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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란도 Nov 11. 2024

노벨상은 문학계의 오징어 게임이 아닐까!

이런 생각 어때! 갈 데까지 가 보는 생각



 <노벨상은 문학계의 오징어 게임이 아닐까! 갈 데까지 한번 가 보는 생각(싸이 노래 생각난다! 일단 각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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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액수의 상금을 걸어야 수준이 높아지고, 인생을 걸만 해지는 것이 아닐까. 우리나라 사람도 돈을 많이 벌어서, 그 돈을 고결한 이상주의에 상금으로 스폰하는 누군가가 나타나면 좋겠다.


     (그게 나이면 좋겠지만, 나는 과학자도 아니고 사업가도 아니고, 평범한 글쟁이일 뿐이니, 쩝... 할 따름이지만).


그래도 꿈은 꾸어볼 수 있지 않은가? 이런 말은 해볼 수 있지 않은가? 노벨상과 같은 고결한 이상주의 상을 만드는 것에 도전해 보라고 말은 할 수 있지 않은가? 복권을 발행하여 기금을 만들듯이, 문학상 또는 다른 업종의 상 까지를 포함 하여, 기금 조성을 할 수는 있지 않을까?


문제는 상업화이다. 복권 발행은 어쨌든 상업성이고 사행성으로 보는 시각이 크기에 거부반응은 있을 수 있다. 노벨상과 이것을 비교하는 것에서부터 불경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노벨상은 거대한 부를 가졌던 한 개인이 기부한 재산으로 이미 기금이 마련되어 있고 그 기금을 운용하여 얻은 수익으로 상금을 지불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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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발점의 차이는 있겠지만, 복권 발행은 역시 일부는 복권 구매자들에게 당첨금으로 지불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중의 일부는 상금으로 분할되어도 되지 않겠는가? 당첨금은 매달 혹은 매주 일 수도 있겠지만, 상금으로 나가는 돈은 일 년에 한 번이면 된다. 그만큼 기금이 축적될 수 있다. 하지만 이 기금은 상금만 주는 것이 아니다. 이 상을 줄 재단을 관리할 인적 구성이나 심사위원 선정이나(노벨상을 주는 한림원은 심사위원이 종신제이다. 누군가 자기 수명대로 살다 죽은 후에 새로운 멤버를 선임한다) 등등에 있어서 비용은 생각보다 클 것이다. 그리고 이 상을 노벨상처럼 세계적인 상으로 성장시키려면, 그만큼의 어떤 공신력도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러자면 기금 조성 시간 역시 축적되어야 할 것이다.


현시대에서, 노벨 같은 사람이 다시 나온다는 보장이 없는 시대에서, 상업적인 성격의 '복권으로 상금 기금 조성'이라는 플랜만 한 것이 있기나 할까?


프리미엄 리그에서,  영국 'EPL' , 스페인 '라리가' , 독일 '분데스리가' , 이탈리아 '세리에' 이런 세계 프로 축구 리그는 일단 선수들에게 돈을 많이 준다. 돈을 많이 주니까 세계 4대 리그가 된 것이다. 이 중에서 스페인 '라리가', 영국 'EPL' 은 부자 팀이 많아서 실력 있는 선수를 많이 확보한다. 그러므로 수준 높은 경기를 펼친다. 당연히 사람들은 이 프로 리그에 열광한다.

일반적으로 노벨상과 맨부커상을 제외하면 모든 다른 상들이 아마추어적으로 비치는 이유는(나만 그렇게 보는지도, 하긴 다른 상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그럴 수 있다), 상금이 작고 게다가 국소적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노벨상과 맨부커상을 제외하면 모든 다른 상들이 아마추어적으로 비치는 이유는(나만 그렇게 보는지도, 하긴 다른 상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그럴 수 있다), 상금이 작고 국소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많은 상들이 있지만, 타이틀이나 명예가 아니라면 상금을 타려고 인생을 걸만한 도전을 하기는 쉽지 않다.


물론 작가가 프로축구 선수처럼 바로 눈에 보이는 실전 경기에서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기에, 차이는 있다.


하지만, 작가의 작품이 시대의 방향 가리키는 작품이 되려면 '마지막 차이'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그 자신의 끝없는 실험 정신과 소재의 정밀함 그리고 문체의 훈련 그리고 인간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것에 있다. 그러자면 일단 작가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은 먼저 죽어야 한다. 그리고 작가 자신도 죽음에의 고통과 함께 간다. 그렇게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전 저작 전체가 오직 '하나'이다. 하나로 행세하는 그 유사적 원리가 작품에 있어야 한다. 즉 전 작품이 한 줄에 꿰어져야 한다.


낱낱의 개별적인 단편으로는 쉽사리 들어오지 않은 것들이 한 권의 책으로는 잡히듯이. 또한 한 권의 책으로는 잡히지 않는 것이 전체 저작으로는 잡히는 어떤 것들이 있듯이, 그것들만의 결이 있는 것이다. 그 결은 인생을 걸고 만들고 지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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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자신이 글을 쓸 때, 벨벳을 어루만지는 느낌으로 글을 쓴다고 말했다(물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푸코의 글에서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일까? 푸코는 그 자신의 결을 다듬어 가는 것이다. 그 자신의 전체를 하나의 방향으로 끌고 가는 중인 것이다. 그는 그렇게 벨벳을 쓰다듬는 손가락의 감촉을 타고 글의 결을 따라가는 것이다. 나는 푸코 자신이 말한 '벨벳을 쓰다듬는 글쓰기'를 이렇게 이해한다.


물론 푸코가 노벨상을 타기 위해, 노벨상 수상 작가들이 노벨상을 타기 위해 자기 인생을 건 것은 아니다. 노벨상은 결과다.


수상 작가들은 그 자신의 인생의 결을 결코 낮추지 않았다. 그 수준을 끌어올리는 자기 한계의 넘어섬도 멈추지 않았다. 여기에 그들의 '고결한 이상'이 있는 것이다. 노벨상의 이상주의와 맞닿아서 드디어 종소리가 울려 퍼진 것이다. 고결함은 그렇게 정점에서 만나고 비로소 소리를 낸다.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이다.


그 자신이 끝까지 가 보는  그 길에 기다리고 있는 어떤 고결함이, 이미 그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면 당신은 어떤 기분이겠는가? 그 환희를 어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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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금은 부수적이지만, 그 상금을 유지하고 관리하여 주인(임자)에게 되돌려주는 그런 체계,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기적이 아니겠는가? '소공녀 세라'가 문득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때는 서구 교육에 의하여 어린아이가 꿈을 백인처럼 꾸는 것을 비웃었던 시대도 있었다. 꿈은 자기 현실의 실제적 반영인데, 꿈을 어떻게 꾸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백인이 꿈을 황인종처럼 꾸거나 또는 흑인종처럼 꾸면 안 된다는 법칙은 잘못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와 반대도 마찬가지다. 검은 것은 죄라는 편견.


세계의 동화는 모두 뒤섞여 있다. 이것들의 원작을 굳이 찾자면 모두 그리스적이거나 모두 인도적이다.


사유의 세계는 서구적이거나 동양적이거나 구별은 없다. 단지 섞어지지 않아서 몰랐거나 접하지 않았던 것일 뿐. 그런데 요즘의 세상이 어디 그런가! 보려고 마음만 먹으면 그것을 자기에게로 가져올 수 있다.


사유는 그 자신을 일깨우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 자신의 당목을 쳐서 종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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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이 12월에 개봉한다고 한다. 전작에서 사람들이 느낀 충격은 엄청난 액수의 상금으로 인생이 바뀌는 것이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나는 그때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였다. 여기에는 어떤 절망과 환희가 동시에 공존했었다. 어쨌든 그것은 어떤 쾌감으로 나타났다.


나는 한강의 노벨상 수상도 어떤 쾌감으로 다가왔다. 만약 상금이 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그 쾌감은 존재했을까? 그랬을 것이다. 우리 역사와 시대가 만들어 낸 고통을 쾌감으로 보상받는 그 아찔한 순간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 그렇기에 우리는 오히려 역사를 더 깊이 직면하게 되고, 인간을 보게 된다. 그리고 다만 상금은 더 큰 시너지 효과를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로 그렇게 큰돈을 벌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지만, 고결한 이상주의 작품에 상을 주라고 유언한 그의 정신은 분명, 이 세상에 대한 어떤 선물을 남긴 것과 같다. 산타클로스 같은 동화적인 마음이 없었다면, 노벨은 그 이상적인 쾌감을 우리에게 선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찌꺼기가 저 깊숙한 곳에서 씻겨져 내려가는 느낌을 우리는 받지 못했을 것이다. 언제나 문제는 산적해 있지만, 우리는 간간이 이런 쾌감을 통하여 힘을 얻는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삶의 기적일 것이다.


<오징어 게임 2>는 이제 막이 오르면 시청한 후에나 알 수 있을 것이고, 쾌감을 줄지 안 줄지는 알 수 없다.

<지옥 2>는 스마트폰으로 봤더니 아직 잘 모르겠다. TV로 다시 봐야 알 것 같다. 넓은 화면이 주는 공간감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쓰고 다른 글을 쓰면서, <지옥 2>에 대한 어떤 생각이 스쳤다. 그러니 생각은 그 글에도 이 글에도 중복되는 셈이다. 그러나 두 글에 모두 적용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 정진수의 기억에는 오직 괴물과 공포밖에 없었다. 현재에서 시간이 휠 때(그가 부활했을 때의 그 현재는 정진수의 현재의 휘어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공포였고, 균열에서 튀어나온 것은 괴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괴물에게 삼켜졌다. 공포와 괴물이란 세계에 갇힌 것이다. "

지금 나에게 <지옥 2>의 그 느낌은 이렇게 다가온다.


<지옥 2>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공포"의 힘일 것이다. 아마도 <지옥 2>는 모든 사람들이 만들어 낸 공포의 크기일 수도 있다. 고결한 이상주의일지라도 공포가 없을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 사회 안에 공포가 없을 수는 없다. 문학과 예술은 때로 그 공포를 정면으로 건드려서 출렁이게 한다. 그러면 우리는 한 번씩 휘청인다. 그리고 시간이 휘고 우리는 어떤 경험을 한다. 이런 시간이 휘는 경험을 어떤 시대의 조류는 강제적으로 감행하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 힘이 나이브한 삶을 흔들어 버리는 것이다. 마치 오징어 게임처럼.


문득 이런 생각이 찾아오길래 글로 옮겨 보았다. 생각은 해볼 수 있는 것이니까. 또 작가의 깊이도 있는 것이고 독자의 깊이도 있는 것이다. 어떤 방식의 생산이든지 그 자신의 결대로 가는 그 힘이 꺾이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 않을까. 방향전환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 전환은 결코 꺾이는 것이 아니다. 활대처럼 오히려 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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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베른하르드 노벨(Alfred Bernhard Nobel, 1833/10/02 ~ 1896/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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