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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심리분석/소포클레스와 아이스킬로스

비극의 탄생/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9장

by 아란도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제9장 p76 ~ 84




* 8장처럼 9장도 전체적으로 나의 입장에서 읽기에 좋도록 문장을 부분 각색하였고, 부분 편집하였습니다.

* 지금은 글 절반만 올리고 내일 마저 올리기로 합니다.









9장은 전반적으로 심리분석적인 형태라고 보인다.

니체는 아이스킬로스(아르킬로코스)의 세계관을 소포클레스 세계관과 대조를 하면서, 아르킬로코스의 세계관에 대하여 심리분석을 진행한다.






1. <소포클레스>

먼저 니체는 소포클레스를 다룬다. 소포클레스의 주인공들은 아폴론적으로 단호하고 명료한 언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명료한 언어를 단번에 보았다고 생각하게 되고, 이 근원에 이르는 길이 그렇게 짧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러나 우리가 한 번 표면으로 드러나 눈에 보이게 된 주인공들의 성격은 어두운 담벼락에 던져진 한 조각의 빛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오히려 이 반사된 빛 속에 투사된 신화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갑자기 익숙한 광학현상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현상을 체험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태양을 바라보려다 눈이 부셔 몸을 돌릴 경우, 우리는 눈앞에서 마치 치료제처럼 어두운 색채의 점을 보게 된다. *맹점현상/ 맹점을 뇌는 금방 채운다. 시각은 뇌로 그린 그림이다. 맹점실험은 뇌가 맹점을 어떻게 채우는가를 실험하는 것. 즉 비어 있는 공간을 채워서 복원하는 것인데, 이것은 “복제” 와 같다. 니체식 설명으로는 정확히는 거울로 반사시키는 것이라고 보며, 요즘 식으로는 “복사”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소포클레스의 주인공들의 광학현상, 즉 ‘가면의 아폴론적인 면’은 자연의 내면과 끔찍한 면을 들여다본 시선이 만들어낸 필연적인 산물이다. ‘그리스인의 명랑성’이라는 진지하고 뜻깊은 개념을 이런 의미에서 이해해야만, 제대로 파악했다고 믿어도 될 것이다.

소포클레스는 그리스 연극의 가장 비극적인 인물인 불행한 오이디푸스를 고귀한 인간으로 이해했다. 지혜로움에도 불구하고 오류를 저지르고 비참한 처지에 처할 운명을 타고난 인물인 오이디푸스. 그러나 그는 가혹한 수난을 거치고 난 후 드디어 ‘복된 마력’을 자기 주변에 발휘하게 되고, 이 마력은 그의 사후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 생각이 깊은 소포클레스는 ‘고귀한 인간은 죄를 범하지 않는다’ 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행동으로 인해 모든 법률, 모든 자연적인 행위, 즉 인륜적 세계가 멸망한다 해도, 바로 이 “행동”을 통해 무너진 세상의 폐허 위에 새로운 세상을 세우는 영향력의 보다 높은 ‘마법적 원’이 그어진다.




프랑수아 자비에 파브르, 〈스핑크스와 오이디푸스> , 다음백과







<오이디푸스 신화>

소포클레스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이러한 “명랑성”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소포클레스는 종교적 사상가로서 말하고자 한다. 그는 시인으로서 기이하게 얽혀 있는 소송 사건의 ‘매듭’을 보여준다. 재판관은 이 매듭을 한 가닥 한 가닥 서서히 풀어가지만, 결국 그것은 자신의 파국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변증법적 해결책을 진정한 그리스인이라면 너무나 좋아했기에 이로 인해 ‘명랑한 분위기’가 전체 작품을 압도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가 이 ‘소송 사건’의 전제들의 ‘예봉’을 꺾어버린다. *여기서 소송사건이라 함은, 오이디푸스의 운명을 말하는 듯. 그리고 그 재판관은 바로 오이디푸스 자신을 가리키는 듯.


하지만 이 명랑성은 여기서 끝없이 미화되어 추앙되고 있다. 닥쳐오는 모든 운명이 스스로를 단지 고통받는 자로서 내맡긴 채 ‘극도의 불행에 빠진 노인’과 이 세상의 것으로 생각되지 않은 ‘명랑성’이 대조를 이룬다. 신의 영역에서 내려온 듯한 이 ‘명랑성’은 비극적 주인공이 순전히 소극적인 행동을 통해 자신의 생애를 넘어서까지 영향을 미치는 ‘최고 경지의 능동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극도의 불행에 빠진 노인은 ‘오이디푸스’를 가리키는 듯. 비극적 주인공의 소극성과 명랑성의 능동성이 서로 대비되고 있다.


반면 그가 의식적으로 행한 모든 노력과 경주는 그를 단지 ‘수동성’으로 이끌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암시한다. 이처럼 죽어야 할 운명을 지닌 존재의 눈에는 풀 수 없을 정도로 엉켜 있는 듯이 보이는 오이디푸스 이야기의 매듭들이 서서히 풀린다. * 운명에 이끌린 자는 ‘수동성’ 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운명이다. 운명이 내민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기에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다. 오이디푸스가 원한 것도 아니었고 알고 행한 일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그렇게 오이디푸스 이전에 조건 지어져 있었던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그냥 아무것도 모른 채 자기 운명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그 자신이 그 이전에 겪었던 모든 고통이나 행위는 이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때 그 자신이 스스로 움직인다고 여겼던 행위들은 단지 그를 ‘수동성’으로 이끌었을 뿐이다. 그렇게 따지면 오이디푸스는 오히려 능동적으로 “운명” 안으로 걸어갔던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체로 보았을 때 ‘수동성“일 뿐이었다. 미로에 갇혀서 그 안을 맴돌고 있었던 셈이다.


변증법에 맞설 수 있는 이 ‘신적 작품’을 보면서 우리에게 인간적 환희가 솟구친다.

설령 이런 설명이 ‘시인’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라 하더라도, 이것으로 신화의 내용을 충분히 설명한 것인지 항상 되물어보아야 한다고 니체는 말한다. *여기서 시인은 ‘소포클레스’를 가리킴.


니체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 겉만 보는 피상적인 설명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다시 해체를 시도한다.




<오이디푸스 신화의 지혜가 전하는 것>


여기까지의 설명에서 드러나는 ‘시인’에 대한 전체해석은, 지옥을 보고 난 후 다친 우리의 눈을 치유해 주는 저 반사광(맹점)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 무엇인가? 피상적인 관찰은 맹점이 회복된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 즉 보상심리가 작용하여 ‘지옥을 보고 난 후 다친 우리 눈’이 맹점 보상 작용을 통하여 명랑성만을 복사해서 붙여 넣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니체는 이제 가려진 부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은폐된 부분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이 소포클레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일 테니까.


친아버지를 살해한 오이디푸스, 생모의 남편인 오이디푸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 오이디푸스, 운명적 행위의 신비스러운 삼위일체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현명한 마법사는 근친상간에 의해서만 태어날 수 있다는 아주 오래된 페르시아 민간 신앙이 있다.”

수수께끼를 풀고 자기 생모를 해방시키는 오이디푸스와 연관 지어 이 신앙을 이렇게 해석해야만 한다.

예언적이고 마법적인 힘에 의해 현재와 미래의 마력인 개별화의 엄격한 법칙이 무너진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고유한 마법까지 깨진 곳에서는, ‘자연에 역행하는 엄청난 일’이 “원인”으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 속의 ‘근친상간’의 경우처럼 말이다.


인간이 비자연적인 행동을 통해 자연에 저항하여 승리하지 않는다면, 자연으로 하여금 자신의 비밀을 밝히도록 강요할 방법이 또 달리 있겠는가? 니체는 오이디푸스 운명의 저 무시무시한 삼위일체 속에서 분명하게 이것을 인식했다.


이중성격의 스핑크스라는 자연의 수수께끼를 푼 사람은 생부의 살해자와 생모의 남편으로서도 가장 성스러운 자연 질서를 파괴해야만 했다. 그렇다. 신화는 지혜, 특히 디오니소스적 지혜는 자연을 거역하는 하나의 만행이라고. 또 자신의 지식으로 자연을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자는 자신에게도 자연이 해체되는 경험을 해야 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속삭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니체는 말한다.

“지혜의 칼끝은 지혜로운 자를 향한다. 지혜는 자연에 대한 범죄다.”


이 오이디푸스 신화는 이런 명제를 우리에게 외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의 시인이 마치 태양 광선처럼 신화의 거대한 ‘멤논 기둥Colossi of Memnon’을 부드럽게 쓰다듬자, 이 기둥은 갑자기 노래하기 시작한다. “소포클레스의 선율로!”


* 니체는 ‘멤논 기둥“을 소포클레스가 부드럽게 쓰다듬자 '소포클레스의 선율‘로 노래하기 시작한다고 한 이유는? 이 기둥을 수리한 후에는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았기 때문인가 보다. 여기에 빗대어 니체는 '신화의 거대한 기둥‘이 소포클레스를 통하여 노래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 그리고 어떤 것은 그 안에서 시작하여 그 안에서 마무리된다. 희기동소(喜忌同所)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한 장소에서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시작도 끝도 모두 같은 곳에서 시작되고 종결된다는 뜻일 거다. 그렇다면 그 장소는 어디일까? 바로 “자연”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실레노스의 지혜’처럼 태어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자연 상태 그 자체는 원인과 결과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기에 ‘운명’을 만들어 내는 공간인 것인지도. 어쩌면 우리의 삶도 우리가 있는 공간 그 자체에서 원인과 결과를 동시에 작용하고 있기에 ‘운명’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인간과 사회는 움직임 그 자체에서 동력을 얻는다. 그렇게 매 순간 끊임없이 움직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수동성’이라는 거대한 막 또한 느껴진다. 그 움직임 자체가 하나의 수동성으로 가는 움직임이라는 것에 대해서, 어쩌면 어느 정도의 답답함 역시, 그리고 고통 역시 ‘운명’을 이행하도록 요구하는 자연의 강요이기도 할 것이다.




멤논 거상Colossi of Memnon/ 다음백과
*멤논 거상Colossi of Memnon/ 이집트 상이집트 지방 키나 주 룩소르에 있는 아멘호테프 3세의 ‘장제전’ 유적/ 장제전은 고대 이집트에서 죽은 왕들을 예배하고 죽은 왕들에게 바칠 물건과 음식을 저장하던 곳이다. 아멘호테프 3세가 지은 장제전은 후세의 파라오들이 완전히 파괴하여, 남아 있는 것은 몇 개의 토대와 높이가 10m나 되는 ‘거대한 돌기둥’, 그리고 멤논의 거상이라고 부르는 2개의 조상뿐이다. 이 조상들은 아멘호테프 3세를 나타내고 있다. 머리에 쓴 관을 합하면 높이가 거의 22m나 된다. ‘북쪽에 있는 조상’은 기묘하게 높은 소리를 냈기 때문에 고대에는 노래하는 멤논으로 유명했다.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와 그의 왕비인 사비나를 비롯하여 수많은 로마 관광객들이 이 놀라운 소리를 듣기 위해 테베를 찾았다. 그러나 이 조상을 군데군데 수리한 후로 노래하는 멤논은 두 번 다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2. <아르킬로코스=아이스킬로스의 프로메테우스>


니체는 이제 “수동성의 영광”에, 아이스킬로스의 ‘프로메테우스’ 주위를 밝혀주고 있는 “능동성의 영광”을 대비시킨다.

아이스킬로스가 시인으로서 자신의 비유적 이미지를 통해 단지 예감만 하게 했던 것을, 젊은 괴테는 자신이 창조한 ‘프로메테우스의 거침없는 말들’을 통해 우리에게 밝혀 주었다.


여기 앉아, 인간을 듣는다.
내 형상에 따라
나와 닮은 한 종족을,
그는 괴로워하고, 울고,
즐기고, 기뻐한다.
그리고 너희를 존중하지 않는다.
마치 나처럼.



아이스킬로스의 《프로메테우스》에서 가장 멋진 점은 ‘정의를 지향하는 아이스킬로스적 경향’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한편에는 용감한 “개인들”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신의 고민” 즉 자신들의 황혼기에 대한 ‘예감’이 있다. 그리고 화해와 형이상학적 일치를 강요하는 이 두 고통 세계의 “힘”이 있다.

이 모든 것은 강력하게 아이스킬로스적 세계관의 중점과 주제를 상기시킨다. 그의 세계관으로 보면, 인간과 신들 위에 군림하는 것은 운명의 여신 “모이라”다.


아이스킬로스는 올림포스 세계를 자신의 천칭 저울에 올려놓고 저울질하는 대담성이 있다. 생각이 깊은 그리스인의 ‘형이상학적 확고부동한 토대’는, 그들의 비밀의식儀式 속에 있다. 그리고 ‘모든 회의와 변덕’은, 올림포스 신들에게서 발산된다. *그리스인들은 신을 두려워하지 않은 듯하다.


그리스 예술가들은 특히 이 신들에 대해 상호 의존의 막연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감정은 아이스킬로스와 프로메테우스와 속에 “상징화”되어 있다. 예술의 거장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창조하고 올림포스 신들을 멸망시킬 수 있다는, 그것도 ‘영원한 고통의 대가’로 획득했던 자신의 지혜를 통해, 신들을 멸망시킬 수 있다는 오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위대한 천재의 훌륭한 “능력” 그 대가로 받을 영원한 고통도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그런 능력, 예술가의 지독한 자부심, 이것이 바로 아이스킬로스 문학의 내용이자 진수다.


반면에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 속에서 성자의 승전가를 즉흥적으로 연주한다. 하지만 ‘아이스킬로스의 신화 해석’으로 이 신화가 지닌 놀라운 공포의 깊이가 다 측량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술가가 되는 기쁨, 어떤 불행도 견딜 수 있는 ‘예술적 창조의 자족감’은 비애의 검은 호수에 반사된 밝은 구름과 하늘의 영상에 불과한 것이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가치>


프로메테우스의 전설은 전체 아리아 민족 공동체가 원래 소유했던 재산이며, 심오하고 비극적인 것에 대한 그들의 재능을 기록한 것이다. 원죄 신화가 셈족의 본질을 규정하는 의미를 가지듯이, 마찬가지로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아리아인 종족의 본질을 규정하는 의미를 지닌다. 이 두 신화의 관계가 ‘남매지간’이라는 것도 개연성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전제는 발전하는 모든 문화의 수호신인 “불”에게 원시 인류가 부여했던 것과 같은 정도의 엄청난 가치인 것이다.


이러함에도 인간이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불을 붙이는 번개의 섬광이나 따뜻한 태양열 같은 하늘의 선물 외에, 다른 방법으로 불을 얻는다는 것은, 저 명상적인 원시인들에게는 신적인 자연에 대한 “모독”이며 “약탈”처럼 생각되었다.


이렇게 “최초의 철학적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당혹스러운 “모순”을 인관과 신 ‘사이에’ 세우고, 그것을 마치 하나의 바위 덩어리처럼 ‘모든 문화의 입구’로 옮겨놓았다.




<아리안 족의 ‘프로메테우스 신화’와 샘족의 ‘원죄 신화’의 대조>


프로메테우스는 인류가 관여할 수 있었던 최상이자 최선의 것을 “모독 행위”를 통해 얻어 냈다. 이에 인류는 이제 다시 ‘고통과 근심 걱정의 홍수’를 “대가”로 치러야 한다.


모욕당한 하늘의 신들은 이런 것들로 ‘높은 곳’을 지향하며 추구하는 인간들을 괴롭힌다. 이것은 ‘모독 행위’에 ‘품위’를 부여하는 가혹한 생각이다. 그런데 바로 그 때문에 셈족의 “원죄 신화”와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샘족의 신화에서는 호기심, 기만적 현혹, 매수, 호색에 대하여 주로 “여성적”인 일련의 정념들이 “악의 근원”으로 간주된다.


아리아인적 관념의 특징은 “능동적 죄”를 ‘프로메테우스 본연의 미덕’으로 간주하는 탁월한 견해다. 여기서 “염세적 비극”의 윤리적 토대, 즉 인간이 지은 죄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고통을 포함한 ‘모든 인간적 악’을 “정당화”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사물의 본질에 내재한 악”을 관조적인 아리아인은 성격상, 사물의 본질을 억지로 해석하지는 않는다. 세상의 심장부에 들어 있는 “모순”은 아이스킬로스에게 서로 상이한 세계들, 즉 신적 세계와 인간 세계의 혼란스러운 뒤섞임으로 나타난다.


각각의 세계는 독립된 개체로는 정당하지만, 다른 세계와 병존하는 하나의 세계로서 ‘자신의 개별화’로 인해,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없다.


‘개별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이 되려는 영웅적 충동’이 생기면 어떻게 되는가? 개별화의 속박을 넘어서서 “하나의 세계 본질 자체”가 되려고 하면, 개별적인 것은 사물 속에 감추어진 근원적 모순의 피해를 당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 존재는 '모독의 죄'를 짓고 고통받게 된다.

이렇게 아리아족은 “모독”을 남성으로, 샘족은 “죄”를 여성으로 이해한다. 이 연장선에서, 원초적 모독은 “남성”이, 원초적 죄는 “여성”이 저지른 것이 된다.

반면에 ‘마녀들의 합창’은 이렇게 말한다. *디오니소스 합창단을 의미하는 듯하다.


우린 그걸 너무 엄격하게 생각지 않아요.
천 걸음에 여자는 그 정도 갈 수 있지,
하지만, 여자가 제아무리 서둘러도
남자는 한번 훌쩍 뛰면 거기 갈 수 있지.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가장 깊은 핵심>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가장 깊은 핵심을 이해한 사람은, 즉 “거인이 되겠다”라고 노력하는 “개인”에게 주어진 “모독의 필연성”과 동시에 염세주의 사상의 ‘비아폴론적 성격’ 또한 반드시 느낀다는 것이다.


아폴론적인 성격의 특성은, 개인들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자기 인식’을 하고, “절도”를 지킬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가장 신성한 ‘세계 법칙’으로서의 이 경계선을 거듭 상기시킨다. 이로써 '개별존재들'을 안정시키고자 한다.


반면에 이 아폴론적 경향으로 인해, “형식”이 이집트적 뻣뻣함과 차가움으로 굳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를테면 호수에 일렁이는 하나하나의 물결에 궤도와 영역을 지정해 줌으로써, 호수 전체의 움직임을 마비시키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이렇게 이따금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큰 물결”이 필요하다. 이 물결은 일방적인 아폴론적 “의지”가 ‘그리스 정신’을 추방해 유폐시키고자 하는 저 작은 ‘동심원들’을 모두 휩쓸어 파괴해 버린다. * 작은 동심원들은 “개인들”의 의지를 말하는 듯하다. 그리고 디오니소스적인 물결이 모든 동심원들을 휩쓸고 호수의 안과 표면을 모두 뒤섞어 버린다는 것. “전복”이다. 이 전복적 사고가 ‘비아폴론적인 성격’인 “디오니소스적인 것”일 것이다.


마치 프로메테우스의 형인 ‘거인 아틀라스’가 지구를 등에 짊어지듯이, 갑자기 불어난 ‘디오니소스의 밀물’은, 개체들이 만드는 조그만 물결을 등에 짊어진다. 모든 개체의 아틀라스가 되어 넓은 등에 그것들을 지고 더 높이, 더 멀리 가져가려는 듯한 이 “거인적 충동”은 ‘프로메테우스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공통점이다. * 이 문장들을 옮겨 쓰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든다. 그 장면이 상상이 되면서 엄청난 호연지기적 장면이 연상된다. 그리고 등줄기에 어떤 소름이 일기도 한다. “거인적 충동”은 바로 이런 의미였구나! 싶다. 이러한 장면은 바로 “숭고미”를 주는 것 같다. 이것은 모두 내 머릿속에서 상상한 것을 내 몸이 체험하는 것이므로, 안전하기에 그 감정이 전율로써 “숭고”로 전해온 것.




< 존재의 ‘이중성’의 의미>


아이스킬로스의 ‘프로메테우스’는, 이런 점에서 디오니소스가 가장한 인물이지만, 아이스킬로스는 앞서 언급한 정의를 향한 깊은 열망 속에, 자신의 부계 조상이 ‘개체화의 신’이자 동시에 정의의 경계와 통찰의 신인 “아폴론”이라는 점을 은근히 폭로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이스킬로스의 프로메테우스가 가진 “이중성”, 즉 디오니소스적이며 동시에 아폴론적인 그의 성격은 다음과 같은 ‘공식의 개념’으로 표현될 수 있다. * ‘이중성’이라는 의미에는 이미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아폴론적으로의 개별화’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중성이라고 표현할 때는 항상 어떤 두 가지의 속성이 같이 겹쳐져 있는 것을 나타낸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그 토대이고 내용이고 본질이라면, 아폴론적인 형상이고 형식이며 개체적인 것이다. 비유하자면, 인간의 객체성 역시 여기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현존하는 모든 것은 정당하며 동시에 부당하다. 이 두 가지 면에서의 정당과 부당은 서로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 * 이중성으로 이루어진 현존하는 모든 것은, 서로 상대적이다. 그리고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그 존재는 드러나거나 은폐된다. 그러므로 존재의 정당과 부당은 항상 동시적이다.

이것이 바로 너의 세계다. 그것이 바로 ‘세계’라 불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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