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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적인 예술가, 그는 "누구"인가?

비극의 탄생/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5장

by 아란도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제5장 p49~56







<니체가 추구한 연구의 본래 목적>


니체는 그 자신의 본래적 연구 목적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바로 “디오니소스적 - 아폴론적 수호신”과 “그의 예술 작품을 인식”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 인식을 통하여 “디오니소스적 - 아폴론적 수호신”에 대한 “통일성의 신비”를 “예감하고 이해”하려 한 것이었다.


5장에서는 우선 디오니소스 축제의 물결이 들이친 이후에 “비극”과 “연극적 디오니소스 송가”로 발전해 갔던 그 ‘새로운 싹’이 그리스 세계의 ‘어디에서’ 처음으로 보였는지를 묻고 있다.


이러한 것에 관해서는 그리스의 ‘고대 자체’가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고대 사회는 그리스 문학의 시조이자 봉화 전달자로서 “호메로스(약 BC800~BC750년경)와 아르킬로코스(약 BC675~BC635년경)”를 조각품, 보석 등 위에 새겨 넣었다. 그 이유는, 이 두 사람만이 완전히 똑같이 독창적인 기질을 지녔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한 백발의 예술가이며 아폴론적인 소박한 예술가의 전형인 ‘호메로스’는 이제 실존을 거칠게 살아온 전투적 뮤즈의 시종 ‘아르킬로코스’의 열정적인 머리를 경탄하며 바라본다.”

이 문장은 상징적 표현이다. 호메로스는 아르킬로코스 보다 대략 100년 정도 앞선 시대의 서사시인이다. ‘백발의 예술가’라는 니체의 표현은 아르킬로코스의 입장에서는 그럴 만하다. 나무위키에 나와 있는 기록으로 보자면, 호메로스는 50세 정도 살았고, 아르킬로코스는 40년 정도 살았다. 요즘 기준으로 보자면 두 사람은 젊어서 죽었다.


아르킬로코스는 호메로스와는 다른 관점으로 서사시를 남겼다. 전쟁을 직접 겪은 아르킬로코스의 실존은 호메로스와는 다른 관점을 가지게 하였다. 니체가 주목한 부분도 바로 그러한 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아르킬로스의 작품들에서 호메로스와의 ‘차이’를 발견할 것이다. 니체의 연구 목적은 바로 이 ‘차이’가 어떤 차이인가? 하는 것이다. 니체의 “그리스 비극 연구 목적”은 그 차이가 발생한 원인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기저에 깔린 메커니즘을 밝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서정시인의 미학적 형이상학>

근대 미학에서는 “객관적 예술가” 앞에 최초의 “주관적 예술가”가 ‘대립’되어 나타났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우리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니체는 말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주관적” 예술가를 ‘나쁜’ 예술가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술의 모든 종류와 단계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먼저 주관적인 것의 극복을 강요받는다. “나”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모든 ‘개인적 의지’와 ‘욕망의 억제’를 요구받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한편으론 사심 없는 순수한 직관이 없다면 전혀 진정한 예술가적인 생산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서정시인’은 예술가로서 가능한가?>

니체는 이 문제에 대해, 우선 ‘우리의 미학’이 ‘서정시인’은 예술가로서 가능한가?라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의 미학이 의미하는 바는 ‘자유주의 미학’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근대 미학과 차별화를 꾀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 ‘차별화’에 의해 근대 미학을 넘어서려는 니체의 의지가 담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서정시인’은 모든 시대의 경험에 따르면 항상 “나”를 말하고, 자기의 열정과 욕망의 반음계 모두를 우리 앞에서 부른다. 바로 아르킬로코스는 호메로스 곁에서, 증오와 조소의 외침을 통하여 도취상태에서의 자기 욕망의 분출을 통하여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니체는 '최초의 주관적 예술가'로 불린 아르킬로코스는 예술가가 아니라고 말한다. 니체는 르킬로코스는 “본래 비예술가가 아닌가?”라고 자문한다. 니체의 문제의식은, 객관적 예술가와 대립되는 '주관적 예술가'는 종래의 예술적 개념에서 보자면, '예술가가 아니다' 라는 의미이다.

욕망의 분출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형태를 근대미학에서 “주관적”이라고 부른다면, 주관성은 예술적인 것이 아닌 것이 되니까 말이다.


근대미학에서 “객관적 예술가” 앞에 “주관적 예술가”가 나타났다고 말하는 그 뉘앙스는 그러므로 어느 정도는 언어유희적이었던 표현이었던 것이다. 진지한 표현이 아니었다.



또 한편으로 근대미학에서 “주관적 예술가”라고 명명한 이유는 진정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형식상에서 일 뿐인 것이다. 왜냐하면 근대는 오히려 모든 개인적 의지와 욕망의 억제를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니체는 “근대 미학에서는 “객관적 예술가” 앞에 최초의 “주관적 예술가”가 ‘대립’되어 나타났다 라는 해석이 우리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주관적 예술가에 대한 전혀 이해 없는 해석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주관적 예술가는 “누구” 인가?>

“ 객관적 예술의 근원지인 델포이의 신탁조차도 매우 진기한 발언을 통해 아르킬로코스에게 보여 준 그 찬양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


이에 대해 우선 니체는 시인 ‘실러’가 자신의 시작詩作 과정을 해명하는 부분을 인용한다.


<실러의 시작詩作>

실러는 자기 자신에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심리학적 관찰을 통해 자신의 ‘시작詩作’ 과정을 해명했다. 그는 시작 행위와 준비 상태에서 사상의 질서 정연한 인과율에 따라 배열된 일련의 영상들 같은 것을 자신 앞에, 그리고 자신의 내면 안에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음악적 기분을 느낀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 느낌은 내게 있어서 처음에는 일정하고 명료한 대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대상은 그 후에 비로소 형성된다. 어떤 음악적 기분이 먼저 일어나고, 이를 뒤쫓아 비로소 시적인 이념이 떠오른다.”
어디에서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서정시인과 음악가의 결합”, 아니 ‘동일성’이라는 고대 서정시 전체의 가장 중요한 현상을 함께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제 서정시인을 앞서 서술된 ‘미학적 형이상학’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니체는 실러의 ‘시작詩作’을 예로 들면서 바로 그것을 고대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킨다. “어떤 음악적 기분이 먼저 일어나고”에 그 해답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음악적 기분’은 미학적 형이상학으로만 설명할 수 있다.







<미학적 형이상학>


니체는 실러의 ‘시작詩作’을 이렇게 비유하여 설명한다. 니체가 비유하여 표현한 개념들은 앞 장에서 니체가 이미 설명한 부분들이므로, 거기에 대입하는 것이다. 니체가 설명하는 것은 메커니즘이다. 즉 공식인 것이다. 그러니 대입만 하면 된다. 여기서 ‘서정시인’은 곧 ‘실러’ 자체를 의미함이 아니다. 여기서 니체가 가리키는 “그”는 바로 “세계 수호신”이자 “서정적 수호신”이다. 그러므로 니체가 ‘서정시인’이라고 말할 때, 이때의 서정시인은 ‘세계 수호신’을 가리킨다. 또는 서정적 수호신이라고도 표현하고 있다.

‘서정시인’은 우선 ‘디오니소스 예술가’이다. 니체는 앞서 ‘2장’에서 예술가적인 힘들에 대해 말했다. "이 힘들은 자연 자체로부터 인간 예술가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솟아 나오며, 자연의 예술 충동들은 이 힘들 속에서 처음으로, 직접적으로 충족된다”라고 말했다.


한 번은 꿈의 형상 세계로서(아폴론적 환영), 또 다른 하나는 도취적 현실로서(신비주의적인 일체감/합일), 이것은 자연의 직접적 예술 상태이며, 따라서 모든 예술가는 “모방자”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그리스 비극에서처럼 “도취와 꿈의 예술가”이다. 이 세 번째 예술가는 아폴론적인 꿈의 예술가와 디오니소스적 도취의 예술가가 혼합된 상태로 나타난다. 이 결합을 니체는 짝짓기 또는 비밀스러운 결혼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이 결합이 ‘아티케 비극’을 산출하였다고 말했다.


니체의 말에 따르면, 자연은 ‘인간 예술가’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솟아 나온다. 자연 그 자체의 힘으로 나온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것이 ‘예술 충동’의 본질일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세 번째 예술가 즉 "결합"으로 나타난 예술가 즉 ‘디오니소스적 예술가’ 일 것이다. ‘그리스 비극’은 이 디오니소스 예술가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비극의 본질’은 이 서정성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바로 서정성 그 자체일 것이다.




디오니소스 예술가로 니체는 아르킬로코스를 말한다. 그리고 아르킬로코스를 통하여 “미학적 형이상학”의 과정을 탐구한다.



‘4장’에서 니체는 ‘근원적인 일자一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정으로 존재하는 자, 근원적인 일자一者는 영원히 고통받는 자와 모순에 가득 차 있는 자로서 자신의 지속적인 구원을 위하여 동시에 ‘매혹적인 환영’과 ‘즐거운 가상’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매혹적인 환영’은 아폴론적인 꿈의 세계이며, ‘즐거운 가상’은 디오니소스적인 도취의 세계이다. 니체는 ‘2장’에서 아르킬로코스를 디오니소스 축제의 합창단에 비유한다.


“그는 디오니소스적 도취의 신비주의적 ‘자기 포기의 상태’에서 열광하는 합창단으로부터 동떨어져 홀로 쓰러진다. 그리고 아폴론적 꿈의 영향을 통해 자신의 독특한 상태인 세계의 가장 내면적인 근거와 하나가 된 자신의 상태가 ‘비유적인 꿈의 형상’ 속에서 그에게 나타난다.”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미학적 형이상학”은 이 문장에 압축되어 있다. 이러한 비유가 5장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근원적 일자一者>

‘근원적 일자一者’는 그의 고통 및 모순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서, 그 자신의 ‘모상模像’을 음악으로 만들어낸다. 이 음악은 ‘세계 수호신’인 그에게 마치 ‘비유적인 꿈의 영상’에서처럼 ‘아폴론적 꿈’의 영향을 받아 가시화된다. ‘영상도 없이 개념도 없이’ 이루어진 ‘음악 속’에서의 ‘근원적 고통’의 저 반영은 “가상” 속에서 구원됨으로써 ‘개개의 비유적 표본’을 산출한다.


위의 이러한 설명은 “디오니소스적 과정”을 드러낸 것이다. 이 디오니소스적 과정을 거친 것은 모두 “디오니소적인 것”이다. 니체가 「자기비판의 시도」 1부 7장에서 ‘명명’했던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니체는 이 과정에서 “예술가는 이미 디오니소스적 과정에서 자신의 주관성을 포기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의 의미는, “신비한 자기 포기”와 연관된다. 즉 자기망각이다. 어떤 힘과 하나 되는 것은 “자기 포기의 높이에 도달해 있어야 한다”라고 니체는 2장 39쪽에서 이미 말했다.


자연의 본질이 상징적으로 표현되려면 ‘새로운 상징의 세계’가 필요하다. 입, 얼굴, 말 그리고 춤의 몸짓 그리고 리듬의 강약과 화음을 통한 음악의 상징적 힘들이다. 마음을 흔드는 음조의 힘, 멜로디의 통일적인 흐름, 화음의 세계는 모두 새로운 상징의 세계이다. 이 모든 상징적 힘들의 총체적 발산을 파악하려면, 인간은 저 힘들 속에서 상징적으로 스스로를 표현하고자 하는 자기 포기의 높이에 도달해 있어야 한다.

즉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더 큰 것과 합일하려면 “자기를 포기”해야 한다. 나를 잊고 더 큰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때 그 자신이라는 개인은 없다. ‘나’라고 하는 ‘자아’는 사라진다. 도취의 세계는 하나의 세계를 지우고 또 다른 하나의 세계가 드러난다. 이때 이 상태에서 예술가에게 “세계의 가슴”과 하나가 되었음을 알려주고 보여주는 영상은 바로 “ 꿈의 장면들”이다. 이 영상은 ‘가상의 근원적 쾌락’과 함께 ‘근원적 모순’, ‘근원적 고통’을 “구체화”한다.

이 영상은 바로 “아폴론적 환영”을 의미하는 것일 거다. 우리는 니체의 이러한 표현을 ‘동영상적’ 동적 영상이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니체는 서정시인의 “나”는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울려 나온다고 말한다.






<디오니소스적 과정을 도식화>

아르킬로코스를 예시로 들겠다.


아르킬로코스 심연에 영원히 고통받는 자이면서 모순에 가득 차 있는 근원적인 일자一者가 있다. 그런데 이 일자는 “예술 충동” 그 자체다. 이 충동은 그 자신의 고통과 모순과 합일한다. 그리고 그 자신의 모상을 만들어 송출한다. 바로 그것이 음악적인 기분이다. 이 음악적인 기분에 의하여 영상이 만들어진다.


이 영상이 만들어지면 자기를 망각한 서정성의 세계 수호신은 이 영상에서 비유적으로 표본을 산출한다. 바로 산출된 그것이 예술 작품이 된다. 서정시인 것이다. 아르킬로코스는 이때 세계 수호신의 환영에 불과하다. 이때의 아르킬로코스는 도취 상태에서 이미 자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가상 세계의 세계 수호신이 드러난 것이다. 도취 상태란 바로 ‘가상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가상 세계로 들어가려면 자기를 포기해야 한다. 즉 자아를 의욕 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함으로써 더 큰 대아와 합일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세계 수호신이 드러나며, 이 수호신을 통하여 창작이 진행된다. 그리고 여기서 “나”라고 하는 것은 세계 수호신이다. 또한 니체가 ‘서정시인’이라고 말하는 자도 바로 세계 수호신을 가리킨다.


세계 수호신이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이러하다. 서정시인의 영상들은 그 자신과 다를 바 없고, 그것은 자기 자신의 다양한 객관화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수호신은 저 세계(가상 세계)의 움직이는 중심으로서 “나”를 말해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근대의 미학자들은 이것을 도외시하고, 아르킬로스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며, “주관적 예술가”라고 말한 것이다.


니체는 이에 근대의 미학자들이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주관성”은 하나의 망상이라고 말한다. 니체는 여기서 아르킬로스는 수호신의 환영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즉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세계 수호신에게 자리를 내어준 것이다. 그때 가상 세계에서 자아는 망각된다. 아르킬로스는 실존 세계에서 자아가 있는 아르킬로스이고, 가상 세계에서 아르킬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존하는 아르킬로코스는 꿈의 영상(환영)을 통해 세계수호신이 비유들을 본다.


그러므로 세계 수호신의 작품은 이미 자기 객관화를 실현하였기에 주관적 작품이자 주관적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따질 때, 세계 수호신(서정시인)은 자기 앞의 인간 아르킬로코스의 현상만을 영원한 존재의 반영으로 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세계 수호신은, 깨어 있고 경험적 현실적인 인간의 자아가 아니라, 진실로 존재하는 유일한 자아, 사물의 근거에 놓여 있는 영원 자아다. 서정적 수호신은 이러한 ‘자아의 모상’을 통해 사물의 저 근거까지도 꿰뚫어 본다. 가상 세계의 주인은 서정적 수호신이다. 곧 본질이다.








“서정시인 아르킬로코스가 ‘뤼캄베스의 딸들’에게 자신의 미친 듯한 사랑과 경멸을 알린다면, 그것은 우리 앞에서 ‘도취의 황홀경’ 속에서 춤추는 그의 열정이 아닌 것이다.”
“ 우리는 디오니소스와 그의 여자 시종들을 본다. 우리는 도취한 열광자 아르킬로코스가 쓰러져 잠자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이제 아폴론이 그에게 다가와서 월계수 잎으로 그를 건드린다. 잠자는 사람의 디오니소스적-음악적 마력은 이제 영상의 불꽃처럼 그의 주변에서 빛을 내면서 작열한다. 이것이 바로 최고로 발전한 비극과 연극적 디오니소스 주신 찬가로 불리는 서정시들이다. ”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서정시들의 표현이고 상징적이다. “춤추는 것은 그의 열정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아르킬로스 그 자신의 열정이 아니라 “세계 수호신” 의 열정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도취하여 춤추다 쓰러져 자고 있는 아르킬로스를 월계수 잎으로 건드린 아폴론의 행위는, 바로 ‘아폴론적 환영’을 불어넣고 있는 행위다. 이것은 모두 상징적 표현들이다. 자연의 “두 예술 충동”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계는 조각가 및 서사 시인의 세계와는 아주 다른 색조와 인과율의 속도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서 “이 세계"는 바로 '하나의 영상‘이며 비유의 세계이다. 즉 '가상의 세계'이다. 그리고 '조각가' 및 '서사시인'은 아마도 "아폴론적 예술가와 호메로스"를 의미할 것이다. 즉 환영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인 가상 세계(도취의 세계)를 가리킨다. 환영의 세계는 순수한 관조에 침잠해 있고, 가상의 세계는 자기 객관화를 한다는 의미다.











<쇼펜하우어의 음악의 형이상학과 니체의 난제 해결>


서정시인이 철학적인 예술의 고찰에서 만들어내는 어려움을 감추지 않는 쇼펜하우어는 하나의 탈출구를 발견했다고 믿고 있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그와 함께 이 길을 갈 수 없지만, 어려움을 결정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수단이 그의 손에, 그의 심오한 음악의 형이상학에 주어졌다. 나는 그의 정신을 계승해서 그리고 그의 명예를 위하여 여기서 그 어려운 문제를 해결했다고 믿는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권, 295쪽을 인용하였다.


<쇼펜하우어의 노래의 독특한 본질>

노래하는 자의 의식을 가득 채우는 것은 의지의 주체, 즉 자신의 의욕이다. 그것은 종종 해방된 충족된 의욕(기쁨)으로서, 그보다는 훨씬 더 자주 억제된 의욕(슬픔)으로서, 그리고 항상 정념, 열정, 감동의 정서 상태로서 의식을 채운다.
그렇지만 이와 함께 그리고 이와 동시에 주위의 자연을 바라봄으로써 노래하는 자는 자기를 순수하고 의욕이 없는 인식의 주체로 의식하게 된다. 이 인식의 흔들리지 않는 행복한 고요는 이제 항상 제한적이고 결핍 상태에 있는 의욕의 충동과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대조, 이러한 변화의 느낌이 본래 노래 전체 속에 표현되며, 그것이 일반적으로 서정적 상태를 이루는 것이다. 말하자면 순수한 인식이 이러한 상태 속에서 우리를 의욕과 그 충동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이를 따른다. 그렇지만 이는 잠시 뿐이다. 의욕 그리고 우리의 개인적 목적에 대한 기억이 재차 우리를 고요한 관조로부터 떼어 놓는다.
그러나 가장 가까이 있는 아름다운 환경은 언제나 다시금 그 의욕으로부터 벗어나라고 우리를 유혹하는데, 이 환경 속에선 순수하고 의욕이 없는 인식이 우리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노래나 서정적 분위기 속에서는 의욕(목적에 대한 개인적 관심)과 스스로를 드러내는 환경의 순수한 기이하게 뒤섞인다. 이 둘 사이의 관계가 탐구되고 상상된다.
주관적 기분, 의지의 애착은 관조된 환경에 그리고 이 환경은 다시금 전자의 기분과 애착에 자신의 색깔을 반사적으로 전달한다. 이처럼 혼합되고 분열된 전체적 심정 상태의 복제품이 바로 진정한 노래다.






<니체의 통탄>


니체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 어느 누가 이러한 묘사 속에서 서정시가 불완전하게 성취된, 뛰어다니기는 하지만 ‘좀처럼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하나의 예술’로 ‘성격이 규정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겠는가? 그렇다. 의욕과 순수한 관조, 즉 비非미학적 상태와 미학적 상태의 기이한 혼잡을 본질로 하는 ”반쪽 예술“로 ‘규정되어 있다’는 것을 누가 오인하겠는가? ”


니체는 다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쇼펜하우어조차도 그것이 하나의 가치 척도이기나 한 것처럼 그에 따라 예술을 분류했던 전체의 대립 관계, 즉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대립 관계”가 ‘미학에서는 부적당하다’고 니체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의욕하고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요구하는 개인으로서의 주체는 예술의 근원으로서가 아니라, 예술의 적으로서만 사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의욕과 순수한 관조/ 비非미학적 상태와 미학적 상태/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은 우선 이렇게 다시 짝지어 볼 수 있다. 의욕/비미학적/주관적, 순수한 관조/미학적/객관적으로 나누어 보면 그 성격이 분명해진다. 쉽게 말해 이러한 혼잡을 본질로 하는 서정시는 반쪽 예술로 규정되어 있다는 의미다. 의욕하고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요구하는 개인으로서의 주체는 예술보다는 실존을 원한다. 주관성과 객관성을 이렇게 현실의 개인에게 적용하면 안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한 그 주체가 예술가인 한, 그는 이미 자신의, 개인의 의지로부터 해방되었고, 매개자가 되었다. 그 주체는 이미 가상세계에서 자기 자신을 포기하였기 때문이다. 그 도취를 통해서 ‘진정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주체는’ 가상 속에서의 자신의 구원을 축하한다. 이러한데 쇼펜하우어마저 이러한 대립적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고 니체는 통탄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가 앞서 근대 미학자들을 비판했던 이유는 이러한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니체의 선언>

전체의 예술 희극이 결코 우리를 위해, 즉 우리의 개선과 교육 때문에 상연된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일자一者’의 구원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심연의 고통받고 모순에 가득 차 있는 자아의 구원에 있다. 또한 우리는 저 예술 세계의 본래의 창조자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굴욕적이기도 하고 우리를 한편으로 높여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것은 분명히 해야 한다.
반면, 우리는 어쩌면 ‘우리’가 ‘예술 세계의 진정한 창조자’에게는 이미 영상들이고, 예술가적 투영이며, 예술 작품의 의미 속에서 최고의 품위를 가진다는 사실을 가정해도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미적 현상”으로만 “실존과 세계”는 ‘영원히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의 의미에 관한 이런 의식은, 화폭 위에 그려진 전사가 그 위에 서술된 전투에 가지는 의식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로써 우리의 전체 예술 지식은 근본적으로 완전히 망상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저 예술 희극의 유일한 창조자이자 관객으로서 영원한 향락을 누리던 그 존재와 지자知者로서의 우리는 일체도 아니고 동일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수호신이 예술가적 창조의 행위에서 ‘세계의 저 근원적 예술가’와 융합되는 한에서만 그는 예술의 영원한 본질에 관하여 약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태에서 그는 기이하게도 눈을 돌려서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동화 속의 무시무시한 인물과 같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며, 또한 작가이고 배우이고 관객이기도 한 것이다.


니체의 선언은 주관과 객관이 따로 있지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정당화되는 것은 “미적 현상”이다. 미적 현상으로만 ‘실존의 세계와 가상의 세계’는 유지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스템을 지탱하는 이중적인 힘에 의해 “실존과 세계”는 돌아간다.

저 근원적인 예술가는 ‘근원적인 일자一者’를 의미할 것이다. 영원히 고통받고 모순에 차 있는 바로 그것의 실체는 우리가 “감성‘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일까? 우리 신체의 주인인 감성은 지성에게 강요한다. ”나의 요구를 해결하라"고 강요한다. 그래서 우리가 괴로움을 느끼는 것인지도.

서정시는 반쪽짜리 예술인 것도 아니고, 근대 미학자들이 대립관계 지어 놓은 주관과 객관의 대립도 아니고, 더구나 서정시의 창작도 우리 자신이 아니다. "수호신이 예술가적 창조의 행위에서 ‘세계의 저 근원적 예술가’와 융합되는 한에서만 그는 예술의 영원한 본질에 관하여 약간 알 수 있다"




이제 그는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며, 또한 작가이고 배우이고 관객이기도 한 것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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