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빛의 그녀를 분홍의 원이 감싸고 그 분홍의 원은 사각의 초록이 감싸고 있으며 그 사각의 초록은 다시 아이보리가 배경이 되어준다. 한 컷의 이미지는 무한으로 휘몰아 들어간다. 그녀의 머리는 하얀 구이다. 마치 AI 같기도 하다. 어쩌면 AI적 기억은 무의식에 가까울 것이다. 그토록 많은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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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네 단락의 투명한 챕터에 대하여 ㅡ
1부 숨, 2부 색, 3부 글, 4부 별로 구성된 챕터는 작가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모두 '사랑'의 다른 이름들이라고 한다.
나는 유년과 청년과 장년과 노년으로 다가온다.
이 시간 안에서의 지속 동안에 '숨'은 생명의 기원과 그리고 유년 그리고 어머니 다시 목숨 그 자체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색'은 눈부신 것인가? 그런데 그때는 온통 괴로운 것만을 생각한다. 그 많은 고민은 다 어디서 왔을까.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그 자신을 밀어내는 작업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사라지지 않고서는 '글'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투명해진 눈빛으로 무엇을 볼 것인가? 투명은 늘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이른 새벽의 영롱한 이슬처럼. 그것은 때로는 '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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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약돌 같은 83편의 단편들에 대하여 ㅡ
오래 쓸리고 깎여 매끈해진 반짝이는 색돌 같은 단편들로 구성되었다.
이 글들은 페이스북에 써놓은 글을 모아서 간추린 후, 작가의 말에 의하면 전면적으로 새로 썼다고 한다.
림태주 작가는 그 자신의 글들이 '시적 산문'이라고 당당하게 말하였다.
그리고 작가는 "한강 작가도 나도 똑같이 시적산문을 쓰는 데 한강은 노벨상 수상 작가다"라고 조크를 던졌다.
좌증 까르르르~~~
각 단편들은 문단을 나누어 읽기 쉽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 문단 나눔이 시처럼 다가온다.
비어 있는 행간을 더 떼어 놓는다는 것은 그만큼 호흡을 느리게 한다.
그 사이는 어떤 분절이어서 기억 이미지들이 새어 나오는 곳이기도 하다.
술술 읽기 쉽다고 하여 문장이 가볍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더 또박또박 읽어야 한다. 이것은 정교하게 목재를 짜맞춤한 한옥 같은 글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문장을 수려하게 가꾼다.
그런데 문장이 아름다운 이유는 미사여구가 많아서가 아니다.
어떤 절제가 있었기 때문이며, 그 문장이 너무 무겁지 않도록 앞 뒤로 책임을 분산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사유가 자리 잡도록 여백의 언어를 배치한다.
아래는 작가의 시적산문이다.
산책에는 동력 수단의 빠름이 가질 수 없는 시선이 있다. 인간의 걸음걸이는 지문처럼 각자의 개체성을 품고 있다. 직립 보행의 반복성과 육체성을 나는 사랑한다. 산책의 시야는 흐릿한 것을 명쾌하게 보여 주는 일종의 광학렌즈다. 인생이 모호해서 그런지 나는 자연의 투명성을 좋아한다. -유물론적 산책- p45
같은 세월을 산 사람들끼리만 이해하고 보듬을 수 있는 내밀한 인생사가 있는 법이다. 나도 언젠가는 낡아져서 교체될 것이다. 누군가 나를 밀어 내고 내 존재를 대신할 것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세월을 대하는 목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어떤 삶도 함부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존엄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쓸모없다고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p52
나는 내가 고른 언어다. 다양하게 말하면 다채로운 내가 되고, 다층적으로 말하면 은유하는 내가 된다. 표현한다는 것은 나의 어떤 단면을 보여 줄 것인가를 선택하는 행위다. 선택의 폭이 곧 내 세계의 지분이고, 나의 세계는 표현된 범위로 제한된다. 삶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서 ‘말하는’ 만큼이 삶이다. 생각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라서 생각한 만큼이 삶이다. -어떤 색을 좋아하세요- p117
색의 감각은 말의 감각이다. 색의 감각, 그 다양한 감정과 사유가 인간인 것과 인간 아닌 것을 구분한다. 말이 평범성의 가면을 쓰고 있듯이 색도 보편성 뒤에 악마성을 감추고 있다. 사유하며 감각하지 않으면 인식은 사각지대에 놓이고 시선은 착시에 빠지기 쉽다.나의 감각이 어디서 왔는지 근거를 묻고 이유를 추궁해야 한다. 관성적이고 습관적일수록 감각마저도 나의 고유한 감각이 아닐 수 있다. 다루지 않으면 길들게 된다. -색의 감각- p142
사랑은 복잡한 것도 어려운 것도 지루한 것도 싫어한다. 최대한 단순해지려고 한다. 생명의 한계성을 극복하려고 직진한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러브 맵을 가동하고 언어 이전의 직관을 사용한다. 믿을만한, 따뜻한, 공정한 같은 가치를 사랑은 본능적으로 기대한다. 이것은 보살핌과 아낌을 갈구하는 동물적 본성에 가깝다. 사랑하지 못해 죽는 경우는 있어도, 사랑은 살리는 일이라서 죽이는 사랑은 없다. -단순한 사랑- p158
쓰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쓰면서부터 조금씩 문체의 색깔이 드러났고, 삶의 감각이 예민해졌다. 나는 서사보다 운문이 좋았다. 한 줄의 문장에 하나의 인생을 담을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믿으며 써왔다. 나에게 글쓰기란 암호 같은 것이어서 생의 비밀을 푸는 데 유용했다. 글쓰기 덕분에 나는 타인의 사람을 살기도 하고 세상을 정의해 보기도 하고 이파리 하나 빗방울 하나가 되어 보기도 한다. -쓰지 않으면- p195
글을 쓰고 싶거든 항상 메모지를 곁에 두라고, 허허로운 말이다. 실상 못 쓰는 사람은 메모지가 없어서 못 쓰는 게 아니라 생각이 곁에 없어서 못 쓰는 것이다. 메모지가 아니라 곁에 둬야 할 건 생각이란 녀석이다. 그 생각 중의 하나가 그리움이다. 그리운 생각이 없는 상태를 나는 외로움이라고 부른다. 그리우면 편지라도 쓰고 전화라도 하고 소설책이라도 읽지만, 외로우면 술 마시고 싸돌아다니고 방구석이 엉망진창이 된다.
그리움은 수증기 같아서 마음을 촉촉하게 만들지만, 외로움은 갈증 같아서 삶의 수분을 빼앗아 말라 죽게 만든다. 글쓰기를 하려는 사람에게 나는 가장 먼저 편지쓰기를 권한다. 편지는 타인과 나를 동시에 관찰하는 생각 훈련법이다. 편지를 쓰는 일만큼 좋은 글쓰기 훈련은 없다. 편지는 그리움의 시학이고 인간관계학이고 문학의 정점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운 생각을 곁에 둘 것- p258
당신이 좋다면 나도 좋은 것이고, 당신이 싫다면 나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느낌이 다르고 해석이 다를 뿐, 잘못된 삶이 있겠는가. 그래도 살아가야 하고 그래서 사랑할 수밖에 없다. 이 모든 인연과 인과가 오늘 당신과 내가 사랑한 흔적들이다. -에필로그/ 모든 의미에는 이유가 없다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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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림태주의 <오늘 사랑한 것> 북 콘서트에서 ㅡ
수요일 저녁 7시 30분보다 앞질러 가기 위하여 집에서 서둘러 출발하였다. 버스를 탔다. 나보다 먼저 버스가 나를 실지도 않고 떠나려 한다. 뛰었다. 코트 안에 스웨터를 입었더니 더웠다. 차 안에서 책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생각보다 그렇게 멋지게 나오지는 않았다. 지하철을 탔다. 퇴근 시간이라 지하철 안은 상당히 꽉 끼었다. 이렇게 사람과 사람의 밀착을 신체로 지각하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매일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이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어쩐지 이 모든 풍경들이 나와는 멀게만 느껴졌다.
안국역에서 창덕궁 쪽으로 나온 바람에 잠시 방향감각이 오류를 일으켰다. 지나는 행인 1에 길을 물었다.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담장 따라 걸으면서 이쯤에서 나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이었다. 앞서서 걷는 어떤 행인 2에 길을 다시 물었다. "실례합니다.노무현 시민센터는 어느 쪽이예요?" , "아, 저도 거기 갑니다. 북콘서트에 가세요?", "네, 저도 북콘서트 갑니다. 림태주님...", "아, 저도 림태주 작가님 북콘서트에 갑니다" 어쩌다보니 ‘노무현시민센터’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만 북콘서트장에 도착한 후, 작가에게서 사인을 받다 보니 헤어져 버렸다. 사인을 받은 후 찾아보려고 두리번거렸으나 누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노무현시민센터 전경
영빈님을 만났다. 처음에는 서로 잠깐 멈칫하였으나 이내 알아보았다. 오랜만에 만났고 또 북콘서트 장에서 만나니 반가웠다. 둘이서 콘서트 장 안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콘서트 장에서 두비였던 분들 일어나 보라고 하여서 나는 엉거주춤 반은 일어나고 반은 앉고 그러는 사이, 영빈님은 가만히 앉아 있으시길래, "왜 안 일어나세요?" , "나는 행성B 였는데?" 아, 웃음이 나왔다. 나는 영빈님도 두비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둘 다 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두비나 행성B를 다른 클럽이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다만 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목적에 맞게 분화시켰던 것뿐이라고 생각했었다.
북 콘서트가 시작되었다.
림태주 작가의 북 콘서트는 10년 만에 열렸다. 그러고 보면 십 년이 지난 것이다. 나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십 년을 나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다가 타인의 십 년을 바라보는 것은 색다른 체험이었다. 그 십 년이라는 시간 동안에 그 많은 사람들 각자마다 그 자신의 시간을 살았을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그 자신이 아닌 이상 아무도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 저마다의 자기 시간과 삶, 그 삶을 살아내야 하는 고단함, 그리고 어떤 평화를 자기 안에 수렴시키기까지는 숱한 밤들을 헤는 시간이 함께 하였을 것이다. 십 년이라는 무게가 있었다.
시간의 무거움을 건드리면 그만한 대가가 있다. 어떤 정체됨을 겪는 것이다. 북콘에서 나는 모든 것이 부옇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나의 시각과는 상관없이 조명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 시각과도 조명과도 상관없는 '희붐'함이 있었다. 그렇게 하나의 시간은 지나가고 있었다. 하나의 시간이 갈무리되어 과거가 된 것이다.
시간이 부옇게 보일 때 예전에는 당황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변화 속으로 이행하는 어떤 전환의 본모습이란 것을 나는 안다. 나에게 이 장소는 현재가 아니었다. 하나의 막 속에 갇히듯 어떤 시공의 사이에 있는 느낌이었다. 시공의 사이에 있으면 현재의 시간은 작동하지 않는다.
그곳에서 폰이라고 터질리가 없다. 폰이 갑자기 먹통 된 이유는 어떤 시간의 막이 작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것이다. 아련한 것들이 하나의 이미지로 남았다는 것에 대하여. 지난 십 년의 시간은 그렇게 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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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리뷰인가 책 홍보인가 ㅡ
욕망을 가진 책들은 독자를 압박한다.
그 압박에 의해 자기에게로 온 책은 그 자신을 압박한다.
스며들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이해라는 견고한 방해벽에 부딪힌다.
그때 자기 안에 균열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스며들려면 먼저 균열을 만들어야 한다.
책은 내가 공기 안에서 숨을 쉬듯이, 그 대기 안에 있는 수분을 피부가 흡수하여 바깥과 안의 수분균형을 유지하여 감기를 막는 것처럼, 책은 그렇게 스며들지 않는다.
새로운 환경이 필요하다.
읽기라는 환경,
그 환경조성에 의하여 자기 내부에 균열은 만들어진다.
책은 앉아서 누워서 배깔고 읽지만, 나의 온 신체가 합세하여 읽는다.
림태주 작가는 북 콘서트에서, 글쓰기가 취미가 아니고 작가를 지향하는 것이라면, 읽기의 강도가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읽는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물을 보는 깊이도 달라져야 한다.
작가에 대한 우선적 이해는 바로 이러한 사물을 보는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해는 메커니즘적으로 일어난다.
어떤 메커니즘을 이행하면 서로 굳이 많은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자기 삶을 누구나 살아내야 한다. 견뎌야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은 체득해간다.
자기 환경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타자의 환경은 그 자신의 환경이 아니다.
그러므로 물리적인 그 장벽은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환경에 놓여 있다.
그런데 환경의 장벽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알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은 장벽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것을 또 무시한다.
그러면 서로 간의 고통이 생긴다.
아무리 말로 설명해보았자 그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이러면 어떤 구조가 자기 안에 그려지게 된다, 슬픔이 방울방울 매달린 구조가 있다. 어떤 대립에 대한 감각, 그것이 자기 자신을 보게 한다. 균열과 결여, 사람에게서 그것이 보일 때 우리는 깊게 들어간 것이지 않을까. 글을 쓰면 그것이 보인다. 스스로 균열을 내고, 이내 결여를 마주하게 된다. 그러므로 상대나 대상에게서도 그 부분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의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지 않을까? 가장 민감한 것을 마주하고 서 있는 것이다.
예민함은 그것을 자기 신체로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그 예민함마저 자기 안으로 수렴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에세이가 그런 힘의 발현이라면, 읽어도 좋을 것이다.
색의 감각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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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에세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ㅡ
에세이 리뷰를 너무 진지하게 가면 서로가 부담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진지해진다.
그 자신의 삶을 써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가볍게 훌쩍훌쩍 넘어가겠는가.
에세이 리뷰는 쉬울 것 같지만 쉽지 않다.
자신의 인생을 던져 놓고서 가볍게 책홍보만을 원한다면 그것은 필시 모순일 것이다.
삶은 철학이다.
철학은 곧 에세이와 같다. 시와 철학과 에세이는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에세이 쓰기는 그 자신의 전부를 들고 쓰는 것이리라.
에세이는 그러므로 삶의 한 조각이다.
그만큼 고통에 대한 사색과 사유와 관조와 자신의 전이해에 대한 철학적인 어떤 것이 담기게 된다.
다만 학문적 탐구 방식의 자연철학과는 달리, 삶의 철학은 오히려 더 형이상학적이다.
왜냐하면 삶은 바로 '시'이기 때문이다.
나는 형이상학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직관이나 또는 문득 어떤 틈을 통하여 보지 못하였던 것을 볼 때가 많다.
그런데 그것은 실제의 세계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것들은 모두 시나 에세이나 철학에 깃들게 된다.
그러니 형이상학은 글로 기록될 방법밖에는 없다.
그래서 삶은 형이하학적인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가 형이상학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어떤 높이를 추구함이 있고 되어감이 있기 때문이다.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은 동시에 중첩되어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아무래도 시가 시적산문으로 변용 되면, 더 많은 문자를 사용하기 때문에 더 주체의 생각이 개입하게 된다. 더 많은 것을 허용하는 것과 그럼에도 간결해야 하는 것의 균형감이 에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에세이에는 삶의 지혜와 생활의 지혜를 주고자 하는 느낌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그 자신이 연마한 언어로 농축한 진핵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리라.
여기에 어떤 한 대목의 의문을 파고 들어가 확대하면 시가 되고, 더 깊이 파고들어 논증하면 철학이 되고 증명하면 학문이 되는 것이지 않을까.
개인의 문제에서 철학은 태두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철학이 개별적이라면 학문은 집단적일 것이다.
그렇기에 금욕적인 삶은 자연스레 추구되는 것일 것이다.
이를테면 작가의 작업실은 금욕적인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무엇을 금욕하는가? 시간과 나태함에 대한 금욕일 것이다.
림태주 작가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정오 무렵까지 글을 쓰거나, 또는 체력이 안 될 때는 오전 10시까지 글을 쓴다고 한다.
작가의 삶의 루틴에서 보자면, 그것은 생업이므로 생활방식에서 나태함을 밀어내려는 무수한 시도였을 것이다.
철학성은 개인의 화두일 것이다.
개인은 사회의 문제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이미 그 자신이 거기에 몸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를테면, 작가는 "지구 환경 문제가 그렇게 자신들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말한다. 강화도는 2030년이면 해안가가 침수된다고 한다. 그리고 농업의 새로운 시도인 퍼머컬처에도 특별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이 창백한 푸른 별에 대한 애정이 깊은 만큼, 지구환경을 걱정한다. 이러한 개인의 의식은 집단의 담론으로 흘러 들어올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삶의 여정이 문득문득 드러나노록 하고야 마는 편린들을 만나는 에세이.
나는 에세이의 이중성을 본다.
쉽고도 어렵다는 것, 지식과 지혜의 그 사이에서 노닌다는 것, 산책하는 그 순간이 머릿속은 가장 바쁘다는 것, 비록 사람 그 스스로 그것을 느끼지 않을지라도.
정리를 해내고 있다는 것에서 산책과 에세이는 ‘걷는 사람’의 이미지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쉬운데 쉽사리 나에게 오지 않는 것.
아마도 거기에는 시간이 서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편 단편으로 읽지만, 그 안에는 하나의 사건의 지속이 함께 한다.
작가의 전체의 시간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쉽사리 오지 않는 것이다.
에세이는 젊어서가 아니라 나중에 늙어서 써야 하는 이유도 그것일 것이다.
그러나 또 너무 늙어서는 말고.
그렇지만 이미 늙어가고 있는 시대에는, 사람들 사이에 에세이는 이미 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에세이는 모든 글의 기준이 되고 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광범위한 에세이를 쓰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에세이를 쓰는 것에 젊고 늙음의 기준이 어디 있겠는지......
삶은 본래적으로 허우적 대는 곳이 아닌가.
그 늪처럼 허우적 거리다가 뭍으로 나왔을 때의 그 완전한 쾌감을 맛보는 것도 삶일 것이다.
한 세계를 열어낸다는 것은 그만큼의 세계 확장이며 다채로움이다.
주어의 고독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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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허세와 허영심 – 허세 독서에 대하여 ㅡ
요즘 시대는 오버핏이 유행이다. 아마도 옷 역시 오버핏은 허세적일 수도 있다.
허세하면 보통 남성적인 뉘앙스를 풍긴다고 나는 늘 생각했다. 그래서 허세에는 여성적인 말이라고 생각되는 ‘멋부림’이라는 말이 연상된다.
박농민은 나에게 날씨 추우니 따뜻하게 입고 가라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이 고마운 마음씀이라는 것을 알지만, 왠지 이렇게 반박하고 싶었었다(속으로는 ‘냅둬유’로 단순하게 끝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굳이 니체의 말을 떠올렸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 이런 잠언을 남겼다.
“만족하면 감기조차도 걸리지 않는다. 잘 차려입었다고 생각하는 여자가 감기 걸리던가? - 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경우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니체가 “이런 말 했어” 라고 말했다.
나는 니체의 이 말이 여자가 멋을 부리면 추위를 타지 않는다는 말로 이해했다. 일종의 멋은 여자의 허세일 수도 있다. 생각해 보면 한창 멋 부릴 나이에 엄마가 나에게 “멋부리다 얼어 죽는다”라고 하면, 귓등으로도 그 말을 안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멋부리고 차려 입으면 그것에 신경쓰느라 추운 것도 몰라” 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그의 말을 들었다. 스웨터를 입었고 더워 죽는 줄 알았다. 요즘 내 몸 안에는 자가발전기가 있다는 것을 깜빡했다.
북토크에서 림태주 작가는 독자의 질문을 모아서 답변을 하는 시간에 이렇게 말했다.
“요즘 허세독서가 유행인데, 허세독서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자존감을 올리는 방법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책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것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책 판매에도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하다 보면 언젠가는 읽게 됩니다. 다만 이쁜 책이 꼭 내용까지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좌중, 까르르르~~~
나는 그때 생각했다. 조금 두꺼운 책은 양장본으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물론 글도 썼다. 게다가 양장본에 책이 이쁘기까지 하면 가지고 다니기도 좋고 사진 찍기에도 좋다. 아무리 책이 지적실용성이라고 하더라도, 책이 너무 안 이쁘면 읽을 맛도 덜 나는 법이지 않을까. 책의 본질은 허세가 아닌가!
요즘 시대를 대체로 천민자본주의 시대로 말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히려 더 자기만족을 추구한다. 이왕이면 다홍치마가 좋은 것이다. 이러니 또 <오늘 사랑한 것> 책표지의 연분홍이 생각난다(이 분홍의 색감을 나는 ‘인디 핑크’라고 생각한다). 이쁜 책이 나는 더 좋다고 생각한다. 책이 이쁘다고 내용까지 좋으란 법은 없다는 말에 책임지려고 림태주 작가는 이쁜 에세이 집에 그토록 담백하면서도 깊은 이야기들을 새겼나 보다.
다시 생각해보면, 나도 허세독서에 일가견이 있었다고 보인다. 만휴에서 일부러 서가를 만들어 내가 가지고 있는 책과 구입한 책을 전시하였다. 읽은 책과 안 읽은 책을 동시에 진열하였다.
그 당시에 나는 혼자서 불빛을 낮추고 서가 앞에서 차를 마시는 것이 좋았다. 책이 나에게 건네는 그 무언의 말들이 좋았다. 그 충일감은 내가 책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 후로 이 느낌을 저녁 무렵 텃밭을 산책할 때에도 받곤 했다.
허세는 어쩌면 미적탐구일 수도 있다. 나는 철학책을 그렇게 전시하면서 읽기 시작했고, 어느새 허세철학독서는 나에게 깊게 들어와 있다고 여긴다. 미적탐구와 지적탐구는 어쩐지 닮아있다. 게다가 삶의 탐구 역시 그렇다.
더구나 SNS 시대에 허세는 자존이며 삶이다. 사진이나 영상으로 대체되는 시대에서는 그것을 또 하나의 감성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것을 키울 일이다. 깊게 보면 오히려 그것이 더 제대로 된 방향일 수도 있다.
_______에필로그______
나의 리뷰에 대하여 ㅡ
사람들은 간소한 리뷰를 좋아하는 것 같고...? 나는 철학적 리뷰를 선호한다. 대책 없이 길어진다는 의미다. 그냥 말을 그렇게 하는 것이다.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고 무슨 편지도 아닌데 말이다.
내 나름대로는 다 날리고 엑기스만 남겼다고 자평한다.
아마도 이것은 허세리뷰가 아닐까 싶다.
그래도 길다고 하면,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다. 1부 2부로 나누기도 멋쩍고 하니까.
에세이는 한 번 세상에 나오면 두고두고 팔리는 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힘겨움이 찾아오면 그때 에세이를 읽어도 좋을 것이다.
에세이를 즐거울 때 읽을 수 있을까?
즐거우면 놀아야 하는데......
<오늘 사랑한 것> 책 한 권을 다 읽고 썼더니, 오히려 나는 어떤 정체를 겪었다. 그리고 과연 내가 리뷰를 쓸 수 있을까? 하는 불안도 있었다. 책의 전체가 쉽사리 다가오지 않았고, 시간을 더 필요로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뭉기적 대니 또 쓰기가 싫어졌다. 괜히 미루고 싶은 것이다.
어제는 리뷰를 쓰다 말고, 동태 찌개를 끓이고, 배추전을 부쳤다. 공부하라고 하면 괜히 청소하는 그런 증상인 것일까. 어쨌든 맛나게 먹었고 힘이 났는지, 나는 리뷰를 마무리 하고 있다. 책을 꼭 끝까지 다 읽고 리뷰를 쓰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지금 살짝 흔들린다.
그렇다면 시간을 더 투여해야 하는 것인데, 무한정 쓸 수도 없다. 다만 방법은 자기 삶을 살아가면서 채워지고 다가오는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시간을 쏟는 것에 대해서 나는 내 시간을 끔찍이도 아낀다. 그렇다면 나를 막아서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바로 여기서 끝장을 봐야 한다. 리뷰를 쓰면서, 책을 읽으며 만들어진 그 균열 속으로 시간의 어떤 층위에 책이 스며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원했던 것은 아마도 편안함이었지 싶다. 맑고 투명한 가을 새벽의 서리와 같은 고적한 편안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