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1>을 낭독으로 읽기 시작했다. 옮긴이의 글이 의미심장한 부분이 많아서 내 나름대로 재구성해서 옮겨쓰기 해보는 중이다.
몽테뉴의 글쓰기 방식을 읽으면서, 지난 이십여 년 간 쓴 글, 내 글쓰기 방식도 <에세>의 형태가 아닐까 싶었다. 또한 책리뷰나 삶의 리뷰 역시 <에세>의 형태가 아닐까 싶다. 몽테뉴는 본인의 글을 망상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이 글은 비평이며 리뷰적이다. 즉 철학적이다. 근대를 연 최초의 사람이었다. 몽테뉴는.
나는 나의 글쓰기가 도대체 어디에 속할까? 에 대해 고민했었다. 그렇다고 에세이로 집어넣기는 뭔가 아니었다. 그래도 에세이로 분류할 수밖에 없었다. 분류 목록이 그렇게 밖에 안 되어 있으니까. 시로 분류하자니, 이것은 시입니다로 강변하고 있는 현상이 발생한다. 물론 시는 시다.
해서 내가 <에세>가 반가운 이유는 하나의 장르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굳이 큰 주제로 묶지 않아도 그 자신의 글의 분류가 <에세>적이라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과연 <에세>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에 대한 설렘을 안고 1장과 2장을 읽으니, 이 방식은 완전 리뷰적이었다. 몽테뉴는 16세기 사람이지만 이미 21세기적이었다. 그러니 니체의 마음에 쏙 드는 책이자 사람이었던 것이다.
몽테뉴는 사건 기술이 아니라 생각 기술적으로 글을 쓴다. 그러니 그는 체험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그 자신 안에 드는 의문이나 마음을 사로잡는 주제가 떠오르면' 쓴다. 이 '괴물 같은 글쓰기'를 통해 그 또한 시시각각 변화하는 한 존재, 미셸 드 몽테뉴의 움직이는 입체적인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다.
나 역시 체험을 구체적으로 쓰기보다는 나의 의문과 나를 사로잡는 주제에 대한 느낌을 쓴다. 또한 몽테뉴는 <에세>를 읽으려면 고전에 대한 사전 지식이 필요할 것이라고 짐작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 "나는 이 장식들이 나를 뒤덮고 나를 가리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 의도와는 반대이니, 나는 오직 나의 것만을, 그리고 원래 내 것인 것만을 보여 주기를 원한다."
몽테뉴가 본문 중에 인용한 말 이외에 인용의 출처를 거의 밝히지 않는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인용들에서 어떤 것을 훔쳐다 변장, 변형시켜 쓸 수 있으니 나는 아주 편하다. 원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이해하지 못한 탓이라는 평을 들을 것을 무릅쓰고, 나는 그것들이 완전히 겉도는 남의 글이 되지 않도록 내 손으로 어떤 특별한 방향성을 부여한다.(<에세 3> 12장)
이런 연유로 그는 인용에 관해 독자에게 아주 간단한 주문만을 남겼다.
"인용한 것에서는 내가 내 주제를 두드러지게 할 수 있는 뭔가를 고를 능력이 있었는지를 볼 일이다." (<에세 2> 10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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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해방감의 몽테뉴의 <에세>가 좋아진다. 그 사람처럼 생각해야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이번엔 몽테뉴가 되어 몽테뉴처럼 <에세>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하지만 이 작업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 자신 안에 타자를 수용하여 함께 거주한다는 것은 내면에 송곳 하나를 안고 산다는 말과 같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대상을 이해할 수 없다. 사물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400년 동안 몽테뉴의 글을 자기 글처럼 인식한다.
마치 자기가 쓴 글 같은 동질감을 몽테뉴 글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이유는, 몽테뉴가 '내면세계'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중세의 발견 중에서 아마도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고 하는 '내면'은 아마도 몽테뉴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닐 테지만, 그것은 아마도 시에서부터 이겠지만, 몽테뉴의 내면 인식은 실존적 기획이 수반된 것이었다.
[관찰하기 위해 기록하며, 기록은 현상 그대로를 글로 고정하는 일이다. 이것은 회의주의에 입각한 판단정지(에포케) 상태의 현상학적 기술 방식이다. 자기에 대한 자신의 주도권을 회복하고, 비판적 의식을 동반한 주관적 견해를 가지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 주체로 사는 길을 연다.
"나는 나를 판결하기 위해 내 법률과 재판정을 갖고 있다" (<에세 3장> 2장)
"종족, 동업조합, 가문 등 보편적이고 집단적인 형태하에서만 자기를 이해했던 중세인의 자기 인식 탈피한 '정신적 개인'인 근대인의 선언이다."
환멸과 폭력의 시대를 살면서 몽테뉴는 인간의 비참, 세상의 비참을 넘어 '세상 저편', 또는 '무덤 저 너머'를 추구하지 않았다. 죽음은 삶의 매 순간을 강렬하게 만드는 배수진이 되고, "매 순간 내가 내게서 빠져나가는 것 같다." 라던 그의 인식은 글을 쓰면서,
""시간의 신속함을 내 민첩함으로 나꿔채고 싶다."" 라는 적극성으로 바뀐다.(<에세 3> 13장)
""죽음이 삶의 목표(le but)""라던(<에세 1> 20장) 그가 ""죽음은 삶의 끝(le bout)이지 목표(le but)가 아니다. 삶 자체가 삶의 목표이자 목적이어야 한다.""(<에세 3> 12장)라고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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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의 <에세> 낭독 여정이 시작되었다. 읽기에 집중할 것이고, 각자의 사유를 방해하는 일 없이 고독하지만 즐거운 완주를 할 것이다. 이번 고독은 좀 더 여유로울 것이다. 니체 낭독의 빈 공간 메꾸기로 다독여진 내 땅은 그렇게 또 나의 밑받침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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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책이 이쁘다
목차가 시 같다. 목차만으로도 글을 만들 수 있을 듯. 목차에서도 동시성의 시대가 발견된다
독자에게 이렇게 몽테뉴는 말하고 있지만, 나는 옛사람들이 겸양지덕으로 내 허접한, 또는 부족한, 또는 망상이라고 말한 것들에 대해, 요즘 사람들이 "오다 주웠다"하며 건네는 것들에 대해서, 어떤 공명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군소리 하지 말아라, 토 달지 말아라'라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어렵게 건네는 내 성의를 무시하면 민망할 거야'라는 우리 시대의 비전이 함축되어 있다. 이것을 보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의 보이지 않는 교양인 것이다.한 시대에서 무엇인가를 시작하는 일은 비교 대상도 참고사항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그 표현은 겸양지덕이 될 수 밖에 없다. 비릿한 시대를 사는 이들이 목숨 거는 방식을 나는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