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탄생/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14장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제14장 p108~114
<소크라테스의 시선과 영향력>
니체는 이제 키클롭스의 눈으로 ‘비극’을 바라보는 소크라테스의 ‘눈’, 즉 시선에 대해서 ‘상상해 보자’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시선은, “찬양받는 고상한”이라고 플라톤이 말했던 ‘비극 예술’에서 도대체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그는 비극 예술에서, ‘결과 없는 원인’, ‘원인 없는 결과’처럼 철저하게 “비합리적인 것”을 보았다. 이러한 비합리적인 것은 너무나 다채롭고 다양해 ‘사려 깊은 기질의 반감’을 사고, 민감하고 쉽게 자극받는 영혼에는 위험한 도화선이 된다.
소크라테스가 알고 있는 유일한 문학은 “이솝 우화”였다. 그가 ‘비극 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은 우화를 볼 때의 시선이다. 그는 “꿀벌과 암탉의 우화에서, 정직하고 착한 ‘겔레르트’가 ‘시의 찬미가’를 부를 때 가졌던 마음, 즉 미소 지으며 순응하는 그런 마음가짐”이 ‘비극’이라고 보았다.
“너는 내게서 보리라, 그것이 어디에 쓰이는지를,
분별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비유를 통해 진리를 말하는 것.”
*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시선은 “비극”이 비합리적이어서 분별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에게는 “비극 예술”이 결코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비극 예술을 “우화”정도로 치부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솝우화는 ‘아이소포스(기원전 6세기 경/이솝)’에 의해 지어졌다고 한다. 그 내용이 교훈적이고 처세적인 측면이 많다. 아마도 소크라테스는 비극을 ‘처세술’ 정도로 여겼고, 이것은 아첨하는 것이고 비굴하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그리고 도무지 뭔가 분명하지 않은 불분명의 모호함에 빠져 있다고 본 듯하다.
비극예술이 소크라테에게는 결코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비극 예술이 ‘분별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 즉 철학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호소한다면 그것은 분명 진리를 말한 것이다. 이는 소크라테스에게 “비극 예술”을 멀리해야 할 두 가지 이유인 것이다. * 비극예술은 합리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의미인 듯하다.
플라톤처럼 소크라테스도, 비극은 편안한 것만 표현하고 유익한 것은 수술하지 않는 ‘아첨의 예술’로 간주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의 제자들에게도 이런 ‘비철학적 유혹’은 엄격하게 거리를 둘 것을 요구했다.
그 결과는 젊은 비극 작가였던 플라톤이 소크라테스 제자가 되기 위해 가장 먼저 ‘시작품’을 불태워버릴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격파할 수 없는 천성이 ‘소크라테스의 원리’에 대항한 곳에서도, 이 원리의 힘과 저 강한 인물의 무게는 “시”자체를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위치’로 ‘옮겨 놓을 정도’로 영향력을 발휘했다. * 이제 그리스 사회에서 “시”의 무게는 감소하게 되었다. 비극에 대한 왜곡된 시선에 의해 비극을 억압한 결과는 결국 “시”의 문제로 귀착된다. 그것은 시의 “지위”에 관한 문제이다. 소크라테스주의의 플라톤에게 영향을 미쳤고, 플라톤은 시를 ‘전혀 새로운 위치’로 ‘옮겨 놓게 된다.
<플라톤의 새로운 예술 형식>
이러한 예는 바로 “플라톤”이다. 비극과 예술 일반의 단죄에 있어서 분명, 스승의 “소박한 냉소주의”에 뒤떨어지지 않는 그도, 전적으로 ‘예술적인 필요’ 때문에 “예술 형식 하나”를 만들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예술 형식은 그가 거부한 “기존의 예술 형식들”과 내적으로 닮아 있었다. 플라톤은 그가 만든 ‘예술 형식’과, ‘내적으로 닮아 있는 비극 예술’에 대하여 차별을 꾀할 필요가 있었다.
플라톤은 ‘과거의 예술에 대해 주된 비판’으로서, 예술은 “가상의 모방이라는 것”, 즉 ‘경험 세계보다 더 낮은 영역에 속한다’라고 비난했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그 자신이 행했던 기존 예술에 대한 비난은, 그 자신이 만든 "새로운 예술 형식"에는 해당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현실을 초월하고자 저 사이비 현실을 지탱하는 토대로서의 “이데아”를 서술하고자 애썼던 것이다. 이로써 플라톤은 우회로를 거쳐 결국 그 자신이 ‘시인’으로서 ‘고향처럼 익숙하게 생각했던 곳’에 도착했다. 소포클레스와 과거의 전체 예술이 저 ‘비난’에 엄숙하게 ‘항의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비극 예술’이 ‘이전의 모든 예술 장르를 자신 속에 흡수’했다고 한다면, 조금은 다른 의미에서 똑같은 말을 “플라톤의 『대화편』”에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대화편’은 ‘기존의 모든 양식’과 ‘형식들의 혼합’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야기, 서정시, 연극 사이에서 산문과 운문 사이를 부유浮游함으로써, ‘통일된 언어 형식’이라는 엄격한 과거의 법칙을 깨고 있다.
* 플라톤의 『대화편』/ 플라톤은 주로 저서를 희곡처럼 대화형식으로 남겼다. 당시는 지금처럼 철학 논문을 쓰는 법이 정립된 시기도 아니었다.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아서, 플라톤의 모든 저술은 등장인물이 나와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논의가 전개되는 형식을 따르고 있다. 제목은 주로 중심이 되는 등장인물의 이름인 경우가 많고, 가끔 주제를 담고 있는 것도 있다. 간혹 'OO에 대하여'라는 식으로 부제가 붙어있는 경우도 있다. 이는 후세 사람들이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나무위키>
견유학파犬儒學派 작가들은 이 길을 계속 걸어갔다. 극히 다양한 형식으로 산문과 운문 형식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광란의 소크라테스”라는 문학적 형상, 즉 그들이 실제 삶 속에서 그대로 구현했던 ‘문학적 형상’에 이르게 되었다.
견유학파犬儒學派/Cynic - 냉소적인 , 비꼬는, 냉소가/ BC 4세기부터 그리스도교 시대 직전까지 번성했던 그리스 철학의 한 학파. 행복이라는 것은 외적인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다고 보고, 무소유와 정신의 독립을 이상으로 삼은 고대 그리스 철학의 한 파. 사유체계보다는 ‘일상관습에서 벗어난 생활방식’으로 더 유명했다. 소크라테스 제자 ‘안티스테네스’가 창시자로 알려져 있지만, 대표적 인물은 시노페의 ‘디오게네스’이다.
디오게네스는 '자연 그대로'의 생활로 돌아가기 위해 ‘가족생활을 포함한 사회관습들을 파괴’하려고 애썼다. 이를 위해 공공건물에서 자고 음식을 구걸하면서 거지 방랑자로 살았다. 또 상황에 따라 일상관습에서 벗어난 행위를 할 때 아무에게도 해롭지 않다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으며, 자신의 대의명분을 솔직히 내세우고 스스로를 엄격히 훈련할 것을 주장했다.
<시가詩歌의 지위 하락>
플라톤의 ‘대화편’은 난파당한 배 같은 ‘과거의 시詩’가 자기 자식들을 도두 데리고 올라타 목숨을 구한 조각배와도 같다. ‘좁은 공간 속’으로 밀려 들어와 ‘소크라테스라는 한 명의 사공’에게 복종하면서, 그들은 이제 ‘미지의 세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이 행렬의 환상적인 모습’을 보는 것에 결코 싫증을 내지 않았다.
플라톤은 후세 전체를 위해서 “새로운 예술 형식의 모범”을 제공했다. ‘장편 소설’의 모범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무한히 고양된 이솝우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속에서 ‘시가詩歌’는, 수백 년 동안 ‘변증론적 철학’이 ‘신학’에 대해 위치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지위’를, ‘변증론적 철학’에 대해 ‘자리’하고 있다. 말하자면, 플라톤에게 있어서 ‘시가詩歌’는 ‘철학의 시녀’인 것이다. 이것이 ‘시가에 주어진 새로운 지위’였다. 플라톤은 마신적인 소크라테스의 압력에 의하여 ‘시가’를 시녀의 지위로 전락시킨 것이다.
* 철학이 신학의 시녀의 자리에 있듯이, ‘시가’는 플라톤에게로 와서 철학의 시녀가 된 것이다. 시가의 신분하락인 것이다. 이전의 비극예술에서 시가는 가장최상의 지위에 있었다. 즉 시가는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플라톤은 시가를 하락시킨 것이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시가의 지위를 다시 복권復權시키고자 하는 것 같다. 나 역시 예전에는 원래 시가는 궁정에서 임금의 비위를 맞추는 역할에서 시작된 줄 알았다. 시가의 위치는 명확 치는 않았었다. 니체는 지금 그 지위를 밝혀낸 것으로 보인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그리스 문화‘가 ’거의 모든 인류의 문화의 뿌리‘로 보는 것 같다. 시의 지위가 본래부터 낮았다면 사람들이 그렇게 시를 짓고자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를 짓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 본능‘에 가깝다. 그것은 그 자신을 높이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 높인다 ‘는 의미는 그 자신의 고통을 승화시켜 변환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며, 그 변화된 그 상태와 그 작품을 통해서 그 자신이 충일감을 갖기 때문이다. 충만감과 환희감은 만족감을 준다. 그러면 그 자신은 고양되는 것이다.
니체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니체가 시가의 지위를 ‘본래적으로’ 되찾으려 했다는 말은 여태 들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말은 들어 보았지만, ‘시가가 철학의 시녀’라는 말은 어쩌면 니체식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의 역사에서 시와 음악의 위치 변천사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이리 따지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모든 노력은 신학에게만 좋은 일 한 셈이다. 그 당시의 그들은 그것을 몰랐겠지만, 역사의 흐름은 그렇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다시 고대 그리스를 발견하여 르네상스가 펼쳐졌다. 그렇게도 좋아하고 흠모하던 르네상스 역시 절반의 예술이었던 것일까. 책 ‘비극의 탄생’에서 이러한 내용을 발견한 것은 뜻밖의 수확이다. 비극의 탄생에 이러한 내용이 아직까지 숨겨져 있었다니, 놀랍다.
여기서 철학적 사상은 ‘예술을 감시’하고, 예술로 하여금 ‘변증법의 줄기에 밀착할 것’을 “강요”한다. 이제 아폴론적 경향은 ‘논리적 도식주의’로 변질되었다. 우리는 에우리피데스에게서 이와 유사한 상황을 관찰할 수 있다. 그 밖에도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자연주의적 격정’으로 변했음을 인지할 수 있다.
*철학사상 -> 예술감시, 변증법의 줄기에 밀착하도록 강요.
*아폴론적 경향 -> 논리적 도식주의로 변질
*디오니소스적인 것 -> 자연주의적 격정으로 변질
*여기서 자연주의적 ‘격정’은 눈에 보이는 자연을 의미하는 것인 듯하다.
<변증론의 본질’ 속에 들어 있는 낙천주의적 요소/ 비극의 본질 파괴>
플라톤의 연극에서 ‘변증론적 주인공’을 맡고 있는 소크라테스를 보면, 그와 흡사한 성격을 가진 에우리피데스의 주인공들을 기억하게 된다. 그들은 논증과 반증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종종 ‘그들의 희극’에 대한 ‘우리의 동정심’을 ‘상실할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변증론의 본질’ 속에 들어 있는 ‘낙천주의적 요소’, 즉 결론이 나올 때마다 환호를 올리며, 명철한 의식 속에서만 숨 쉴 수 있는 그런 요소를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비극 속으로 한번 침투한 낙천주의적 요소는 ‘비극의 디오니소스 영토’를 서서히 잠식한다. 결국 그것을 자기 파멸로, 즉 ‘시민극’으로의 ‘투신자살’로 몰아갈 수밖에 없다.
“미덕은 자식이다. 죄는 무지에서 저질러진다. 미덕을 갖춘 자는 행복한 자다”라는 ‘소크라테스 명제의 논리적 결론’만 상기하면 된다.
낙천주의의 이 ‘세 근본 형식’ 속에 ‘비극의 죽음’이 들어 있다. 왜냐하면 이제 ‘덕 있는 주인공은 변증론자’여야 하고, 미덕과 지식, 신앙과 도덕은 ‘필연적이고 가시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초월적 정의’라는 ‘아이스킬로스의 해결책’은, 상투적인 자동 해결사인 “신”을 사용하는 ‘시적詩的 정의’라는 평면적이고 파렴치한 원칙으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소크라테스적 -낙천주의적 무대 세계’에 비해, 이제 ‘합창단’과 ‘비극의 음악적인 디오니소스적 토대 전체’는 어떻게 보일 것인가? 그것은 ‘우연적인 것’으로, ‘비극의 기원에 대한 없어도 좋을 추억’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합창단”을 ‘비극’과 ‘비극적인 것’ 자체의 원인으로 생각할 때에만,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합창단의 중요성
이러함에도 이미 ‘소포클레스’에게서 ‘합창단을 둘러싼 당혹감’이 역력히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는 이미 그에게서 “비극의 디오니소스적 기반이 무너지기 시작한다”는 중요한 ‘징표’다. 그는 과감하게 합창단을 등장인물로, 배우로 새롭게 이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합창단은 마치 오케스트라에서 나와 ‘무대 위로 올라간 듯’이 보였다.
* 소포클레스는 아이스킬로스가 합창단을 줄여서 12명으로 만들었고 배우 한 명을 더 도입하여 2인으로 만든 것에서, 더 비극의 형식을 변형시켰다. 합창단을 더 축소하였고, 배우를 한 사람 더 늘렸다. 그만큼 음악이 줄어 들고 대사 중심으로 흐르게 되었다. 니체는 지금 합창단을 축소하거나 배우를 늘리면, 오케스트라가 무대 위로 올라간 것이라고 말한다. 합창단은 축소되면 안 되는 것이었다. 니체는 소포클레스의 이러한 변형을 안타까워하는 것 같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변형을 통해서도 드러낼 수 있다고 소포클레스는 생각했던 것일까? 연극을 통해서 표현된다고 보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서사와 서정은 조금 다른 절차를 통한다.
비록 아리스토텔레스가 합창단에 대한 이런 견해에 찬성했을지라도, 이로써 “합창단의 본질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소포클레스는 매번 자신의 연극을 상연하면서, 또 전승에 따르면 어떤 책에서도 ‘합창단의 위치’를 이와 같이 변화시킬 것을 추천했다고 한다. 이는 합창단의 절멸에 이르는 첫걸음을 뗀 셈이 된다. 그 뒤를 이어 에우리피데스. 아가톤과 새로운 희극에서 파멸은 급속도로 진행된다.
낙천주의적 변증론은 ‘삼단논법’의 채찍을 휘둘러 ‘음악’을 비극에서 추방한다. 음악은 ‘비극의 본질’, 즉 ‘디오니소스적 상태’의 ‘유일한 표현’이며 ‘형상화’다. 비극에서 음악의 추방은, ‘음악의 가시적 상징화’이며 디오니소스적 도취의 꿈같은 세계로 해석될 수 있는 ‘비극의 본질’을 파괴한 것이다.
여기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소크라테스 이전에 ‘반디오니소스적 경향’이 이미 작용하고 있었으며, 이 경향은 단지 소크라테스에게서 전례 없이 힘찬 표현을 얻었을 뿐이라고 ‘가정했다’고 니체는 말한다. * 니체는 왜 '가정'이 필요했던 것일까? 니체는 이 지점에서 소크라테스가 감옥에서 죽음 직전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소포클레스를 ‘합창단’ 파괴의 시작으로 본다는 것은 좀 그렇다. 합창단 변형은 아이스킬로스부터 시작되었다. 앞 장들에서는 이런 말이 없다가 이 지점에서 이렇게 가정을 하니 조금 당혹스럽다. 어쨌든 내가 니체의 미끼에 또 낚였나 보다. 뒤에 가서는 또 어떤 내용들이 펼쳐질지 모르니까. 이번에도 나에게 있어서는 반전이다.
합창단이 변형되기는 하였지만 소포클래스에 있어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여전히 살아 있다. 나는 왜 소포클래스를 변론하고 있는가? 1세대 2세대 3세대의 형태로 흐르면서 비극의 형태는 변형되고 이내 변질이 가속화되었다. 이것은 시대의 흐름상 어쩔 수 없는 변화이기는 하지만, 니체는 여기서 예술과 소크라테스주의와의 공존은 불가능했는가?를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여기서 ‘가정’이라고 못을 박고, 소크라테스를 비극 살해범에서 일단 보류하고 있는 듯하다.
* 이러한 논의는 비극의 탄생 안에서의 이야기이므로 비극의 탄생의 개연성을 따라가며 감정 이입을 하여 상황을 파악해 보는 것이다. 다만 문득문득 이렇게 낚시에 걸려 항의를 해보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같은 현상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소크라테스와 같은 현상’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플라톤의 ‘대화편’의 내용을, 단지 소크라테스 현상을 해체하기만 하는 부정적 힘으로서 해석할 수만은 없다. ‘소크라테스적 충동’의 가장 직접적인 효과는 분명 ‘디오니소스적 비극의 해체’였지만, 소크라테스의 심오한 인생 체험을 볼 때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소크라테스주의와 예술 사이에는 반드시 대립관계만 존재하는가? 또 ‘예술가적 소크라테스 탄생’은 그 자체로 모순된 것인가?”
라는 질문 말이다.
저 폭군적 논리학자 소크라테스는 가끔 예술을 대하면서 공허감, 공백감과 아울러 반쯤은 자책감 어쩌면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느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옥중에서 종종 같은 꿈을 꾸었다. 이 꿈에서는 항상,
“소크라테스, 음악을 울려라!”
라는 말만 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생애 마지막 날까지, 자신의 철학은 ‘최고의 음악 예술’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달랬다. 그래서 꿈에서 말이 들릴 때마다, 이렇게 생각한다. “어떤 신이 자신에게 저 ‘비속하고 대중적인 음악’을 상기시키려 하나 보다”하면서 꿈속의 말을 진지하게 믿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소크라테스는 감옥에서 ‘양심의 가책’을 덜어볼 심산으로 자신이 경시했던 ‘음악’을 하겠다고 다짐한다. 이런 심정에서 아폴론에게 바치는 노래를 짓고 이솝 우화 몇 개를 ‘운문’으로 바꾸어 놓기도 하였다.
소크라테스를 이런 습작으로 몰고 간 것은 ‘마신이 경고하는 목소리’와 ‘비슷한 것’이었다. 이 목소리는 바로 자신의 ‘몰이해’로 말미암아 신에게 죄를 지을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깨달은 소크라테스 자신의 아폴론적 인식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야만인 왕처럼 ‘고귀한 신의 형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스스로의 경고였던 것이다.
*gnothi seauton/그노티 세아우톤/ 델포이 신전에 새겨진 문구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여기에도 해당될 수 있을 듯하다. 소크라테스에게 “음악을 연주하라”하라고 한 꿈의 목소리는 아폴론적 인식이지만, 소크라테스는 아폴론적 인식마저도 잠재우고 있었는지 모른다.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은 동전의 양면처럼 포개져 있다. 지금 이렇게 글 쓰고 있는 나는 합리적인 사람인가? 사람이 합리적인 판단만 한다면, 그 자신의 존재를 온전하게 지탱할 수 없다. 비합리적인 것이 합리적인 것이고, 합리적인 것은 또 비합리적이기도 하다.
<합리성과 비합리성은 겹쳐져 있다>
소크라테스의 꿈에 나오는 ‘그 말’은 ‘논리성의 한계’를 우려하는 “유일한 징표”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야만 했을 것이다.
“나에게 이해되지 않는 것이라고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지 않을까? 논리학자를 추방해 버린 지혜의 왕국이 있지 않을까? 예술은 학문과 상관성이 있으며 혹 그것을 보완하는 것은 아닐까?”
* 니체는 그의 저서 여러 곳에서 학문에 관한 견해를 내보인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도 학문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가의 지위에 대한 것을 다시 묻는 것이다. 그리고 원래의 ‘시가’ 자리에 시가를 되돌리는 것이다. 혹자는 니체가 그의 저작 말년으로 갈수록 학문을 인정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니체는 학문을 처음부터 인정 안 했던 것은 아니다. 니체는 “학문이 예술과 같은 과정을 겪는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 학문을 하는 과정에서 예술적인 원리가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를 ‘철학자’로 말하지만, 나는 니체를 예술가 또는 미학자라고 말하고 싶다. 니체가 《비극의 탄생》을 통하여 ‘시가詩歌’의 지위를 되찾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연의 본래적 질서였으며, 인간의 근원을 찾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서부터 ‘시작詩作’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학문은 ‘시가’ 이후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시가는 곧 음악이기 때문이다. 음악에서부터 언어는 표본을 산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