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문화는 ‘세 가지 환상’의 자극제들로 이루어졌다

비극의 탄생/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18장 -1

by 아란도





* 이 글은 18장에 달아 놓았던 코멘트가 너무 길어서, 따로 독립하여 '18장 -1'로 올리는 글입니다.




니체는 “불교문화”라고, 단지 이 한 단어만 써놓았다. 나는 이 부분을 보면서 글을 썼는데, 처음에는 여기까지는 연결되지 않았었다. 그러다 조금 지친다 싶어서 잠시 그냥 앉아 있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조금은 외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나는 지금 이러한 일상을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미소가 지어졌다. 이 글을 쓰는 일이 조금은 재미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는 잠을 잤다. 꿈속에서 정말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사건들을 접했다. 꿈 내용이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리고 토요일 저녁 5시에 눈을 떴다. 나는 폰을 들어서 거실에 있는 그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요즘 정보를 머릿속에 많이 집어넣어서 잠을 많이 자야 돼. 안 그러면 머리가 멍해져”

라고 말했다.

거실에서 그가 말한다.

“치킨 시켜 줄까?”

“콜!”

이렇게 말하고는 나는 일어나서 물을 마시고 잠시 머리를 식히고, 냉장고에 있는 배추를 꺼내서, 배추 전을 부쳤다. 배추를 오래 놔두어서 이제는 다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배추 전을 부치고 있는 동안은, 가스레인지 앞에서 머물러야 한다. 내가 이리저리 움직이지 않고 한 곳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머릿속에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그런 생각들이 내가 쓰던 글과 연결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안에서부터 '웃음'이 솟아올랐다. 그래서 지금 그전에 써 놓은 글을 보완 및 추가하여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어떤 직관적 연결은 멍시간이나, 즉 내 몸이 무엇인가에 붙들려 있을 때 잘 연결되더라. 몸은 가만히 있고 생각은 자유로울 때. 그것이 자기시간 아닐까!



니체는 “불교문화”라고 한 단어만 말했을 뿐인데, 나는 어떤 생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리고 다시 니체의 이 말고 연결되었다.


“ ‘자라나는 다음 세대’가 이처럼 대담한 시선으로, ‘결연하게 살기 위해’, 저 낙천주의의 나약한 교리에 등을 돌린 ‘악룡 퇴치자’의 대담한 용맹성과 당당한 발걸음을 상상해 보자. ‘자기 학습’을 통해 진지함과 공포를 익히는 이 “문화의 비극적 인간”이 “새로운 예술 = 형이상학적 위로의 예술”로서 그에게 어울리는 ‘헬레나로서의 비극’을 열망하면서. ” <19장, p138/ 요약 발췌>


‘불교문화’ , ‘자라나는 다음 세대’ , ‘자기 학습을 통해 진지함과 공포를 익히는’ , ‘문화의 비극적 인간’ , ‘새로운 예술 = 형이상학적 위로의 예술’... 이 문구들을 핀셋 하여 재구성하였다. 이 문구들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자 이렇게 연결되었다. 니체는 짤막하게 말했을 뿐이지만, 그 '비어 있는 행간'은 내가 스스로 연결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니체가 ‘비극’을 불교문화라고 말하는 이유는, 디오니소스의 비극적 예술은 본래 그리스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異문화’적인 요소인 페르시아로부터였다. 문화의 경계에서 이 둘은 만난 것이다. 그리고 다시 '간다라 지방'에서 ‘페르시아 문화’와 ‘그리스 문화’는 다시 만난다. 이 문화는 여기에서 불교와 결합하였다. 불교에 디오니소스적 원리를 드러낸 '무상 고 무아'가 함축되어 있기에 ‘비극’과 통한다. 고와 실존과 비극은 동어 반복적 관계인 것이다.



고=실존=비극은 모두 같은 의미이자 동시에 다른 표현이다. 그렇다면 ‘비극’은 삶의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인간의 자발적인 감정의 소산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시”이며 “노래”다. 인간이 느끼는 고통은 집단과 어우러져서 용해된다. 그리고 그것은 멜로디 형태로 흥얼거림처럼 목을 타고 넘어온다. 그 멜로디는 '곤충의 알'처럼 '분만'되어 사방에 퍼진다. 그리고 그 멜로디는 점차로 선율이 된다. 그렇게 민족의 정서는 그 선율에 응축된다. 그리고 그 노래(민요)는 민족 정서의 “원형”이 된다. 우리가 원형을 추적하는 이유는 바로 그 원형에 실마리가 보존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니체가 그리스 ‘비극’이란 원형에서 “예술의 원리”라는 실마리를 찾아낸 것처럼 말이다.


불교와 결합한 그리스 디오니소스 예술은 비로소 간다라 미술이 된 것이었다. 간다라 미술은 호메로스적 아폴론 문화와 결합한 것이 아니다. 간다라 미술은, 디오니소스적 음악의 정신이 아폴론적 조각 예술과 결합하여 완성된 ‘비극’과 결합한 것이다. 그러니까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대승불교에는 이미 디오니소스적 음악적 요소가 내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음악의 정신’이다. 바로 이것이 ‘비극적 원리’이다. 대승불교의 음악의 정신과 그리스 아폴론적 조각 예술이 다시 결합된 것이다. 디오니소스의 예술이 다시 되살아난 것이다.


불교에는 공동체가 있다. 대승불교로 이행되면서 집단성은 더욱 커졌다. 이 집단성의 특징이 바로 그리스 비극의 “합창단”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이 합창단이 만들어 내는 도취적 분위기에 의해 근원과 만나는 그리스 비극의 특징에서 보자면, 율법을 가진 불교 공동체가 만들어 내는 음악성은 그리스 아폴론적 예술과 만나자마자 바로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비극 문화’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공동체”라는 원동력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일”에 필요한 동력을 조달할 수 있다는 의미다.


개별화를 넘어선 공동체의 힘이 근원과 하나가 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렇게 근원과 연결되어 합일하는 세계의지의 반영이 ‘비극 문화’인 것이다. 그리고 합일된 그 환희를 산출하여 표출된 것이 ‘간다라 미술’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간다라 미술이 한반도로 흘러 왔고, 한반도의 정서와 결합하였다. 한반도의 정서는 음악적으로 표현되었다. 무의식으로 축적된 음악적 정서는 예술작품으로 드러났다. 현실의 고통을 승화된 미의 예술로 표현한 것이다.







인도/ 불교 소나리탑/ 사리를 봉안한 탑/ 사진 : 페이스북에서




<비극의 탄생 본문 내용>


<문화는 ‘세 가지 환상’의 자극제들로 이루어졌다/ 예술, 학문, 종교>

우리가 “문화”라 부르는 것은 이 ‘자극제’들로 이루어졌다. 혼합률에 따라 우리는 ‘소크라테스적 문화’를 가지기도 하고 또는 ‘예술문화’, 아니면 ‘비극적 문화’를 가지기도 한다. 역사적인 보기에서는 ‘알렉산드리아 문화’ 또는 ‘그리스 문화’, ‘불교문화’가 있다. * 문화는 ‘미의 환영’과 ‘강도적 도취’와 ‘탐욕스러운 의지’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문화의 자극제들이다. 이것들의 ‘혼합률’에 따라 문화의 양상은 달라진다. 차례대로 그 양상은 ‘예술문화’, ‘비극문화’, 소크라테스문화이다. 역사적으로는 그리스 문화, 알렉산드리아 문화, 불교문화가 있다고 하였다. 이 유추에 대입하면, 예술문화 => 그리스문화, 비극문화 => 불교문화, 소크라테스문화 => 알렉산드리아적문화로 대입하여 볼 수 있다.




* 니체는 여기서 비극문화를 ‘불교문화’로 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디오니소스적 문화’에서 ‘실레노스의 지혜’는 ‘불교적 세계관’을 투영하고 있다. ‘무無’와 ‘무상無常’과 ‘고苦’ 그리고 ‘무아無我’는 불교적 가치들이다.


‘무無’는 빈 공간적인 ‘시간적인’ 특징을 유추할 수 있으며, 이것은 ‘공空 사상’과도 밀접하다. ‘무아無我’의 가치는 니체가 말하고 있는 “자기 포기의 높이”에 비춰볼 수 있다. ‘무아’는 ‘도취 상태에서의 개체가 사라지는 현상’과 유사하다. ‘무상無常’의 가치는 ‘현상의 세계’에 비추어서, 시뮬레이션 현실인 비유의 세계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개별 사건적 세계인 곳에서는 늘 변화한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않고 움직이며,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그렇기에 무상하다고 하는 것이다.


태어나지 않는 것도 ‘해탈적 관점’에서 보자면 불교적 가치이다. ‘영원한 고통’이라고 말하는 ‘원초적 개별화의 고통’ 역시 불교에서의 ‘고苦’에 해당하는 가치이다. ‘도취와 강도의 세계’는 거의 보살 수준의 훈련을 요구한다. 이것은 어떤 세계에서, 즉 지하의 가상의 세계에서의 ‘자기만의 훈련의 강도强度’라고 볼 수 있다. 아직 표면화되지 않는 세계, 심층의 세계에서의 강도적 체험이다. 보통 이것은 의식화되지 않은 세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현실화되지 않은 사물의 세계이다. 이런 시간을 사람이 겪을 때는 그 시간은 비현실적 느낌처럼 그 자신만의 특수한 상황이다. 이러한 시간을 통하여 사람은 무엇인가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이 또한 ‘자기 포기의 시간’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무, 무상 고 무아, 깨달음의 불교적 가치들은, 모두 ‘비현실 세계의 실재’에 기반하고 있다고 보인다. 이것은 흔히 “가상”이라고 불리는 세계이다. 물론 요즘은 가상세계를 게임이나 시뮬레이션을 통하여 눈으로 볼 수 있는 메타버스 형태로 구축하고 있지만, 이것 역시 일정 부분은 시뮬레이션 현실에 포함되어 있다. 상상의 세계를 현실로 가져와 실제화시킨 것이기에 그러하다. 반면 선험성의 비현실적인 세계는 정신적인 세계이다. 그래서 예술적 세계라고 하는 것이다.


이 세계는 시뮬레이션 현실을 구현하는 원재료를 제공하는 세계이다. 이 원천에서, 디오니소스적 원리를 통하여 직관적으로 직접 소통하여 아이디어, 영감을 현실로 가져와 실제화시킨다. 이러한 원리가 ‘예술적 원리’라고 니체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불교적 세계관은 공동체를 중요시하는데, ‘상가Saṅgha’라고 하는 승가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를 통하여 승가공동체는 ‘사부대중四部大衆’이 하나로 움직이게 된다. 율법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를 ‘처음 보는 이들’은 그들이 사는 방식이 마치 ‘비밀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석가모니 이전에 아미타불 불교적 세계관은 부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디오니소스 식으로 보자면 부활이며 재생이다.



* 사부대중四部大衆/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우바새(優婆塞), 우바니(優婆尼)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상가Saṅgha는 사부대중의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출가자와 재가자로 이루어진 공동체이며, 역할 분담의 형태이지만, 불법을 공유하는 것은 동일하다.


이러한 불교적 세계관은 그리스 문화와 결합하여 불교미술을 낳았다. ‘대승불교의 미의 세계관’은 그 자체로 ‘아폴론적 미의 세계’이다. 불교의 보살들은 모두 아폴론적 미의 화신으로 현현한 모습으로 벽화를 통하여 우리의 세계에 있다. 불교의 이런 미적 승화의 세계는 그리스 문화와 결합한 결과였다. 영원한 고통을 자비로 감싸 않는 것이다. 불교의 초기에는 조각 미술이 없었다. 아울러 불상이나 벽화도 없었다. 탑만 있을 뿐이었다.

불교의 미적 세계관에서, 불교적 음악성의 특징은, 종소리, 목어, 목탁 소리, 진언 그리고 독경, 예불 소리는 그 자체로 음악적이다. 전반적으로 낮은음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소리들은 저 깊은 곳을 건드리는 음악인 것이다. 어쩌면 현상 세계와 ‘막’ 하나의 차이로 경계 지어진 실재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소리들 인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 실재의 세계에서 비롯된 소리들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 세계를 표현하는 소리이고 그 세계를 해석하는 소리일 것이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 19장, 135쪽에서, 세 가지 환상의 단계들이, 문화의 세 가지 자극제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혼합률'에 따라 문화의 양상이 달라진다고 하였다. 아주 짤막하게 언급하였다. 그 세 가지는, 소크라테스적 문화, 예술적 문화, 비극적 문화이다. 이것을 다시 더 구체적으로 전승된 '현재의 세계 문화권'으로 비유하면, ‘소크라테스적 문화 = 알렉산드리아 문화권’, ‘예술적 문화 = 그리스 문화권’, ‘비극적 문화 = 불교문화권’으로 짝 지어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니체의 말에 비추어서, 대입해 보면 이러하다. 그리스 문화는 원래 호메로스적 아폴론적 문화이다. 그런데 디오니소스의 광기가 이 문화에 흘러왔다. 디오니소스적 광기 형태는 아마도 먼저 페르시아적인 형태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광기는 힌두교적이기도 하다고 생각된다. 조로아스터교에 힌두교가 결합된 느낌이다.


그리고 이내 디오니소스 도취 문화는 그리스의 호메로스적 그리스인의 정서와 결합한다. 이때까지의 그리스인은 아폴론적인 꿈의 환영으로 신들의 세계를 이상으로 삼았는데, 디오니소스 도취와 결합하면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즉 페르시아 문화와 그리스 문화 = 조로아스터교와 아폴론 신앙이 만나서 결합된 것이다.


이를테면 디오니소스의 원리의 과정은 이러하다. 광기는 도취로 들어가는 마중물이다. 여기까지만 형성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여기서 헤맬 수 있다. 어떤 목적이나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자신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자기 안으로 들어가려면 몰입이 필요하다. 그 몰입 상태를 광기가 제공해 준 것이다. 이로서 도취를 통하여 근원에 닿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상태에서 근원적 일자(영원한 고통)와 합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아직 미완성이다.


그 합일된 충만한 환희감이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요소를 호메로스적 아폴론적 예술이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꿈의 환영에서 비롯된 아폴론적 인식이다. 이 미의 환영을 통하여 그 환희감은 구체적으로 표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환상이 없이 예술 작품이 아름다워질 수는 없기는 때문이다. 즉 예술은 어떤 세계의 직접적 투영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알렉산드로스 3세의 원정 전까지의 ‘그리스 비극 예술의 과정’이다.



인도 보드가야 박물관/ 불교/ 수투파의 숲/ 기원 후 4세기 무렵/ 사진: 페이스북에서





그 과정을 도식화하자면 이러하다. 이것은 점차로 분만하는 형태로 변양 되었다.


1단계 분만 / 디오니소스 + 힌두교 = 광기/도취 상태만 가능.

2단계 분만 / 디오니소스 광기 => 도취 상태를 통하여 -> 근원적 일자(영원한 고통)와의 결합이 가능해짐. => 디오니소스적 도취 예술 완성


3단계 분만 / 디오니소스적 도취 예술 + 아폴론적 예술 => 도취 -> 일자와의 합일 -> 미의 환영 -> 창작 -> 세계를 해석 => 디오니소스적 ‘비극’ 예술 완성 => *** 비극이 전성기를 구가하다가 기원전 5세기 ~ 기원전 4세기에 소멸하고 -=> 비극이 ‘희극의 연극적 형태’로 변화(소크라테스적이고 에우리피데스적 -> 플라톤 예술(알렉산드리아 문화) -> 알렉산더 원정/ 헬레니즘 시대 <= 기원전. 기원 후 -> 로마제국(BC 27 ~) -> 2세기 로마 영토 확장 -> 크리스트교 공인(AD 313/콘스탄티누스 1세) -> 중세시대 5세기 ~15세기(약 천년).

4단계 분만 / 페르시아 문화 + 불교 => 대승불교 + 그리스 문화 => 간다라 미술.

그리스 예술은 알렉산드로스 3세에 의해 다시 동방에 재전파 된 것과 같다.


알렉산더 대왕(BC 356~BC 323)의 동방원정 이전에 이미 동방에서 계속 무엇인가가 그리스 사회로 흘러들어 왔다. 알렉산드로스 3세는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인도를 원정을 강행했다. 그 결과 원정길은 하나의 문화 교역권이 된다. 소수의 사람들만 어찌어찌 넘어오던 그 샛길을 아예 대로로 개척한 셈이 된 것이다. 이 후과는 모두 알렉산드로스 3세 이후의 시대들이 가져간다. 원정에 대하여 찬반 논란은 일단 뒤로 하고, 알렉산드로스 3세의 동방 원정은 또 다른 형태를 불러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후과에 의해 ‘간다라 미술’은 탄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불교의 초기에는 불상이 없고 탑만 있었다. 불상 조각가 부조는 페르시아와 그리스 아폴론 예술의 영향일 것이다.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영향으로 불교에서도 ‘미술문화’가 탄생한 것일 거다. 불교 예술은 그 후로 사람들에게 형이상학적 위안을 주었을 것이고, 대중에게 전파된 동력이 된 것일 거다. 반면 예술적 차원에서 종교적 차원으로 예술이 넘어가 버린 결과도 있다. 차안의 실존에서 피안의 도피(기복)로 이탈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불교는 차안을 강조하였기에 다시 균형을 회복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론 니체는 종교적 공동체를 부정한 거 같지는 않다. 종교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 ‘독단론’을 부정한 것이며, 예술을 희생시킨 것을 부정하는 것이며, 예술을 모상의 신에게 봉사하게 한 것을 부정한 듯하다. 즉 기독교적 예술은 플라톤의 사상과 결합한 것인데, 이 플라톤의 예술관은 그리스 비극을 부정하는 형태였기 때문이고, 그 부정에 의해 ‘이데아’를 상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언어는 음악보다 앞설 수 없다.


이것이 비극 예술의 원리의 골자다. 그런데 이것이 뒤바뀌었기 때문에 니체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철학을 공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라고 보인다. 의지는 음악의 의지이고, 이 음악의 의지가 세계의 의지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니체는 판단한 것이다.


인류 최초의 고대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는 현재에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조로아스터교적인 요소와 힌두교적인 요소가 초기의 디오니소스 숭배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인다. 페르시아로부터 흘러온 사상이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숭배와 결합한 것의 형태를 보자면 그러하다. 디오니소스 신전은 튀르키예 안탈리아에도 있다. 디오니소스 숭배는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5단계 분만 / 간다라 미술 + 삼국시대 이전의 고대 국가 무속적 문화 + 비극문화 = 신라 불교 미술, 백제 불교 미술, 고구려 불교 미술.


그리스 세계에서 이러한 문화접변이 ‘비극’ 예술로 나타났다면, 인도의 간다라 지방에서는 ‘간다라 미술(AD 1세기 ~ AD 5세기, 6~7세기)’로 나타났다. 이 간다라 미술은 신라의 '석굴암'에도 영향을 미쳤다. 본존불이 ‘석가여래’인지 아니면 ‘아미타불’인지를 놓고, 논란이 있다고도 하는데 나는 ‘아미타불’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라의 김대성이 석굴암을 축조할 당시에 , 석굴암을 이렇게 조성해야 한다고 전해준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김대성은 불상의 조성과 방향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것이다. 아무 정보도 없이 김대성이 석굴암을 조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석굴암은 그 당시에서 건축 양식과 조각 미술의 하나의 실험 사례와도 같았다. 건축과 미의 양식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면 이렇게 산중턱에 조성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김대성 역시 그가 미적 조예가 없었다면 이것을 수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으로 “본존불이 바라보는 방향이 문무대왕릉으로 알려진 대왕암 방향이며 이는 신라의 호국불교 사상을 뜻한다는 주장이 있다. 방향이 대충 비슷하긴 하나, 정확히는 “동지 때 해가 뜨는 방향”에 더 가깝다. 반면 '석굴의 방향이 동짓날 일출 지점'이고 '동해의 아침 햇살을 본존불 백호에 맞추려는 거룩한 의도로 석굴이 지어졌다."라는 주장은, 일본의 방식이라는 설보다는, 오히려 ‘동지 때 해가 뜨는 방향’은 ‘디오니소스 신화’와 더 가깝다고 여긴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그리스 예술의 방향과 더 가깝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물론 근현대에서의 동지의 해 뜨는 시각은 크리스마스와 더 가깝게 사용되고 있다.


왜냐하면 석굴암의 방향은 정확히 ‘간다라 지방’을 향하고 있고, 그 선을 더 연결하면 그리스 아테네에 닿기 때문이다. 석굴암의 방향은 석굴암 건축 양식이 전해 온 곳을 향해 있다. 물론 그 방향은 불교가 전파된 길이기도 하다. 신라의 김대성은 그 방향을 ‘서방정토의 방향’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정확하게 그 방향을 측정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석굴암 건축가는 나침판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신라시대부터 풍수 사상이 퍼졌다. 그때 풍수가 들은 풍수 ‘지남침指南針’을 가지고 주변 산세를 측정했다. ‘지남침’은 늘 남북을 가리키는 자성을 가진 물체다. 어쩌면 석굴암의 방향 역시 이 ‘지남침’을 사용하여 결정한 것이 아닐까.

구글지도에서 살펴 본, 아테네, 간다라 지방, 석굴암, 동지 해 뜨는 방향 / 고대 불교 이동로



지남침이 장착된 윤도 / 사진 daum에서



6단계 분만 / 삼국의 불교 예술(무유불선의 예술) = > 고려 불교 미술


* 고대의 도교문화는 ‘기술 문화’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랍문화의 영향과 결합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점차로 주술문화로 변질된 측면은 '기술에 대한 확고한 장인적 정신이 약'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나타난 환영의 형태는 모두 아폴론적 인식이었는데, 그것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도교의 형태는 ‘예술적 장인문화’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지 않을까. 그것이 지나치게 신비주의로 빠져버린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다 종교화 되어버린 것이고. 도교는 비세속적 하나의 공동체를 지향했다. 일종의 자립 공동체 같은 형태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런 형태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신비롭게 비쳤을 것이다. 모든 문화의 양식에는 기술적 측면이 받쳐주어야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미적 장인들의 형태였는데, 마땅한 위치가 정해지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에 정통한 전문가 집단이었음에도 일상생활과는 다소 동떨어진 전문적 지식이었기에 신비로운 형태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전설의 화타 역시 도교적 전문적 장인 의술가였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산에서 은둔하거나 은밀한 공동체를 지향하여 교육하고 수련하였으므로, 신비주의화 된 것일 거다.



7단계 분만 / 모든 총합의 완성된 고려 불교 예술 + 유교 예술 = 조선 예술 + 서구권 예술 = 한국 예술







글이 한페이지로 붙어있고 단락 구분이 안 되어 있어서, 먼저 단락을 구분한 후 문장을 정리한다.



< '비극 문화'와 불교 문화를 관통하는 것은 "공동체"이다>


* 그리스 '비극' 문화는 비가시적인 원리이기도 하다. 디오니소스적 원리는 그 민족의 정서와 결합하여 문화를 만든다. 그렇다면, 이 그리스적 비극의 원리는 즉 음악의 정신은 파괴되지도 않고 영원한 생명과도 같다고 보아야 한다. 영원히 사는 것은 바로 이 음악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인의 실존의 고통은 바로 이 음악의 정신과 결합하여, 그리스 ‘비극’을 낳았다.


불교의 지혜는 동북아시아 정서와 만났다. 간다라 지방에서의 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살펴보자면, 2세기에 로마는 카스피 해 부근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의 그 지역에 새로 일어난 ‘파르티아’는 비단길을 장악하여 동서의 중계 무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자연적으로 어떤 이동의 움직임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한반도의 고대 국가 건국 세력은 이러한 이동과 관계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쪽에서 보자면 한반도 남부는 땅의 끝일 수도 있다. 더 가고 싶어도 더 가지 못하고 이곳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다.

불교의 '무상 고 무아'와 '대승불교 미술'은 한반도의 '정서'와 만나서 결합하였다. 이 정서가 바로 디오니소스의 비극적 예술인 음악의 정신이다. 모든 지정학적 민족에게는 그 민족만의 정서가 있다. 이 정서는 인간의 실존의 드라마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이 '한민족의 정서와 유사'하다는 것은 금세 파악할 수 있다. 비극의 의미를 유추하면, 그것이 한민족의 ‘한의 정서’와 상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비극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하면, 우리 민족이 왜 시나 노래에 그렇게 탁월한 감성을 가지고 있는지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왜 그렇게 언어적인 민족이고 학문적인 민족이며 깨달음의 민족인지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왜 한반도에 어떤 것이 응축되어 문화가 보존되어 있는지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한”의 정서가 바로 “비극”이다. 고대 그리스 비극은 '한반도의 정서'에 원형으로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비극의 원형에서 추출된 정서와 한반도의 한의 원형에서 추출 된 정서는 동일하다. 그것은 직접적인 관계다.


그리고 그러한 정서를 함유하고 있는 민족의 문화는 동일하게 ‘비극 문화’를 추출해 낼 수 있다. 니체의 주장은 이러한 정서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그러한 요소를 그 자신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명명하였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이름이 없으니 이름을 지어 준 것이며, 그렇게 이름을 지어 불러 준 것이다.


그러자 비로소 디오니소스의 음악의 정신에 대해 학문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개념화시킨 것이며, 철학화 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해 감을 잡지만, 이름이 없으니 말을 못 하는 것이므로, 이름을 붙여주고 우리의 인식에 포함시킨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철학의 역할이니까 말이다.



철학은 본래부터 ‘리뷰적’이라 생각한다. 고대 호메로스가 음유시인들의 노래를 그의 서사시로 리뷰하였듯이, 고대 아이스킬로스가 그 당시의 정서를 서정시로 노래하였고 비극을 공연했듯이, 그 후의 시인들과 철학자들이 사물과 예술을 대상으로 하여 언어로 재해석하였듯이. 이러한 모든 것은 모두 “사물”의 이면과 현상에 대해 리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세계 의지가 산출한 감정을 ‘받아쓰기’ 한 것과 같다. 모든 작품은 그렇게 표현된다. 지혜는 그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 모습은 다양한 변주를 통하여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변양 되어 드러난다. 비로소 다양해진다.


문화의 혼합률예술, 학문, 종교가 결합한 것이다. 이 혼합률에 따라 문화의 양상이 달라진다. 그런데 이 문화에서 배제되었던 인간의 행위들에서 현재는 더 많은 범주의 것들이 문화로 편입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예술적인 형태로 구현되고 있다. 이를테면 스포츠는 예술이 아니었지만, 우리는 점차로 스포츠에서 예술성을 느끼고 있다. 현시대에서 스포츠는 예술을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인간이 하는 행위가 본질적으로 예술적인 것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어떤 것이라도 '지극하면 예술적 원리를 관통'하게 되기 때문이다. 니체는 학문에서 그러한 본질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이내 학문의 과정 역시 예술적 원리를 통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더 나아가 현 시대에서는 더 많은 분야들이 예술적 원리를 동반하고 있으며, 그것은 바로 삶의 토대가 되는 모든 것이다.



'비극 문화'의 본령은 공동체에 있다고 보인다. 음악의 정신은 공동체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일 것이며, 그것은 하나에 접속하는 힘일 것이다. 현대인의 원초적인 고통은 이러한 본령에서 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단절과 소외는 고립감을 준다. 현대에도 많은 형태의 소小공동체 형태로 모임들이 만들어지고 사라지고를 반복한다. 아마도 현대인 역시 알게 모르게 이러한 음악적 합일의 상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일 거다. 그것이 명확하게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할 뿐이지 않을까.


비극문화가 '불교문화권'인 이유는, 자연의 본질적인 지혜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소크라테스 알렉산드리아 문화는 지혜를 왜곡한 형태에서 진행되었다. 그래서 예술이 반쪽짜리 예술이 된 것이다.


어쩌면 이 ‘비극’이라는 어감이 주는 것에서 사람들은 비극을 더 멀리 한 것일지도. 일단은 왠지 꺼림칙한 느낌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비극의 의미를 일상 단어 의미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비극’의 의미는 더 깊은 곳에 있다. 그것은 저 깊은 심층의 심연에서 올라오는 것에 있다. 영원한 고통을 사랑으로 껴안는 그 메커니즘에 비극의 본체가 있다. 비극의 의미는 커다란 슬픔이며 그 슬픔은 곧 사랑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