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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은 예술의 원리에 기반하고 있다

비극의 탄생/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15장

by 아란도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제15장 p114~120





<모든 문화의 고삐를 쥐고 있는 그리스 문화>



소크라테스가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의 것은 공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이 물음을 스스로에게 물었어야 한다고 니체는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영향은 그 순간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마치 석양에 점점 더 커져가는 그림처럼 후세로 퍼져갔다. 그리고 그 영향은 ‘예술의 형이상’에서, 즉 가장 포괄적이며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의 예술에게 ‘새로운 창조’를 ‘강요’했다. 또한 그 영향은 ‘자기 자신의 무한성’으로 ‘예술의 무한성’까지 보장해 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것에 또 다른 인식이 있다.

“모든 예술이 호메로스에서 소크라테스에 이르기까지 ‘그리스인들’에게 ‘내면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그리스인들이 의미하는 바’와 소크라테스가 ‘그리스인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 즉 이 말은, 모든 예술이 그리스인에 의지하고 있다는 인식을 하기 전까지는 우리도 소크라테스와 별만 다른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감정은 어떤 것과 비교해서, 자기가 작아지거나 뭔지 모르지만 부당하다는 감정을 품게 하는 ‘피해의식’과 비슷하다. 또 한편으로는 기성세대의 문화에 신세대가 갖는 반감도 이에 유사한 감정이라고 볼 수 있다. 전 지구적으로 본다면 그리스문화는 ‘문화의 모태’와 같다. 그래서 거기에서 벗어나고픈 충동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모든 것의 시작에 그리스가 있으니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낡은 신전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지로 나아가고 싶은 그런 감정. 말하자면, 그곳에 갇힌 느낌을 주기 때문일 것이고, 이전 문화가 억압처럼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고, 좀 더 다른 것을 열망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일 것이다. 독립적이고 싶은 것이다. 일종의 부모에게서 벗어나고픈 그런 심정. 개별화되어 독립되고 싶은 것. 그리스 전통에서 벗어나고픈 충동 같은 것일 거다.


거의 모든 시대와 문화의 단계는 깊은 불만감에서 한 번쯤은 그리스인들에게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쳐본 경험이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인들 앞에서 서면 자신이 이룬 모든 것, 외면상 완전히 독창적으로 보이는 것, 진정으로 감탄할 만한 것들이 갑자기 색채와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실패한 모사품으로 희화되어 오그라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나라의 것이 아니면 모두 “야만적”이라고 뻔뻔스럽게 말하는 저 오만한 ‘소민족’에 대해 항상 새롭게 분통을 터트리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들이 도대체 누구인가”


라고 묻곤 한다.



단지 일시적인 역사적 영광, 우습지도 않은 편협한 제도, 풍습의 의심쩍은 건실성 외에는 보여줄 것도 없고 심지어 추악한 악덕을 특징으로 하면서도, 민족 중에서,

‘천재가 대중으로부터 마땅히 받아야 할 그런 존경’과 특별대우를 요구하는 저 민족은 도대체 누구인가?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은 ‘그런 존재’를 간단히 처치할 수 있는 “독배”를 발견하지 못했다. 어떠한 시기와 질투, 중상모략, 분노의 독도 저 ‘자족적인 장엄함’을 파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리스인들 앞에서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만약 ‘어느 한 사람’이 ‘진리’를 그 무엇보다 존중하여, 다음과 같은 ‘진리를 고백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다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마부처럼, ‘문화’와 ‘모든 문화의 고삐’를 쥐고 있으며, 마차와 말들은 언제나 빈약한 소재여서 그것을 끄는 ‘마부의 영광’에는 합당치가 않다. 또한 그런 ‘수레’를 골짜기로 떨어뜨린다고 할지라도, ‘아킬레우스의 도약’과 ‘무지개의 아름다움’으로 쉽게 건널 수 있는 골짜기로 떨어지는 것쯤은, 그리스인들은 장난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고백한다면 말이다.

*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그 자신이 낼 수 있는 ‘용기’를 내었고, 스스로 마부가 되었다는 의미인 듯하다.









<이론적 인간의 유형>



소크라테스가 이와 같은 ‘마부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에게서 그때까지 없었던 ‘존재 양식의 유형’을 찾아내면 될 것이다.



그것은 ‘이론적 인간의 유형’이며,


“그 유형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통찰이 우리의 마지막 과제”


가 될 것이다.




‘이론적 인간’ 역시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기존의 것’에 대해 무한히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예술가처럼 염세주의의 실천적 윤리로부터 보호를 받고, 암흑 속에서도 볼 수 있는 ‘린케우스의 눈’으로부터도 이 “기쁨”의 보호를 받는다.


* 린케우스Lynceus/ 그리스 신화 세계관 전체를 통틀어서 최고의 천리안을 가진 영웅으로 린케우스의 눈은 어두운 곳이나 멀리 있는 사물을 식별하는 매의 눈인 것은 기본이고 마치 엑스레이처럼 벽이나 돌, 땅, 심지어 피부까지 꿰뚫어 보는 투시 능력까지 가졌다. 이 능력으로 인해 아르고 호 원정에서는 정찰을 맡았다.
* 린케우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이깁토스’의 아들이다. 아이깁토스는 여러 명의 여인과 관계를 맺어 50명의 아들을 두었다. 린케우스는 그 가운데 장남이라고 한다. 어머니는 ‘아르기피아’이다. 아이깁토스의 쌍둥이 형제인 ‘다나오스’는 아르고스를 다스리던 왕이었다. 다다오스는 ‘다나이스’라고 하는 50명의 딸을 두었다. 아이깁토스는 ‘자신의 아들들’과 동생의 딸들인 ‘다나이스’와의 결혼을 강요하였다. 50명의 아들과 50명의 여조카를 한 번에 결혼시키려 하였다. 다나오스는 형이 자신의 왕국을 빼앗으려는 속셈이라고 간주하였다.

‘다나오스’는 결혼식을 치른 그날 딸들을 불렀고, 단검을 하나씩 나눠 주면서 첫날밤 신랑들의 목을 베라고 시켰다. ‘린케우스’는 다나이스 가운데 맏이인 ‘히페름네스트라’와 혼례를 올린 뒤 신방에 들었다. 히페름네스트라는 자신의 처녀성을 존중해 준 린케우스에게 아버지의 살인 명령을 고백한 후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린케우스의 형제 49명은 이미 다나이스의 칼에 목을 베인 뒤였다. 탈출에 성공한 린케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아르고스로 돌아왔다. 히페름네스트라를 제외한, 다나오스 왕은 물론이고 49명의 다나이스를 죽였다. 린케우스는 아르고스를 점령하였고 왕이 되었다. 히페름네스트라와 결혼하여 아들 ‘아바스’를 두었다. <위키백과>



예술가가 진리가 밝혀진 후에도 ‘여전히 덮여 있는 것’에 ‘황홀한 시선’을 고정시킨다면, 이론적 인간은 ‘벗겨진 덮개’에 기뻐하고 만족하며,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성공적인 폭로 과정 자체’에서 ‘최고의 기쁨’을 느낀다. 학문과 상관있는 것은 다름 아닌 저 ‘하나의 벌거벗은 여신’이라고 한다면 ‘학문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것만이 상관있다고 했다면, ‘학문의 사도들’은 지구 한가운데 ‘구멍 하나’를 파고 들어가는 사람들과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즉 자신이 평생 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거대한 깊이’의 극히 일부만을 팔 수 있다는 것은 빤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 작은 구멍조차 이웃의 작업으로 다시 메워질 것이다. 그래서 ‘제삼자’는 자신의 힘으로 구멍을 뚫기 위한 '새로운 장소'를 하나 찾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만약 그때 한 사람이 ‘이 구멍을 계속 뚫어도 지구의 반대편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한다면, 예전에 뚫어놓은 구멍에서 계속 일하려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혹시 땅을 파다가 ‘귀한 보석’이나 ‘지하자원을 발굴’하는 데서 오는 ‘만족감’이 없다면 말이다.










<학문의 지향점은 ‘예술’이다. 학문의 목적은 ‘진리 그 자체’라기보다, “진리의 탐구 과정”에 있다. >


그러므로 가장 성실한 ‘이론적 인간’인 ‘레싱’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진리 그 자체’라기보다, “진리의 탐구 과정”이라고 과감히 말했던 것이다. 학자들에게는 놀랍고 분한 일이겠지만, 이로써 학문의 “근본적 비밀”이 드러난 것이다.


지나치게 정직했던 이런 인식 외에, 우선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을 통해 처음 알려지게 된 의미심장한 “망상” 하나가 있다.



그것은

“사유는 인과성의 실마리를 따라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에까지 이를 수 있으며, 사유가 존재를 인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수정할 능력이 있다는 흔들림 없이 확고한 믿음”


이다.


이 당당한 ‘형이상학적 망상’은 ‘학문에 본능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학문을 그 한계점으로, 즉 “학문이 예술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는 한계점”으로 몰고 간다. 예술은, 이런 메커니즘에서 ‘원래 학문이 지향하는 목표인 것’이다.









<사유의 횃불로 소크라테스를 비춰보기>


이제 이런 “사유의 횃불”로 소크라테스를 비추어보자. 그의 모습은 저 ‘학문적 본능’에 이끌려 살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죽을 수도 있었던 “최초의 인간”처럼 우리에게 비친다.


그래서 죽어가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지식과 논거’를 통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모습이다. 그것은 학문의 출입구 위에 걸려 모든 이에게 ‘학문의 사명’을 상기시키는 ‘문장紋章’인 것이다. * 문장紋章/ 국가나 일정한 단체 등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표지



다시 말해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며, 그로써 ‘정당한 것’으로 만드는 ‘학문의 사명’을 상기시키는 문장인 것이다. 이를 위해 논거가 충분하지 않을 경우, 결국 “신화”가 그 역할을 해야만 한다. 나는 이 신화를 조금 전 “필연적인 결과‘, 아니 '학문의 목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학문의 사제 소크라테스가 죽은 후, 철학의 학파들은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처럼 차례로 교체되었다. 예상치 않게 ‘지적 세계의 넓은 영역’의 걸쳐 ‘보편화된 지식욕’은, 높은 능력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본연의 과제로 간주되어 학문을 넓은 대양으로 이끌어 갔다. 그 후 ‘학문’을 이 대양에서 완전히 추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졌다.


그런데 이 ‘보편화된 지식욕’ 때문에 ‘사상의 공동 그물망’이 전 지구상을 덮게 되고, 게다가 ‘태양계 전체의 법칙’을 세울 수 있는 전망도 보여준다.


놀라우리만큼 높은 현재의 '지식의 피라미드'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고려해 본 사람이라면, 소크라테스가 이른바 ‘세계사의 전환점’과 ‘소용돌이’를 이룬다는 사실을 목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저 세계 추세를 위해 소모된, 그러니까 인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실질적인 목표인 ‘개인과 민족의 이기적 목표’에 사용된 수량화할 수 없는 ‘힘의 총계’를 한번 생각 생각해 본다면 이러하다.


일반적인 섬멸전이나 끊임없는 민족 이동으로 인해 삶의 의욕이 너무나 약해져서 사람들은 습관처럼 자살하고, 또 피지 섬의 주민처럼, 아들이 부모를, 친구가 친구를 목 졸라 죽이면서 마지막 의무를 다했다고 느낄 것이다.


이것은 ‘실천적 염세주의’로서 ‘동정심에서 타민족을 학살한다’는 ‘끔찍한 윤리’를 만들어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염세주의는 예술이 어떤 형태로든, 특히 종교와 학문의 형태로 저 독기의 치료제와 예방제 역할을 하지 않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었고 지금도 볼 수 있다.


이런 실천적 염세주의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이론적 낙천주의자’의 원형이 된다. 이론적 낙천주의자는 ‘사물의 본성’을 규명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지식과 인식’에 만병통치약의 힘을 부여하고자 한다.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이론적 낙천가는 ‘오류’를 ‘악덕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적 인간에게는, ‘사물의 근거’에 천착하고, ‘가상과 오류’에서 ‘진정한 인식’을 ‘분리해 내는 일’이 ‘가장 고귀한 소명’, 그 자체로 하나밖에 없는, 정말이지 ‘인간적인 소망’으로 생각된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사상적 후계자들에 의해, 개념 및 판단과 추리의 메커니즘은, 소크라테스 이래로 다른 어떤 능력보다도 더 높이 평가되었다. 이것은 최고의 활동, 경탄할 만한 자연의 선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가장 숭고한 윤리적 행위인 동정심, 희생심, 영웅심 그리고 아폴론적 그리스인들이 ‘절제의 미덕’이라 부르는 얻기 힘든 “영혼의 고요”조차도 지식의 변증법에서 추론될 수 있다고 간주되었다. 그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윤리적 행위와 미덕’들은 가르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소크라테스적 인식의 기쁨을 한번 몸소 경험했고, 이 ‘기쁨’이 점점 넓은 원을 그리면서 현상계 전체를 포괄하고자 한다”


라는 것을 감지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이것보다 강한 자극은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삶으로 몰고 갈’ 수 있는 그 ‘어떤 강한 자극’도 여기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을 완성’하고 ‘그물망’을 물 샐 틈 없이 단단히 얽어매려는 욕구가 더 격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런 “충동”에 휩싸인 사람은 “플라톤이 묘사한 소크라테스”‘전혀 새로운 형태’의 “그리스적 명랑성”과 “삶의 축복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 새로운 형태의 명랑성과 삶의 축복은 ‘행동으로 발산’되고자 한다. 그리고 대체로 ‘천재의 배출’을 목표로 하게 된다. 그 목표는 고귀한 청년에게 ‘교육적’으로, 즉 ‘산파술적’으로 ‘감화’를 주는 형태로 “발산”된다.


그러나 이제 “학문”은 자신의 강력한 환상에 자극받아 쉴 틈 없이 ‘자신의 경계’에까지 이른다. 이 “경계”에서 논리학의 본질 속에 감추어진 ‘학문의 낙천주의’는 실패하고 만다. 왜냐하면 ‘학문의 원주’ 위에는 ‘무수한 점들’이 있다. 그리고 이 ‘원을 완전히 측정할 수 있는 길’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재능 있는 귀한 인간’은 ‘생애의 중반’에도 이르기 전에 어쩔 수 없이, 이런 ‘원주의 한계점’에 이르게 된다. 거기서 그는 ‘해명할 수 없는 것’ “응시”하게 된다.



그는 여기서


“논리가 이 ‘한계점’에서 빙빙 돌다가 결국 자신의 꼬리를 무는 것을 보고 몸서리칠 때, 인식의 새로운 형태 비극적 인식이 터져 나온다.”


* 이 문장의 의미는 결국 ‘모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비극적 인식은 단지 참고 견디기 위해, 예술이라는 보호막과 치료제를 필요로 하게 된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인들에게서 ‘원기를 얻은 힘찬 눈’으로 우리 주변에 넘쳐흐르는 ‘그리스 세계의 가장 높은 영역들’을 바라보면 이러하다. 소크라테스에게서 모범적으로 나타나는 강렬한 욕구, 즉 채워지지 않는 ‘낙천주의적 인식욕’이 “비극적 체념과 예술에 대한 갈망”으로 “전환하는 것”을 보게 된다.


어쨌든 이 욕구는, “낮은 단계”에서는 예술에 적대적이고, 특히 ‘디오니소스적 비극적 예술’을 ‘내면적으로 혐오’할 수밖에 없다. * 이 문장의 의미는 “낮은 단계”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를 파악해야 이해할 수 있다고 보인다. 아마도 “감수성”의 층위가 얇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소크라테스적 인식의 기쁨은 감수성과는 반비례 관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감수성이 감지하는 것들을 인식의 소크라테스적 논리는 관심을 두지 않고 추려내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에게서 얻은 원기를 얻은 눈은 ‘건강한 신체’를 의미한다고 보인다.








이는 소크라테스주의가 아이스킬로스의 비극과 투쟁하는 실례에서 서술한 바 있다.


<거인적 충동에 대하여>

* 개별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이 되려는 영웅적 충동이 생기면, 즉 개별화의 속박을 넘어서서 ‘하나의 세계 본질 자체’가 되려고 하면, 개별적인 것은, 사물 속에 감추어진 근원적 모순의 피해를 당하게 된다. 그리되면 그 존재는 ‘모독의 죄’를 짓고 고통 받게 된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가장 깊은 핵심을 이해한 사람은, 즉 “거인 되겠다”라고 노력하는 “개인”에게 주어진 “모독의 필연성”과 동시에 염세주의 사상의 ‘비아폴론적 성격(즉 디오니소스적 성격)’을 반드시 느낀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나친 아폴론적 경향으로 뻣뻣하고 차갑게 굳어서 죽음의 형태가 되면, 디오니소스적 물결이 필요해진다. 즉 ‘전복’이 일어난다. 갑자기 불어난 디오니소스의 밀물은 개체들이 만드는 조그만 물결을 등에 짊어진다. 모든 개체의 아틀라스가 되어 넓은 등에 개체들을 지고 더 높이, 더 멀리 가려는 듯한 이 “거인적 충동”은 프로메테우스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공통점이다. <9장, p82~83 인용 및 요약>


*그러므로 “거인적 충동”이란 바로 거인과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거인의 등에 올라타고 같이 더 높이, 더 멀리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보통 ‘거인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아마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기초한 내용들일 것이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와 디오니소스적인 것에서 나타나는 거인적 충동”의 의미는 개체들의 작은 물결을 등에 지고 더 높이 더 멀리 가려는 충동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거인적 충동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바로 이 부분을 간과하면 안 된다고 보인다. 거인과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별적인 것이 ‘하나의 세계 본질’ 자체가 되려는 것과 싸워야 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프로메테우스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거인 충동"의 본질에 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전환과 현재라는 갈림길에서...>

이제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현재와 미래의 문’을 두드려보자. 저 “전환”은 수호신의 새로운 구성과 음악을 하는 소크라테스의 탄생으로 이어지는가? 아니면 지금 “현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불안’하고 ‘야만’적인 분주함의 소용돌이 속에서, 갈기갈기 찢어지는 “운명”에 처하게 되는가?

근심에 가득 차, 그러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잠깐 옆으로 물러나 저 엄청난 ‘투쟁’과 ‘전환’의 ‘증인’이 될 것을 ‘허락받은 방관자’가 되어보자. 아! 싸움을 바라보는 자도 싸움에 가담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싸움의 마법’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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