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놀_167장_무조건적인_충성 (2) "내 생각" 머릿속이 이끄는 대로 썼다. 나중에 수정 보완 필요하면 할 거다욤! 글 하나 옮기고 쓰면 날 새는데, 나는 아침형 인간과는 거리가 먼 듯. 썼다는 데 의의를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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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언급한 세 인물의 경우는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다루고 있다고 보인다. 한 사람 안에서도 충돌은 있다. 그런데 각각의 인물들에 대한 숭배자들의 지지는 열렬하게 추종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반면에 인물에 대한 추종은 비판적 추종이었다고 니체는 말한다.
너무나 좋아하고 아끼고 숭배하지만 동시에 비판적 수용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여기에는 역설이 작용하고 있다. 이 세 인물은 바로 그것을 그 자신들의 추종자들로부터 획득했다는 사실로부터 니체는 독일에서 어떤 희망을 얼핏 본듯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본 듯했다. 그것은 더 먼 미래로부터 오는 빛이었을 것이다.
카르노의 "인물이 아니라 사태다"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사람들은 보통 인물에 집중한다. 그런데 니체는 카르노의 말을 빌려, 한 인물은 곧 사건 그 자체이며 그 사건의 발생 자체에서 진행되는 양상 전체를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에게 충성하면 그것은 '우스꽝스러운 어떤 것'이 된다. 이 현상에서 벗어나는 일은 요즘 시대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누군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의 주변은 모두 사람에게 충성하고 있으니 아이러니이다.
쇼펜하우어도 바그너도 비스마르크도 모두 하나의 사건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사건을 더 키웠다. 갈 데까지 끝까지 밀어붙여서 가 본 것이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은 기묘하게 사람들 안에서 공존하고 있다. 비판적 수용을 사람들이 배운 것일 것이다. 니체의 계몽주의적 관점은 사람들이 어떤 것을 자기 안에 수용하되 차이적 공존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점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하나의 것을 볼 때 그것은 사건이 된다. 이를테면 내가 차를 우리며 차를 마시는 일은 하나의 사건이지 단순한 취미인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지속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발생 시점이라는 시발점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차를 마시는 것은 하나의 사태로 보아야 한다. 그렇기에 차가 사물로서의 차인 것만은 아닌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또는 우리가 책을 읽는다면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지 단순한 친목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속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책을 읽는 행위는 사태로 접근해야 한다. '되어감'이라는 행위가 담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여 다회를 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사람 또는 인물 때문에 모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회라는 '사태'가 주인이다. 다회는 천 년에 이어진행위의 지속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쇼펜하우어를 받아들이고 숭배한다면 그것은 어떤 철학을 받아들인 것이다. 비판적 수용은 아마도 인물과 지속을 구분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비스마르크를 사람들이 추종할 때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사태 그 자체를 지지하는 것이다. 거기에 그 자신들이 설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존재적 위치를 획득하는 지속의 시간에서 사람들은 어떤 하나의 시발점을 찍기 때문일 것이며, 그러한 특이점들이 또 다른 사건을 잉태하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자에게는 철학 그 자체만의 어떤 스탠스가 있고 음악가에게는 음악 그 자체만의 어떤 스탠스가 있고 정치가에게는 정치 그 자체만의 어떤 스탠스가 있다. 사람들 안에서는 오묘하게 그것을 공존시키는 힘이 있다. 그것을 회복할 때 그 사람 안에서 모순은 공존할 수 있는 것일지도. 그 모순의 밸런스를 잘 조율하는 것이 니체의 자유주의자들! 인지도. 니체는 다른 장에서 노동에 대해 말하고 있다. 노동자에게만 휴가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의 휴가는 인간에게 불명예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휴식은 특정하게 휴가 받아서 한가함으로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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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달 내내 같은 페이지로 펼쳐져서 그 자리에서 화석이 될 것만 같은 아침놀, 그 페이지를 다시 읽어 보고 드는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