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더랜드
원더랜드를 보았다. 현실과 비현실,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현실.
영화적 상상이 참으로 안정적으로 흐르는 영화였다. 인간의 상상이 균형을 이르는 지점에 도달했구나를 생각했다. 그것은 그만큼 어색하지 않았다는 것은 의미한다.
입자들의 새로운 분화를 표현하는 방식도 마음에 들었다.
정신이란 무엇일까? 기억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기억을 가지고 있는 자가 사멸하면 사라질 한 존재에 대한 기억.
기억이란 서로 공유하고 연결된 존재끼리만 의미 있는 것일까? 결국 1:1의 기억. 남은 자가 사라지면 사라질 기억.
기억의 한계성. 인간이 가장 하고 싶은 것, 원한 것, 마지막 순간에 가장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일까? 기억을 보존하여 그 자신이 다 하는 날에 같이 사멸해 줄 이란 결국 가족 또는 그 무엇일까?
이 역시도 남은 자를 위한 위안인 것일까? 산 자와 죽은 자의 기억의 공존은 산자가 기억하고 싶어 해야만, 그 필요가 강렬해야만 가능하다. 결국 염려와 사랑 때문이다. 그것 외에는 그 기억과 현실에서 공존하기란 사실상 버거운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상과 이야기는 보편적이어서 실효성이 끝나지 않는다. 그러니 이야기 사랑의 이야기인 철학적인 사유는 끝나지 않는다.
#비현실적 경험을 가상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비현실 세계는 스마트 폰을 통하면 현실 세계와 연결된다. 그러니 또 가상 세계가 현실과 공존하게 된다. 어떻게든 그 연결 통로를 확보만 할 수 있다면 가능하다. 아직까지는 글이 그 기능에서 더 우세하지만, 영화적 상상은 물질화로 가능하다는 상상을 펼친다. 어차피 우리 정신 안의 세계를 끌어내는 일이므로, 정신을 물질과 연결하지 못하리라는 법도 없으니까.
사실 전화 그 자체도 그걸 뛰어넘었기에 가능하다. 먼데 있는 사람 목소리 들으며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아주 예전에는 상상에 불과했었다. 그 상상들이 점차로 물질화로 구현되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여기에는 어떤 공허함도 있다. 여전히 빈 곳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걸 해결하는 게 모든 분야의 몫이다. 그런데 현대인만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다. 완전함이란 그 자신의 세계안에서 경험하는 것이지만 물질의 세계에서는 직접적 대상이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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