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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신화'를 낳았다. '낳음'은 음악의 능력이다

비극의 탄생/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16장

by 아란도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제16장 p120~127






<‘비극’에 대한 고찰>


니체는 역사적 실례를 통하여 “비극” 음악의 정신에서만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혔다. 또한 “음악의 정신”이 사라질 때 비극 역시 확실하게 ‘멸망’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혔다. *비극은 음악의 정신에서만 탄생한다. 그리고 음악의 정신이 사라지면 비극 역시 소멸한다. 음악의 정신이 없다면 비극도 없다. 불가분의 관계다. 비극이 형이상학적 예술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음악이 정신으로만 감흥하기 때문이다. 가시적인 현상의 예술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세계로부터 근원 하기 때문일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주장의 ‘비일상적’인 ‘특이성을 완화’하고, 이러한 ‘인식의 근원’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눈으로 ‘우리 시대의 유사한 현상들’을 관찰해야 한다고 말한다. *“비일상적인 특이성”이라는 말은 ‘비가시적인 실재의 세계’라는 의미이다. 비일상성이라는 말은 일상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일상과 비일상의 ‘차이적 차이’는 무엇인가? 비일상은 일상을 비틀면 비일상이 된다. 다르게 살아보기 또는 낯설게 보기가 여기에 해당한다. 예술은 일상을 비틀어서 비일상이 드러나게 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것은 ‘특이성’을 발생시킨다. 이 특이성에 의해 무엇인가의 일의적인 형태가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형이상학적 예술의 형태이다. 일의성을 갖는 것은 바로 이 예술의 형태인 것이고, 이것이 삶을 지속시킨다. 이것이 원동력이다.








<'낙천주의적 인식’과 ‘비극적 예술의 필요>



니체는 현 세계의 최고 영역에서 ‘만족할 줄 모르는 낙천주의적 인식’ ‘비극적 예술의 필요’ ‘사이’에서 벌어지는 ‘싸움의 한복판’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 투명인간이 되어 그 싸움 한복판에서 그것들의 양쪽 양상을 제대로 관찰해야 한다는 것. * 한편 '낭만주의'의 뿌리가 '낙천주의적 인식인지도.


니체는 ‘예술과 비극’에 ‘대항’하는 다른 모든 ‘적대적 충동들’을 무시하겠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충동들은 현재에도 승리를 확신한 채 대중 속에 확산되고 있다. 예컨대 무대 예술 중에서도 '소극笑劇과 발레'만이 어느 정도 무성하게 자라나서, 모든 이에게 ‘향기롭지만은 않은 꽃’을 피우고 있을 정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소극과 발레를 니체는 예술과 비극에 적대적 충동이라고 말하고 있다. 소극은 ‘대사와 동작’ 위주이다. 발레는 ‘동작과 율동’ 위주이다. 그런데 현대에서 보자면, 소극의 배우도 발레의 발레리나도 모두 그 자신의 고통을 감수하고 ‘신체적 기술’을 획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속에서 분출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어떠한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것을 ‘연마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니체에 의한다면, 이것은 절반의 예술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아폴론적 환영에 의한 ’ 개별화된 상태‘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단도직입적으로 “가장 고상한 적대세력”에 대해서만 말한다는 의미인가 보다. 굳이 여기서 다루어야 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그보다 더 중요한 사안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니체는, 다만 ‘비극적 세계관’의 “가장 고상한 적대 세력”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조상 소크라테스를 우두머리’로 하여 ‘가장 깊은 본질’에 있는 “낙천주의적 학문”을 의미한다.

니체는 이 싸움의 한복판으로 뛰어들기 전에, 이제까지 획득한 ‘인식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고 말한다. * 인식의 갑옷. 사람은 어떤 싸움에 임하거나 혹은 그 자신을 보호하려면 갑옷이 있어야 한다. 날것 상태의 맨 몸으로 그 무엇인가를 대적할 수는 없으니까. 사람의 삶도 이러한 ‘인식의 갑옷’이 필요하다. 사람은 그 갑옷이 없어서 때로는 고통스러운 것이니까. 사람은 어쩌면 그 갑옷을 만들려고 고군분투하며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니체가 분류한 두 부류/

(1) ‘하나의 원칙’을 모든 예술 작품의 필연적인 삶의 원천‘으로 생각하는 부류

(2)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에게서 '두 개의 상이한 예술 세계'의 생생하고 분명한 대표들을 인식하는 부류 >



니체는 ‘두 부류’에 대하여 구분하여 말한다.


그 하나는, ‘하나의 원칙’을 모든 예술 작품의 필연적인 삶의 원천으로 생각하고, 이 원칙으로부터 예술을 추론해 내는 데 열심인 사람들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의 저 예술신,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에게서 그 깊은 본질과 최고의 목적에서 '두 개의 상이한 예술 세계'의 생생하고 분명한 대표들을 인식하는 사람들이다. 니체는 두 개의 부류에서 후자의 입장에 그 자신의 시선을 향하고 있다.


니체에게 아폴론은 ‘개별화의 원칙’을 미화하는 수호자로 서 있다. 오로지 아폴론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허구’ 속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허구 속에서’는 ‘가상’ 세계를 의미한다. 즉 비현실적인 세계다. 가상 세계 속에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

반면, 디오니소스의 신비한 환호 아래서 ‘개별화의 족쇄’는 산산이 부서지고, ‘존재의 어머니들’에게 사물의 내밀한 핵심에 이르는 길을 열린다. * 여기서 ‘개별화의 족쇄’가 부서진다는 말의 의미는, 자기 포기상태인 도취로 진입하여, 일자의 근원에 접속하여 합일된다는 뜻이다.


아폴론적 예술로서의 ‘조형 예술’과 디오니소스적 예술가로서의 ‘음악’을 가르는 저 ‘엄청난 대립’을 분명하게 본 사람은 위대한 사상가 가운데 유일하게 단 한 사람이다. * 조형예술과 음악의 엄청난 대립이 의미하는 바는 이러하다. 조형예술은 개별화의 예술, 즉 독립적 피사체를 만들어 내는 예술이다. 음악은 근원에서 올라오는 ‘의지’이다. 이 두 예술이 대립하고 있다는 의미는, 하나는 독립되고자 하고 또 하나는 합일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립적인 관계의 예술이 그리스 비극에서 하나로 모아졌고, 두 원리는 융합되었다. 그것은 차례대로 일어나는 ‘순서’에 입각한 원리가 되었다. 디오니소스의 원리가 비가시적이고 아폴론적 원리가 가시적이다. 이 두 원리는 공존한다. 공존의 예술이 비극인 것이다.


그래서 그 사상가는 그리스 ‘신들의 상징’의 안내를 받지 않고도, 다른 예술들과 구분되는 ‘성격과 기원’이 “음악”에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 왜냐하면 음악은 다른 예술들과는 달리, ‘현상의 모사’가 아니라, ‘의지의 직접적인 모사’이기 때문이다. 즉, 세상의 모든 물질적인 것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것”을 ‘모든 현상’에 대해 “물자체”를 묘사하기 때문이다. 〈니체가 책에 직접 인용/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권 310쪽〉


리하르트 바그너『베토벤』에서

“음악은 결코 미의 범주가 아니라, 다른 조형 예술과는 전혀 다른 ‘미학적 원칙’에 따라 측정되어야 한다.”

라고 확인하였다.

그는 ‘모든 미학의 가장 중요한 원칙’에 자신의 낙관을 찍어 그것이 진리임을 보증했다. 이와 더불어 ‘미학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이러하였지만, 한편으로 바그너는 잘못된 미학에 오도되었다. 왜곡된 예술의 손 안에서 놀아난 것이다. 그는 ‘조형세계’에서나 통하는 미의 개념을 가지고, ‘음악’에게 미술작품과 비슷한 효과를 요구했다. 즉 “아름다운 형식에 대한 즐거움”을 불러일으킬 것을 요구했다. * 바그너의 이런 오류에도 불구하고, 바그너가 ‘베토벤’에서 쓴 표현에 대해, 니체는 그 말이 맞는 표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음악은 결코 미의 범주가 아니라, 다른 조형 예술과는 전혀 다른 ‘미학적 원칙’에 따라 측정되어야 한다.”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이 말과 더불어 ‘미학이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니체는 말하고 있다.






<니체의 인식과 비극의 근본문제 그리고 마법적 능력>


니체는 이 엄청난 대립을 인식한 후, ‘그리스 비극의 본질’과 ‘헬레니즘의 수호신의 가장 심오한 현현’을 좀 더 가까이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비로소 ‘통상적인 미학의 미사여구’를 넘어서서, ‘비극의 근본 문제’를 생생하게 그 자신의 머릿속에 그려낼 수 있는 ‘마법의 능력’을 가졌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 아마도 ‘마법의 능력’이 의미하는 바는, 도취와 가상의 세계가 펼쳐지는 ‘원리에 대한 감각’ 일 것이다. '마법적 능력'이라고 말한 것에서 보자면, 그 메커니즘에 대해 이해하고 나면 그 표현이 아무 문제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니체는 이것에 의해 이상할 정도로 독특한 시선으로 ‘헬레니즘적인 것’을 통찰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니체는, ‘거만한 체하는 고전적 헬레니즘적 학문’이 이제까지 주로 ‘그림자 연극’과 ‘피상적인 면’만을 보고 즐길 줄 알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 눈에 보이는 현상적 헬레니즘 학문에 문제 제기하는 니체. ‘거만한 체하는 고전적 헬레니즘적 학문’은 낙천주의적 학문, 즉 소크라테스적 낙천주의를 가리킨다.



니체는 다음의 질문으로 ‘저 근본 문제’를 건드리려고 한다.


이에 관해선 쇼펜하우어가 가장 상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리하르트 바그너도 이 문제에서 쇼펜하우어가가 더할 나위 없이 명료하고 투명한 서술을 했다고 찬사 한 바 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가 서술한 부분 전체를 인용한다’라고 말한다.




<쇼펜하우어의 음악론>


<니체의 인용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권 310쪽>

이 모든 것에 따라 우리는 현상 세계, 또는 ‘자연이나 음악’을 ‘동일한 사물’의 ‘서로 상이한 두 표현’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사물 자체가 둘의 유사점을 유일하게 매개하는 것이고, 유사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매개체를 인식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에 따르면, 음악은 세계의 표현으로 간주될 경우, 최고로 보편적인 언어다. 심지어 이 언어는 개념의 보편성에 대해서도, 개별적인 사물에 대한 관계와 동일한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음악의 보편성은 추상의 공허한 보편성이 아니라,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며, 일반적이고 명확한 내용과 결부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음악은, 기하학적 도형이나 숫자와 비슷하다. 즉 모든 가능한 경험 대상의 보편적인 형식으로서 모든 것에 선험적으로 적용 가능하지만,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다.

가능한 모든 노력, 흥분과 의지의 표출, 즉 이성이 부정적이고 광범위한 개념인 감정으로 치부하는 인간 내면의 모든 과정이 무수히 가능한 선율 속에 표현된다. (15장/p123)

____
그러나 소재 없이 항상 단순한 형식의 보편성 속에서 표현되며, 마치 육체 없이 육체의 가장 내적인 영혼을 따르듯이 현상을 따르지 않고, 언제나 물 자체를 따른다.

음악이 모든 사물의 진정한 본질과 맺는 이 친밀한 관계로부터 다음 현상이 설명될 수 있다. 즉 어떤 장면, 줄거리, 사건, 환경에 적절한 음악이 흐르면, 음악은 그것의 가장 은밀한 의미를 해명해 주는 것 같고, 그에 대해 가장 명확하고 분명한 주석을 알려주는 듯한 까닭이 설명된다.

이는 어떤 교향곡이 주는 인상에 완전히 몰두한 사람이 음악을 들으면서 마치 삶과 세계의 모든 가능한 과정이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리면, 그는 자기 눈앞에서 떠다니던 사물들과 저 음악 사이에 어떤 유사성도 진술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말했듯이, 음악은 현상의 모사가 아니라,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의지의 적절한 대상의 모사가 아니라, 의지 자체의 직접적인 모사이며, 세상의 물질적인 모든 것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것, 모든 현상에 대해 물 자체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다른 예술과 구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구체화된 음악이라 불러도 되고 구체화된 의지라 불러도 될 것이다. 그러므로 왜 음악이 모든 형상, 즉 실질적 삶과 세상의 장면이 좀 더 높은 의미를 가지고 나타나도록 만드는지 그 이유가 분명해진다.

물론 선율이 주어진 현상의 내적 정신과 유사하면 할수록 그 의미는 그만큼 더 명료해진다. 바로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 우리는 시를 노래로서 구체적인 묘사를 무언극으로서 또는 이 둘을 오페라로서 음악에 종속시킬 수 있다. (15장/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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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보편적인 언어에 종속된 인간의 삶의 모습들이 필연적으로 음악에 연결되어 있거나 음악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 모습들과 음악의 관계는 보편적인 개념들과 임의의 사례들과의 관계와 같다.

그 모습들은 음악이 단순한 형식의 보편성 속에서 표현하는 것을 현실의 명확성 속에서 묘사한다. 선율은 어떤 의미에서는 보편적 개념처럼 현실의 추상화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실은, 즉 개별적인 사물의 세계는 개념의 보편성과 선율의 보편성에,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것, 특수하고 개인적인 것, 개별 사건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개념과 선율의 두 보편성은 어떤 측면에서는 서로 대립된다. 개념들은 관조로부터 추상화된 형식, 즉 사물에서 벗겨낸 겉껍질만을 가지고 있어서 추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에 반해 음악은 모든 형체들에 앞서 존재하는 가장 내밀한 핵심, 사물의 심장을 제공한다. 이런 관계는 스콜라 학파의 언어로 잘 표현될 수 있다. 즉 개념들은 시물 이후의 보편universalia post rem이지만, 음악은 사물 이전의 보편universalia ante rem이고, 현실은 사물 속의 보편universalia in re이다.

그러나 작곡과 구체적인 묘사 사이에 관계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은 이미 말했듯이, 이 둘은 세상의 동일한 내적 본질의 상이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어떤 개별적인 경우에 그런 관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다시 말해 작곡자가 어떤 사건의 핵심이 되는 의지의 활동을 음악의 보편적 언어로 표현할 줄 안다면, 그 노래의 선율, 그 오페라의 음악은 표현력이 풍부할 것이다.

그러나 작곡가가 발견한 둘 사이의 유사성은, 그의 이성이 의식하지 못한 채, 세게의 본질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으로부터 얻어져야 하며, 의식적이고 고의적으로 개념들을 통해 매개된 모방이어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음악은 내적 본질, 즉 의지 자체를 표현하지 못하고 의지의 현상만을 불충분하게 모방할 뿐이다. 원래 모방하는 모든 음악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15장/p125)










<음악은 ‘현상의 모사’가 아니라, ‘의지의 직접적인 모사’이다/ '낳음'이 음악의 능력이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이론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음악을 의지의 언어로 직접 이해’하게 된다”라고 말한다. 음악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며, 보이지는 않지만, 생생하게 움직이는 정신세계에 ‘형태를 부여’한다. 그러면 그것을 ‘유사한 보기’로 ‘구체화’하고 싶은 ‘우리의 환상이 발동하는 것’을 느낀다. * 쇼펜하우어에 이론이 가리키는 의미는, 우리는 음악과 직접적 소통을 한다는 것이다. 음악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우리의 정신세계를 볼 수는 없지만, 생생하게 움직이는 정신세계에 음악은 ‘형태를 부여’한다. 그리되면 우리는 이것에 대하여 ‘유사한 보기(시, 노래, 그림, 조각 등등)’로 ‘구체화’하고 싶어 하는 ‘우리의 “환상”이 발동하는 것’을 느낀다는 것. 여기서 환상은 실행하고자 하는 어떤 ‘충동’인 것이다. 음악이 정신세계에 형태를 부여한다는 의미는, 어떤 ‘이미지’ 일 것이다. 이 이미지 구현을 하려고 우리는 충동을 일으키는 것인지도.

다른 한편, ‘형상과 개념’은 진실로 이에 부합하는 ‘음악의 영향’으로 한층 ‘더 높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 형상과 개념은 음악이 부여한 이미지에서 산출된 것이므로 더 높은 의미가 부여된다.


‘디오니소스적 예술’은 보통 ‘아폴론적 예술 능력’에 두‘ 가지 영향’을 미친다. “음악”은 ‘디오니소스적 보편성’을 ‘비유의 형식’으로 “관조”하게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음악은, 비유 형식의 ‘형상’을 ‘최고의 의미’를 가지고 나타나게 한다. * 음악이 디오니소스의 보편성을 비유의 형식으로 “관조”하게 한다. 그리고 이 관조는 비유“형상”을 ‘최고의 의미’를 가지고 나타나게 한다. * 관조 상태는 수동성의 상태다. 즉 음악이 수동성을 강요한다. 이 수동성에 의해 자기 포기의 높이에 도달하게 된다. 음악이 신체에 대하여 수동성에 대한 강요가 없었다면 어쩌면 인간은 ‘디오니소스의 비유 형상’의 ‘최고의 의미’를 알 수 없었을 것이며, ‘형이상학적 위안과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음악의 수동성 강요’가 이 모든 것의 어머니이며, 모성이며, 감성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더욱 깊이 있는 관찰이 필요 없는 그 자체로 자명한 사실들로부터, 니체는 '음악의 능력'이 가장 의미 있는 본보기인 “신화를 낳을 수 있음”을 밝혀낸다. 디오니소스의 인식에 관해 음악은 ‘비유’를 통해 말한다. 이 비유가 ‘비극적 신화’를 낳는다. 바로 이 ‘낳음’이 “음악의 능력”이다. * 음악은 ‘모성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모성이 만유를 ‘낳은’ 것이다. 먼저 음악은 비유를 통하여 신화를 낳았다.



니체는 앞서 ‘서정시인의 현상’을 통해 “음악이 서정시인에게서 ‘아폴론의 형상’을 빌려 ‘자신의 본질’을 알리려 애쓴다”는 점을 서술했었다.


‘음악’이 최고로 ‘고양된 상태’에서, 최고의 ‘형상화’에 이르도록 노력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음악’이 자신의 진정한 ‘디오니소스적 지혜’를 위한 ‘상징적 표현’을 찾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이러한 표현을 비극에서 그리고 ‘비극적인 것’이라는 개념 속에서 찾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 “비극”이 예술의 원리이다.


보통 ‘허구와 미’의 ‘유일한 범주’에 의거해 이해하는 ‘예술의 본질’로부터는 ‘비극적인 것’을 결코 도출해 낼 수 없다. 반면, 우리는 ‘음악의 정신’에 의해 ‘개체의 파멸’이라는 “즐거움을 이해”한다. 왜냐하면, 이 ‘파멸’의 ‘개별 사례들’에서는, 오직 “디오니소스적 예술의 영원한 현상”만이 우리에게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 전자의 문장의 의미는 아폴론적 예술의 특성을 의미한다. 이것에 기반하고 있는 예술로는 ‘비극적인 것’을 도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체의 파멸은 음악의 정신에 의해서다. 이것은 도취의 예술 즉 디오니소스적 예술을 의미한다. 도취의 세계에서 ‘개체의 파멸’, 즉 자기라는 생각과 너라는 생각이 사라진다. 근원적 일자와 합일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사라지는 것, 즉 자기 포기 상태가 개체의 파멸 상태다. 예술적 체험은 현재의 자기의식을 가지고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사라지고 수호신의 눈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환영으로 나타난다. 즉 이미지다. 이것을 산출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은 그 자신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수호신이 본 것, 느낀 것에 대한 이미지 산출과 같다. 비극적인 것이란? 개체가 파멸되기 때문에 ‘비극’이었던 것. 그리스 비극도 그래서 ‘비극’이라고 이름이 붙은 것. 그러므로 비극은 디오니소스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무게중심이 디오니소스적 도취에 있었던 것.


그렇다면 정녕, 시나 노래 그림 조각은 '누가' 쓰고 부르고 그리고 조각한 것일까?





디오니소스적 예술은, ‘개체 원칙’의 배후에 있는 ‘전능한 의지’, 모든 현상의 ‘피안’에서 모든 ‘파멸’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영원한 생명’을 표현한다. * 영원한 생명은 개체의 파멸에 의해서 근원적인 일자와 합일하므로, 영원한 생명은 바로 근원적인 일자이다. 그러므로 이 디오니소스 현상이 나타나고 가상세계를 경험하는 바로 그 상태는 비가시적인 세계다. 비일상적인 세계만이 영원하다.


‘비극적인 것’에 대한 ‘형이상학의 기쁨’은, ‘무의식적인 디오니소스적 지혜’가 ‘형상의 언어’로 ‘번역된 것’이다. * 형이상학적인 기쁨은 ‘환희감’이다. 무의식적 지혜가 형상의 언어로 번역되면, 기쁨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희열이다. 환희감에서 피어나는 ‘웃음’이다.







영웅, 최고의 의지 현상은, 우리의 쾌락을 위해 부정된다. 왜냐하면, ‘영웅’은 단지 ‘현상일 뿐’이며, “의지의 영원한 생명”은 그의 파멸에도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라고 ‘비극’은 부르짖는다. 반면, “음악은 이 생명의 직접적인 이념이다.”

여기서 아폴론은, “현상의 영원성”에 대한 ‘빛나는 찬미’를 통해 ‘개체의 고통’을 극복한다. ‘미’는, 생명에 내재하는 고통을 이긴다. ‘고통’은 어떤 의미에서 ‘자연의 성질’로부터 제거된 것처럼 보인다.

디오니소스적 예술에서, 그리고 그것의 ‘비극적 상징’에서 ‘동일한 자연’이 꾸밈없는 진실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한다. * 목소리는 바로 음악이다. 음악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

“나처럼 되어라! 현상의 끊임없는 변화에서 영원히 창조적이고, 영원히 실존을 강요하며, 이 현상의 변화에 영원히 만족하는 원초적 어머니인 나를!”

* 음악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임. 음악은 모성이고 원초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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