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철학자들에게 선악의 저편에 서고 ㅡ 도덕판단이라는 환상을 뒤로 넘겨버려야 한다고 요구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이 요구는 나에 의해 최초로 정식화된 통찰 : 도덕적 사실이란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통찰에서 비롯된다. 도덕판단은 존재하지도 않는 실재성을 믿는다는 점에서 종교적 판단과 공통된다. 도덕은 단지 특정 현상들에 대한 해석이고,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릇된 해석에 불과하다. 도덕판단은 종교적 판단처럼 실재라는 개념도 갖고 있지 않고, 실재와 가상을 구별조차 하지 않는 무지의 단계에 속한다. 그래서 이 단계에서의 '진리'란 것은 순전히 오늘날 '공상들'이라 불리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이런 한에서 도덕판단을 결코 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
이런 도덕판단은 증후학으로서는 대단히 가치 있다 : 그것은 적어도 자기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해서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여러 문화나 내면세계의 가장 귀중한 실상을 알려준다.
도덕은 단지 기호언어에 불과하며, 증후학일뿐이다 : 도덕에게서 무엇인가를 얻고자 한다면 그것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를 이미 알아야 한다.
그 첫 번째의 예 :
어느 시대든 사람들은 인간을 '개선시키기'를 원했다. 짐승 같은 인간을 길들이는 것뿐 아니라, 특정한 인간 종류의 사육도 '개선'이라 불리어왔다.
야수와 싸울 때 야수를 약하게 만드는 유일한 수단은 야수를 병들게 만들어버리는 것일 수 있다 : 교회는 인간을 망쳐버렸고, 약화시켰다. 하지만 교회는 인간을 '개선'시켰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의 예 :
특정한 계급과 종을 사육하는 경우
<마누 법전>에 나오는 인도 도덕. 성직자 계급, 전사 계급, 상인 및 농민 계급, 수드라인 노예 계급.
이 경우에는 야수와의 싸움이 아니라, 부드럽고 이성적인 인간의 반대 개념인 사육되지 않은 인간, 잡탕인간, 찬달라와의 싸움이다. 그런데 체제 역시 찬달라를 병들게 만드는 것을 위험하지 않게, 약하게 만드는 유일한 수단으로 삼고 있었다.
그것은 '대다수'와의 싸움이었다. 마누 자신은 이렇게 말한다. "찬달라는 간통, 근친상간, 범죄의 열매이다(이것은 사육 개념의 필연적 귀결이다).
반대로 오른손을 사용하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것은 단지 덕 있는 자들, 즉 계급에 속한 사람들만의 권한이다."
이러한 규정에서 우리는 정말 순수하고, 정말 근원적인 아리안적 후머니티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순수혈통이라는 개념이 무해한 개념과는 정반대라는 점을 배운다.
한편 어떤 민족에게서 이런 '휴머니티'에 대한 증오, 찬달라의 증오가 영구화되었는지, 이 증오가 어디서 종교가 되고, 어디서 천재가 되었는지가 명백해진다. 이런 관점에서 복음서는 일류급 문서이다. 그리스도교는 사육과 계급과 특권의 도덕 각각에 대한 반대 운동을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전형적인 반아리안적 종교다. 그리스도교는 모든 아리안적 가치들의 전도이자, 찬달라적 가치들의 승리이며, 가난한 자와 천한 자들에게 설교된 복음이고, 짓밟힌 자, 불우한 자, 실패자, 처우를 잘 받지 못하는 자들이 모두 '계급'에 맞서 벌이는 총체적 봉기이다. 영구적인 찬달라의 복수가 사랑의 종교로서.
사유의 도덕과 길들임의 도덕은 그것들이 자신을 관철시키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서로 완벽하게 어울린다.
우리가 최고 명제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도덕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정반대이니 것으로 무조건 향하는 의지를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가장 오랫동안 몰두해 온 엄청나고도 섬뜩한 문제, '개선시키는 자'의 심리학에 관한 것이다.
비소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겸손한 사실, 소위 말하는 종교를 빙자한 성스러운 거짓말이 내게 이 문제에 접근하는 첫 도입구를 제공했다.
이것이 인류를 '개선시켰던' 모든 철학자와 신학자의 유전질인 것이다. 마누나 플라톤, 공자나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교사들도 한 번도 자기네들이니 거짓을 말할 권리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권리와는 완전히 다른 권리들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식화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지금까지 인류를 도덕적으로 만들어야만 했던 수단은 모두 근본적으로는 비도덕적이었다.(*도덕이라는 미명하에 오히려 비도덕적인 규정들을 관철시켜 왔으며 유지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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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_몽고반점_나무불꽃
감기처럼 채식주의자를 다시(이번에는 끝까지...) 읽었다. 표면에 발 걸려 넘어서지 못하는 소설 속의 세계를 관통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일상의 표면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리라.
이 소설이 나온 지 17년째 되는 해이다. 책 표지 너머에서 초판 1쇄 발행 2007년 10월 30일, 초판 38쇄 2016년 7월 22일을 본다.
그러니까 나는 2016년에 이 책을 구입했던 것이다. 문득 나는 작가 한강이 이 소설을 쓸 때 무얼 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7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 소설을 이해하게 된 것일까. 이 시간의 축적에서 보자면 나도 한강도 우리도 모두가 다 잘 견뎌온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나의 소설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은 나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의미일까. 이 소설을 읽으며 왠지 안에서 솟아나는 흐느낌을 느꼈다. 그래서 감기처럼 그냥 울었다. 내가 울고 싶었는지 조차 모를 어떤 의지로부터 비롯된 눈물이었다. 그냥 흘러나온 눈물, 많은 이유들이 요동치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두서없는 파동일 뿐이었고 나는 담담했다. 이유나 핑계나 그런 것은 없었다.
노벨상의 힘이 채식주의자로 이끈 것일까. 아니면 <비극>의 힘이 채식주의자를 노벨상으로 이끈 것일까. 어떤 정화의 힘, 한강은 그렇게 정화시키고 있었다. 작은 점 하나가 우리 사회에 던져졌다.
빅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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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문장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이 의미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어떤 분노와 설득도 그녀를 움직일 수 없었다. 내 손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내 손으로 사람을 죽인 느낌, 아니면 누군가 나를 살해한 느낌, 겪어보지 않았다면 결코 느끼지 못할...... 단호하고, 환멸스러운, 덜 식은 미지근한.
그때마다 나를 사로잡는 것은 기이하고도 불길한 예감이었다. 예감이란 것을 갖고 살아본 적 없는 둔감한 성격의 나였지만, 그 안방의 어둠과 정적은 오싹했다.
풍파에 깎인 것 같은 그 표정이 나는 꺼림칙하고 싫었다.
고개를 들어봐. 나는 소리 내지 않은 채, 이를 악물고 속으로 말했다. 고개를 들고 웃어. 그 대답이 농담이라는 걸 보여봐. 그러나 그녀는 웃지 않았다.
나는 내가 잃고 살아왔을지 모를 것들을 아쉬워했다.
아내가 무슨 말이든 꺼내놓을 것이라고 나는 기대했다. 그러나 그녀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상에 내려놓는 것으로, 그 모든 얼굴들이 쏘아 보내는 무언의, 하나의 메시지에 대한 답을 대신했다.
" 네 꼴을 봐라, 지금 네가 고기를 안 먹으면, 세상사람들이 널 죄다 잡아먹는 거다. 거울 좀 봐라, 네 얼굴이 어떤가 보란 말이다."
이런 일은 나에게 일어나선 안되었다.
그러나 내가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는 잠에서 깨어난 순간 잊고 말았다.
아내는 분수대 옆 벤치에 앉아 있었다. 환자복 상의를 벗어 무릎에 올려놓은 채, 앙상한 쇄골과 여윈 젖가슴, 연갈색 유두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마치 타인인 듯, 구경꾼들 중의 한 사람인 듯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나는 저 여자를 모른다,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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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앞에서 그는 두려웠고, 흥분했으며, 압도되었다. 일 년여 전부터 그를 사로잡았던 이미지가 전혀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 ㅡ 안무가 ㅡ 에게서 흘러나온 것을 그는 믿을 수 없었다.
있었다면 다시 환멸을 맛보았다는 것, 결국은 자신이 그것을 실현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는 것이었다. 그가 꿈꾸는 것을, 대체 어떻게 다른 누군가가 대신 끄집어내 줄 수 있겠는가.
한순간 이 이미지는 그에게로 왔다. 일 년여이니 고갈상태가 어떻게든 끝나리라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던,
그것은 그에게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때까지 그는 자신이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작품으로 화를 겪을 수도 있으리라는 상상은 해본 적이 있었지만,
자신에게 무한정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실감한 적이 없었다.
오래 억눌러온 고함 같은 것이 기침처럼 터져 나올 것 같다고 그는 느꼈다.
무엇이 부족하게 느껴지는지 딱히 짚어내지 못한 채 그는 결혼을 결심했다.
부조리극의 한 장면처럼 믿기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문득 구역질이 났는데, 그 이미지들에 대한 미움과 환멸과 고통을 느꼈던, 동시에 그 감정들의 밑바닥을 직시해 내기 위해 밤낮으로 씨름했던 작업의 순간들이 일종의 폭력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더 이상 그 현실의 이미지들을 견딜 수 없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을 다룰 수 있었을 때 그는 충분히 그것들을 미워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혹은 충분히 그것들로부터 위협당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삶을 담은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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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혼자여 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한 시선으로,
생시에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혐오감 때문에 그녀는 흠칫 눈을 떴다가 다시 잠들었다.
이제 괜찮아. 그녀는 낮게 중얼거렸는데, 그것이 아이를 달래려는 것이었는지, 자신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그때 영혜의 입가에 어린 조용한 미소는 어쩐지 낯설어 보였다. 마치, 그녀가 영혜를 낯설게 느끼는 것만큼이나 영혜 역시 그녀를 낯설게 느끼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녀가 간절히 쉬게 해주고 싶었던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가 정말 사랑한 것은 그가 찍은 이미지들이거나 그가 찍을 이미지들뿐이었을 것이다.
신기하게도 그 우묵하고 비좁은 공간이야말로 서른 두 평의 아파트 안에서 가장 아늑하게 느껴지는 장소라는 사실을 그녀는 깨닫는다.
막을 수 없었을까. (...) 그렇게 모든 것이 ㅡ 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의 삶이 모래산처럼 허물어져버린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말하다 말고 숨을 멈춘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의심이 고개를 쳐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잘못 생각한 것 아닐까. 처음부터 영혜는 바로 그것, 죽음을 원해온 것 아닐까.
그 저녁, 영혜의 말대로 그들이 영영 집을 떠났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까.
되짚어 헤아리는 일은 부질없었을뿐더러 가능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
몸에서 끝없이 새어 나오는 선혈이 그것을 증거 한다고 믿었을 때 그녀는 이미 깨달았었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 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
지금 그녀가 남모르게 겪고 있는 고통과 불면을 영혜는 오래전에, 보통의 사람들보다 빠른 속력으로 통과해, 거기서 더 앞으로 나아간 걸까. 그러던 어느 찰나 일상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끈을 놓아버린 걸까.
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웃음의 끝에 그녀는 생각한다.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은 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 때로는 소리 내어 웃기까지 한다.
그것은 결코 따뜻한 말이 아니었다. 위안을 주며 그녀를 일으키는 말도 아니었다. 오히려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이었다.
..... 어쩌면 꿈인지 몰라.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
그녀의 눈길은 어둡고 끈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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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며...
'무균실 같은 현실'이라는 해설자의 말은 아마도 도덕이 지배하는 현실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희생제의의 종교적'이라는 문구는 자매들이 흘린 피처럼, 어떤 대가일 것이다. 아마도 생을 사는 모든 존재들은 생의 제물로 바쳐진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삶은 희생을 담보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각자만이 안다. 시간 속에 내던져진 존재들은 그 자신을 제물 삼아 그 자신을 먹으며 발 딛고 나아간다. 앎이란 것의 처절함을 딛고서 걸어간다.
소설과 시 그 자체의 '형식'을 차용한다는 것과 그것에 대한 이해는 세계의 막을 분리하는 것을 감각하는 일인지도. 오늘 어떤 뉴스 기사를 읽으며 드는 생각이었다. 어떤 형식을 활용하는 일은 그래서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의 세계에서 흩어져 있는 파편들을 해설자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다시 여미듯이 이내 독자를 바깥으로 이끄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