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7장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August Wilhelm von Schlegel, 1767~1845년/ 독일의 시인이자 비평가다. 낭만주의 연극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는 하노버에서 태어나 괴팅겐 대학교에서 신학 및 고전어를 배우고, 1798년 이후에 예나 대학교 교수로서 괴테, 실러와 친교를 맺었다. 또한 동생 프리드리히와 함께 잡지 <아테네움(Athenaeum)>을 창간, 낭만주의의 이론적인 지주가 되었다. 1797년 이후 셰익스피어의 작품 17편을 번역 간행하고 1801년 베를린 대학교, 18년에는 본 대학교의 교수가 되고 그동안에 <극예술·극문학 강의>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동생과 함께 독일에서의 동양 언어학의 창시자, 스탈 부인(Madame de Stael)의 상담역으로도 유명하다. 셰익스피어, 칼데론의 번역을 통하여 독일 극문학의 발전에 기여한 공적은 크다. <위키백과>
현재의 우리는 항상 진정한 관객이라면 그 누구든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것이 경험적 현실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 작품’ 임을 늘 의식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반면에 고대 ‘그리스인들의 비극 합창단’은 무대 위의 인물을 ‘살아있는 실존 인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오케아노스의 딸들의 합창단은 거인 프로메테우스를 눈앞에 실제로 보고 있다고 믿으며, 자신을 무대의 신과 똑같이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오케아노스Okeanos/ 대양의 신/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아들이며, 12 티탄 남매 중에서 장남이다. 아내 테티스와의 사이에서 수많은 강의 신들과 여신들 그리고 정령들을 낳았는데, ‘아들 포타모이 3000명’, ‘딸 오케아니데스 3000명’이다. 그야말로 곤충들 분만하듯이 아이들을 낳았다. 자연의 분만 형태는 곤충 형태인 듯.
고대 그리스인들은 세계가 원형의 평평한 판처럼 생겼다고 보았다. 그 주위를 오케아노스라는 큰 강이 둘러싸고 흐른다고 생각했다. 강과 신의 이름과 동일하다. 대양 강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 신이 로마 신화와 융합되며 오케아누스Oceanus가 됐고, 이는 오션Ocean의 어원이 되었다.
손윤락의 <그리스인들의 우주 신화와 철학>이라는 논문에 따르면, 오케아노스는 모든 신들의 조상에 해당되는 태초의 존재이자 만물의 시간적 기원 격에 해당되며, 그 자체로 세상의 끝을 이루는 것이고 밑에서 세계를 떠받치는 존재이며, 그렇기에 오케아노스는 앞서 서술한 것처럼 시간적 기원에 해당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공간적 기원에 해당된다고 할 수가 있다고 한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인데, 고대 문명에서 이 거대한 세계를 굳건한 토대 위에 정초 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며, 이것은 탈레스가 만물의 기원을 물이라고 보고, 세계가 물 위에 떠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통한다고 한다.
안진태의 <불멸의 파우스트> 내용에 따르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강과 바다, 샘물, 우물은 전부 이 오케아노스의 소생이며, 세계를 형성해 낸 기본적인 힘이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오케아노스의 남매이자 그와 결합한 테티스는 오케아노스의 분신이자 생산을 위해, 성을 분리한 경우일 수도 있다고 한다. 점차적으로 신화가 약화되며 오케아노스가 지닌 시간과 관련된 의미는 잊혔고, 세계의 하천들의 아버지이자 대하의 신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오르픽 찬송가에 따르면 영원한 아버지이자 모든 강과 바다의 근원이자 인간과 신들의 창조자이고 지구의 경계를 두르는 존재라고 한다. 거기에, 모든 신과 인간의 아버지라고 한다.
우리는 미학적인 관객을 믿어왔고, 관객 각자가 예술 작품으로서, 즉 미학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이 크면 클수록 그를 그만큼 더 유능하다고 간주했다. 그런데 슐레겔의 표현은 완전하고 이상적인 관객은 무대의 세계로부터 전혀 미학적인 영향이 아니라 육체적, 경험적인 영향을 받는 점을 암시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합창’이 화제가 될 때마다 슐레겔의 말을 반복했다.
그러나 저 분명한 ‘전승’이 슐레겔과 반대되는 말을 한다. 무대 없는 합창단 자체, 즉 ‘비극의 원시적 형태’와 ‘이상적 관객’은 서로 조화되지 않는다. ‘관객의 개념’으로부터 추출될 수 있는 “관객 그 자체”가 그것의 본래 형식으로 할 예술 장르는 도대체 어떤 것인가? ‘연극’이 없는 ‘관객’은 불합리한 개념이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이 대중의 도덕적 지성에 대한 존경으로부터도, 연극 없는 관객의 개념으로부터도 “설명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두렵다고 말한다. 또한 이 문제는 너무나 심오해서 피상적인 관찰로는 겉핥기일 뿐이라고 간주한다.
“이상적인 관객”이란 말을 니체는 이렇게 뒤집는다. “합창단은, 그것이 유일한 관객, 즉 무대의 환상 세계의 관객인 한에서 ‘이상적인 관객’인 것이다. 관객석이 하나의 중심을 향해 내려가는 반원형 계단식 구조로 된 그들의 극장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기 주변의 전체 문화 세계를 완전히 간과하고 또 무대를 만족스럽게 내려다보면서 자기 자신이 합창단원이 되었다고 오인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러한 통찰에 따라 우리는 원시 비극의 원시적 단계의 합창단을 디오니소스적 인간의 자기 반영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원시 비극의 합창단인 그리스의 사티로스 합창단이 소요했던 곳은 ‘이상적 땅’이며, 사멸할 수밖에 없는 자들의 현실적 통로보다 훨씬 더 높이 솟아 있는 땅이다. 그리스인은 이 합창단을 위해 가공의 자연 상태인 공중에 떠 있는 가설무대를 만들고, 그 위에 가공의 자연 존재들을 세워 놓았다.”
비극은 바로 이러한 토대 위에서 성장했고, 물론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현실의 섬세한 모사로부터 해방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경우 가설무대는 상상을 통해 하늘과 땅 사이에 자의적으로 설치된 세계는 아니다. 오히려 올림포스 산과 그 위에 사는 여러 신들이 신앙심 깊은 그리스인들에게 의미했던 것과 같은 ‘현실성’과 ‘신빙성’을 지닌 세계라고 니체는 말한다.
디오니소스 축제의 무용수인 ‘사티로스’는 신화와 제식의 신성한 재가를 받아 종교적인 것으로 인정받는 현실 속에서 살고 있다. 바로 그와 함께 ‘비극이 시작된다’는 점이다. 사티로스를 통해 비극의 디오니소스적 지혜가 말한다는 점은 비극이 합창으로부터 탄생한 것만큼이나 우리에게는 낯선 현상이다.
디오니소스적 음악이 ‘문명과 관계’를 맺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가공의 자연 존재인 사티로스가 ‘문화인과 관계’를 맺는다고 내가 주장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새로운 관찰의 출발점을 얻게 될 것이다. 문명에 관하여 ‘바그너’는 이렇게 비유했다. “등불의 빛이 대낮에 의해 사라지듯이, 문명은 음악에 의하여 그 빛을 상실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의 문화인’은 ‘사티로스 합창단’ 앞에서는 자신이 제거되는 것처럼 느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와 사회,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간극’이 강력한 ‘통일 감정’에 의해 밀려나고, 이 감정은 ‘자연의 심장부’로 되돌아간다는 ‘디오니소스적 비극의 직접적 영향’이다. 사물의 근저에서 생명은 현상들의 온갖 변화 속에서도 파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즐거움에 가득 차 있다는 “형이상학적 위안”, 이 위안은 ‘사티로스 합창단’이며 ‘자연 존재의 합창단’으로서 ‘구체적으로 명료화’되어 나타난다.
이 “자연 존재”는 모든 문명의 배후에서 부단히 살아 있어 근절할 수 없으며, 세대와 민족사의 온갖 변천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저 일상의 현실이 다시 의식 속에 되살아나면, 그 현실은 구토를 느끼면서 현실로서 지각된다. 금욕적이고 의지를 부정하는 심정이 그와 같은 상태의 결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디오니소스적인 인간은 햄릿과 유사하다. 양자는 우선 사물의 본질을 올바로 들여다보았다. 그들은 ‘인식’했다. 그리고 행위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구토를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위는 사물의 영원한 본질을 조금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지리멸렬한 세계를 다시 정돈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우스꽝스럽거나 치욕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인식은 행위를 죽인다. 환영에 의해 베일이 드리워진 상태가 행위에 속한다.
이것이 햄릿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너무 많이 반성하여, 즉 가능성의 과잉 때문에 행위에 이르지 못하는 몽상가 한스의 진부한 지혜가 아니다. 반성이 아니다. 그렇다. 그것은 진정한 인식이다. 무서운 진리에 대한 통찰이다. 햄릿뿐만 아니라 디오니소스적 인간에게서도, 행위를 재촉하는 모든 동기를 압도한다.
“인식은 행위를 죽인다. 환영에 의해 베일이 드리워진 상태가 행위에 속한다.”
“이제 위안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 ‘동경’은 사후의 세계와 신들까지도 뛰어넘는다. 실존은, 신들 속에서 혹은 불멸의 피안에서 빛나는 자신의 모든 반영들과 함께 부정된다. 한번 관조된 진리를 의식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제 인간은 어디에서나 존재의 공포와 불합리를 보게 된다. 이제 그는 오필리아의 운명 속에 있는 상징을 이해한다. 이제 그는 숲의 신 ‘실레노스의 지혜’를 인식한다. 그것이 그를 ‘구역질’ 나게 한다.
“그들의 황홀경 속에서 탄생한 환영이 보이는 정도까지 ‘무아지경’에 이르도록 청중의 분위기를 고취시키는 것이었다. 가면을 쓴 비극의 주인공이 무대에 등장하면 인간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황홀경에서 탄생한 신의 형상을 가면 쓴 인물에게 투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폴론적인 꿈의 상태다. 무아지경의 관중들이 이미 신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고 있을 때, 무대 위로 걸어오는 신을 보았을 때 가졌을 법한 감정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한번 관조된 진리를 의식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제 인간은 어디에서나 존재의 공포와 불합리를 보게 된다.” 재인식된 진리를 통하여 “그”는 실존 까지도 꿰뚫게 된다. “오필리아의 운명 속에 있는 상징”과 “실레노스의 지혜”를 인식한 “그” 는 구역질을 느낀다.
이제. 이러한 의지의 최고 위험 속에서 “예술”이 구원과 치료의 마술사로서 다가온다. 오직 예술만이 실존의 공포와 불합리에 관한 저 구역질 나는 생각들을 그것과 더불어 살 수 있는 표상들로 변화시킬 수 있다.
이 표상들은 공포를 예술적으로 통제할 경우 숭고한 것이고, 불합리의 구역질로부터 예술적으로 해방시킬 경우 희극적인 것이다. 디오니소스의 ‘사티로스 합창단은 그리스 예술의 구원하는 행위다. 이 디오니소스 시종들의 중간 세계에서 앞서 서술한 심경의 변화들은 고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