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 시즌 3과 비극의 탄생을 압축하는 글
1.
낭독 시즌 3에서는 새 멤버 두 분이 함께 하였다. 기존 멤버 한 분은 자체 방학을 연장하사, 한 분 빼고 두 분 더 받고 콜! 이렇게 시즌 3의 신호탄은 다시 켜졌다. 여섯 명이 하는 낭독은 좀 더 색다른 면이 있었다.
이를테면, 기존 멤버들의 낭독 목소리는 한결 안정되고 듣기에 좋다는 것이며, 새로운 두 분 중에서 한 분이 '바그너에게 바치는 서문'을 읽을 때에는 마치 연애편지를 읽어주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시 낭송을 하였기에 그렇다는 평이었다. 그리하여 니체 책도 두 분이 금방 적응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방학 기간에 낭독 목소리도 자체 성장을 한 느낌이었다.
2.
<수동성과 자기포기의 높이>
낭독은 각자의 목소리로 읽어 나가며 책의 두께를 함께 독파하는 일이다. 서로의 목소리가 공명되어 책의 내용들은 파편화되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 친다. 그것은 아직 어떤 개념이 아니다.
낭독은 두꺼운 책을 목소리로 쪼개는 작업이다. 그러니 여기서 목소리는 곡괭이일 수도 있다. 우리는 도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 낭독은 그 과정 자체에서 분명 어떤 보물을 캐는 시간이다.
니체는 수동성에 대해 말할 때, "자기 포기의 높이에 도달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비극의 탄생에서 핵심 키워드다.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자기 신체로 체감할 때, "비극"에 대하여 직관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 이것은 전달할 수 있는 것도, 가르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설명하자면, 수동성은, 자기가 사라지는 것이다. 자기 의식을 의식하지 않아야 한다. 유사한 형태로는 '담금질'이다. 쇠를 사용하려면 일단 용광로에 녹여야 한다. 쇠는 담금질을 통하여 무엇인가로 변신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러한 원리가 바로 "수동성"이라는 의미이고, 자기 포기의 높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니체가 그의 다른 책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본능을 극복하라'는 의미는, '형이상학적인 학문적 본능'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이 말을 풀어보면, 그것은 "자기를 포기하라"라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예술의 원리는 학문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는 것. 단지 그것에 대해 그동안 말하지 않았을 뿐이고, 유사한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을 뿐이고, 우리 삶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단지 말해지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
여컨대, 우리가 낭독을 함께 하며 알 수 있는 것은, 조화와 조율이다. 일정부분 자기를 포기하기에 함께 할 수 있는 것. 그 포기한 만큼 함께 어우러질 수 있고, 낭독회라는 공동체와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자기를 포기한다고 하여 무엇이 나빠지거나 더 불쾌해진 부분이 있었던가? 비극의 탄생 내용을 압축하라고 한다면, 바로 이러한 의미가 될 것이다. 환희를 느끼는 과정은 생각처럼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다. 반면 그 과정에는 일정한 시간 투여가 필요하다. 이러한 원리가 만유에 복제된 것이고 보면, 그리스적 비극의 원리는 모든 문화의 기원을 넘어서서 메커니즘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은 비극의 탄생을 압축해본 것이고, 그것에 대해 이해하거나 알려면, 정리와 실행은 더 필요할 것이다.
3.
<'거인적 충동'에 대하여>
개별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이 되려는 영웅적 충동이 생기면, 즉 개별화의 속박을 넘어서서 ‘하나의 세계 본질 자체’가 되려고 하면, 개별적인 것은, 사물 속에 감추어진 근원적 모순의 피해를 당하게 된다. 그리되면 그 존재는 ‘모독의 죄’를 짓고 고통 받게 된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가장 깊은 핵심을 이해한 사람은, 즉 “거인 되겠다”라고 노력하는 “개인”에게 주어진 “모독의 필연성”과 동시에 염세주의 사상의 ‘비아폴론적 성격(즉 디오니소스적 성격)’을 반드시 느낀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나친 아폴론적 경향으로 뻣뻣하고 차갑게 굳어서 죽음의 형태가 되면, 디오니소스적 물결이 필요해진다. 즉 ‘전복’이 일어난다. 갑자기 불어난 디오니소스의 밀물은 개체들이 만드는 조그만 물결을 등에 짊어진다. 모든 개체의 아틀라스가 되어 넓은 등에 개체들을 지고 더 높이, 더 멀리 가려는 듯한 이 “거인적 충동”은 프로메테우스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공통점이다. <9장, p82~83 인용 및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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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거인적 충동”이란 바로 거인과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거인의 등에 올라타고 같이 더 높이, 더 멀리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보통 ‘거인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아마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기초한 내용들일 것이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와 디오니소스적인 것에서 나타나는 “거인적 충동”의 의미는 개체들의 작은 물결을 등에 지고 더 높이 더 멀리 가려는 충동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거인적 충동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바로 이 부분을 간과하면 안 된다고 보인다. 거인과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별적인 것이 ‘하나의 세계 본질’ 자체가 되려는 것과 싸워야 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프로메테우스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거인 충동"의 본질에 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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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024/01/10 플래시몹 줌 낭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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