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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험적예술적 경험, 그 자신이 행위하는 과정에 기반한다

비극의 탄생/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18장 - 2

by 아란도




* 18장(연재 27화)의 글에서, 칸트와 쇼펜하우어 부분만 따로 가져왔습니다. 이 글에 빗대어 연이어진 생각을 아래에 같이 올렸습니다.







<보편타당을 가진 위대한 인물/ 칸트, 쇼펜하우어- 낙천주의에 대해 승리하다>


“이론적 문화”의 품 안에서 졸고 있는 ‘불행’이 서서히 ‘현대인을 불안’하게 만드는 동안. 현대인이 ‘경험을 총동원’하여 자신도 별로 믿지 않는 ‘위험 방지 수단을 사용’하는 동안. 그가 자기에게 돌아올 ‘결과’를 ‘예감’하기 시작하는 동안. ‘보편적 재능을 가진 위대한 인물들’은 믿기지 않을 만큼 ‘침착’하게 ‘인식의 한계’와 ‘제약’을 설명한다. 그럼으로써 ‘보편타당성’과 ‘보편적 목적’에 대한 ‘학문의 권리 주장’을 결정적으로 ‘부인’ 하기 위해 ‘학문 자체의 무기’를 사용할 줄 알고 있었다. * 문장이 거의 한 단락으로 이어져 있어서 읽기에 좋도록, 쉼표를 마침표로 바꾸었다. 원 문장의 쉼표도 읽기에는 아무 부담이 없지만, 문장이 거의 한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잘게 쪼갰다.


* 외국어는 말을 할 때, 접속사를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 같다. 그 접속어는 ‘마침’의 의미이자 ‘연결’의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문장을 잘게 쪼개도 의미 전달에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앞의 말이 모두 접속어로 연결되는 문장이라면, 마지막 문장에 방점이 찍힐 것이기 때문이다.


* 학문 자체를 무기로 사용하여, 소크라테스 학문을 무너뜨렸다는 의미다. 학문으로 학문과 대적했다는 의미다.


이를 ‘증명’함으로써, ‘인과론’에 이끌려 ‘오만’하게도, ‘사물의 가장 내적인 본질’을 ‘규명할 수 있다’고 말하는 ‘망상’이 “망상으로서 인식”되었다.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커다란 ‘용기와 지혜’는 ‘힘겨운 승리’를 얻었다. ‘논리의 본질 안에 내재한 낙천주의’, 우리 문화의 토대인 ‘낙천주의에 대해 승리한 것’이다. * ‘보편적 재능을 가진 위대한 인물들’은 ‘칸트와 쇼펜하우어’를 가리킨다. 이들이 ‘사물의 가장 내적인 본질을 규명’할 수 있다고 믿은 ‘낙천주의적 망상’을 깨부순 것이다. 이론적 인간의 원형인 소크라테스에게서 벗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로써 철학은 한걸음 내디딘 것이었을까.


“낙천주의”는 확실해 보이는 ‘영원한 진리에 의거’하여 ‘모든 세계 수수께끼를 인식’하고 ‘규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시간, 공간과 인과성을 보편타당한 절대 법칙”으로 다루었다. * 낙천주의 소크라테스 학문은 ‘모든 세계 수수께끼를 인식하고 규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낙관론적인 망상이었다. 시간과 공간의 인과성은 현상이지 보편타당한 절대법칙이 아니다. 소크라테스의 낙천주의는 눈에 보이는 현상을 믿었다는 의미다. 시간과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장소를 제공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개별적 사건들이 비유로서 일어나고 스러지는 장소다. 그러므로 이 비유들이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지를 찾아야 한다. 바로 이것을 칸트와 쇼펜하우어가 찾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반면, 칸트는 ‘시간, 공간’과 ‘인과율의 목적’은 단지 ‘단순한 현상’, 즉 ‘마야의 작품’을 유일한 ‘최고의 실재로 승격’ 시키고, ‘사물의 가장 내밀하고 진실한 본질’을 ‘현상으로 대체’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본질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 쇼펜하우어의 말에 따르면 ‘꿈꾸는 자를 더 깊이 잠들게 만드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권, 498쪽) 데 있다는 것’을 밝혀낸다. * 여기서 ‘마야의 작품’은 앞에서 언급되었던 ‘마야의 베일’을 의미할 것이다. 즉 비가시적인 가상 세계를 가리키며, 그것은 하나의 ‘막膜’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마야의 작품을 유일한 최고의 실재로 승격” 시켰다는 말의 의미는, 칸트의 ‘선험성’의 개념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 대하여 쇼펜하우어는 “꿈꾸는 자를 더 깊이 잠들게 만든 데 있다”라고 표현한 것일 거다.


‘이런 인식’과 더불어 니체가 “비극적 문화”라고 표현하는 “문화”가 시작된다. 이 문화의 ‘중요한 특징’은 ‘최고의 목적’으로 ‘학문의 자리에 지혜가 들어’ 서며, “지혜”는 학문의 유혹적인 유인에 속지 않고,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세계의 전체상을 조망’하고, ‘동정과 사랑’을 통해 “영원한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이해하려 한다는 것”이다. * 니체의 ‘그리스 비극’에 대한 정의이며, 동시에 ‘비극적 문화’에 대한 정의. * 칸트와 쇼펜하우어에 의해 그리스 비극은 다시 되살아났다. 이로부터 ‘비극적 문화’가 시작되었다. 비로소 학문의 자리에 ‘지혜’가 들어섰다. 지혜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세계의 전체상을 조망한다. 지혜는 동정과 사랑을 통해 “영원한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이해한다.







강화도 해든 미술관에서/ 로버트 인디애나의 LOVE


‘비극의 본체’는 지혜에 있다. 지식 위에 지혜가 자리 잡음으로써, 음악은 다시 최고의 자리를 되찾았다. 세계 의지를 가진 것은 음악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동정과 사랑’은, 영원한 고통에 대한 동정이다. 그리고 사랑은 그 고통을 이해하여 감싸 안는 것이다. 동정과 사랑은 다른 표현이지만, 하나의 감정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선험적 세계를 회복'함으로써 비극은 다시 예술로 부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의 자존감도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일 것이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영원한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이해하려 하는 ‘지혜’에 있을 것이다.









<차문화/다회/차도, '비극'적 예술>


내가 차도를 하면서 또는 낭독을 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바로 이러한 것일 것이다. 그것이 제대로 되었을 때, 전해오는 충일감이 있다. 이러한 희열의 즐거움에서 소외감 없이 '완전성을 경험'하는 것일 거다. 내가 비극의 탄생에서 찾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완전성의 체험!이다. 그리고 예술의 원리적 측면에서 보자면, 들뢰즈의 철학의 방향 역시 옳았는지도. 그 역시 선험성을 탐구했다고 보이니까 말이다.


* 이 부분은 따로 다루어야 하므로 간략히만 썼습니다.






정상에서 전체를 조망하는 풍경이 좋다





<낭독의 예술과 필사로서의 학문 그리고 금욕적인 불균형>

* 필사도 한문을 병행해야 의미전달이 명확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언어유희적인 측면에서 두 가지 의미를 사용한다. 필사筆寫와 필사必死. 옮겨 쓰기를 죽기 살기로 하였다.


문득 이렇게 책 내용을 '필사'를 하듯이 워드로 옮기는 과정에서 드는 생각이다. 책을 낭독으로 읽는 것은 ‘전체를 조망하는 일’이다. 이렇게 목소리를 통하여 울림으로 공명하는 것은 뇌를 깨운 일이다. 우리 안의 저 깊은 곳을 흔드는 것이다. 집단이 모여서 서로 호흡을 맞추고 손발을 맞추는 일은 저 깊은 세계로 들어가려면 도취 상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낭독에 도취되는 순간은 읽는 목소리가 귀에 거슬림이 없어야 하고, 그 목소리가 그 자신을 감싸 안아야 한다. 목소리는 바깥 세계를 잊어버리게 하는 주문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낭독을 하는 동안 낮인지 밤인지 모호한 상태에서 자기를 둘러싼 어떤 '막' 안에 머문다. 그것은 전혀 다른 세계이다. 이것은 하나의 세계 경험이다. 그 세계 경험의 힘으로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 이것은 하나의 음악적 놀이이며 일이기도 하다.


반면, 필사를 하면 책 속의 내용이 그리는 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된다. 눈으로만 읽을 때는 안 보이던 것이 필사를 하다 보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문장의 연결이나 문장이 지시하는 것들에서, 눈으로 읽을 때는 연결이 안 되고 뚝뚝 끊어져 있는 채로 느껴지는 내용이 연결되어 의미를 드러낸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은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 그대로 쓴 것이다.

필사를 하면 더 의미가 드러난다. 행간이 보이는 것이다. 즉 비어 있는 맥락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글은 문장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문장은 언젠가는 끝난다. 문장은 자체 편집되어 있는 셈이다. 하나의 문장 자체가 이미 편집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의 끝남으로 인해서 어떤 의미는 행간 사이로 숨어버린다. 깊은 침묵이다. 무언의 침묵 속으로 사라져 버리면 그것은 감추어진다. 문장은 보통 어떤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문장 자체는 '지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냥 하나의 키워드 형태가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문장의 지시는 그 자체로 편집인 것이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문장을 계속 이어 썼는지도 모른다. 접속어로 계속 이어진문장은 리듬감이 있다. 그 문장의 이해와 상관없이 리듬감이 중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전체를 조망해야 하기 때문이다. 감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안으로 침투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문장이 길면 소리 내어 얽어야 한다. 우리 조상들은 한자로 된 아직은 의미화되지 않은 한문으로 된 문장들에 조사나 접속어를 붙여서 낭독하였다. 그렇게 책 전체를 노랫가락처럼 암기를 한 것인지도.


하지만 어딘가 에서는 문장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그러면 의미도 같이 숨는다. 필사를 하다 보면, 숨어 있는 의미가 드러난다. 자체 편집된 의미는 드러나서 '머릿속에서' 서로를 연결시킨다. 그러므로 그 자신 안에서 연결되는 것이다. 이때 텍스트는 그대로 있고 손상되지도 않는다. 물론 눈으로 읽어도 이런 현상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자면 많이 자주 반복적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좀 더 깊은 의미를 찾는 작업은 필사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그 자신이 글을 옮겨 쓰는 동안 문장을 더 깊숙하게 파고들기 때문일 것이다. 더 몰입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연결이 일어나면, 접속어를 자주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거기서 튀어나온 알맹이가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알맹이는 파편적이다. 그 자신이 문장을 만들어서 앞과 뒤를 연결시켜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시적분출'과는 조금은 다르다. 시적분출은 그 자체적으로 음악적이고 시적이다. 음악적 충동에서 단숨에 일어나는 폭발력이다. 그러나 필사에서 행간을 연결시키는 일은 서사적이고 산문적이다.



'낭독'이 '음악적 효과'로서 '전체를 조망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아마도 '세계'를 감으로 '느끼는 것'일 거다. 필사는 '강도의 세기'로서 깊이를 파고드는 것으로써 그 작업은 개념적 세계를' 이해하는 것'일 거다.


낭독은, 눈과 목소리와 귀를 사용하여 읽으면서 듣는 것이다. 필사는, 눈과 의식과 손가락을 사용하여 쓰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낭독이 시적이고 음악적이라면, 필사는 산문적이고 지식적이다. 이 두 현상에서 말미암은 효과는 지혜와 지식이다. 지혜는 음악에서 만들어지고 지성은 지식에서 만들어진다. 지혜가 지성에게 강요하여 지식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영원한 고통을 감싸 안는 방식'이다. 나는 필사를 하는 도중에 이렇게 내 글을 쓰고 있다. 내 글을 쓰는 것은 지혜를 생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의 글쓰기는 저 깊은 곳에서 솟는 자발적 분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안에 사로잡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일종의 몰입이며, 도취상태이다. 도취란 그것을 하도록 다른 것은 마비된 상태일 것이다. 즉 내 몸은 노트북에 붙들려 있다. 이쪽으로만 의식이 열려 있는 상태인 것이다. 반면에 이것은 또 하나의 '음악적 효과'이기도 하다. 이 작업은 나를 거쳐 일어난 '창작활동'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간은 바로 '예술의 원리'에 부합하며, 이 창작 과정은 '학문이 하는 방식과도 동일'하다. 학문도 예술도 모두 이러한 창작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폴론적 미'를 드러낼 것이며, '형이상학적 위로'인 내적 환희감에 사로잡힐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A이면 B이듯이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메커니즘이다. 조건이 형성되면 메커니즘적의 발현은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필사'의 공부 방식은 종교적 수행에 가깝다/ 알렉산드리아적 인간 = 금욕주의적 인간>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면 이러하다.


문화의 "세 가지 환상"은 예술, 종교, 학문이다. 낭독과 글쓰기는 이 세 분류에서 '예술'에 포함되는 예술적 행위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자기 신체를 가지고 자기 안의 충동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을 할 때는 그냥 말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다. 글을 쓴다 하여도 마찬가지다. 저절로 분출되는 형태는 모두 예술적 원리 방식으로 분류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을 '예술 그 자체'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반면, 책 읽기와 공부는 '학문'으로 분류되어야 한다. 이것은 억지로 해야 하는 것이다. 의도를 가지고 해야만 비로소 달성될 수 있는 형태이다. 이것에 시간을 투여하는 동안 그 강도의 세기에 따라서 어떤 세계로 들어가는 깊이도 달라진다. '필사'는 강도의 시간에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 역시 학문에 포함된다. 이 필사 방식에 비롯되어 인간은 지식을 강화하게 된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인간은 기억을 강화시켰다. 그 자신에게 각인시키는 것이다.


어느 면에서는 이 공부 방식은 예술의 자연스러운 분출보다는 종교적 수행에 더 가깝다. 그래서 니체가 말한 금욕주의적 인간형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또한 알렉산드리아적 인간형 역시 금욕주의적 인간형이라고 볼 수 있다. 왜 알렉산드리아적 인간형 인가 하면, 공부하는 방식 그 자체가 그 자신을 옥죄이기 때문이다. 그 자신은 죄인처럼 갇혀 있는 것이다. 그것을 마무리하지 못하면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에 탐닉하면 다른 것들의 즐거움을 잊어버리거나 흥미가 없어진다. 밥을 먹는 것도, 씻는 것도, 일상의 소일거리도, 알렉산드리아적 인간에게는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균형이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이 공부 과정에서 무엇인가 우리는 뜻하지 않는 수확물을 건진다. 이것과 저것이 연결되면서 지적 세계가 확장된다. 그리고 또 어떤 영감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것은 음악적 분출로 일어나기도 한다. 그 안에서 예술적 형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니체는 그래서 "예술의 원리"를 학문 역시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것일 거다. 학문의 결과보다는 학문의 과정에서 얻은 수익물들, 즉 중간중간에 획득한 보물들이 말로 학문하는 즐거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즐거움을 놓쳐버린다면, 그때부터 파우스트 형태가 되어버린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떤 시간(예술적)을 만들어 지속적으로 한다(학문적)는 것, 그 자체가 종교적이고도 금욕적인 인고이기도 하다. 예술적 원리가 드러나려면 이 세 조합은 어쩔 수 없이 필수다.




<'낭독과 글쓰기'는 예술적인 형태, '읽기와 필사 및 연재'는 '공부적인 형태'>



나는 니체 철학 '낭독(목소리를 통하여 책을 소리 내어 읽기)''읽기(책 내용을 이해하기 위한 읽기)' '글쓰기(내 생각이 일어나는 대로 쓰기)', 그리고 '필사(비록 책 원문 그대로는 아닐지라도)'그리고 '브런치 연재'동시적으로 진행했다.


여기에서 '낭독과 글쓰기'는 예술적인 형태이고, '읽기와 필사 및 연재'는 '공부적인 형태'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이 두 방향성이 나를 갈등 상황에 내몰기도 하였다. 전자를 따르자니 후자가 힘들고, 후자를 따르자니 전자가 약해지면 어쩌지 하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방식의 병행은 나에게는 수행과도 같았다. 그러니, 낭독 한 번에 예술과 학문과 종교가 모두 합쳐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일이든지 그러지 않은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세 형식의 혼합률이 없이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얻기는 어렵다. 예술 역시 안의 충동적 분출로만은 그것을 현재화시키기는 어렵다. 단지 행위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인간의 삶에서 그것만큼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모여서 예술적인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 역시 이러한 자발적인 분출에 의한 것이다. 인간을 '즐겁게 만드는 행위'야말로 우리 삶에 더 필요한 요소들이다. 그리고 그러한 방식이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요체일 것이다.


이렇듯 예술과 학문과 종교는 '어느 정도의 비율'을 가지고 '우리 삶에 개입'한다. 이러한 것들은 현대인에게 공기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현시대에서 보자면 점차로 종교의 비율은 낮아지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예술적 비율이나 학문적 비율이 더 높아진 것은 아니다. 단지 예술에서는 '즐기는 것, 소일하는 것'의 비율이 증가되었을 뿐이다. 학문은 방향도 없는 공부 비율만 높아졌을 뿐이다. 종교는 본래적 중요 소산이 공동체에 대한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냥 사람만 모아 놓고 맹목적 믿음과 헌금만이 중요시될 뿐이다.


하나의 공동체가 갖는 의미는, 본질에서 이미, 깊은 슬픔을 감싸 않는 사랑의 형태가 형식으로 만들어진 것 그 자체다. 그러므로 이미 그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깥에서 또는 현상 세계에서만 그것을 개별적으로 찾으려고 하고 있다.


현시대에서 공동체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삶'을 만드는 형태일 것이다. 삶의 아름다움은 저 깊은 심층에서 비롯된 고통을 감싸 않는 합일의 방식이며, 그것은 이내 그 자신 안에서 환상으로 표현되는 그 감정을 바깥으로 표현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일 거다. 그 힘은 공동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을 만들어 내는 방식도 자기 혼자의 개별성이 아닌 다수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예술적 방식의 어떤 형태가 만들어지면, 학문의 형태가 지속성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종교적 형태가 바로 집단성이며, 이 집단성에 의해 '합일'할 수 있는 동력이 만들어진다.'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모든 공동체에는 이러한 특성이 있다. 무엇이 더 부각되는가일 뿐이지만, 사람이 모이면 그 힘을 제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문제가 남는다. 바로 그것이 수행성일 것이다. 여기서 '수행'은 중의적 의미를 갖는다. '반복적 움직임인 수행성(遂行性, performativity)' '단련하는 형태의 수행(修行,conduct, train)'이 있다.


이러한 방식이 인간이 삶을 사는 방식일 것이다. 실존 상태에서 어떤 환상을 덧 씌워서 상처를 가려주는 형태가 바로 '비극'의 "음악의 정신"이 가리키는 상징성일 것이다. 인간이 몸에 옷을 입어서 신체를 가리듯이, 인간의 실존 역시 '근원적인 고통'에서 비롯되는 음악의 정신'을 통하여 고통을 가리는 것이다. 그때 인간은 매끄러운 표면을 갖게 되고, 환희감의 희열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비가시적인 세계의 실재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정신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것을 '선험적인 경험'이라고 한다.


예술은 또는 예술적인 형태는 사람이 실존의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에 필요한 것이라고 니체는 말하였다. 어쩌면 나 역시 그러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진 찍기와 음악 듣기와 그 외의 글들과 글쓰기, 차를 마시는 일, 캠핑과 여행, 모임과 공동체 등은 모두 내가 삶을 살고 내 시간을 건너는 동안에 필요한 것일 거다. 선험적 예술적 경험은 그 자신이 행위하는 과정을 기반으로 하여 얻는 기쁨이다. 다른 데서 찾으면 안 된다. 삶을 사는 일은, 건너가는 과정에서 어떤 기쁨과 즐거움을 필요로 한다. '형이상학적인 위안'이 필요한 이유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이러한 것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가. 오직 혼자서만 보내는 시간은 그 자신의 '강도적 체험'의 비현실적 시간이지만, 그 역시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 또다시 균형의 회복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바로 이러한 것에 대한 '감각'이 필요한 것일 거다.



낭독은 신체사유적이었다. 우리 모두에게 차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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