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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란도 Jul 15. 2024

니체 아침놀 제5권 423장에서 427장까지 옮겨 쓰기

낭독회에서 이 부분을 읽으면서 녹음 후 자막 추출해 봄.



423.

거대한 침묵 속에서 - 여기는 바다다. 여기서 우리는 도시를 잊을 수 있다. 바로 지금도 도시의 종은 아베마리아를 시끄럽게 울리고 있지만 그것은 낮과 밤의 십자로의 저 음침하고 어리석은 그러나 달콤한 소음이다. 그러나 단지 순간뿐이다! 지금은 모든 것이 침묵한다! 바다는 창백하게 빛을 발하며 누워 있다. 그것은 말할 수 없다. 하늘은 빨강 노랑 초록 등의 색으로 자신의 영원한 황혼녘에 무언극을 연출한다. 그것은 말할 수 없다.


가장 고독한 장소를 발견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바닷속으로 뛰어드는 작은 절벽과 바위들 모두 말할 수 없다. 돌발적으로 우리를 엄습하는 이러한 거대한 침묵은 아름답고 소름 끼치는 것이다. 이제 가슴은 충만하게 된다. 오, 이 무언의 아름다움의 위선이여! 그것은 만일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선하게 그리고 또 얼마든지 악하게 말할 수 있을 텐데! 그것의 묶인 혀와 얼굴에 나타난 번민하는 행복은 그대의 공감을 비웃기 위한 속임수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하라! 나는 그러한 힘들에게 비웃음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이여, 나는 그대가 침묵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대를 동정한다. 비록 그대의 혀를 제어하는 것이 그대의  악의에서 온 것일지라도. 아니, 더 나아가 나는 그대의 악의를 위해 그대를 동정한다! 아 점점 더 조용해진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 가슴은 부푼다.


그것은 새로운 진리 앞에서 경악을 금치 못한다. 내 가슴도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입이 이 아름다움 속으로 무엇인가를 외칠 때 내 가슴은 함께 비웃고 스스로 침묵의 달콤한 악의를 즐긴다. 말하는 것뿐 아니라 사유하는 것이 내게는 가증스러운 것이 된다. 나는 모든 말의 배후에서 오류와 상상, 광기가 웃는 것을 듣지 않는가? 나는 나의 동정을 조소해서는 안 되는가? 나의 조소를 조소해서는 안 되는가? 오, 바다여! 오, 저녁이여! 그대들은 나쁜 교사들이다! 그대들은 인간에게 인간이기를 그칠 것을 가르친다! 인간이 그 자신을 그대들에게 바쳐야 하는가?  인간이, 그대들 자신이 지금 그런 것처럼 창백하고 빛을 발하며 말이 없고 거대하며 자기 자신 위에서 쉬어야 하는가? 자기 자신을 넘어서 숭고해줘야 하는가?


______


424.

누구를 위해 진리는 존재하는가 -  지금까지 오류는 위안을 주는 힘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식된 진리에서 동일한 효과를 기대하며 그것을 이미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다.


진리가 바로 이것, 즉 위안을 주는 것을 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도대체 이것이 진리에 대한 이의 일까?  진리는 괴로워하고 위축되어 있고 병든 인간의 상태와 어떤 점에서 공통점을 갖기에 그들에게 유용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러나 어떤 식물이 병든 인간의 치유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식물의 진리에 대한 반증은 아니다. 그러나 예전에 인간은 자신을 자연의 목적이라고 너무나 확신했기 때문에 인간의 건강에 도움이 되거나 인간에게 유익하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인식을 통해 발견될 수 없다고 가정했으며, 나아가 별생각 없이 [인간의 건강에 도움이 되거나 인간에게 유익한 것] 이외의 것들은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고 가정했을 정도였다. 아마도 이 모든 것에서 다음과 같은 명제가 따라 나올 것이다.


즉 전체적인 것, 연관된 것으로서 진리는 오직 강력하면서도 순진하고 기쁘고 평화로운 혼들 (아리스토텔레스의 혼이 그랬던 것처럼)에만 존재한다.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혼들만이 진리를 추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성과 지성의 자유에 대해 긍지를 갖고 있을지라도 진리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치료제를 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학문에 대해 진정한 기쁨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그것의 냉정함과 메마름과 비인간성을 비난하는 것은 이러한 사정에 연유한다.


바로 이것이 건강한 자들의 유희에 대해 병든 자들이 내리는 판단이다. 그리스의 신들 역시 위로하는 법을 몰랐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인들 역시 모두 함께 병들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러한 신들이 몰락하게 된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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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

자신들을 추방된 신들로 여기는 것! -  인류는 자신들의 기원, 자신들의 독특함,  자신들의 사명 그리고 그리고 이러한 오류들의 근거해 제기된 요구들을 통해 자신을 고향이 왔고 거듭해서 '자신을 초극해 왔다'. 그러나 동일한 오류들을 통해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통 서로에 대한 박해, 헐뜯음, 오해 그리고 개개인이 느끼는 훨씬 더 많은 비참함이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도덕 때문에 괴로워하는 동물이 되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인간들이 그것으로 얻게 된 것은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근본적으로 너무 선하고 너무 중요한 존재이기에 단지 잠시 이 세상의 머물 뿐인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괴로워하는 오만한 자들'은 당분간 변함없이 인간들의 최고 유형으로서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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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

사상가들의 색맹 -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리스인들이 파란색과 녹색을 구분할 수 없는 색맹이고  파란색 대신에 짙은 갈색을, 녹색 대신에 노란색을 보았을 때 (그러니까 예를 들어 그들이 머리카락의 검은색과 수레국화의 색과 남쪽 바다의 색을 동일한 단어로 지칭하고 또한 가장 긴 짙은 녹색 식물의 색과 인간의 피부색, 꿀과 노란 수지의 색조차 동일한 단어로 지칭했을 때, 그리하여 그들의 가장 위대한 화가들조차 세계를 오직 검은색과 하얀색, 빨간색, 노란색만으로 그렸을 때 그리스인들은 얼마나 다르게 자연을 보았던가.  그들의 눈에 인간의 색은 자연에서도 우세를 점하고 자연이 말하자면 인류의 색의 에테르 안에서 부유했기 때문에 자연은 그들과 너무나 다르고 인간에게 너무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을 것임에 틀림없다. [다른 어떤 색보다 파란색과 녹색은 자연을 탈 인간화한다. ]


그리스인들을 특징짓는 저 유희하는 가벼움, 즉 자연 현상을 신들과 반신들,  즉 인간과 유사한 형태로 보는 것은 위와 같은 결함에서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추측에 대한 비유일 뿐이다. 모든 사상가는 자연 세계와 모든 사물을 존재하는 것보다 더 적은 수의 색깔로 그리며 또한 몇 가지 색을 서로 구분할 수 없는 색맹이다. 이것은 결함만이 아니다. 그들은 이러한 접근과 단순화를 통해 색들의 조화를 사물들 안으로 투입한다. 이러한 조화는 큰 매력을 가질 수 있으며 자연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다.


아마 이것을 통해 인류는 존재를 보는 데서 처음으로 즐거움을 배웠을 것이다. 즉 이러한 존재는 우선 하나 또는 두 가지 색조로 그리고 이를 통해 조화된 형태로 인류에게 제시되었다.  인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색조로 이행하기 전에 이러한 소수의 색들을 연습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부분적인 색맹의 상태에서 보다 구별하는 상태로 나아간다.


그러나 이 경우 그들은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언제나 이전에 누렸던 약간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상실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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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

과학의 미화 - 로코코 정원 예술이, "자연은 추하고 야만적이며 지루한 것이다. 자! 우리는 그것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다"라는 감정에서 발생한 것처럼 "과학은 추하고 메마르고 위로를 주지 않으며 어렵고 지루하다. 자! 우리로 하여금 과학을 아름답게 만들게 하라"라는 감정에서 항상 철학이라 불리는 것이 거듭해서 발생한다. 철학은 모든 예술과 시가 의도하는 것을 의도하는 바 무엇보다도 '즐겁게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철학은 자신이 계승한 긍지에 따라 더욱 숭고하고 고상한 방식으로 선별된 정신들 앞에서 그것을 수행하고자 한다. 이러한 정신들을 위해  정원 예술을 제공하는 것,  그것의 주요 매력은 저 '보다 통속적인 정원 예술'과 마찬가지로 눈을 기만하는 것이다 [비유컨대 사원, 원경, 동굴, 미로, 폭포를 통해 과학을 솎아내고 모든 종류의 진기하고 돌발적인 조명과 함께 [과학]을 제시하고, 사람들이 그 [과학] 안을 '마치 야생의 자연 속처럼' 그러나 아무런 피로나 권태도 없이 배회할 수 있도록 많은 모호함 불합리 몽상을 거기에 섞는 것, 이와 같은 것들은 결코 작은 야심이 아니다.


이러한 야심을 가진 사람은 이전에 인간들에게 최고의 여흥을 제공했던 종교를 이러한 방식으로 불 필요하게 만드는 것 역시 꿈꾼다 이것은 현재 진행되고 있으며 언젠가는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지금 이미 철학에 대한 반대의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는데 이 소리는 이렇게 외치고 있다. 과학으로 되돌아가라 자연과 과학의 자연스러움으로 아마 이와 함께 마치 우리가 루소 이후 높은 산맥과 사막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처럼 과학의 '야생적이고 추한' 부분에서 가장 강력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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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권 앞 도입부 한 단락씩 낭독하여 영상으로 제작하였는데, 브런치에는 영상 자체가 올라가지 않은 관계로 글만 올립니다.


#플래시몹_철학_낭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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