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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흰빛, 고 철 시집

시집 리뷰/ 자신과 놀 줄 아는 시들, 허공에서 날아온 말 하나

by 아란도


해학적 맑은 시집을 만났다. 자신과 놀 줄 아는 시들이라고 생각했다. 주관과 객관이 넘나들면 한바탕 판소리 마당처럼 비장미마저 너털웃음 속에 삼켜진다. 술술 흐르는 시, 그러다 꿀꺽 한 방울의 삶이 샘 위에 떨어지는 낙숫물처럼 또옥똑 소리를 내면, 어떤 비애가 침샘에 고인다. 그러다 이내 허공에 뚫린 휑한 구멍들로 바람이 휘도는 것을 느낀다. 그 구멍들 메우느라 이 시들이 밤잠 좀 설쳤겄다. 시가 되려고 비는 내렸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재밌고 맑은 시들의 마지막 문장만을 모아서 하나의 시를 만들어 보았다. 이 시의 제목은 <제1부의 말들>이다. 거의 이상의 시 필이 난다! 3부까지 하려고 했으나, 돌 날아올까 봐 1부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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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남는다를 뺀 적은 없다

좋아서 죽을 뻔했다

오늘은 내가 먼저 절뚝거리며 할미새를 이길 거다

미국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세상은 고요하고 고요했다

사진 속에 살았던 사람들이 사진 밖의 달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극단적 어둠들이 차츰차츰 흩어졌다

상호 간 참 외로웠던 모양이다

버르장머리 없는 애들 엄마를 생각해 보았다(원 시를 안 읽고, 이 문구로만은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오해하라고 해서 '시'다)

내일은 시가 나를 위해 살아줬으면 좋겠다

경우를 막론하고 묘지는 슬프다

길은 시인의 의도와는 정반대에서 산다

내년에는 농사가 망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웃으면서 찍혔다

비도 나를 구경했다

스스로의 결의에 비웃거나 비꼬아선 안 된다

착해지고 싶은 날이다

구부구부 산새가 108번은 더 울었을 텐데

저 달은 틀림없이 부어 있는 거다

태양의 중심을 피해서 가기도 했다

다음 달에는 신神 하나를 더 사와야겠다

나는 틀린 답이 되었다

나는 대광大光의 인력이 되었다

물푸레 속살 같았던 여름이었다





이제 고철 시인의 시를 직접 만나 보자




<하얀 꽃 눈송이처럼 날릴 때 > - 고 철 -


마당의 풀 뽑다가 지저귀는 새가 시끄러워서

하늘을 본다

지게 내려놓고 하늘을 본다

배추밭 매다가 하늘을 본다

옥수수에게 비료 주다가 물 주다가

하늘을 본다

세수도 못 하고 면도도 못 하고

똥도 못 누고 하늘을 본다


허무합니까, 괜찮습니까,


강아지랑 놀다가

날리는 꽃 보면서 하늘을 본다

마당 쓸다가 쓰레기 태우다 하늘을 본다

설거지 끝낸 허무가 하늘을 본다


새는 저쪽 산에 살고

우리는 이쪽 산에 산다


허무는 그쪽으로 가고

아침은 이쪽에서 온다


허무합니까, 그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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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멍> - 고 철 -


인정 많은 눈빛으로

내 주머니 털어간 사람 있다

인정 수북한 눈빛으로

나를 속여먹은 사람 있다

나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 있다


이걸

죽여

말어


이걸

죽여

말어


혼자 중얼거리다가 불 앞에서 졸았다

불도 자기 몸 태우면서 졸았다



_________



<끝> - 고 철 -


말 못하는 사람이

끝 끝 끝 하면서

말 연습을 하고 있었다

혀끝이 입천장에 자꾸만 달라붙어서

말이 생기지 않았다

피가 나게 노력했음에도

말 생기지 않아 속상했다

포기하기로 했다

끝을 접어서 삼켜버렸다

벙 어 리 벙 어 리 하면서

자책했다


벙 어 리 벙 어 리 벙 어 리

벙 어 리 벙 어 리 벙 어 리 하다가


말 생긴 걸 알았다

기적이었다

날아갈 만큼 소리쳤다


나는 말 못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벙어리가 아닙니다

이젠 끝!


하다가 다시 벙어리가 되었다

한 입 가지고 두 말 하려다 생겨난 말까지 잃어버렸다





고철의 시는 이솝우화처럼 어떤 여운을 준다. 나는 여기에서 인간의 비애를 본다. 그러자니 또 못내 어떤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정화'마저 느끼게 되는 것이다. 고 철 시의 효과다. 시인의 이름으로 시인을 놀려먹을 심산은 추호도 없지만, 고철의 시가 인간의 마음을 맑고도 수승하게 만든다. 고철이 새것이 된 것이다. 오래된 녹을 털어낸 것이 아니라 오래된 녹, 그 자체가 바로 새것인 것이다.


이러한 건축 자재가 있던데, 아마도 그것의 이름은 '코르텐강(내후성강판)'일 것이다. 물론 검색해서 이름을 알았다. 비바람을 맞으면 녹이 생겨서 오히려 더 단단해지는 그런 성질처럼 아마도 고철 시 역시 그러하다고 생각되었다. 한바탕 웃으며 후루룩 읽고 머리를 비운다. 그리고 이내 허공에서 말 하나 날아온다. '너 자신을 보세요' 어떤 부끄러움도 일렁인다. 마알간 부끄러움은 리셋의 효과도 준다. 고철의 시다.




#고철_극단적_흰빛_시와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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