적 비밀교의’는 개념을 통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신의 세계가 나타내는 매우 명료한 형상을 통해서, 통찰력 있는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알아보게 한다.


“그리스 세계에서 아폴론적 조각가의 예술과 디오니소스적 비非조형적 음악 예술 사이에는 그 기원과 목표에 따라 커다란 대립이 존재”한다는 우리의 인식은, 그들의 두 예술의 신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와 결부되어 있다.


니체는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를 통하여 “예술충동”의 기원을 밝히고 있다.

니체는 이 두 개의 힘을 “충동”이라고 말한다. 이 두 개의 ‘충동’이 바로 “예술충동”이다. 이 두 충동은 공공연하게 서로 대립하고 있다. “예술”이라는 말이 두 충동을 외견상으로만 연결시키고 있다. 이 두 ‘충동’은 대립의 투쟁을 자신들 안에서 지속하도록 만드는 원동력이다. 두 충동은 더 강력하게 재탄생할 수 있도록 서로를 ‘상호 자극’하면서 공존한다. 상호 자극은 곧 '관계'적이라는 의미이며, 상호작용 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물리학에서 '관계와 상호작용'은 양자 중력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용어들을 일상에서 숱하게 이미 사용하고 있다.

이 충동들은 그리스적 “의지”의 “형이상학적 기적 행위”를 통해 마침내 서로 결합하여 나타난다. “이 짝짓기를 통해 마침내 디오니소스적이기도 하고 아폴론적이기도 한 “아티케 비극”을 산출”한다. 이 짝짓기는 바로 최초의 ‘결혼’적인 형태다. 아티케 비극은 고대 아테네가 있던 그리스의 아티케 주를 의미한다. 그 지역에서 행해졌던 비극이다.



남쪽에 아테네가 포함된 그 반도 전체가 '아티케' 지역






<꿈과 도취> 꿈

이 두 “충동”을 우선 “꿈과 도취”라는 ‘상호 분리된 예술 세계’로 생각하는 것이 이해하기에 더 수월하다. 꿈과 도취는 우선 생리학적 현상이다. 즉 우리 신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 생리학적 현상들 사이에,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관계에서와 같은 대립이 발견”된다. 즉 꿈과 도취 역시 서로 대립이 있다는 것이다.


니체는 “꿈”, 우리가 잠을 잘 때 꾸는 꿈이 아폴론적 예술의 기원이라고 밝히고 있다. 고대 사람들은 꿈을 통하여 그들 신의 형상을 감각한 것이다. 고대인은 꿈의 해석을 통하여 현실 세계를 판단했다. 그리스인은 꿈의 해석을 통하여 그들 신의 세계를 조각으로 구현하였다.

루크레티우스의 생각에 의하면, 장엄한 신들의 형상은 꿈속에서 처음으로 인간의 영혼 앞에 나타났으며, 위대한 조각가는 ‘꿈’속에서 초인적 존재의 매혹적인 신체구조를 보았다. 그렇게 자신이 본 그 신체구조를 조각한 것이다.

이를 꿈의 영감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나는 간혹 무엇인가를 할 때 어떤 느낌이 내 안에서 생성되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을 구현하고자 하지만 그것은 늘 처음과는 다른 형태, 그러니까 그 자체의 것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하곤 하였다. 그러므로 내 안에서 생성된 그것은 ‘예술충동’이라고 보이며, 드러난 것은 ‘예술’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그러하다는 의미이다.


니체는 한스 작스를 통하여 “시적 창조”의 비밀을 알려주고 있다. 한스 작스가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꿈’을 상기하거나 그와 비슷한 것을 연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시인 ‘한스 작스’가 ‘직장가인職匠歌人’이라는 노래에서 전해준 가르침과 같다.


나의 친구여
자신의 꿈을 해석하고 기억해 두는 것
바로 그것이 시인의 일이다
나를 믿어라
인간의 가장 진정한 환상은 꿈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모든 시 예술과 시작詩作은 다름 아닌 예언적 꿈의 해석이다

“시작詩作”이라는 말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시작은 ‘시를 짓는 일이로구나!’


꿈의 세계의 아름다운 가상은, 모든 조형예술의 전제 조건이다. 꿈의 세계의 아름다운 가상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모든 인간은 완전한 예술가다. 그것은 시문학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의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우리는 형상을 직접적으로 이해하면서 즐기고, 모든 형식들은 우리에게 말을 건다. 중요하지 않은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이러한 꿈 현실이 전개되는 최고의 삶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이 “가상”이라고 어렴풋이 느낀다.
적어도 나의 경험은 그렇다. 이것이 자주 일어나고 정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나는 많은 증거와 시인들의 잠언을 제시할 수도 있다.
철학적 인간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존재하는 이 현실의 밑에는 전혀 다른 하나의 현실이 놓여 있고, 그 현실도 또한 ‘하나의 가상’이라고 ‘예감’하기도 한다.




니체는 그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그리고 시인들의 잠언을 통하여 그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고 있다. 경험 + 사례를 통하여 그 자신이 발견한 그리스 예술의 미학의 기원을 펼쳐내고 있다. 모두가 꿈을 꾼다고 하여 그 꿈이 다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어떤 감지 능력과 연계된다. 바로 그것은 ‘예술적으로 민감한 인간’을 의미한다. 쇼펜하우어는 바로 예술적 민감성을 하나의 ‘재능’으로 보았다.

“철학자가 실존의 현실을 대하는 것처럼, 예술적으로 민감한 인간은 꿈의 현실을 그렇게 대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러한 형상들에서 삶을 해석하고, 이러한 과정들에서 그는 삶을 위해 연습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철학자가 보는 세계를 예술적으로 민감한 사람에게도 적용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달라 보이지만 그 안은 같은 구조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것은 서로 호환되어 통하기 마련이다. 메커니즘이 동일하면 그것은 이것과 저것을 계속하여 링크시킨다. 여기서 나는 일부러 ‘링크’라고 썼다. 연결이나 링크나 같은 의미이지만, 링크가 더 직접적으로 ‘범주화’ 상태의 이미지를 더 부각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링크는 직관적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이때의 직관은 매우 논리적으로 서로 연결시켜야 할 것들을 잇는다고 생각한다. 그로써 하나의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니체가 1장의 첫 줄에서 쓴 문장에서,

“세대가 지속적으로 투쟁하면서, 단지 주기적으로 화합하는 남성과 여성의 이중성에 의존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이 유사한 방식이 바로 메커니즘의 '자가 복제'를 의미한다고 여긴다. 하나의 메커니즘은 어떤 사건들에 계속 복제된다. 그러므로 어떤 사건의 구조는 모두 동일하다. 다만 차이는 양상의 차이이다. 그 방식이 예술에도 복제되고, 그 메커니즘을 보는 철학자의 민감성처럼 예술에 민감한 인간 역시 철학자의 민감성과 유사한 민감성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니체는 ‘유사성’이라고 하였지 동일성이라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메커니즘의 구조는 동일하지만, 인간과 예술 또는 철학자의 민감성과 예술에 민감한 인간 그 자체는 서로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남녀의 차이 그 정도의 차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남녀는 인간의 신체형상이라는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 차이를 ‘유사성’으로 부르고 있다고 생각된다. ‘민감성’이란 것도 철학자가 포착하는 것과 예술적으로 민감한 인간이 포착하는 것의 차이이지, 민감성 그 자체의 기능은 본질적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탑재하고 있는 동일한 기능이다. 예민성의 차이일 뿐이다.


니체의 이러한 사유방식을 나는 ‘연결적 사유’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유 방식을 통하여 우리는 또 다른 것을 파악하며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결적 사유방식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우리가 아는 역대 인물들 및 그 이후의 인물들은 ‘연결적’ 사유 방식을 통하여 그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였고 그것을 다시 수렴시켰다. 하나의 범주다발은 하나의 의미로 수렴된다. 니체는 그 자신이 발견한 그리스 비극예술을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압축하였다. 결국 개념화한 것이다. 의미는 바로 이 압축을 다시 풀면 튀어나온다.






<꿈 - 아폴론적 형상의 유래>

그리스인들도 꿈 경험의 이러한 즐거운 필연성을 그들의 아폴론 속에 표현했다. 모든 ‘조형력’의 신 아폴론은 동시에 예언하는 신이다. 그 뿌리에 따라 “빛나는 자”, 즉 빛의 신인 그는 내면적 환상 세계의 아름다운 가상까지도 지배한다.
불완전하게 이해되는 대낮 현실과 대립하는 이러한 상태의 보다 높은 진리와 완전성, 나아가 잠과 꿈속에서 치유하고 도와주는 자연에 관한 심오한 의식은 동시에 예언하는 능력의 상징적 유사물이다. 또한 삶을 가능하게 하고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예술 일반에 대한 상징적 유사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꿈의 형상이 병리적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넘지 말아야 할 저 민감한 경계선도 아폴론의 모습에서 없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가상”은 졸렬한 현실로서 우리를 기만하게 될 것이다. 적절한 한계 설정, 광폭한 격정으로부터의 자유, 조형의 신의 지혜로운 평정이 그것이다.
그의 눈은, 그 근원에 맞게, “태양다워야” 한다. 그가 화를 내고 불쾌하게 바라볼 때에도 아름다운 가상의 성스러움은 그에게 서려 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권, 416쪽을 인용하고 있다.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채 포효하며 산과 같은 파도를 올랐다 내렸다 하는 광란의 바다 위에서, 한 뱃사람이 조각배 위에, 그 허약한 배를 신뢰하며 앉아 있는 것처럼, 고통의 세게 한가운데서 ‘개별적인 인간’은 ‘개별화의 원리’를 의지하고 믿으며 고요하게 앉아 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마야(환영)의 베일 속에 사로잡힌 사람들’에 관해 한 말은, 약간 벗어난 의미이긴 하지만 아폴론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보았다.

“고통의 세계 한가운데서 개별적인 인간은 ‘개별화의 원리’를 의지하고 믿으며 고요하게 앉아 있다”는 이 문구를 니체는 아폴론의 형상에 적용한다.



<숭고/환희/쾌감>

그 원리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뢰와 그 안에 사로잡혀 있는 자의 ‘고요한 정좌’가 아폴론의 형상 속에 가장 ‘숭고’하게 표현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아폴론 자체를 “개별화의 원리 principii individuationis"의 장려한 신상神像아라고 부르고 싶을 것이다. 그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가상“의 쾌락과 지혜 전체가 그의 태도와 눈길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건넬 것이다.


이러한 니체의 아폴론 감상은 간다라 미술에 영형을 받은 ‘경주 불국사 석굴암 본존불’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비록 그리스 시대와 시간차를 두고 조각된 불상이기는 하지만, 아폴론적인 이상은 그대로 석굴암 본존불의 이상이기도 하다. 조형예술로 따지면 그것은 같은 것이다. 이 유사성에서 우리는 어떤 동일한 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이 인상은 인간이 아름다움을 구현할 때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개별화의 원리’는 ‘인간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드러난 상태‘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아폴론의 고요한 정좌를 보며 숭고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것의 독립성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꿈에서 아름다운 신체를 보았고, 그 신체를 조각하였다 하여도 그것은 꿈의 재현이 아니다. 밖으로 드러난 그 조각은 개별적인 것이다. 독립된 것은 그 자체의 결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그때 느끼는 감정은 바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이며 환희다.


여기서의 이 환희와 전율의 적용은 고대의 그리스와는 다르다. 굳이 그리스에 비유한다면, 동양의 대승불교는 민중들에게 적용될 때 '소크라테스적 이성주의'가 더 작용했다고 보인다. 그리고 어쩌면 선불교에서의 '할'이나 '방' 그리고 선사들의 기이한 행각은 오히려 디오니소스적 충동의 힘을 활용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해서 그 힘은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힘은 아니었다. 그러나 선불교는 점차로 '소크라테스적 이성주의'가 보편화되었다고 보인다.




성 요한 축제의 주인공은 천주의 요한이다 / 여기서 성자는 '천주의 요한'을 가리킨다. 성자는 아픈 사람을 안고 땅에 쓰러지고, 가브리엘 대천사가 기적적으로 나타나 그를 도와준다.


<전율과 도취>

같은 곳에서 쇼펜하우어는 무시무시한 “전율”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 전율은 근거에 대한 원리, 즉 ‘근거율根據律’이 ‘자신의 여러 형태들 중 어느 하나에서 예외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임으로써 인간이 ‘현상의 인식 형식들’에서 ‘갑자기 혼란스러워할 때’ 그를 ‘장악’한다.
만약 개별화의 원리가 깨졌을 때, 인간의 가장 깊은 근저로부터, 즉 자연으로부터 솟구쳐 나오는 환희에 찬 황홀을 이 전율과 함께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본질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니체의 이 문장은 다소 혼란스럽다. 사실 이렇게 혼란스러울 때, 어쩌면 우리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본질’을 엿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머릿속에서는 어떤 무엇이 떠오르는 것 같은데 그것이 잘 잡히지 않고 문장으로 만들어지지 않을 때, 나는 머릿속이 혼란스럽다고 여긴다.

그것이 나에게로 와서 내 안에서 환하게 차오른다면 그것은 개별화가 된 것일 것이다. 예컨대 그리스인들이 아폴론 앞에 섰을 때 그 자신과 아폴론의 일대일 대응에서 어떤 느낌을 받았다면 그것은 예술적 감응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 니체는 “ 근거율根據律이 ‘자신의 여러 형태들 중 어느 하나에서 예외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임으로써 인간이 ‘현상의 인식 형식들’에서 ‘갑자기 혼란스러워할 때’ 그를 장악” 한다고 하였다. 근거율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이론이다. 근거율(생성, 인식, 존재, 행위)은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네 가지 범주로 구성된다. 이 이론의 핵심은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에 대한 근거를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는 지금 세상을 인식하는 이 네 가지 근거가 깨졌을 때를 상정하고 있다.


즉, 개별화의 원리로써 구현된 아폴론 신상을 보고 일대일 예술적 감응을 받은 환희감 상태에서 더 깊이 들어가 그 세계 안에 갇힌 것을 의미한다고 보인다. '물아일체, 합일된 상태'가 된 것이다. 니체는 이 상태를 '도취된 상태'로 본다. 이 상태는 '자기를 잊어버린' 상태다. 자기를 잊어버릴 때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본질을 엿보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를 잊어버리는 상태로 들어갈 때 인간은 “전율”과 동시에 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니체는 여러 축제들을 예시로 든다. 성 요한제, 성 파이트제, 소아시아의 바빌론의 축제, 고대 이란 고원의 사카이엔 족의 축제 등등, 이러한 축제는 그리스인의 바코스제의 합창단의 모습을 재인식하게 한다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축제를 경험의 결여나 둔감으로 인해 “민족 병”인 것처럼 조소하거나 동정하는 사람들을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니체가 “도취”를 말할 때 ‘환각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니체가 말하는 도취는 예술적 충동으로부터 비롯된 도취다. 이 환각 상태는 터키의 ‘슈피니즘의 세바 춤’처럼 인간의 신체를 이용한 것이다. 우리가 예술 작품을 만들거나 감상할 때, 그것은 구체적 행위로부터 비롯된다. 그것은 행위를 통하여 들어가는 세계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바쿠스제의 합창단도 목소리를 통하여 그 열기가 고조됨에 따라 하나의 세계를 열었던 것이리라. 그리되면 그 안에 함께 있는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연결된다. 자기를 잊어버린 상태는 바로 하나가 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만약 둔감하여 그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면, 그 사람이 보기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상한 사람들’로 보일 것이다. 어쨌든 예술적 효과는 모두 이러한 것을 의도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어떤 작품이 그 사람에게 그 자신을 망각하도록 만들지 못한다면 그 예술은 의도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예술작품은 일대일 감응이지만, 비극은 집단무와 같다. 즉 고대 극장 예술은 극장 안의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효과는 로마의 콜로세움으로 변환되어 활용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대에서도 소극장 연극이나 어떤 영화들은 사람들을 하나로 만든다. 그리고 월드컵 경기도 비근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니체는 지금 이러한 효과들 그 자체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를 인식하고 개별화로 살아야 하는 존재이고 현대는 개인의 시대이므로 더욱더 그러하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를 잊어야 더 큰 자기로 거듭나게 된다. 아마도 비역사적인 인간 유형이 그러한 사람들일 것이다. 현존재도 비역사적 인간 유형에 해당하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우리는 보편적으로 역사에서 그러한 유형의 사람들을 발견한다. 이미 역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현재처럼 계속 변화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역사적인 인물에 대해 해석은 시대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어떻게 그 시대와 가장 부합하게 잘 해석해 내는가에 따라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 비역사적인 인간이 역사에서 다른 위치를 갖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가 한 행위가 바뀌는 것도 아니다. 역사에서 시대의 망각을 거치고 계속 살아나는 그런 사람들이 아마도 그러한 유형의 사람일 것이다. 역사 안에서의 망각이 가능한 이유는 현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럴 때 신화가 되는 것일 것이다. 자기를 잊었을 때 인간은 인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아마도 내 생각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일단 한 사람만 천거하라고 한다면 ‘이순신’을 비역사적인 인간으로 꼽고 싶다.





니콜라 푸셍/ 판의 동상 앞에서 춤 추는 바쿠스 신도들




* 삽입한 모든 그림 출처는 '나무위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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