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낭독을 '90회'로 종결하였다. 2년 1개월이 걸렸다. 1년은 매주 이틀간, 두 시간씩, 5명이서 낭독하였고, 또 1년은 매주 하루 두 시간씩 6명이서 읽었다.
니체 전집에서, 우리가 읽기로 한 총 8권을 낭독으로 완독하였다.
2권(비극의 탄생), 7권(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8권(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 10권(아침놀), 12권(즐거운 학문, 메시나에서의 전원시, 유고), 13권(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4권(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15권(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 송가, 니체 대 바그너)
우리는 전집의 순서와는 상관없이 읽었다. 첫 번째로 14권을 먼저 읽었고, 15권을 마지막으로 읽었다.
다 읽고 난 지금 심정은 15권을 마지막에 읽은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15권은 니체가 1888년에 그 자신의 삶과 저작을 총정리한 입장에서 쓴 단행본들을 모아 놓은 책이기 때문이다.
15권을 읽을 때 나는 말할 수 없는 우울감에 휩싸였다. 니체에게서 어떤 집요한 의무감을 보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한 인간에게 주어진 인생의 무게를 느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행간에 스며서 아직도 생생한 니체의 그때의 기분이 전달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한 8권을 읽고 난 나의 지침 때문일 수도 있었다. 나의 생의 리비도가 모두 흩어지는 것 같은 엄청난 허무감, 그것은 텅 빔 그 자체였다. 내가 무엇을 읽었는지 모를 정도로 모두 증발되는 경험은 '죽음'과 흡사하다고 생각되었다. 어쩌면 니체는 쓰러지기 직전에 그런 무의 상태를 경험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마지막까지 엄청난 열정으로 모든 것을 불태운 니체가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삶을 사랑했다. 그는 현실주의자였으며, 실존주의자였다.
생성하는 모든 순간과 생의 충만이 약동하는 지금을 몸으로 느끼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의 글은 현실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는 다른 곳이 아닌 '이곳'의 현실 안에서 세상과 세계를 보았다.
_______
[차라투스트라는, 오직 무엇만이 그에게 '인간'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규정하고 있다. 인간이 사랑의 대상도 아니고, 결코 동정의 대상도 아니라고 하면서.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에 대한 엄청난 구토를 극복해 버렸다.
그에게 인간은 조각가를 필요로 하는 지형이고, 소재이며, 보기 흉한 돌이다.
더 이상 - 원하지 - 않기. 더 이상 - 평가하지 - 않기. 더 이상 - 창조하지 - 않기 : 오오, 이 크나큰 피로가 나로부터는 항상 먼 곳에 머물러 있기를!
인식에서도 나는 내 의지의 생식과 생성의 욕구만을 느낀다 ; 그리고 만일 내 인식에 순수함이 깃들어 있다면, 그것은 생식의지가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의지가 나를 신과 신들에게서 등을 돌리라고 유혹한다 : 신들이 ㅡ 거기 있다면, 창조할 게 뭐 있겠는가?
그러나 내 불타는 창조의지는 끊임없이 새롭게 나를 사람들로 내몬다 : 이렇게 망치를 돌로 내모는 것이다.
아아, 너희 인간들이여, 돌 속에 하나의 형상이, 형상 중의 형상이 잠자고 있다! 아아, 그 형상이 가장 단단하고도 가장 보기 흉한 돌 속에 갇혀 잠을 자야만 한다니!
이제 내 망치가 이 형상을 가두고 있는 감옥에 대해 잔인한 광포를 보여준다. 돌에서 파편이 흩날린다 : 내가 상관할 일인가!
나는 이 형상을 완성하기를 원한다. 내게 어떤 그림자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ㅡ 만물 가운데 가장 조용하고 가장 경쾌한 것이 나를 찾아온 것이다!
위버멘쉬의 아름다움이 그림자로서 나를 찾아온 것이다 : 내게 ㅡ 신들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나는 마지막 관점을 강조한다 : 밑줄 그은 구절이 그 단초를 제공한다. 디오니소스적인 과제를 위해서는 망치의 단단함과 파괴 시의 기쁨 자체가 그 결정적인 전제 조건이 된다.
"단단해질지어다!"라는 명령,
모든 창조자는 단단하다는 더할 바 없이 심층적인 확실성이 디오니소스적인 본성의 가장 특징적인 표시인 것이다.
_이 사람을 보라 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8장, p436~437]
_____
2. <시대의 벽을 깨고 인간을 조각하는 차라투스트라의 망치/ 니체와 반휴머니즘의 세계>
인간을 조각하는 차라투스트라의 망치, 망치가 말한다. 피로로부터 멀리 떨어지라고. 니체의 무수한 말들과 마지막 말들에서 나는 어떤 압박을 느꼈나 보다.
시대의 벽을 깨는 니체와 시대에 갇힌 듯 몸부림치지 못하고 굳어가는 듯한 이 시대의 풍경에서, 문득 니체의 망치는 갑자기 유리벽을 향하여 날아간다.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냈다. 휴머니즘과 반휴머니즘 사이에 갇힌 이 시대에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세계의 무수한 영화와 드라마는 포스트휴머니즘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시간상의 진행이 대한민국에서는 다소 늦은 감이 있었다. 이 현상은 빛의 집회현장과 바로 융합하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히어로물 시리즈에서 지속적으로 나치를 되살려 악으로 규정하는 이것에 대하여, 예전에는 진부하다! 그렇게도 소재가 없을까?라고 생각했었다. 이번 내란 사태를 겪는 와중에 생각해 보니, 나치를 악으로 규정하여 세계를 이원적인 두 개의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하는 이 훈련을 멈추지 말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 훈련이 창작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세계를 파괴하고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는 훈련이다.
동양에서도 일본제국 군국주의는 끝없는 악으로 규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 군부 독재와 검찰독재는 끝없는 악으로 규정되어 창작 안에서 다시 되돌아올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기억에 각인되어 잊지 않고 상황에 따라 대처가 가능하다.
세상에 공부 아닌 것이 없고 훈련 아닌 것이 없고 기억 아닌 것이 없다. 이 모든 인간 창작 활동은 바로 기억하는 방법이다.
몸에 기억한 것을 다시 전승시키고 그 전승된 것을 다시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놓는다. 사람의 신체기억과 상상의 세계 기억으로 기억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려고 하여도 이미 벌여 놓은 것이 많으면 수습이 안 되어서 쉽게 결정을 하지 못한다. 이를테면 '하야'를 하고 싶어도, 그 이전에 벌여 놓은 구린 것이 많아서 감당이 안 되어 방법은 계엄 밖에 없었듯이. 서로 엮인 것들이 서로를 안 놓아주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못 놓고. 어쩔 수 없이 그곳은 유리벽이 된다. 그리고 '망치'가 어디선가 솟아 나와 그 유리벽을 부숴버리는 것이다. 파괴의 미학은 이렇게 적용되어야 하리라.
______
[실재성 앞에서 도피하는 '이상주의자들'의 비겁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진리를 말하고 활을 잘 쏘는 것. 이것이 페르시아적 덕이다.
진실성에서 나오는 도덕의 자기 극복, 도덕주의자들의 자기의 대립물로의 자기 극복 ㅡ 내 안으로의 자기 극복 ㅡ 차라투스트라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바이다. p459
다른 어느 곳이 아니라 바로 이 대목을 차라투스트라가 원하는 것을 파악하기 위한 단초로 삼아야 한다 :
그가 구상하는 인간 유형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생각한다 :
그 인간은 그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며 ㅡ, 그런 현실에서 소외되지도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다. 그는 그 현실 자체이며, 현실의 끔찍하고도 의심스러운 모든 것을 자기 내부에도 가지고 있다. 이렇게 해서야 인간은 위대해질 수 있는 것이다. p462~463
- 이 사람을 보라에서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에서]
_____
3. <니체와 나와의 사이에서...>
2년의 시간이 지금 이렇게 지나고 있다. 엄청난 시간이었다. 평균적으로 3달에 한 권을 읽었다. 읽는 동안 나는 책 속으로의 접속을 시도하며 이 시간을 지나왔다. 지금은 접속을 해제하는 중이다. 니체를 내 안에서 소화하고자 하는 애쓰던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어떤 허무함도 있다. 다만 내가 무겁다고 느꼈던 것은 이러하다.
니체가 명징하게 말한 것들과 니체가 모호하게 말한 것들의 사이에서 나는 길을 잃지 않으려고 버텼다. 그리고 마지막 무렵에 니체가 가장 그 자신의 극점에 있을 때, 나에게도 어떤 임무가 주어졌다. 나는 니체의 말을 과연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에 대해 나의 언어로 말할 수 있을까? 하는 고뇌적 자괴감이 있었다. 열망과 소화는 다른 것이니까. 소화, 그것은 내가 먹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떤 구토를 느꼈다. 어떤 이질감에 나는 몸서리쳤다. <이 사람을 보라>를 읽으며 나는 어떤 고비에 직면했던 것일까. '파괴'에 대한 윤곽 잡히지 않는 어떤 이질감이었을 것이다. 이 말이 나의 신체에 도달하여 감각되기까지의 시간 동안은 방황이었다. 어렴풋한 윤곽은 다른 방식으로 나에게 왔다.
니체 이후 철학자들이 연구해 놓은 것은 모두 니체가 말한 것과 모호하게 말한 것에 대한 주석적인 해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니체의 특정 문장과 연결되는 느낌에서도 그렇지만, 니체 저작들의 전체적인 느낌의 흐름에서도 그렇게 전해온다.
니체의 말은 어느 면에서는 대략적으로 말하고 있고 그 후 철학자들은 하나의 주제로서 구체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니체가 후대에게 연구하라고 모호하게 말한 것들, 바로 그러한 것들이 니체가 말하지 않고(모호하게 건너뛰거나 주석 없이 다음 문장으로 바로 이어가 버리거나, 아마도 그것은 생각의 서술이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 지점이 자신의 심정으로 직진하는 이유가 된다. 내가 심정적으로 말한 것들에 대해 너희는 빈공백을 채워 넣어야 한다라는 바로 그러한 주문이었다.
과연 그러했다. 니체 이후의 현대철학을 읽은 후 니체를 다시 읽으면 그 안의 빈공백에 맞춰지는 퍼즐 조각들. 그리고 다시 니체 이전의 고전을 읽으면 비로소 니체는 완성된다. 니체는 그 자신의 생각 안에서 역사와 현실이라는 두 개의 세계를 놓고서, 현실을 살았다. 니체에게 역사적 장소는 현실 아닌 곳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세계'라고 부른다. 우리 안의 세계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세계 창조 방식에서 우리 안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는 이유이다.
______
4. <니체를 낭독하는 우리의 시간 - 낭독회>
때로는 다섯이서 때로는 여섯이서 그때마다의 분위기를 만들어 가며, 컨디션 조절을 하며 우리는 니체를 읽었다. 같이 모여서 책을 낭독으로 읽을 때는 서로의 기분이나 컨디션 상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우리는 줌에서 만나서 서로의 상태와 안색을 보며 점검한다. 줌 상태에서 볼륨이나 마이크 상태를 체크하듯이 말이다. 그렇게 서로의 상태를 어느정도 평평하게 만든 후 낭독으로 들어간다. 공기와 분위기가 균일해지면 목소리에도 윤기가 돈다. 마음도 윤택해진다. 깊은 밤의 진공을 깨뜨리는 말이 목소리를 타고 공간에 울리면, 시공에 균열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 시공이 깨지며 다시 말을 흡수한다. 빈공간이 마치 목소리를 먹고 있는 것 같았다. 때로는 말들이 귓속을 넘어서지 못하고 말들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졸음이 오는 순간들은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귓전에서 톡툭 떨어지는 말들을 느끼면서도 그 말을 붙잡을 의지는 약해지는 것이다. 그러면 또 접속이 나와 희미해지는 것이다.
매번 낭독 때마다 컨디션은 다르다. 단지 매번 그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낭독 하는 날은 미리 책을 살펴보거나 공지 작성해야 하는 날은 지난 번 읽은 부분을 뒤적인다. 그리고 30분 전에 차를 우린다. 차를 워머에 올려 놓는다. 폰 거치대와 스탠드를 다시 자리 잡는다. 링크에 접속한 후, 기다린다. 크게 심호흡을 한다. 니체낭독 2년이 넘어도, 낭독은 쉽사리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대체로 평온하였다. 그 이유는 줌이라는 거리감과 정해진 시간 접속의 한정이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신경을 차단하기 때문이었다. 정해진 시간과 나름의 규칙이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었다. 별일 없으면 항상 이 과정이 반복 되었다.
같이 수정하고 같이 약속을 집행한다. 별것없을 것 같은 작은 모임일지라도 오히려 더 섬세하다. 바로바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될 수 있으면 책에 집중하도록 하였다. 그것만이 모여있는 이유이기 때문이었다. 그 나머지는 시간에 따른 낭독 반복이 만들어내는 차이에 의해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았다. 반복이 우리에게 그런 힘을 갖도록 하였다. 그 무엇인가의 거리를 조절할 수 있는 힘은 스스로 알아가는 것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스스로 아는 것, 그것이 '철학의 힘' 아닐까! 줌의 세계에서 현실의 일상으로 스며든 것들.
_______
5. <플래시몹 낭독회, 니체 낭독 90회 그랜드 슬램 달성 >
90번의 반복 끝에 니체 낭독이 마무리 되었다. 원래는 100회로 니체낭독을 마무리 하고 싶었지만, 90회에서 갈무리되었다. 아마도 니체 책의 내용은 각자 마다 다르게 그 자신에게 전달되었겠지만, 우리가 반복한 90번의 이 행위는, 매번 다른 강도로 우리 자신에게 다가왔고, 그것은 매번 새로운 사건이었을 것이다. 우리 안, 우리 신체 사이사이에 기억된 시간이다. 아마도 이것은 기억일 것이다.
철학책을 같이 읽는 일은 책과 저자와 정보와 그리고 이 책을 통하여 또 다른 책으로 번지는 사건에 있을 것이다. 책은 평소에 구입해 놓아야 그 자신이 읽고 싶을 때 읽을 수 있다. 예기치 않은 만남은 항상 불현듯 찾아오니까 말이다.
니체 전집 중에서 8권을 혼자가 아닌 여럿이서 호흡을 맞춘 낭독회를 통해서 '90회'를 읽은 일은 전무후무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플래시몹 낭독회, 니체 낭독 90회 그랜드 슬램 달성>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내 카톡에도, 페북 담벼락에도 그렇게 써놓을 것이라고 '플래시몹 낭독회'에서도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정말 기쁘다. 기쁨과 슬픔은 항상 공존한다. 몸의 허물어짐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인가를 얻는다. 그만큼 자기 시간과 자기 에너지를 투여했기 때문이다. 행위의 순수한 기쁨과 순수한 분노가 있었다. 순수한 기쁨은 원인이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데, 순수한 분노는 원인이 궁금하다. 그동안의 경험상으로 보자면, 아마도 이것은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을 쓰면 기쁨으로 바뀔 긴장상태의 연속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다.
추상적인 것은 항상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다. 추상성을 벗어났을 때만이 명징하게 다가오는 앎이 있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고 또 글을 쓴다. 침잠과 적요 속에서 얻어 낸 수확물은 은근하게 때로는 강렬한 환희로 번진다. 니체는 이제 내 안에서 침잠할 것이다. 그리고 나와 섞어질 것이다. 잠재태로 시간을 같이 보낼 것이다. 어떤 모습일지 지금은 알 수 없다.
_____
#플래시몹_낭독회(다경,미류,영배,연수,현영,아란도) 감사해요. <낭독 시즌 6>은 몽테뉴의 <에세>로 이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