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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예술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방식

비극의 탄생/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7장

by 아란도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제7장 p61~68






* 아르킬로코스와 아이스킬로스는 같은 사람인데 이렇게도 부르고 저렇게도 부르는가 보다. 나무위키는 아이스퀼로스로 쓰고 있다. 워드에서 오타 줄이 표시가 안 되는 표기는 ‘아이스킬로스’이다. 하지만 나는 ‘책세상’에서 ‘아르킬로코스’로 표기되어 있어서 그렇게 사용한다. 하지만 ‘7장’에서는 ‘아이스킬로스’라고 표기되기도 한다. <7장, p62:9~8줄>






* 글이 갈수록 길어집니다. ㅎ

뒤로 갈수록 내용이 압축되면서도 어렵고 양도 많아집니다. 글이 길어짐을 양해 바랍니다. 공부하는 중이니까요...^^;;






기억은 도취적일까?






니체는 우선 “근원”이라는 문제가 한 번도 진지하게 제기된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고대의 전승의 단편적 조각들’이 이미 조합되고 또다시 쪼개진 적이 그렇게나 많았기 때문이다. 니체는 ‘그리스 비극의 근원을 “미로”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미로에서 빠져나가려면 지금까지 논의된 모든 예술 원리들의 도움을 받을 수박에 없다고 말한다.


고대의 전승은 비극이 ‘비극적 합창’에서 발생했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비극은 근원적으로 합창일 뿐이고, 합창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 역시 단호하게 말해준다.



니체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적 합창’을 보는 여러 주장에서, 우선 이러한 입장을 세 가지로 표본을 만들어 비판한다.



1. <비극 합창단을 보는 근대의 정치적 설명의 입장/ 비극이 민중을 대변한다?>

첫 번째는 ‘비극 합창단’이 제후들의 영역에 대해 ‘민중을 대변’한다고 말하는 입장에 대해서이다. 이것은 마치 ‘민주적 아테네 시민들의 굳건한 도덕 법칙’이 ‘민중의 합창’ 속에 서술되어 있으며, 이 ‘민주의 합창’은 왕들의 열정적인 월권과 방종을 넘어서 ‘항상 정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 한마디가 이 생각을 아무리 강력하게 지지한다고 하더라도, 비극의 근원적 형성에 아무런 영향력을 가지지 못한다. 왜냐하면 민중과 제후의 대립, 일반적으로 모든 정치적-사회적 영역은 ‘순수하게 종교적인 근원들’로부터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아르킬로코스와 소포클레스에게 있어, 고전적 합창 형식과 관련하여서는 “입헌적 민중 대표제도”를 예감했다고 말하는 것을 모독으로 간주하고 싶다고 니체는 말한다. 왜냐하면 고대의 국가제도는 “입헌적 민중 대표제도”를 실제로 알지 못했으며, 아마 그들의 비극에서도 이것을 “예감”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이렇게 ‘민중을 대변’한다는 입장이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비판하는 이유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본다면 이러하다. 나체는 ‘핀다로스의 송가’가 본질적으로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아폴론적 서사시이다. 그러므로 호메로스는 디오니소스와 결합한 것이 아니고 순수하게 아폴론적 예술가이다. 호메로스의 영향을 받은 ‘핀다로스의 송가’역시 아폴론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고대의 시를 모두 비극 합창단의 기원과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서 “무리한”것이며 ‘모독하는 것’이라고 니체는 항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는 스승과 제자 사이이며, 그리스 비극의 창시자와 같다. 니체는 ‘비극적 합창단’의 기원이 다르다고 ‘송가’와는 다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비극적 합창단은 정치와 사회와는 아무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비극 합창단을 정치에 대입하여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극 합창단’을 정치적으로 적용하여 해석하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2. <슐레겔의 입장/ 비극적 합창에 대하여, ‘이상적인 관객’>


두 번째로는 ‘슐레겔(AW.Schlegel/의 견해’다. 슐레겔은 “합창”을 어느 정도 관중의 정수와 엑스트렉트extract, 즉 “이상적인 관객”으로 볼 것을 권고한다. 슐레겔의 주장은 ‘근원적으로 비극은 합창에 불과했다’는 역사적 전승과 비교해 보면, 조야하고 비학문적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현란하다. 이 주장은 표현의 압축적 형식에 의해 “이상적”이라고 불리는 것에 사람들에게 순간적인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그로 인해 현란한 광채를 얻었다.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August Wilhelm von Schlegel, 1767~1845년/ 독일의 시인이자 비평가다. 낭만주의 연극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는 하노버에서 태어나 괴팅겐 대학교에서 신학 및 고전어를 배우고, 1798년 이후에 예나 대학교 교수로서 괴테, 실러와 친교를 맺었다. 또한 동생 프리드리히와 함께 잡지 <아테네움(Athenaeum)>을 창간, 낭만주의의 이론적인 지주가 되었다. 1797년 이후 셰익스피어의 작품 17편을 번역 간행하고 1801년 베를린 대학교, 18년에는 본 대학교의 교수가 되고 그동안에 <극예술·극문학 강의>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동생과 함께 독일에서의 동양 언어학의 창시자, 스탈 부인(Madame de Stael)의 상담역으로도 유명하다. 셰익스피어, 칼데론의 번역을 통하여 독일 극문학의 발전에 기여한 공적은 크다. <위키백과>


여기서 일반적인 ‘연극 관객’과 ‘비극 합창단’의 유사점을 끄집어내어 ‘이상화’하는 것이 관연 가능한가?라는 자문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내 슐레겔의 주장에 대해서 조용히 부정하게 된다.


현재의 우리는 항상 진정한 관객이라면 그 누구든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것이 경험적 현실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 작품’ 임을 늘 의식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반면에 고대 ‘그리스인들의 비극 합창단’은 무대 위의 인물을 ‘살아있는 실존 인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오케아노스의 딸들의 합창단은 거인 프로메테우스를 눈앞에 실제로 보고 있다고 믿으며, 자신을 무대의 신과 똑같이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가장 순수한 관객”이란, 오케아노스의 딸들처럼 프로메테우스를 육체를 가진 실재 인물로 간주한단 말인가? 그리고 무대 위에 뛰어올라 신을 그 고난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이상적 관객의 징표란 말인가?


*오케아노스Okeanos/ 대양의 신/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아들이며, 12 티탄 남매 중에서 장남이다. 아내 테티스와의 사이에서 수많은 강의 신들과 여신들 그리고 정령들을 낳았는데, ‘아들 포타모이 3000명’, ‘딸 오케아니데스 3000명’이다. 그야말로 곤충들 분만하듯이 아이들을 낳았다. 자연의 분만 형태는 곤충 형태인 듯.

고대 그리스인들은 세계가 원형의 평평한 판처럼 생겼다고 보았다. 그 주위를 오케아노스라는 큰 강이 둘러싸고 흐른다고 생각했다. 강과 신의 이름과 동일하다. 대양 강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 신이 로마 신화와 융합되며 오케아누스Oceanus가 됐고, 이는 오션Ocean의 어원이 되었다.

손윤락의 <그리스인들의 우주 신화와 철학>이라는 논문에 따르면, 오케아노스는 모든 신들의 조상에 해당되는 태초의 존재이자 만물의 시간적 기원 격에 해당되며, 그 자체로 세상의 끝을 이루는 것이고 밑에서 세계를 떠받치는 존재이며, 그렇기에 오케아노스는 앞서 서술한 것처럼 시간적 기원에 해당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공간적 기원에 해당된다고 할 수가 있다고 한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인데, 고대 문명에서 이 거대한 세계를 굳건한 토대 위에 정초 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며, 이것은 탈레스가 만물의 기원을 물이라고 보고, 세계가 물 위에 떠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통한다고 한다.

안진태의 <불멸의 파우스트> 내용에 따르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강과 바다, 샘물, 우물은 전부 이 오케아노스의 소생이며, 세계를 형성해 낸 기본적인 힘이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오케아노스의 남매이자 그와 결합한 테티스는 오케아노스의 분신이자 생산을 위해, 성을 분리한 경우일 수도 있다고 한다. 점차적으로 신화가 약화되며 오케아노스가 지닌 시간과 관련된 의미는 잊혔고, 세계의 하천들의 아버지이자 대하의 신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오르픽 찬송가에 따르면 영원한 아버지이자 모든 강과 바다의 근원이자 인간과 신들의 창조자이고 지구의 경계를 두르는 존재라고 한다. 거기에, 모든 신과 인간의 아버지라고 한다.



그러니까 니체가 슐레겔의 “이상적인 관객”을 비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현재의 관객이 무대를 보는 관점과 고대의 합창단이 무대를 보는 관점은 달랐다. 그런데 그 차이를 보지 않고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미학적인 관객을 믿어왔고, 관객 각자가 예술 작품으로서, 즉 미학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이 크면 클수록 그를 그만큼 더 유능하다고 간주했다. 그런데 슐레겔의 표현은 완전하고 이상적인 관객은 무대의 세계로부터 전혀 미학적인 영향이 아니라 육체적, 경험적인 영향을 받는 점을 암시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합창’이 화제가 될 때마다 슐레겔의 말을 반복했다.


그러나 저 분명한 ‘전승’이 슐레겔과 반대되는 말을 한다. 무대 없는 합창단 자체, 즉 ‘비극의 원시적 형태’와 ‘이상적 관객’은 서로 조화되지 않는다. ‘관객의 개념’으로부터 추출될 수 있는 “관객 그 자체”가 그것의 본래 형식으로 할 예술 장르는 도대체 어떤 것인가? ‘연극’이 없는 ‘관객’은 불합리한 개념이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이 대중의 도덕적 지성에 대한 존경으로부터도, 연극 없는 관객의 개념으로부터도 “설명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두렵다고 말한다. 또한 이 문제는 너무나 심오해서 피상적인 관찰로는 겉핥기일 뿐이라고 간주한다.







돌과 도토리와 유사한 모양의 열매, 이러한 색감은 도자기 찻잔과 너무나 닮아 있다.



3. <실러의 입장/ 비극적 합창단의 ‘성곽’과 ‘가설무대’>


또 다른 세 번째 예시로 실러의 《메시나의 신부》의 서문을 예시로 든다. 니체는 실러는 ‘합창단의 의미’에 훨씬 더 가치 있는 통찰(1)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실러는 ‘합창단’을, 비극이 자신을 현실 세계로부터 순수하게 분리하고 자신의 이상적인 토대와 자신의 시적인 자유를 보전하기 위해서 ‘자기 주변에 쳐놓은 살아 있는 성곽’으로 여겼다.


실러는 자신의 주요 무기 중에서, 이러한 통찰을 가지고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통속적인 개념에 대항’하여 싸웠다. 즉 극문학에 요구되는 ‘환영에 대항’하여 싸웠다. 가령 대낮은 무대 위에서는 인위적인 대낮일 뿐이고, 건축은 단지 상징적이며, 운율적 언어는 이상적 성격을 지닌다고 하는 이런 오류가 전체적으로 지배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실러의 이러한 생각에 대하여, ‘모든 시문학의 본질’을 단지 ‘시적 자유’로 용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합창단의 도입은 모두 예술의 자연주의에 대항하여 공개적으로 명예롭게 선전포고를 하는 단호한 조치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오늘날 자연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예찬을 통해 도달한 곳이 오히려 이상주의의 정반대인 ‘밀랍인물상 전시실’과 영역이라는 점이 걱정된다. 실러의 관찰방식은 우리 세대가 스스로 우월하다는 망상에 빠진 ‘사이비 이상주의’라는 경멸적 표어를 붙인 관찰방식으로 여겨진다.



이상을 정리하자면, 니체는 첫 번째의 정치적 입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고, 두 번째 슐레겔의 입장은 피상적인 관찰로 간주하여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8장을 살펴보면, 니체는 여기서 슐레겔의 주장에 대하여, 니체는 슐레겔의 말을 거꾸로 뒤집는다.


“이상적인 관객”이란 말을 니체는 이렇게 뒤집는다. “합창단은, 그것이 유일한 관객, 즉 무대의 환상 세계의 관객인 한에서 ‘이상적인 관객’인 것이다. 관객석이 하나의 중심을 향해 내려가는 반원형 계단식 구조로 된 그들의 극장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기 주변의 전체 문화 세계를 완전히 간과하고 또 무대를 만족스럽게 내려다보면서 자기 자신이 합창단원이 되었다고 오인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러한 통찰에 따라 우리는 원시 비극의 원시적 단계의 합창단을 디오니소스적 인간의 자기 반영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슐레겔 시대에서, 그리고 니체의 시대에서 이상적인 관객은 미학적인 관객이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비극 합창단은 근대와는 달랐다. 오히려 그때의 관객은 그 자신들도 합창단으로 여겼던 것이어서, 전체가 하나의 세계를 열었고 공유했던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집단적이었지 근대의 개인의 미학적 취향이 아니었다. 고대의 그리스 합창단은 관객과 합창단의 구별이 없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의 마당극 같은 구조였을 것이다. 그리고 비극 합창단의 형태는 근대 말기부터 현대로 오면서 새로운 형태로 변모하여 우리에게로 왔다. 열린 무대로 확장되었고, 관객과 더 소통하는 방식이었다.



세 번째의 실러의 입장은 사이비 이상주의 관찰 방식이라는 것이 니체의 견해이다. 실러의 입장에서 설명된 방식을 보면, 실러가 극문학에서 요구되는 환영을 의미 없다고 한 것에 대하여, 니체는 시인의 시적 자유로 치부하고 지나치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이지 않을까.


그리고 니체의 실러의 올바른 통찰(2) 중의 또 한 가지를 말한다.


“원시 비극의 합창단인 그리스의 사티로스 합창단이 소요했던 곳은 ‘이상적 땅’이며, 사멸할 수밖에 없는 자들의 현실적 통로보다 훨씬 더 높이 솟아 있는 땅이다. 그리스인은 이 합창단을 위해 가공의 자연 상태인 공중에 떠 있는 가설무대를 만들고, 그 위에 가공의 자연 존재들을 세워 놓았다.”
비극은 바로 이러한 토대 위에서 성장했고, 물론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현실의 섬세한 모사로부터 해방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경우 가설무대는 상상을 통해 하늘과 땅 사이에 자의적으로 설치된 세계는 아니다. 오히려 올림포스 산과 그 위에 사는 여러 신들이 신앙심 깊은 그리스인들에게 의미했던 것과 같은 ‘현실성’과 ‘신빙성’을 지닌 세계라고 니체는 말한다.
디오니소스 축제의 무용수인 ‘사티로스’는 신화와 제식의 신성한 재가를 받아 종교적인 것으로 인정받는 현실 속에서 살고 있다. 바로 그와 함께 ‘비극이 시작된다’는 점이다. 사티로스를 통해 비극의 디오니소스적 지혜가 말한다는 점은 비극이 합창으로부터 탄생한 것만큼이나 우리에게는 낯선 현상이다.

실러에 대한 니체의 글들은 해석하기가 조금은 모호하다. 어찌 보면 긍정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부정 같기도 하다. 다만 실러에 대한 인용을 전자(통찰 1: 성곽)와 후자(통찰 2: 가설무대)로 나누었을 때, 이 장에서는 다소 전자(통찰 1)의 표현이 모호하지만, 8장을 보면, 니체는 실러의 ‘성곽’ 표현(8장, p69)이 옳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7장에서 니체가 예시를 들고 있는 가지 입장에서 ‘실러’만이 근접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실러의 통찰(2)의 ‘사티로스 합창단의 가설무대’는 8장에서 ‘사원’이라는 표현으로 바뀐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의 전개는, 풀어낸 내용을 다시 하나로 가다듬어 표현을 압축한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진행해 나가는 구조 같다. 그러므로 앞 장에서 설명하는 표현 방식에 너무 천착하지 않은 것이 좋다고 보인다. 그리고 한 장을 이해하려면 앞 장과 그다음 장을 동시에 이해해야 그 한 장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는 거 같다. 물론 읽어 온 전체가 토대가 되어야 그다음 장들에서 압축하여 설명한 내용들을 이해하는 것은 물론일 것이다. 니체의 글 전개 방식은 자연의 생성과 압축을 닮아 있는 것 같다. 글 자체가 자연의 존재방식을 모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두 닮아 있다. 분위기가...




<니체의 메커니즘/디오니소스적 원리/예술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바로 그것이 '삶'>


무엇이 ‘낯설’ 다는 것일까? 니체는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

디오니소스적 음악이 ‘문명과 관계’를 맺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가공의 자연 존재인 사티로스가 ‘문화인과 관계’를 맺는다고 내가 주장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새로운 관찰의 출발점을 얻게 될 것이다. 문명에 관하여 ‘바그너’는 이렇게 비유했다. “등불의 빛이 대낮에 의해 사라지듯이, 문명은 음악에 의하여 그 빛을 상실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의 문화인’은 ‘사티로스 합창단’ 앞에서는 자신이 제거되는 것처럼 느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와 사회,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간극’이 강력한 ‘통일 감정’에 의해 밀려나고, 이 감정은 ‘자연의 심장부’로 되돌아간다는 ‘디오니소스적 비극의 직접적 영향’이다. 사물의 근저에서 생명은 현상들의 온갖 변화 속에서도 파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즐거움에 가득 차 있다는 “형이상학적 위안”, 이 위안은 ‘사티로스 합창단’이며 ‘자연 존재의 합창단’으로서 ‘구체적으로 명료화’되어 나타난다.

이 “자연 존재”는 모든 문명의 배후에서 부단히 살아 있어 근절할 수 없으며, 세대와 민족사의 온갖 변천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다.

“문명은 음악에 의하여 그 빛을 상실한다고 말한다” 이 문장을 생각해 보면, 음악은 확실히 원초적 분위기를 만든다. 또 한편으론 서정성을 드러나게 한다. 음악은 사람을 도취시킨다. 그러므로 음악은 문명보다는 그 이면을 더 들추어낸다. 또 한편으로는 음악은 음과 양에서 "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보인다. 여기서 문명은 인간의 실존적인 측면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실존이 아닌 본질의 세계는 '자연의 힘'과 상통할 것이다.


“그리스의 문화인’은 ‘사티로스 합창단’ 앞에서는 자신이 제거되는 것처럼 느꼈을 것” 이 문장의 의미는, 아폴론적 그리스인의 이성이 황홀경에 의해 마비 또는 무감각해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성은 그때 사라지고 감성이 고개를 든다는 것.



몹시 섬세한 고통과 몹시 강렬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유별난 능력을 지닌 사려 깊은 ‘그리스인’은 이러한 “합창”으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는 예리한 시선으로 세계의 무시무시한 파괴 충동과 자연의 잔인성을 꿰뚫어 보았다. 그리고 ‘의지’에 대한 ‘불교적 부정’을 동경하는 위험에 처해 있다. 예술이 그를 구원한다. 그리고 예술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은 “삶”이다.


실존의 일상적 제한과 한계를 파괴하는 ‘디오니소스적 상태’의 황홀은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 일종의 ‘무감각적 요소’를 함축한다. 과거에 개인적으로 체험한 모든 것은 이 상태 속으로 침잠해 버린다. 이 “망각의 심연”에 의하여 ‘일상적 현실의 세계’와 ‘디오니소스적 현실의 세계’가 서로 구분된다.




<햄릿의 가르침과 구역질>

그러나 저 일상의 현실이 다시 의식 속에 되살아나면, 그 현실은 구토를 느끼면서 현실로서 지각된다. 금욕적이고 의지를 부정하는 심정이 그와 같은 상태의 결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디오니소스적인 인간은 햄릿과 유사하다. 양자는 우선 사물의 본질을 올바로 들여다보았다. 그들은 ‘인식’했다. 그리고 행위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구토를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위는 사물의 영원한 본질을 조금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지리멸렬한 세계를 다시 정돈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우스꽝스럽거나 치욕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인식은 행위를 죽인다. 환영에 의해 베일이 드리워진 상태가 행위에 속한다.
이것이 햄릿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너무 많이 반성하여, 즉 가능성의 과잉 때문에 행위에 이르지 못하는 몽상가 한스의 진부한 지혜가 아니다. 반성이 아니다. 그렇다. 그것은 진정한 인식이다. 무서운 진리에 대한 통찰이다. 햄릿뿐만 아니라 디오니소스적 인간에게서도, 행위를 재촉하는 모든 동기를 압도한다.


여기서 이제 위안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 ‘동경’은 사후의 세계와 신들까지도 뛰어넘는다. 실존은, 신들 속에서 혹은 불멸의 피안에서 빛나는 자신의 모든 반영들과 함께 부정된다. 한번 관조된 진리를 의식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제 인간은 어디에서나 존재의 공포와 불합리를 보게 된다. 이제 그는 오필리아의 운명 속에 있는 상징을 이해한다. 이제 그는 숲의 신 ‘실레노스의 지혜’를 인식한다. 그것이 그를 ‘구역질’ 나게 한다.



수면의 거울 투영/자기 투영









이쯤에서 다시 정리를 해보자면 이러하다.


예술이 그를 구원한다. 그리고 예술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은 “삶”이다. 이 명제에 따라서 니체는 그 자신의 원리를 밝힌다. 즉 디오니소스적 원리이다. 이 원리를 통하여 “그”는 통찰을 얻는다. *물론 내가 여기서 사용한 “그”는 내가 글의 화자이면서 체험자로서 “그”라고 한 것이다.


“인식은 행위를 죽인다. 환영에 의해 베일이 드리워진 상태가 행위에 속한다.”



여기서의 인식은 동양식으로 말하자면 “깨달음 또는 각성”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가 말하는 인식은 “재인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재인식을 통하여 “그”는 사태의 본질을 본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그”로 하여금, 현실에서의 행위를 제한하게 한 것이다. 니체는 바로 이러한 것을 “햄릿의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말한 햄릿의 대사가 명확하고도 모호하게 다가오기는 처음이다. 아마도 그것은 연결의 문제일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좀 전까지 몹시 졸렸다. 찬바람을 쏘이고 졸음을 쫓고 니체의 글을 다시 읽어 보니, 이중의 나선이 휘돌고 있는 것처럼 다가왔다. 분명 명확한데 한편으론 너무도 모호하다. 나는 그 이중의 가닥을 더듬어가며 글로 잡아내야 한다. 문득, 급 졸음이 오는 이유는 내 머릿속에서 그것에 대해 헤아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몽롱 해진 것이다. 어쩌면 잠을 자면 꿈속에서 정돈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지금 잠을 몰아냈다. 어쩌면 이것은 또 직관의 힘인지도 모른다.


문득 ”직관은 연결하는 것이 임무“라는 생각이 스친다. 범주들을 연결시키는 역할이 아닐까 싶다. 나에게 직관은 여러 형태이지만, 한 번은 이런 경험이 있다. 영화에서 보듯이 모든 회로가 연결되는 듯 환영이 보였다. 이 환영은 그러니까, 머릿속에서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나에게 그런 영상이 떠오르면서 실재적으로 그 영상에 대해 내가 체험한 것이다.


머릿속에서 영화에서 보듯이 갑자기 밝은 빛이 촤르륵 순간에 퍼진 것이다. 그때의 내가 본 영상은 뇌가 내가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쉽게 산출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때의 경험이 너무나 생생했다. 그 후로 그때의 영상이 범주들을 연결시킨 것이라는 직관이 찾아왔다. 이것은 나에게 새로운 인식이었다. 나는 인간이 이러한 재인식을 통하여 어떤 변화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니체도 어쩌면 그와 유사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위안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 ‘동경’은 사후의 세계와 신들까지도 뛰어넘는다. 실존은, 신들 속에서 혹은 불멸의 피안에서 빛나는 자신의 모든 반영들과 함께 부정된다. 한번 관조된 진리를 의식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제 인간은 어디에서나 존재의 공포와 불합리를 보게 된다. 이제 그는 오필리아의 운명 속에 있는 상징을 이해한다. 이제 그는 숲의 신 ‘실레노스의 지혜’를 인식한다. 그것이 그를 ‘구역질’ 나게 한다.

이렇게 이미 옮긴 문장을 다시 인용하니, 괜히 글만 길어지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이렇게 다시 인용한 이유는 이러하다. 이 문장들에서 나는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표현이 느껴졌다. “실존이 신들 속에서, 불멸의 피안에서 자신의 모든 반영들과 함께 부정된다”는 말은, 더 이상 신들이 ‘신들의 세계에서 실존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호메로스적 그리스인들은 신들의 실존을 그들 자신의 삶에 투영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투영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위안이 더 이상 쓸모없다는 말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이렇게 따지면 니체는 이미, 신들의 실존을 《비극의 탄생》에서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비극의 탄생의 표본 산출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표출하였던 것이 아닐까.


아폴론적인 이성과 이상이 살아있던 호메로스적 그리스적 세계는 디오니소스적 원리에 의하여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니체는 8장(p72~73)에서 이렇게 말한다.


‘디오니소스 송가 합창단’은 이러한 도취(황홀)에 의해 망각되어, 의식이 없는 배우들로 된 공동체이며 그들은 서로 ‘변신’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마법에서 디오니소스 도취자는 스스로를 사티로스로 보고, 그는 사티로스로서 다시금 신을 본다. 그는 자신의 변신을 통해 자기 밖에서 새로운 환영을 자신의 현 상태의 아폴론적 완성으로서 보는 것이다. 이 새로운 환영으로 연극은 완전해진다.

이때의 환영은,

“그들의 황홀경 속에서 탄생한 환영이 보이는 정도까지 ‘무아지경’에 이르도록 청중의 분위기를 고취시키는 것이었다. 가면을 쓴 비극의 주인공이 무대에 등장하면 인간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황홀경에서 탄생한 신의 형상을 가면 쓴 인물에게 투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폴론적인 꿈의 상태다. 무아지경의 관중들이 이미 신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고 있을 때, 무대 위로 걸어오는 신을 보았을 때 가졌을 법한 감정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요즘은 ‘아이돌’이 떠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재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공연장에서 경험할 수 있는 유사한 감정이다. 그리고 인간은 곳곳에서 황홀경의 체험을 하게 된다. 가깝게는 그 자신이 갖은 애를 끓인 후에 얻게 된 어떤 눈앞에 작품들도 그러할 것이고, 관계에서도 그러한 체험을 할 수도 있다. 어쨌든 이 모든 것들은 여전히 디오니소스적인 원리들이 작동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강하든 미약하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 원리에 의해 힘을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번 관조된 진리를 의식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제 인간은 어디에서나 존재의 공포와 불합리를 보게 된다.” 재인식된 진리를 통하여 “그”는 실존 까지도 꿰뚫게 된다. “오필리아의 운명 속에 있는 상징”과 “실레노스의 지혜”를 인식한 “그” 는 구역질을 느낀다.

사람이 어느 정도 살다 보면 자신의 세계를 인식하는 때가 오는 것 같다. 그리고 사랑은 여러 종류이지만,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대한 재인식도 필요한 것 같다. 인간의 실존을 가장 크게 피부로 접하는 것은 부모가 어느덧 늙어버렸을 때가 아닐까. 그것은 어느 때라고 정해진 것은 없다. 그냥 문득 갑자기 늙어버린 것이다. 부모는 쉬지 않고 늙고 있었지만, 자식은 그 현상을 어느 날 문득 접하게 된다. 늙음이란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늙음이 가져온 신체 변형은 정말 이상한 것이다. 자식은 여전히 어떤 기억에 사로잡혀 있다. 아마도 젊은 부모에 대한 기억이며 그 기억이 늙은 부모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다. 그 양자를 가르는 기준은 “문득”이다. 그 재인식은 “그”가 느낀 그때에 어떤 본질의 꿰뚫음이다. 그리고 “그”는 구역질을 느낀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구역질일까? 그렇게 조건 지어졌다는 인간의 공포와 불합리이다. 부모 자식의 관계는 바꿀 수도 없고, 그 자신을 존재하게 한 그 권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세세히 전승되어 온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 인간이 만약 식물처럼, 알뿌리 식물처럼 인간을 밭에서 캐낸다면 어떨까?라는 환영이 스치는 것이다. 그 영상에서, 인간을 밭에서 캐내는 그 풍경에서, 문득 밭은 ‘자궁’이라는 직관이 스치는 것이다. 어딘가에 심어져야만 태어나는 존재라는 것, 여인의 자궁이 밭이라는 인식에 미치자 갑자기 구역질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존재 형태에 대한 낯선 이미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 온통 어떤 것이 뒤섞이는 혼돈과 혼합을 경험해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교육된 인식이 무너지고 자연의 존재방식이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질감이 구역질을 느끼게 하였을 것이다. 햄릿의 구역질이나 “그”의 구역질은 같은 종류일 것이다. 인간은 낯선 이질감이 주는 그 강한 대비에 구역질을 느끼는 존재인 것이다.






<예술의 구원/ 치료와 마술사>

이제. 이러한 의지의 최고 위험 속에서 “예술”이 구원과 치료의 마술사로서 다가온다. 오직 예술만이 실존의 공포와 불합리에 관한 저 구역질 나는 생각들을 그것과 더불어 살 수 있는 표상들로 변화시킬 수 있다.
이 표상들은 공포를 예술적으로 통제할 경우 숭고한 것이고, 불합리의 구역질로부터 예술적으로 해방시킬 경우 희극적인 것이다. 디오니소스의 ‘사티로스 합창단은 그리스 예술의 구원하는 행위다. 이 디오니소스 시종들의 중간 세계에서 앞서 서술한 심경의 변화들은 고갈된다.


삶을 살다 보면 어느 순간들은 그때를 넘어서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그때가 인간에게 디오니소스적 원리를 적용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어떤 것에 직면했다면, 바로 그때 그 자신에게 솟구치는 어떤 힘을 예술적인 생산 행위로 변환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감정이 많은 존재다. 그 감정들에 의해 매 순간 감정에 끄달리며 살게 된다. 만약 어떤 분노가 피치 못하게 그 자신을 지배한다고 하였을 때라고 한다면, 사람은 그것을 어디로 발산하여야 할까? 그것을 안에 눌러 놓는다고 하여도 그것은 빠져나갈 통로를 원한다. 그 통로를 열어주어야 한다. 급작스럽 게가 아니라, 서서히 빠져나가도록 그 자신이 출구를 조절하는 스위치를 갖는 것이다.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러한 방식이 그 자신의 예술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글을 써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만드는 행위도 좋을 것이다. 여행도 좋을 것이다. 아니라면 그 순간에 그 자신이 무엇인가에 몰입하고자 하는 충동적인 것도 있을 것이다. 그림을 그려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충동을 그 자신이 통제하려면, 그 자신에게 익숙한 형태를 평소에 만들어 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것이 아마도 취향이고 취미일 것이다. 그 취미가 그 자신의 인생의 길과 맞닿아 있다면, 그 충동에 의해 그 자신의 취미를 업그레이드할 계기를 마련할지도 모른다. 어떤 힘은 어떤 행위를 하는 동안에 그곳에 옮겨진다. 하나의 그 자신만의 작품이 탄생할 수도 있다. 완성하는 동안 서서히 그 힘은 거기 에로 옮겨간다. 그것은 바로 변용이다. 그 자신 안의 어떤 분출이 형태를 바꾸어 눈앞에 사물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그리스 조각가들도 그러한 체험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디오니소스적인 원리가 함께 한다. 그 자신이 무엇인가에 몰입하게 될 때 그 자신의 현실적인 어떤 것들에 대하여 멀어진다. 망각이다. 그리고 그러한 반복적인 과정을 통하여 그 자신은 다른 존재가 되어 간다. 변신이다. 창작을 할 때 인간은 신적인 것을 느낀다. 아마도 인간은 그 방식으로 자기 시간을 보내며 사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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