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비극의 탄생> '16장' 내용의 일부입니다. 쇼펜하우어 음악론을 니체가 인용한 부분입니다. 그 부분만 따로 떼내어 독립 글로 올립니다. 이 글이 마지막 장을 장식하게 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그렇게 되었습니다.
* 글은 제 자신이 읽기에 좋도록 문장을 부분적으로 수정하였습니다. 각 단락 또는 문장에 달린 코멘트는 이해해 보려고 다시 풀어서 써 본 것입니다. 그리고 좀 더 긴 코멘트는 저의 생각을 써 놓은 것입니다.
* 이 글로 연재 30화를 마무리합니다. <비극의 탄생 풀어쓰기> 연재를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남은 분량은 차차로 어찌어찌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나날들 되시어요^^
<쇼펜하우어의 음악론>
<니체의 인용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권 310쪽>
이 모든 것에 따라 우리는 ‘현상’ 세계, 또는 ‘자연이나 음악’을 ‘동일한 사물’의 ‘서로 상이한 두 표현’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사물” 자체가 ‘둘의 유사점’을 유일하게 매개하는 것이고, 유사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매개체를 인식하는 일’이 필요하다. * 현상세계, 자연, 음악은 동일한 사물인데, 서로 다르게 표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들의 공통점은 “사물”이라는 것이다. 이 사물이 ‘서로 다른 두 표현’의 유사점을 유일하게 ‘매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유사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매개하는 것을 인식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 매개체는 “사물”이다. 사물을 이해하는 것이 유사점을 파악하게 한다.
이 전제에 따르면, 음악은 ‘세계의 표현’으로 간주될 경우, 최고로 “보편적인 언어”다. 심지어 이 보편적인 언어는 ‘개념의 보편성’에 대해서도, ‘개별적인 사물’에 대한 관계와 “동일한 관계”를 맺는다. * 이러한 전제를 따르면, 음악은 ‘세계의 표현’으로 간주할 수 있다. 세계의 표현은 곧 “보편적인 언어”다. 이 보편적 언어는 “개념의 보편성”이 ‘개별적인 사물’과의 관계를 맺을 때에도, ‘세계의 표현’ 때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음악의 보편성’은 ‘추상의 공허한 보편성’이 아니라,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며, ‘일반적이고 명확한 내용’과 결부되어 있다. * 음악의 보편성은 일반적이고 명확한 내용과 결부된다. 그것은 추상의 공허한 보편성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또는 어떤 사건적 형태로 접하는 것 역시 일반적인 명확한 내용과 결부된다. 그러니까 직접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음악은, 기하학적 ‘도형’이나 ‘숫자’와 비슷하다. 즉 ‘모든 가능한 경험 대상’의 ‘보편적인 형식’으로서 ‘모든 것에 선험적’으로 적용 가능하지만,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다.* 음악은 기하학적 도형과 숫자와 비슷한 언어다. 경험할 수 있는 모든 대상에게 보편적인 형식으로 작용한다. 음악은 모든 경험 대상에 ‘선험적’으로 적용 가능하다. 음악은 모든 경험 대상에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다. 이 음악의 보편적인 형식은 추상적이지 않다.
가능한 모든 노력, 흥분과 의지의 표출, 즉 ‘이성’이 부정적이고 광범위한 개념인 ‘감정으로 치부’하는 ‘인간 내면의 모든 과정’이 ‘무수히 가능한 선율 속에 표현’된다. (비극의 탄생/16장/p123)
* 이성이, 부정적이고 광범위한 개념으로 치부하는 것은 “감정”이다. 이 감정은 ‘인간 내면의 모든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 내면의 모든 과정, 즉 감정은, 가능한 모든 노력, 흥분과 의지의 표출 등으로 ‘무수히 가능한’ 선율 속에 표현된다.
쇼펜하우어 1788~1860 / 산진 : 나무 위키
음악은 ‘소재 없이’ 항상 ‘단순한 형식’의 보편성 속에서 표현되며, 마치 ‘육체 없이 육체의 가장 내적인 영혼’을 따르듯이 ‘현상’을 따르지 않고, 언제나 ‘물 자체’를 따른다. * 음악은 현상을 따르지 않고, 물 자체를 따른다. 그 형태는 마치 육체 없이 육체의 가장 ‘내적인 영혼’을 따르는 것 같다. 음악은 소재 없이 ‘단순한 형식’의 보편성 속에서 표현된다. * 이 말은, 음악이 어떤 사물의 형상이나 현상의 묘사가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사물의 본질을 헤아리듯이 스며든다는 의미일 것이다.
음악이 모든 ‘사물의 진정한 본질’과 맺는 이 ‘친밀한 관계’로부터 다음 ‘현상’이 설명될 수 있다. 즉 어떤 장면, 줄거리, 사건, 환경에 적절한 음악이 흐르면, 음악은 그것의 ‘가장 은밀한 의미를 해명’해주는 것 같고, 그에 대해 가장 ‘명확하고 분명한 주석’을 알려주는 듯한 까닭이 설명된다.* 음악이 모든 사물과 맺는 이 ‘친밀한 관계’로 다음의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어떤 장면, 줄거리, 사건, 환경에 적절한 음악이 흐르는 그때의 음악은, 사물의 ‘가장 은밀한 의미’를 해명해 주는 것처럼 다가온다. 이 느낌으로 말미암아 음악이 그 상황을 가장 명확하고 분명한 주석을 알려주는 것 같은 ‘환상’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어떤 교향곡’이 주는 ‘인상’에 완전히 몰두한 사람이 음악을 들으면서 마치 ‘삶과 세계’의 ‘모든 가능한 과정’이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 이러한 상태의 느낌은 ‘어떤 총체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주마등처럼 스쳐간다고 여기는 장면들은 그 자신의 ‘어떤 내적 총체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모든 가능한 과정’은 ‘그 자신의 경험 안에서 모든 가능한 과정’이다. 즉 내적 경험으로서의 모든 가능한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 그것은 그 자신만의 총체성이다. 그 총체성은 편집되어 나타나지, 연결되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무슨 말인가? 그 편집된 형태 즉, 파편화되어 되어 나타나는 그 현상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그 편집된 형태, 파편화된 형태만이 모든 가능한 과정을 압축한 형태이다. 이 압축에 의하여, 편집되어 스쳐 지나가는 것은 어떤 서사를 구성한다.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편집된 형태를 연결하는 형태다. 만약 하나의 이야기만 있다면, 그것은 공허할 것이다. 왜냐하면 편집할 내용이 없는 것이고, 어떤 변화를 겪지 않았다는 것이고, 스토리가 없다는 의미가 된다. 압축할 근거가 빈약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사람은 유년과 청소년기와 성년기와 청년기와 장년기를 거쳐 노년기에 도달한다. 이미 그 자체로 변신이고 그 사이에는 무수한 이야기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어떤 모든 가능한 과정이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편집된 기억의 장면들을 연결하면 ‘동영상 형태’가 된다. 그러면 우리는 그 장면들이 ‘움직이는 것’ 같은 환영을 본다. 영화처럼 말이다. 영화는 편집된 장면들을 이어 붙이기 한 것이다. 우리가 그때 보게 되는 삶의 총체성의 형태도 그러하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환영(환상)의 형태이고, 가상적이다.
이러한 것이 우리의 뇌에서는 비현실적 체험으로 나타나며, 그것이 바로 가상세계 경험이다. 환영은 그렇게 비가시적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이러한 경험에서 삶의 위안을 얻는다. 어떤 홈 페인 곳이 메워지는 감각적 체험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신체 안에서 일어나므로 지극히 감각적이고 실제적이다. 이렇게 메워지는 경험에서 인간은 다시 재생의 에너지를 얻거나 편안함을 획득하게 된다.
음악의 효과 또는 예술의 효과는 인간을 재생한다. 이 재생의 힘으로 인간은 삶을 산다. 삶이란, 실존하는 상태를 잠시 망각할 때, 즉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아도 될 때 아름다워진다. 이성의 통제에서 벗어나서 더 큰 것과 합일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불안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불안 또는 고통이 그 성질을 망각하였는지도 모른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고통을 극복하는 형태에서 필요하였다. 실존하는 인간이 어느 한순간 자기를 망각할 때는 그 자신의 근원과 만날 때이다. 현재의 자기를 벗어날 때이다. 현재의 자기가 모든 것을 장악한다면, 인간은 그 어느 곳도 갈 수가 없다.
영원한 현재만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잠을 자지 못하는 불멸의 고통에 직면에 있는 것과 같다. 우리가 때로는 샛길을 찾아서 여정을 떠나듯이, 예술적 체험 또는 예술적 활동을 하는 이유는, 바로 일상에서 비일상을 만들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야기는 니체가 말한 ‘비일상적인 특이성’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이 비일상적인 특이성은 비가시적인 현상이다. 우리가 삶에서 익히 경험하면서도 잘 드러나지 않기에 낯설게 여겨지는 현상이다. ‘낯설게 보기’는 바로 낯설게 보여서 놀라거나 움츠려드는 것을 오히려 ‘전면화시킨 기법’이다.
낯설게 보기를 통하여 우리는 ‘비일상적인 특이성’을 “완화”시킬 수 있다. 즉 일상처럼 비일상을 친근하게 만드는 것이다. 비일상을 삶으로 끌어오면 삶이 풍부해진다. 삶의 위안과 치유는 그 자신 안의 힘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공통의 주제와 그 주제들에 부합한 손발 맞추기와 호흡 맞추기의 공동체 훈련에 의하여 인간은 소외감과 고립을 벗어날 수 있다. 개별화의 고통은 이러한 방법만으로 만이 치유될 수 있고 홈 페인 구멍을 메울 수 있다. 그러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세계 바로 가상적 비현실의 세계다. 예술 세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리면, 그는 자기 눈앞에서 떠다니던 사물들과 저 음악 사이에 어떤 유사성도 진술할 수 없다. * 음악이 주는 환영에서 벗어나면, 자기 눈앞의 환영(사물=기억의 각 장면들)과 음악의 유사성은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느낌으로 치유받는다.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면 어떠한 유사성도 찾을 수 없지만, 그 환영은 여운을 남긴다. 그리고 사람은 그것에서 어떤 표본을 산출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비실제에서 실재를 느끼는 것이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느낌으로 각인되어 지워지지 않고 계속 되살아나서 그것을 다시 찾게 만든다. 하지만 경험은 매번 다른 느낌을 준다. 같은 것이지만 다른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달받고 이해받는 충만감은 동일하다.
왜냐하면 이미 말했듯이, 음악은 현상의 “모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의지의 적절한 대상의 모사’가 아니라, ‘의지 자체의 직접적인 모사’이며, 세상의 ‘물질적인 모든 것’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것’을, 그리고 ‘모든 현상’에 대해 ‘물 자체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다른 예술과 구분’되기 때문이다.
* 음악은 현상의 모사가 아니다. 음악은 의지의 적절한 대상의 모사가 아니라 ‘의지 자체의 직접적인 모사’이다. 왜냐하면 음악은 물질적인 모든 것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것’을 모사한다. 또한 모든 현상에 대해서는 ‘물 자체’를 표현한다. 이 점에서 음악은 다른 예술과 구분된다.
* 이 말은, 음악은 사물에서는, 물질의 형이상학적인 것을 모사하고, 모든 현상에 있어서는 ‘물 자체’를 표현한다. 즉 하나의 사물에 대하여 음악은 내적 의지적인 것과 형상적인 것의 두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서로 같은 것이지만 다르게 표현된다.
내적 의지 형태에서는 ‘형이상학적인 것을 모사’하고, 현상으로 드러날 때는 ‘물 자체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즉, 전자는 환영의 형태이며, 후자는 선율의 형태일 것이다. 우리의 선험적 경험은 전자에 속한다. 내적 의지의 직접적인 모사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이라는 것은 그 자신을 떠나서 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 안에서 체험된 것이며, 직접적인 신체 반응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구체화된 음악’이라 불러도 되고 ‘구체화된 의지’라 불러도 될 것이다. 그러므로 왜 음악이 ‘모든 형상’, 즉 ‘실질적 삶’과 ‘세상의 장면’이 ‘좀 더 높은 의미’를 가지고 나타나도록 만드는지 그 이유가 분명해진다. * 음악의 이러한 특성에 의해, 세상은 구체화된 음악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음악은 ‘구체화된 의지’ 이기도 하다. 음악이 모든 형상과 실질적 삶에 좀 더 높은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직접적 원인’에 의해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음악의 현현이라는 것에서 보자면, 우리는 세상을 좀 더 친근한 눈으로 바라보아도 좋을 것이다. “나”와 아주 친한 관계인 것이다. 그것을 회복한다면, 분명 삶의 눈높이와 만족도 역시 달라질 것이다. 세상은 나를 필요로 하고 나는 세상을 필요로 한다. 이 둘은 불가분의 공생관계다. 음악이 세상에 품위를 부여하고, 음악이 세상을 더 높인다. 그것이 아름다움일 것이다. 음악은 곧 지혜다. 세상이 구체화된 음악이라면, 세상에 존재하는 물 자체는 “지혜”의 또 다른 현현일 것이다.
물론 ‘선율’이 ‘주어진 현상’의 ‘내적 정신’과 ‘유사’하면 할수록, 그 ‘의미’는 그만큼 더 ‘명료’해진다. 바로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 우리는 “시”를 “노래”로서, ‘구체적인 묘사’를 ‘무언극’으로서 또는 이 ‘둘’을 ‘오페라’로서 ‘음악에 종속’시킬 수 있다. (16장/p124)
* 선율이 주어진 현상의 ‘내적 정신’과 유사성이 강해지려면, 그 내적 처함의 강도가 순일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자기 포기의 높이’에 ‘도달’해 있어야 한다. 그 도달한 만큼 순일한 강도적 환영을 체험할 것이고, 거기서 그만큼의 표본을 산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산출된 것을 우리는 시를 노래로 변형하고, 구체적인 묘사는 무언극으로 변신시킬 수 있다. 그리고 노래와 무언극을 오페라에 투영하여 “음악”에 종속시킬 수 있다. 즉 창작을 하여 예술을 더 충부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음악의 ‘보편적인 언어’에 종속된 ‘인간의 삶의 모습들’이 ‘필연적’으로 음악에 연결되어 있거나 음악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 ‘모습들’과 ‘음악의 관계’는 ‘보편적인 개념들’과 ‘임의의 사례들’과의 관계와 같다.* 임의의 사례들은 보통 특수한 사례들이다. 그것은 어떤 유사적 특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적 체험에 속한다. ‘인간의 삶의 모습들’은 개별적 체험 사례들이다.
‘그 모습들’은 음악이 ‘단순한 형식의 보편성’ 속에서 표현하는 것을, ‘현실의 명확성’ 속에서 ‘묘사’한다. “선율”은 어떤 의미에서는 ‘보편적 개념’처럼 ‘현실의 추상화’이기 때문이다.* 음악은 단순한 형식의 보편성이고, ‘인간의 삶의 모습들’은 현실의 명확성 속에서 음악을 묘사한다. 왜냐하면, 선율은, 개념처럼 현실에서는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음악은 형이상학적인 것을 모사하고, ‘인간의 삶의 모습들’은 현실의 명확성을 묘사한다. 그러므로 음악은 직접적인 모사이고 현실은 간접적 추상이다. 선율은 이미 단순한 형식에서 벗어나 추상성을 띠며 반복된다. 선율은 이미 현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개별 사례들을 모사하게 돠는 것.
다시 말해 “현실”은, 즉 ‘개별적인 사물의 세계’는 ‘개념의 보편성’과 ‘선율의 보편성’에,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것, 특수하고 개인적인 것, 개별 사건을 제공해 준다. * 현실은 곧 개별적인 사물의 세계다. 이 개별적인 사물의 세계는 개념의 보편성과 더불어 선율의 보편성에 어떤 ‘개별 사건’을 제공해 준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것’이고 ‘특수하고 개인적인 것’이다.
즉, '가시성'과 ‘특이성’이다. 현실은 가시성과 특이성을 동시에 제공한다. 개념은 글(작곡)의 형태이고 선율은 소리의 형태이다. 현실의 개별 사건의 세계에 "개념의 보편성"과 "선율의 보편성"이 노출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개인적 체험에 노출되어 그것을 묘사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개념과 선율의 두 보편성’은 어떤 측면에서는 ‘서로 대립’된다. ‘개념들’은 ‘관조’로부터 ‘추상화된 형식’, 즉 ‘사물에서 벗겨낸 겉껍질’만을 가지고 있어서 추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 관조와 직관의 차이일까? 개념은 관조로부터 비롯된 추상, 직관은 음악으로부터 비롯된 느낌. 추상과 느낌은 대립은 간접 소통과 직접 소통의 차이적 차이일 것이다. 언어와 음악의 차이일 것이다. 이 개념의 형식이 현상을 모사만 하게 되면, 내용의 선율 역시 '의지 자체의 직접적인 모사'가 아니게 된다. 즉 제대로 된 표현이 아니게 된다는 것.
그에 반해 ‘음악’은 모든 형체들에 앞서 존재하는 ‘가장 내밀한 핵심’, ‘사물의 심장을 제공’한다. 이런 관계는 ‘스콜라 학파’의 언어로 잘 표현될 수 있다. 즉 개념들은 사물 이후의 보편universalia post rem이지만, 음악은 사물 이전의 보편universalia ante rem이고, 현실은 사물 속의 보편universalia in re이다.
* 개념 -> 사물 이후의 보편 -> 사물에서 벗겨낸 겉껍질 -> 추상
* 음악 -> 사물 이전의 보편 -> 의지 자체
* 현실 -> 사물 속의 보편 -> 형상
이렇게 보면, 우리는 사물 이후의 보편이 진리라고 속기 쉬울 거 같다. 그리고 때로는 현실 그 자체가 진리라고 오판을 범할 수도 있다. 언제나 현상 너머에 배후가 있다. 사물 이전의 음악이 배후다. 그것을 우리는 느낌 즉 '감'으로 또는 직관으로 파악하게 된다.
그러나 ‘작곡’과 ‘구체적인 묘사’ 사이에 ‘관계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은, 이미 말했듯이, 이 ‘둘’은 ‘세상의 동일한 내적 본질의 상이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작곡과 묘사 -> 세상의 동일한 내적 본질의 상이한 표현 = 세상의 동일한 내적 본질의 서로 다른 두 표현. 언어와 음악의 관계는 같은 것의 다른 표현이다.
‘어떤 개별적인 경우’에 그런 관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다시 말해 ‘작곡자’가 어떤 사건의 핵심이 되는 ‘의지의 활동’을 ‘음악의 보편적 언어’로 표현할 줄 안다면, 그 노래의 선율, 그 ‘오페라의 음악’은 표현력이 풍부할 것이다.
그러나 작곡가가 발견한 ‘둘 사이의 유사성’은, 그의 ‘이성’이 의식하지 못한 채, ‘세계의 본질’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으로부터 얻어져야 하며, 의식적이고 고의적으로 개념들을 통해 ‘매개된 모방’이어서는 안 된다.* 작곡자가 ‘작곡과 구체적인 묘사’ 사이에서 서로 유사성을 발견하려면, 세계의 본질에 대하여, ‘그 자신의 이성이 의식하지 못하는 인식으로부터 얻어’져야 한다. 즉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 의식적이고 고의적인 개념들을 통한 ‘매개된 모방이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의 스타일이 드러나는 방식도 바로 이러한 방식이어야 한다. 그럴 때 아 그 사람이구나! 하게 된다.
그럴 경우, 음악은 ‘내적 본질’, 즉 ‘의지 자체’를 표현하지 못하고 ‘의지의 현상’만을 ‘불충분하게 모방’할 뿐이다. 원래 모방하는 모든 음악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16장/p125)
* 세계의 본질을 건드리지 못하고 낮은 단계 즉, 현상의 구체적인 묘사로만 봉사하게 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