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취의 낭독

망각할 때는 망각해야 한다

by 아란도


낭독 시

읽을 때, 타인을 의식하지 말고 그 자신이 책 내용에 도취되어 읽어야 한다. 그래야 그 내용이 나중에 그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다.

듣기도 마찬가지다. 타인을 신경 쓰지 말고 듣기에만 집중한다.


이렇게 되려면, 분위기가 먼저 좋아야 한다. 서로에 대한 감정 상태가 잔잔해야 한다. 친하고 이해와 신뢰가 있으면 감정에 동요가 없다. 믿음이다. 너는 나를 믿고 나는 너를 믿는다는 그 전제하에 마음 편히 도취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또한 신체에 대한 안전도 마찬가지이다. 조용한 집에서 안전하게 도취에 드는 것이다. 최근에 낮에 윗집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자주 들렸다. 마치 화나서 걷는 것처럼 들렸다. 한 번 신경이 가니, 내 의식은 온통 그것을 신경 쓰고 있었고, 나는 피곤했다. 그러다 그것에 대해 글을 썼다. "의식은 머리 쪽에서 나는 소리와 또한 반복적인 것에 반응한다. 같은 형태와 같은 소리에 의식은 민감하다. 주의 상태인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나는 피곤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해야 하는데 천정에서 나는 소리에만 집중하게 되기 때문이다. 의식하지 않아야 편안한 상태이다." 이렇게 글을 쓰고 나니, 낭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되었다. 나 역시 낭독을 방해할 말은 더는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낭독은 낭독이고 이해는 이해고 공부는 공부고 글쓰기는 글쓰기다. 그것은 모두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독립적인 각각의 형식이다. 그리고 연결은 또는 충동의지는 어느 날 또는 그 언젠가 문득 일어나 그것들을 서로 연결시킨다. 그럴 때 무엇인가 변화하게 되고 변화했다는 자각을 갖게 된다. 그뿐이다. 하나에 하나이다. 그러니 의식하게 만드는 것들은 그 하나를 행할 때 망각해야 한다. 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낭독 훈련은 바로 이것이 주안점일 것이다. 이게 잘 되면 그다음은 저절로 된다.


낭독에 있어서 이것이 전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읽거나 또는 들을 때에 그 상태에 도취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도취가 그 자신에게 많은 영상을 띄우고 말을 거는 것이며, 그것에서 무엇인가가 피어나는 것이다.


분위기란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상태의 '질'을 감각하며 판단하는 우리의 느낌일 것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이것을 안다. 니체는 본능을 비하하는 소크라테스를 비극의 탄생에서 비판했다. 본능을 넘어설 게 아니라 그것은 맡겨야 하는 것이다. 본능을 배제시키고 그 바깥인 현실에서만 무엇인가를 하려고 한다면, 바로 그때 한나 아렌트가 주장한 '악의 평범성'에 먹히는 것일 거다. 반시대적 고찰을 읽으면서 비로소 의문이 나름대로 풀렸다. 무엇인가를 자꾸 배제하는 것에서 악은 자란다. 예술을 배제하고 본능을 배제하고, 결국 현실 안에서 적을 찾아낸다. 유대인 학살은 그렇게 일어났던 것. 언제나 둘이 공존해야 한다. 음양은 그래서 있는 것.


평소에 우리는 자기 케어하는데 알게 모르게 시간 소요가 많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어떤 하나를 하는 것도 그렇다. 사전에 자기 케어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자세 만들기이다. 이것이 그 자신의 이미지를 만든다. 이미지는 영상이다.


다른 모든 것들도 이와 유사한 방식이 적용될 것이다.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줌 낭독회가 문득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옮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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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낭독회 끝나고 눈 구경 가다. 자정에!

올해 여기서 눈이 이렇게 많이 올 때 눈을 맞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한테 눈구경하고 눈 맞으라고 이렇게 딱 타이밍 맞춰서 눈이 내리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지! "얘야, 창밖으로 보지만 말고 와서 눈 맞으렴~~" 이러는 것 같아서리~~ 눈이 날 유혹하는데 그럼 또 넘어가 드려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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