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1> 7장/ 우리 행동은 의도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죽음은 우리가 지닌 의무를 모두 면제해 준다고들 한다.
영국 왕 헨리 7세는 돈 펠리페와 협약을 맺었다. 협약의 내용은 이러했다. 헨리 7세는 돈 펠리페에게 네덜란드에 피신하고 있던 자신의 적인 백장미파의 서포크 공작을 자기에게 넘겨달라고 하였다. 대신 공작의 목숨은 건드리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헨리 7세는 아들에게 자기가 죽는 대로 곧장 서포크 공작을 살해하라고 지시하는 유언을 남겼다.
헨리 7세는 고의로 약속을 저버렸다. 자기가 죽고 난 뒤로 서포크 공작 살해 실행을 미루어 놓았다고 해서 그의 배신이 용서될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힘과 수단을 넘어서까지 책임질 수는 없다. 일의 결과나 이행은 완전히 우리 능력 밖의 것이다. 대신 우리 안에 있는 것은 정녕 우리의 의지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지켜야 할 의무의 모든 원칙들은 의지에 근거를 두고 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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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시대 사람 여럿이 남의 재산을 가로챘다는 사실에 가책을 느낀 나머지 자기가 죽고 난 뒤 유언을 통해 보상해 주겠다고 결심하는 것을 보았다. 그토록 다급한 일을 두고 늑장을 피운 것이나, 그에 대해 별다른 괴로움도 느끼지 않고 스스로는 그리 손해 보는 일도 없이 잘못을 대강 벌충하려 드는 것은 값진 행동이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은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무엇으로 빚을 갚아야 마땅하다. 무겁고 힘든 책임을 감당할수록 그들의 만족감은 더 정당하고 온당한 것이 된다. 속죄하려면 짐을 져야 마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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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숨기고 있다가 마지막 유언을 통해 자기 측근에 대한 증오를 드러내는 자들은 더 못된 사람들이다. 모욕당한 사람들이 그들을 기억할 때마다 분노하게 해 자신의 (사후) 명예를 배려하지 않은 셈이다.
죽음에 대한 경외심 때문이라도 자기의 적개심을 죽여 버렸어야 했다. 그런데 적개심을 자기들 삶 너머에까지 계속 살아남아 있게 함으로써 자기 양심에 대해서는 더욱 배려하지 않은 셈이 되었다.
자기들이 소송 내용을 들을 수 없게 되는 날 이후로 판결을 미뤄 두는 (그 자신은) 못된 재판관인 셈이 아닌가.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내 삶이 먼저 공공연하게 말하지 않은 것을 내 죽음이 말하게 하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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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내 삶이 먼저 공공연하게 말하지 않은 것을 내 죽음이 말하게 하지는 않겠다" 이 문장과 위의 내용을 토대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라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이러한 관점에서 유래된 듯하다.
프랑스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그 기원은 로마시대부터이다.
"귀족(고귀함)은 의무를 지는데 그 이유는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지면 그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수반한다. 주로 사회 지도층 혹은 상류층이 사회적 위치에 걸맞은 모범을 보이는 행위를 표현한다. 이러한 것에 완전히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이들을 비판받는다."
프랑스에서도 전 세계적으로도 귀족이란 계급은 약화되었기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 역시 약화되었다. 민주주의가 자리 잡으면서 상대적으로 약화된 말이다. 대신 복지 개념이 강화되었다.
그런데 지나온 역사가 점차로 개인화되었듯이, 이러한 개념도 점차로 개인이 소화해야 하는 시대로 향했던 것은 아닐까. 개인 안에서 그 자신이 내면화해야만 하는 하나의 정신 같은. 그렇기에 '정신의 귀족'이라는 니체의 말이 성립되는 지도.
그러나 개인에게는 어느 지점까지의 한계가 분명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과 복지의 개념을 결합하면, 국가에 그 책임과 의무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시대는 개인(국민)과 국가의 조합을 추구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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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본문을 읽으면서, 죽음 뒤에 유언으로 그 자신의 적개심(복수)을 남긴 사례들에서, 나는 '폐비 윤 씨'가 떠올랐다. 자신의 아들(연산군)을 망쳐버린 어머니의 유언. 그런데 요즘 시대에도 이와 유사한 짓을 자행하는 무리들이 있다. 거짓을 유언으로 남겨 사람들의 가슴 안에 복수를 심는 것과 같은 행위들. 거짓말에 놀아나는 한 무더기의 사람들. 공적 책임을 져야 하는 곳에서 오직 사적 이득만을 취한 이들이 거짓말 퍼레이드를 기필코 행하며 어리석은 드라마를 상영하는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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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모든 경우에서 개인이 강해져야 하는 이유는 점점 더 분명해진다. 어쨌든 아무리 뛰어난 철학책이라도 시대가 앞서면, 이 시대에서 전 시대의 작품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시대에서는 그 작품이 가장 진보적이었다. 그런데 그 작품은 그 시대를 넘어설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몸과 사유가 그 시대의 양분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보적인 작품도 전통이 되면 이미 보수적이다. 그런데 '보수적'이라는 개념을 이 시대에 맞춰서 판단해 버리면 곤란하다. 현시대에서 '보수적'은 전통(유산)과 결합되어 나타난 문화유산적 개념이지, 현시대의 세속적 정치와 결탁한 개념은 아니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한에서의 '보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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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본문을 임의로 재구성하여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