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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와 쇼펜하우어, 낙천주의 학문을 넘어서다.

비극의 탄생/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18장

by 아란도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제18장 p134~138





*18장은 그동안의 그리스 비극에 대한 내용을 총정리하는 장이다. 일종의 요약 정리하는 장이다. 그래서인지 비교적 니체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그리스 비극'의 모든 여정은 일단락된다. 나머지 장들은 근대의 예술에 대한 니체의 사색이다. 어쨌든 기묘하게 어떤 연결점들이 맞아 떨어진다.






<영원한 현상과 세 가지 환상>


여기 “영원한 현상” 하나가 있다. ‘탐욕스러운 의지’‘사물’ 위에 펼쳐진 ‘환상’으로 ‘피조물’을 “삶”에 얽어매고, ‘생존을 강요하는 수단’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 ‘영원한 현상은 바로 디오니소스적인 도취의 예술이다.

‘인식과 망상’의 ‘소크라테스적 쾌락’에 사로잡혀 그것으로 “실존의 영원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 인식과 망상의 소크라테스적 낙천주의 학문은 칸트와 쇼펜하우어에 의해 부서진다. 소크라테스적 쾌락은 ‘실존의 영원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즉 사물의 본질을 밝힐 수 있다고 믿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눈앞에서 하늘거리는 ‘예술의 유혹적인 미의 베일’에 휘감겨 있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현상의 소용돌이’ 밑에서 “파괴할 수 없는 영원한 삶”이 ‘계속 흐른다’는 “형이상학적 위로”에 붙잡혀 있기도 하다. 그리고 또 다른 한 편의 사람은, ‘의지’가 매 순간 마련해 주는 ‘더 강력하고 더 비속한 환상’에 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 (1)‘예술의 유혹적인 미의 베일’, (2)“파괴할 수 없는 영원한 삶”과 “형이상학적 위로”, (3) 더 강력하고 비속한 환상, 이 세 가지 환상은 차례대로 아폴론적 예술, 디오니소스적 예술, 소크라테스적 예술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비유는 차례대로, 호메로스 예술, 아이스킬로스 예술, 소크라테스 예술을 가리킨다.


앞서 말한 “세 가지 환상”의 단계들‘고귀한 천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그들은 ‘존재의 짐’과 ‘부담’을 무척 ‘불쾌하게 느끼고’, 어렵게 찾은 ‘자극제’를 통해 이 불쾌함을 애써 잊어버리게 된다. * 세 가지 환상의 단계들은 그리스 비극의 변천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존재의 짐과 부담”을 불쾌하게 생각하여 “어렵게 찾은 자극제”를 통해 이 불쾌함을 애써 잊어버리려 하는 행위의 의미는 이러할 것이다. 이들 역시 비극을 모두 너무 피상적으로 접근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비극의 본질을 관통하지는 못했다는 의미다.








<문화는 ‘세 가지 환상’의 자극제들로 이루어졌다>


우리가 “문화”라 부르는 것은 이 ‘자극제’들로 이루어졌다. 혼합률에 따라 우리는 ‘소크라테스적 문화’를 가지기도 하고 또는 ‘예술문화’, 아니면 ‘비극적 문화’를 가지기도 한다. 역사적인 보기에서는 ‘알렉산드리아 문화’ 또는 ‘그리스 문화’, ‘불교문화’가 있다. * 문화는 ‘미의 환영’과 ‘강도적 도취’와 ‘탐욕스러운 의지’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문화의 자극제들이다. 이것들의 ‘혼합률’에 따라 문화의 양상은 달라진다. 차례대로 그 양상은 ‘예술문화’, ‘비극문화’, 소크라테스문화이다. 역사적으로는 그리스 문화, 알렉산드리아 문화, 불교 화가 있다고 하였다. 이 유추에 대입하면, 예술문화 => 그리스문화, 비극문화 => 불교문화, 소크라테스문화 => 알렉산드리아적문화로 대입하여 볼 수 있다.




구글지도로 보는 경주 석굴암과 그리스 아테네 그리고 간다라 지방



*** 이 단락에 '문화의 분만'에 관한 것과 '불교문화'에 대한 것은, 연재 28화 '19-1장'으로 독립 글로 올렸습니다. 내용이 길어서 글이 길어졌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드리아 문화 / 이론적인 인간의 원형 소크라테스

우리의 ‘현대 세계’“알렉산드리아 문화”의 그물에 사로잡혀서 ‘최고의 인식능력’을 갖추고, ‘학문을 위해 봉사’하는 “이론적 인간”을 ‘이상’으로 알고 있다. * 니체는 세 현상에서 ‘알렉산드리아 문화’를 다루고 있다. 그 이유는 이것이 가장 큰 ‘문제’였기 때문이다. 문제화한 것.


이 ‘이론적 인간’의 “원형”이 바로 ‘소크라테스’다. 우리의 ‘모든 교육 수단’은 원래 이 “이상”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 외의 다른 존재’는 ‘비의도적’이었지만, ‘허락된 존재’로서 ‘그 옆의 한 자리’ 잡으려고 ‘힘들게 투쟁’한다. * 이 한 문장에 세상의 형태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오랫동안” ‘교양인’은 오로지 ‘학자의 형태’로만 찾을 수 있었다. 우리의 “시 예술”조차 ‘학자의 모방’에서 발전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시 형식”모국어가 아닌, ‘학자적 언어’에 의한 “예술적 실험”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운율의 주요 효과”에서 알 수 있다. * 교양인은 학자 층에서, 그리고 학자적 형태의 교육에서 비롯되었다. 기준이 거기에 맞춰졌기 때문이다. 그러한 원인에 의해서 교육도 이 초점에 맞춰졌고, 학자적 인간 향성이 목표가 되었다. 어쩌면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유학 역시 그랬는지도 모르고, 그 이전의 고려시대도, 삼국시대도 그랬는지 모른다. 학문이 강화되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지난 역사는 모두 이론적 인간을 양성하는 데 주안점이 있었다. 비록 예술이 발전하기는 하였지만, 예술은 이론적 인간의 기준에 맞춰진 형태도 많았다. 우리나라 시조를 보아도 그렇다. 시조의 운율의 효과도 학자적 형태에 맞춰져 있다. 배우지 않으면 시를 지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도 마찬가지였다. 핀다로스의 경우를 보면 그가 시 짓는 법을 배웠다고 나온다. 하긴 인간이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면 무엇이든지 배워야만 인간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일 것이다. 어떤 의도적인 ‘운율의 효과’에서 보자면, 조선시대의 시조는 한자어를 차용하여 운율과 압운을 결정하였다. 모국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일반 민초와는 동떨어진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였고, 모국어로 말하고 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생각한 것들을 모국어로 표현한다는 것만큼 행복한 일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바로 민초의 고통을 감싸 않은 커다란 애민 정신이 있다. 이것은 사랑의 표현일 것이다. 세종이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알지는 못한다. 그럴 수도 없고. 그것은 당연히 공동체에서 발현된 사랑이다. 그 고통은 저 깊숙한 곳을 관통한다.


그 관통에 의하여 한글은 아폴론적으로 산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연민과 종정 그리고 사랑은 현실에서 개별적 사례로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비현실의 선험적인 세계에서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직접적인 소통이고 느낌이다. 직관의 영역이다. 그렇게 직관된 것에서 어떤 행동이 나오는 것이며 창의가 표현되는 것일 거다. 한글이라는 구체적인 작품인 탄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글은 “사랑 그 자체이며 음악의 변형일 것이다.




현대적문화 파우스트 인간형 - 알렉산드리아적인 인간


그 자체로 이해하기 쉬운 ‘현대적 문화 인간 파우스트’가 그리스인에게는 얼마나 이해하기 힘든 존재일까. 모든 학부를 다 돌아다니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지식욕에 목말라 마술과 악마에게 몸을 파는 파우스트. * 지적 욕구에 허덕이는 현대인은 또 다른 파우스트의 반사일지도.


현대인이 저 ‘소크라테스적 인식 욕망의 한계를 예감하기 시작’했고, ‘지식의 망망대해로부터 해안에 도달했다는 점’‘인식’하려면, ‘소크라테스 옆에 파우스트를 세우고 비교’ 해야 한다. * 그렇다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보면 그저 감만 잡다가도 파우스트라는 개별화된 전형을 보면 소름이 돋는 오싹한 체험을 하게 된다.


괴테의 생산적 인간에 대한 변론

‘괴테’나폴레옹에 대해 ‘에커만’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 친구야, 행동의 생산성이라는 것도 있다네”라고.그’는 품위 있고 소박한 방식으로, ‘이론적이지 않은 사람’현대인에게는 믿을 수 없는 존재이며,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이다. 때문에 “그렇게 낯선 존재 양식을 이해하고 용서”하려면, 다시 ‘자신과 같은 사람’지혜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상기시켰던 것이다. * ‘그’ -> 나폴레옹, ‘자신과 같은 사람’ -> 괴테를 가리킨다. 나폴레옹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이이어서, 그렇게 낯선 존재양식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에서는, 괴테와 같은 사람의 지혜를 필요로 한다는 것. 즉, 생산적인 사람의 행동력에 대하여 긍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소크라테스적 문화의 품 안에 감춰져 있는 것’을 숨겨서는 안 된다.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망상에 빠진 낙천주의!’ 이 낙천주의의 과실이 익어도. 최하층에 이르기까지 그런 문화에 푹 전 사회가 부푼 욕망에 전율하더라도. 만인의 현세적 행복에 대한 믿음도. 그런 ‘보편적인 지식 문화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서서히 ‘알렉산드리아적 지상의 행복’에 대한 ‘위협적인 요구’로 변해도. ‘에우리피데스의 기계장치 신’을 불러내는 ‘주문’으로 변해도. 이제 우리는 놀라서는 안 된다. * 문장이 거의 한 단락으로 이어져 있어서 읽기에 좋도록, 쉼표를 마침표로 바꾸었다. 원 문장의 쉼표도 읽기에는 아무 부담이 없지만, 문장이 거의 한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잘게 쪼갰다. 어차피 마지막 문장 “이제 우리는 놀라서는 안 된다.”로 다 수렴되기 때문이다. 이런 것에 놀라지 말라는 니체의 당부다. 우리에게 새가슴 되지 말라는 당부라고 여겨진다.


알렌산드리아 문화의 모순 - 알렉산드리아적 문화가 ‘지속적으로 존재’하려면, 노예계급이 필요


우리는 다음 사실을 알아야 한다.알렉산드리아적 문화”‘지속적으로 존재’하려면, “노예계급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러나 이 ‘문화’는 ‘실존’을 ‘낙천적’으로 보기 때문에, ‘그런 계급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이나 “노동의 존엄성” 과 같은 ‘아름다운 유혹의 단어’나 ‘위안의 말’의 효과가 소진되면, 서서히 참혹한 파멸의 길을 걷는다. * 알렉산드리아적 문화가 유지되려면 노예계급이 필요한데, 오히려 민주주의를 했다는 의미처럼 다가온다. 알렉산드라아 문화는 소크라테스 · 플라톤의 학문 중심주의 사회였으므로, 학자 층은 학문에 쏟는 시간이 거의 모든 시간을 쏟아야 하므로, 노동을 할 시간이 없다. 그 학문에 쏟는 시간을 대신해 줄 계층이 필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즉 노동을 대체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는 의미인 듯하다. 그런데 말로만 유혹적인 “인간의 존엄성”과 “노동의 존엄성”을 말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그 사회가 필요한 제도와는 반대로 향했다는 것일 거다.


‘자신의 존재’‘불의’로 보는 법을 배우고, 자신을 위해서 또 후세를 위해서 ‘복수를 다짐’하는 ‘야만적인 노예계급’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 어느 누가 그런 ‘위협적인 돌진’에 대항해 ‘용기’를 가지고, 우리의 ‘창백하고 지친 종교’에 ‘호소’하려 하겠는가? 그 자체로 근본에서부터 “학자 종교”로 변질된 우리의 종교에 말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의 필연적인 전제’“신화”는 이미 어디서나 ‘마비’되었다. 이 분야에서조차 우리가 지금 우리 사회의 ‘파멸의 싹’으로 간주해 온 저 “낙천적인 정신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 종교도 이미 낙천적인 정신의 지배를 받아서 학자 종교로 변질되었다. * 불교를 예시로 들자면, 이미 ‘부파불교’ 시대에서부터 ‘학자 종교’로 이행되었는지도 모른다. 많은 양을 영원히 전승하기는 어려우므로 문자로 기록하고, 그것을 연구하고, 그것을 분석하고, 그것을 자연철학과 결부 시키고, 등등에서 이미 그때의 승려는 학자 층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노동을 하지 않았다. 이미 전문적인 형태의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탁발’로 음식을 충당했는데, 요즘 식으로 따지면 후원에 의지해서 공동체를 유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니체는 알렉산드리아적 문화가 유지되려면, 노예계급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 이유가 바로 학자적 전문 집단이 되면, 시간이 없다. 수행자 집단도 수행하려면 노동할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려면 오히려 노예계급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에둘러 말하는 것이다. 반면 알렉산드리아 공동체와 불교의 승가 공동체의 차이점은, 최상층의 위치와 최하층의 위치적 차이다. 학자층은 최상층에서 정치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승가 공동체는 자발적 최하층의 위치에서 탁발을 행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니체가 사티로스들이 ‘봉사하는 낮은 신분들, 산양 같은 사티로스들로 구성’되었다고 말한 이유는, 이러한 승가 공동체를 빗댄 표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높은 의미와 근원적 성격이 부여되었다.

“이 합창단은 환영 속에서 자신들의 주인이며 스승인 디오니소스를 바라보는, 영원히 봉사하는 합창단이다.” 이 문장에 승가 공동체를 대입하여 보면 이러하다.

“ 이 승가 공동체는 환영 속에서 자신들의 주인이며 스승인 붓다를 바라보는 영원히 봉사하는 승가 공동체이다.”

이렇게 대입하여 보면, 불교의 승가 공동체의 의미가 그대로 딱 들어맞는다. 불교의 초기에는 그렇게 승가 공동체는 탁발을 하면서도 높은 의미와 근원적 성격이 부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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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타당을 가진 위대한 인물/ 칸트, 쇼펜하우어- 낙천주의에 대해 승리하다>


“이론적 문화”의 품 안에서 졸고 있는 ‘불행’이 서서히 ‘현대인을 불안’하게 만드는 동안. 현대인이 ‘경험을 총동원’하여 자신도 별로 믿지 않는 ‘위험 방지 수단을 사용’하는 동안. 그가 자기에게 돌아올 ‘결과’‘예감’하기 시작하는 동안. ‘보편적 재능을 가진 위대한 인물들’은 믿기지 않을 만큼 ‘침착’하게 ‘인식의 한계’와 ‘제약’을 설명한다. 그럼으로써 ‘보편타당성’‘보편적 목적’에 대한 ‘학문의 권리 주장’결정적으로 ‘부인’ 하기 위해 ‘학문 자체의 무기’를 사용할 줄 알고 있었다. * 문장이 거의 한 단락으로 이어져 있어서 읽기에 좋도록, 쉼표를 마침표로 바꾸었다. 원 문장의 쉼표도 읽기에는 아무 부담이 없지만, 문장이 거의 한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잘게 쪼갰다. * 외국어는 말을 할 때, 접속사를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 같다. 그 접속어는 ‘마침’의 의미이자 ‘연결’의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문장을 잘게 쪼개도 의미 전달에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앞의 말이 모두 접속어로 연결되는 문장이라면, 마지막 문장에 방점이 찍힐 것이기 때문이다.

* 학문 자체를 무기로 사용하여, 소크라테스 학문을 무너뜨렸다는 의미다. 학문으로 학문과 대적했다는 의미다.



이를 ‘증명’함으로써, ‘인과론’에 이끌려 ‘오만’하게도, ‘사물의 가장 내적인 본질’‘규명할 수 있다’고 말하는 ‘망상’이 “망상으로서 인식”되었다.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커다란 ‘용기와 지혜’‘힘겨운 승리’를 얻었다. ‘논리의 본질 안에 내재한 낙천주의’, 우리 문화의 토대인 ‘낙천주의에 대해 승리한 것’이다. * ‘보편적 재능을 가진 위대한 인물들’은 ‘칸트와 쇼펜하우어’를 가리킨다. 이들이 ‘사물의 가장 내적인 본질을 규명’할 수 있다고 믿은 ‘낙천주의적 망상’을 깨부순 것이다. 이론적 인간의 원형인 소크라테스에게서 벗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로써 철학은 한걸음 내디딘 것이었을까.


“낙천주의”는 확실해 보이는 ‘영원한 진리에 의거’하여 ‘모든 세계 수수께끼를 인식’하고 ‘규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시간, 공간과 인과성을 보편타당한 절대 법칙”으로 다루었다. * 낙천주의 소크라테스 학문은 ‘모든 세계 수수께끼를 인식하고 규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낙관론적인 망상이었다. 시간과 공간의 인과성은 현상이지 보편타당한 절대법칙이 아니다. 소크라테스의 낙천주의는 눈에 보이는 현상을 믿었다는 의미다. 시간과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장소를 제공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개별적 사건들이 비유로서 일어나고 스러지는 장소다. 그러므로 이 비유들이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지를 찾아야 한다. 바로 이것을 칸트와 쇼펜하우어가 찾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반면, 칸트는 ‘시간, 공간’과 ‘인과율의 목적’은 단지 ‘단순한 현상’, 즉 ‘마야의 작품’을 유일한 ‘최고의 실재로 승격’ 시키고, ‘사물의 가장 내밀하고 진실한 본질’‘현상으로 대체’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본질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 쇼펜하우어의 말에 따르면 ‘꿈꾸는 자를 더 깊이 잠들게 만드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권, 498쪽) 데 있다는 것’을 밝혀낸다. * 여기서 ‘마야의 작품’은 앞에서 언급되었던 ‘마야의 베일’을 의미할 것이다. 즉 비가시적인 가상 세계를 가리키며, 그것은 하나의 ‘막膜’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마야의 작품을 유일한 최고의 실재로 승격” 시켰다는 말의 의미는, 칸트의 ‘선험성’의 개념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 대하여 쇼펜하우어는 “꿈꾸는 자를 더 깊이 잠들게 만든 데 있다”라고 표현한 것일 거다.



‘이런 인식’과 더불어 니체가 “비극적 문화”라고 표현하는 “문화”가 시작된다. 이 문화의 ‘중요한 특징’은 ‘최고의 목적’으로 ‘학문의 자리에 지혜가 들어’ 서며, “지혜”는 학문의 유혹적인 유인에 속지 않고,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세계의 전체상을 조망’하고, ‘동정과 사랑’을 통해 “영원한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이해하려 한다는 것”이다. * 니체의 ‘그리스 비극’에 대한 정의이며, 동시에 ‘비극적 문화’에 대한 정의. * 칸트와 쇼펜하우어에 의해 그리스 비극은 다시 되살아났다. 이로부터 ‘비극적 문화’가 시작되었다. 비로소 학문의 자리에 ‘지혜’가 들어섰다. 지혜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세계의 전체상을 조망한다. 지혜는 동정과 사랑을 통해 “영원한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이해한다.







<자라나는 다음세대에게 바란다/ 니체의 염원>


‘자라나는 다음 세대’가 이처럼 대담한 시선으로, ‘괴물’을 향해 영웅적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완전히 “결연하게 살기 위해” 저 ‘낙천주의의 나약한 교리에 등을 돌린’ ‘악룡 퇴치자’의 대담한 용맹성과 당당한 발걸음을 상상해 보자.


‘자기 학습’을 통해 ‘진지함과 공포를 익’히는 이 ‘문화의 비극적 인간’이 “새로운 예술”, 즉 형이상학적 위로의 예술. 그에게 어울리는 ‘헬레나로서의 비극’을 열망하면서, 파우스트처럼 다음과 같이 외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나는 그래서는 안 되는가?
가장 커다란 동경의 힘으로
오직 하나뿐인 인물에 생명을 부여해서는?”


이제, ‘소크라테스의 문화’ ‘두 측면’으로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한 측면은 ‘차후에 예감’하기 시작한 ‘자신이 빚은 결과에 대한 공포’로부터이다. 또 다른 측면은 ‘자기 토대의 영원한 타당성’을 ‘과거처럼 소박하게 신뢰하고 확신할 수 없었다’는 충격으로부터이다. 이 충격에 의하여 ‘무오류성의 왕홀王忽’을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붙잡고 있다.


그래서 ‘이 문화의 춤추는 사유’가, 언제나 새로운 인물에게로 돌진하여 끌어안고 있다가는, 갑자기 ‘메피스토펠레스’가 유혹적인 ‘라미엔’을 단념했듯이, 몸서리치며 밀어내는 것은 ‘슬픈 연극’이 아닐 수 없다.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 파우스트 전설에 등장하는 악마. 낭만주의적 악마의 대표 격.

보통 쓰는 '메피스토'는 이 '메피스토펠레스'를 줄인 말이다.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는데, 히브리어로 해석할 경우 מֵפִיץ(메피스), "퍼뜨리는 자"와 ט֫פֶל" שֶׁ֫קֶר(토펠 세커), "거짓말쟁이"의 합성어로 추측된다. 그리스어로 해석할 경우 μή(메, "아니다") + φῶς(포스, "빛") + φιλι(필리스, "사랑") = 메포스필리스("빛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추측한다.

그리스어 해석은 재미있는 점이 "빛"의 의미가 중의적이라는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빛이 신을 의미한다고 이해되지만 사실 희랍어의 포스, 즉 ‘포스포로스’는 라틴어의 ‘루시퍼’에 해당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즉 "루시퍼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된다. 메피스토펠레스 자신도 파우스트 박사처럼 악마와의 내기에서 패배하여 악마(루시퍼)를 섬겨야 하는 존재로 해석되기도 하므로(크리스토퍼 말로우 판), 의미 있는 이름인 셈이다.

물론 그런 의미 없이 그냥 고유명사일 수도 있다. 애당초 메피스토펠레스는 ‘괴테’ 본인이 지은 이름이 아니며, 괴테가 읽은 ‘요한 파우스트 이야기책(volksbuch)’에 등장하는 ‘메피스토필레스라는 캐릭터를 괴테가 재해석한 것’이다. 그 외에도 메피스토필레스는 구전 등에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였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인 "윈저의 쾌활한 여인들"(1602년작)에도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이름이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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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희곡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메피스토펠레스

메피스토펠레스는, 언제나 악을 원하면서도, 언제나 선을 이루는 힘의 일부다. 끊임없이 부정(否定)만 하는 정령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태어나는 모든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기 때문이고 차라리 아무것도 태어나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그 스스로 말한다. 죄 또는 파괴라고 하는 것, 즉 “악”이라고 부르는 것이 메피스토펠레스의 ‘본성’이다.

당시 인간들 사이에 퍼져 있던 모든 지식을 깨우치고 허무해하는 파우스트에게, 검은 푸들의 모습으로 접근해 그와 계약을 맺는다. 계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메피스토는 파우스트에게 모든 종류의 쾌락을 제공하며, 파우스트가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는 정말로 아름답구나!"라고 하는 순간, 그의 영혼을 빼앗는 것이었다. 서론 부분에서 언급되지만, 이는 신과의 내기로서, '순간이여 멈추어라'라는 말은 ‘진리에 대한 끝없이 계속될 탐구를 포기’하는 것이다. 현재의 쾌락을 선택하는 ‘타락을 의미’한다. 파우스트를 타락시키면 ‘메피스토의 승리’가 된다.

이후 메피스토는 파우스트를 회춘시켜 준다. 악마와 마녀의 파티인 ‘발푸르기스의 밤’에도 초대한다. 심지어 그리스 신화의 유명한 미인인 헬레네와 결혼도 시켜준다. 결국 파우스트는 지상 낙원을 목표로 한 영지를 건설한다. 그 순간,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는 정말로 아름답구나!"라는 대사를 한다. 메피스토는 계약에 따라 그의 영혼을 가져가려고 한다.

바로 그때, 파우스트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순수한 여인 ‘그레트헨’에 의해 파우스트의 죄는 용서받게 된다. 죄를 용서받은 덕에 천사들이 파우스트의 영혼을 구출하러 온다. 메피스토는 천사들에 대항해 끝까지 발악하지만 천사들의 미모에 취하게 된다. 그 사이에 파우스트의 영혼을 천사들에게 빼앗긴다.

사실 신이 파우스트의 영혼을 구한 것은 그레트헨 때문이기도 하지만, 메피스토텔레스와의 계약 내용이 실제로는 만족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확하게 말하면 파우스트는 "언젠가 내 뜻이 이루어지면 나는 그때야말로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즉 파우스트의 말은 여전히 ‘미래의 꿈을 추구하는 것’이며 현재의 쾌락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메피스토는 '파우스트가 어떤 의미로건 정해진 말을 했으므로 계약의 내용이 충족되었다'라고 생각했지만, 신 쪽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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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피스토텔레스는 하급 악마이다. 아니다, 어느 정도는 위치가 있는 악마이다.라고 일말의 논쟁은 있지만, 대체로 영화에서 등장하는 악마는 메피스토텔레스적인 급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니까 중간 정도의 악마등급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나무위키에서 발췌 정리>





tkliwi nihilisci by Mathieu Chatrain/인스타그램에서





"단절", 현대인의 원초적 고통


‘이론적 인간’이 자신으로 말미암은 ‘결과’에 놀라, ‘실존의 무서운 빙하’에 ‘감히 몸을 담그지 못’하고, ‘강가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바로 저 “단절”의 특징이다. 누구나‘단절’을 ‘현대 문화의 원초적 고통’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는 이제 어떤 것도 온전히, ‘사물의 온갖 자연적인 잔인함을 포함’‘온전히 가지려 하지’ 않는다. * 단절과 소외는 현대 문화의 원초적 고통이다. 뚝뚝 끊어진 채로 고립되어 있는 것이다. “온전히 가지려 하지 않는다”라는 것의 의미는 ‘완전성의 부재’를 의미할 것이다.


그의 낙천적인 관점은 그 정도로 나약해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스스로 ‘비논리적’이 되려고 한다. 즉 ‘자신의 결과로부터 도피’하기 시작하면, ‘학문의 원칙 위에 세워진 문화’처럼 ‘파멸할 것’ 임을 “예감”하고 있다.


‘우리의 예술’은 이런 ‘보편적인 위기 상황’을 드러낸다. 온갖 ‘위대한 생산의 시대’와 ‘인물을 모방’하면서 그들에게 의존해도 소용없다. ‘현대인을 위로’ 하기 위해, 온갖 “세계 문학”을 그 주변에 수집하고, 그를 모든 시대의 예술 양식과 예술가들 가운데 세워서, ‘아담’이 동물을 명명하듯 ‘그들에게 이름을 붙’여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는 ‘영원히 굶주린 자’이며, 즐거움과 힘이 없는 ‘비평가’이고, 근본적으로 ‘사서이며 교정자’이고, ‘책의 먼지’와 ‘오자’에 언젠가는 비참하게 눈이 멀 “알렉산드리아적 인간인 것”이다. * 오싹하다. 공포 영화 한 편 본 기분이다. 이것은 오디세우스에 비유한 표현일 것이다. 아귀와 같은 지식 탐구는 자연의 실패한 것까지 복사하려 한다. 그 방식으로는 ‘비극’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니체는 “자라나는 다음 세대”가 대담한 시선으로 결연하게 살기를 바랐다. 낙천주의의 나약한 교리에 등을 돌린 “ 악룡 퇴치자”의 용맹성과 당당한 발걸음을 닮길 바랐다. 자기 학습을 통해 진지함과 공포를 익힌 문화의 비극적 인간이 되기를 바랐다. 거기서부터 형이상학적 위로의 새로운 예술을 열망하기를 바랐다. 자라나는 다음세대에게 어울릴 ‘헬레나로서의 비극’을 열망하기를 바랐다.


공포가 무엇인지를 익힌 ‘비극적 인간’은 ‘알렉산드리아적 인간’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낭독을 하고 필사를 하는 나는 무엇을 얻기 위함이었을까? 니체의 책으로부터 무엇을 얻기 위함이었을까? 니체는 정말 책을 읽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인가? 아마도 니체는 ‘알렉산드리아적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함일 것이다. 즉 ‘비극을 부정한 학문의 방식’은 안 된다는 것이다. 비극을 죽인 부정의 학문 방식 그 자체가 내포라고 있는 것이 바로 ‘공포’라는 것이다. 이 공포의 방식으로 가지 않으려면, 그 방식은 ‘비극을 긍정’하는 방향이어야 할 것이다. ‘긍정의 방향’이 “형이상학적 위로”를 우리에게 주기 때문이다.



사진/tkliwi nihilisci/ 인스타그램에서/ * 안개의 막에 가려 있을 때는 산의 정상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저 산의 정상은 저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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