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5장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한 백발의 예술가이며 아폴론적인 소박한 예술가의 전형인 ‘호메로스’는 이제 실존을 거칠게 살아온 전투적 뮤즈의 시종 ‘아르킬로코스’의 열정적인 머리를 경탄하며 바라본다.”
‘서정시인’은 모든 시대의 경험에 따르면 항상 “나”를 말하고, 자기의 열정과 욕망의 반음계 모두를 우리 앞에서 부른다. 바로 아르킬로코스는 호메로스 곁에서, 증오와 조소의 외침을 통하여 도취상태에서의 자기 욕망의 분출을 통하여 우리를 놀라게 한다.
“ 객관적 예술의 근원지인 델포이의 신탁조차도 매우 진기한 발언을 통해 아르킬로코스에게 보여 준 그 찬양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
실러는 자기 자신에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심리학적 관찰을 통해 자신의 ‘시작詩作’ 과정을 해명했다. 그는 시작 행위와 준비 상태에서 사상의 질서 정연한 인과율에 따라 배열된 일련의 영상들 같은 것을 자신 앞에, 그리고 자신의 내면 안에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음악적 기분을 느낀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 느낌은 내게 있어서 처음에는 일정하고 명료한 대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대상은 그 후에 비로소 형성된다. 어떤 음악적 기분이 먼저 일어나고, 이를 뒤쫓아 비로소 시적인 이념이 떠오른다.”
어디에서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서정시인과 음악가의 결합”, 아니 ‘동일성’이라는 고대 서정시 전체의 가장 중요한 현상을 함께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제 서정시인을 앞서 서술된 ‘미학적 형이상학’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진정으로 존재하는 자, 근원적인 일자一者는 영원히 고통받는 자와 모순에 가득 차 있는 자로서 자신의 지속적인 구원을 위하여 동시에 ‘매혹적인 환영’과 ‘즐거운 가상’을 필요로 한다.”
“그는 디오니소스적 도취의 신비주의적 ‘자기 포기의 상태’에서 열광하는 합창단으로부터 동떨어져 홀로 쓰러진다. 그리고 아폴론적 꿈의 영향을 통해 자신의 독특한 상태인 세계의 가장 내면적인 근거와 하나가 된 자신의 상태가 ‘비유적인 꿈의 형상’ 속에서 그에게 나타난다.”
‘근원적 일자一者’는 그의 고통 및 모순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서, 그 자신의 ‘모상模像’을 음악으로 만들어낸다. 이 음악은 ‘세계 수호신’인 그에게 마치 ‘비유적인 꿈의 영상’에서처럼 ‘아폴론적 꿈’의 영향을 받아 가시화된다. ‘영상도 없이 개념도 없이’ 이루어진 ‘음악 속’에서의 ‘근원적 고통’의 저 반영은 “가상” 속에서 구원됨으로써 ‘개개의 비유적 표본’을 산출한다.
자연의 본질이 상징적으로 표현되려면 ‘새로운 상징의 세계’가 필요하다. 입, 얼굴, 말 그리고 춤의 몸짓 그리고 리듬의 강약과 화음을 통한 음악의 상징적 힘들이다. 마음을 흔드는 음조의 힘, 멜로디의 통일적인 흐름, 화음의 세계는 모두 새로운 상징의 세계이다. 이 모든 상징적 힘들의 총체적 발산을 파악하려면, 인간은 저 힘들 속에서 상징적으로 스스로를 표현하고자 하는 자기 포기의 높이에 도달해 있어야 한다.
“서정시인 아르킬로코스가 ‘뤼캄베스의 딸들’에게 자신의 미친 듯한 사랑과 경멸을 알린다면, 그것은 우리 앞에서 ‘도취의 황홀경’ 속에서 춤추는 그의 열정이 아닌 것이다.”
“ 우리는 디오니소스와 그의 여자 시종들을 본다. 우리는 도취한 열광자 아르킬로코스가 쓰러져 잠자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이제 아폴론이 그에게 다가와서 월계수 잎으로 그를 건드린다. 잠자는 사람의 디오니소스적-음악적 마력은 이제 영상의 불꽃처럼 그의 주변에서 빛을 내면서 작열한다. 이것이 바로 최고로 발전한 비극과 연극적 디오니소스 주신 찬가로 불리는 서정시들이다. ”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서정시들의 표현이고 상징적이다. “춤추는 것은 그의 열정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아르킬로스 그 자신의 열정이 아니라 “세계 수호신” 의 열정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도취하여 춤추다 쓰러져 자고 있는 아르킬로스를 월계수 잎으로 건드린 아폴론의 행위는, 바로 ‘아폴론적 환영’을 불어넣고 있는 행위다. 이것은 모두 상징적 표현들이다. 자연의 “두 예술 충동”이다.
서정시인이 철학적인 예술의 고찰에서 만들어내는 어려움을 감추지 않는 쇼펜하우어는 하나의 탈출구를 발견했다고 믿고 있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그와 함께 이 길을 갈 수 없지만, 어려움을 결정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수단이 그의 손에, 그의 심오한 음악의 형이상학에 주어졌다. 나는 그의 정신을 계승해서 그리고 그의 명예를 위하여 여기서 그 어려운 문제를 해결했다고 믿는다.
노래하는 자의 의식을 가득 채우는 것은 의지의 주체, 즉 자신의 의욕이다. 그것은 종종 해방된 충족된 의욕(기쁨)으로서, 그보다는 훨씬 더 자주 억제된 의욕(슬픔)으로서, 그리고 항상 정념, 열정, 감동의 정서 상태로서 의식을 채운다.
그렇지만 이와 함께 그리고 이와 동시에 주위의 자연을 바라봄으로써 노래하는 자는 자기를 순수하고 의욕이 없는 인식의 주체로 의식하게 된다. 이 인식의 흔들리지 않는 행복한 고요는 이제 항상 제한적이고 결핍 상태에 있는 의욕의 충동과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대조, 이러한 변화의 느낌이 본래 노래 전체 속에 표현되며, 그것이 일반적으로 서정적 상태를 이루는 것이다. 말하자면 순수한 인식이 이러한 상태 속에서 우리를 의욕과 그 충동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이를 따른다. 그렇지만 이는 잠시 뿐이다. 의욕 그리고 우리의 개인적 목적에 대한 기억이 재차 우리를 고요한 관조로부터 떼어 놓는다.
그러나 가장 가까이 있는 아름다운 환경은 언제나 다시금 그 의욕으로부터 벗어나라고 우리를 유혹하는데, 이 환경 속에선 순수하고 의욕이 없는 인식이 우리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노래나 서정적 분위기 속에서는 의욕(목적에 대한 개인적 관심)과 스스로를 드러내는 환경의 순수한 기이하게 뒤섞인다. 이 둘 사이의 관계가 탐구되고 상상된다.
주관적 기분, 의지의 애착은 관조된 환경에 그리고 이 환경은 다시금 전자의 기분과 애착에 자신의 색깔을 반사적으로 전달한다. 이처럼 혼합되고 분열된 전체적 심정 상태의 복제품이 바로 진정한 노래다.
“ 어느 누가 이러한 묘사 속에서 서정시가 불완전하게 성취된, 뛰어다니기는 하지만 ‘좀처럼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하나의 예술’로 ‘성격이 규정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겠는가? 그렇다. 의욕과 순수한 관조, 즉 비非미학적 상태와 미학적 상태의 기이한 혼잡을 본질로 하는 ”반쪽 예술“로 ‘규정되어 있다’는 것을 누가 오인하겠는가? ”
“쇼펜하우어조차도 그것이 하나의 가치 척도이기나 한 것처럼 그에 따라 예술을 분류했던 전체의 대립 관계, 즉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대립 관계”가 ‘미학에서는 부적당하다’고 니체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의욕하고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요구하는 개인으로서의 주체는 예술의 근원으로서가 아니라, 예술의 적으로서만 사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체의 예술 희극이 결코 우리를 위해, 즉 우리의 개선과 교육 때문에 상연된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일자一者’의 구원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심연의 고통받고 모순에 가득 차 있는 자아의 구원에 있다. 또한 우리는 저 예술 세계의 본래의 창조자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굴욕적이기도 하고 우리를 한편으로 높여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것은 분명히 해야 한다.
반면, 우리는 어쩌면 ‘우리’가 ‘예술 세계의 진정한 창조자’에게는 이미 영상들이고, 예술가적 투영이며, 예술 작품의 의미 속에서 최고의 품위를 가진다는 사실을 가정해도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미적 현상”으로만 “실존과 세계”는 ‘영원히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의 의미에 관한 이런 의식은, 화폭 위에 그려진 전사가 그 위에 서술된 전투에 가지는 의식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로써 우리의 전체 예술 지식은 근본적으로 완전히 망상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저 예술 희극의 유일한 창조자이자 관객으로서 영원한 향락을 누리던 그 존재와 지자知者로서의 우리는 일체도 아니고 동일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수호신이 예술가적 창조의 행위에서 ‘세계의 저 근원적 예술가’와 융합되는 한에서만 그는 예술의 영원한 본질에 관하여 약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태에서 그는 기이하게도 눈을 돌려서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동화 속의 무시무시한 인물과 같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며, 또한 작가이고 배우이고 관객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그는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며, 또한 작가이고 배우이고 관객이기도 한 것
그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