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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에세 1> 20장과 26장을 오가며... 그리고 ...

by 아란도



몽테뉴의 <에세 1> 20장은 '철학을 한다는 것은 죽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 20장은 몽테뉴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몽테뉴는 죽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죽음에 대해 사유했고 준비했으며 탐구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준비된 그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살았다.


죽음에 대해 사유하면 현재의 지금이 당연히 소중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현재들이 낭비되고 있는가?. 사색마저도 현재를 사는 일이다. 그 사색(멍 때리기)은 현재의 지금이 없다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겨울에서 봄으로 이전되는 공기의 변화를 코의 숨으로 얼굴의 피부로 감지하는 순간은 손가락으로 바람을 만져 보는 행위처럼 살아있음의 순간은 무엇인가?를 느끼게 한다.


그 순간에도 죽음은 항상 자신의 옆에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권태의 매너리즘에 빠져든다. 이러한 권태적 매너리즘은 삶을 낭비하는 일인가? 어쩌면 주어진 생을 사는 모든 갖가지 방식들은 낭비가 아닐 수도 있다. 어절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다만 그 어쩔 수 없음을 조금이라도 능산적인 자연을 닮아서 시도해 보려는 인간의 애씀이 삶을 활짝 열어젖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시도 속에서 인간의 갖가지 감정들은 동력을 제공하는 것인지도.


몽테뉴는 죽음을 친숙하게 옆에 두고 살면서 그 죽음을 넘어서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서 사는 인간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죽음에 대해 자각하지 못해도 인간은 매 순간 자기를 쫓아오는 어떤 것을 느낀다. 이 지점에서 인간의 온갖 것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모호한 실체를 이겨 내는 일 그 자체가 죽음을 넘어서며 사는 일이지 않을까.


몽테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죽음은 무無보다도 더 두려울 것 없는 하찮은 것이다. 무보다 더 하찮은 것이 있을 수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루크레티우스의 시를 인용한다.


"우리는 죽음을 훨씬 더 작은 무엇으로 생각해야 하느니, 만일 무엇이 무보다 더 작을 수 있다면 말이다." -루크레티우스-


* 무보다 작은 것으로..., 그 무엇도 그 자신이 감당할 크기로 작아져야 한다. 그렇게 작게 만드는 것은 그 자신이 커지는 것이다. 예부터 사람들은 호연지기를 말하였다. 정상에서 정상을 바라보고, 정상에서 전모(그 정상을 둘러싼 전체)를 바라보는 시야를 확보해야 하는 것처럼, 내려다보는 시선을 기를 때 인간의 마음은 안정된다.


몽테뉴는 말한다.


"구부려 접은 몸으로는 짐을 받치기가 더 힘들다. 우리 영혼도 마찬가지이다. 적수의 공격에 맞서도록 영혼을 단련해 일으켜 세워야 한다. 영혼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동안에는 휴식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영혼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면, 마치 인간 조건을 초월한 무엇인 듯 영혼은 자기를 자랑삼을 수 있다. 불안도 고통도 두려움도, 나아가 가장 작은 불쾌함조차 자기 안에는 깃들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호라티우스의 시를 인용한다.


폭군의 위협적인 시선도, 아드리아해를 뒤집어 놓는 성난 오스터(남풍)도, 벼락을 퍼붓는 주피터의 억센 손도, 그 무엇도 그의 굳센 마음을 흔들 수 없다. -호라티우스-


* 자신의 적은 바로 자기 안에 있다. 무수하게 많은 감정들과 생각들 사이로 자신의 적은 숨어 있다. 타인은 보고 그 자신은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적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 온다. 그것은 그 자신만이 차단할 수 있다.


몽테뉴는 이어서 말한다.


"이럴 때 영혼은 자기 정념과 탐욕을 다스리고, 빈곤, 수치, 가난, 그리고 다른 모든 풍상고초를 이겨 내는 주재자가 되는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런 영예를 차지하자. 우리로 하여금 억압과 불의에 맞서고 감옥과 족쇄를 우습게 여기게 하는 진정한 자유, 최고의 자유가 거기에 있다."


그리고 호라티우스의 시를 인용한다.


네 손과 발에 족쇄를 채워 잔인한 옥지기에게 지키게 하리라.
네가 원할 때, 신이 몸소 나를 해방시키리라.
ㅡ 필경 이 말은 죽겠다는 말이리라. 죽음은 모든 것의 종말이니까. -호라티우스-


* 두려움 없이 산다는 것, 그 험한 시대에 '안중근이라는 사내'는 그 시간을 넘어섰다. 어제 '하얼빈'을 보았다. 우리의 시대는 그들의 선물이다. 왠지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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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면할 수 없을 없는 바에야 그 앞에서 뒷걸음질 친들 무슨 소용 있나? 죽음을 통해 크나큰 비참을 면하게 되었으니 죽어서 다행이었던 자들을 너희는 충분히 보았다. 반대로 죽어서 잘못된 이를 본 일이 있는가? 너희 자신도, 다른 이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을 단죄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이다. 왜 '너'는 나와 운명을 원망하는가? 우리가 네게 잘못하고 있는가? 우리가 너를 다스려야 하는가, 아니면 네가 우리를 다스려야 하는가? 네 나이는 아직 차지 않았을지라도, 네 명은 다 찼다. 어린 인간도 성인과 마찬가지로 온전한 인간이다."


*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한강의 문체의 변형이 떠올랐다. 나가 아닌 너희, 너, 너희로의 인칭 대명사가 변화하는 것은 발화자와 발화자가 말하는 대상이다. 발화자는 '나'이지만, 여기서 나는 그 나(몽테뉴)가 아니다. 여기서의 나는 '나'라고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고, '너'와 '너희'라는 인칭 대명사를 통하여서만 비로소 드러나는 '나'이다. 곧 자연 또는 신이다. 1인칭 '나'가 바로 드러나면 '너'는 2인칭이다. 동등한 수평적 시선이어서 어떤 시간의 한 시점에 머물러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너희에서 너로 다시 너희'로의 이동에서 보자면, 이 시선은 서라운드적이다. 시간 전체를 훑으는 시선이다. '너희'는 인간 전체이고 '너'는 그 누구라도 될 수 있다. 몽테뉴도 될 수 있고, 몽테뉴 아이도 될 수 있고 너도 나도 될 수 있다. 포괄적인 전체로서 인간의 운명과 개별자로서의 인간의 운명에 대해 자연이 또는 신이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몽테뉴의 자기 객관화적 문체 - 신의 관점 - 를 통하여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였다. 자기를 넘어선 목소리를 통하여, 그러니까 나라는 구체성 없이 목소리가 말하는 것이다.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너희와 너를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침묵 안에서 울려 퍼지며 나오는 거대한 소리이면서 동시에 시선이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다. 인간에게 자연의 본모습을 인식시키는 장치로서의 내면의 소리를 이끌어 내는 방식은 루이스 글릭의 시 기법과 유사한 느낌을 준다. 루이스 글릭의 시를 이해하는 데 몽테뉴의 시적 산문은 아주 탁월한 기원성을 충족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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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도, 그들의 인생도, 자로 잴 수 없다. 키론은 시간과 수명을 관장하는 신인 아버지 사투르누스에게서 불멸의 조건에 대해 듣고는 그것을 거절했다. 생각해 보라, 실로 영원한 삶이란 것이 내가 준 산보다 얼마나 더 힘겹고 고생스러울지를. 만일 너희에게 죽음이 없다면, 아마도 너희는 죽음을 주지 않았다고 쉬지 않고 나를 저주할 것이다.
죽음의 편익을 보고 너희가 너무 탐욕스럽고 무분별하게 덥석 끌어안지 못하게 하려고 나는 일부러 죽음에 약간의 쓰라림을 섞어 놓았다. 삶을 피하지도 않고, 죽음 앞에서 겁먹고 물러서지도 않는, 내가 너희에게 요구하는 그 중용에 머무르게 하려고, 삶과 죽음 둘 다 달콤함과 쓰라림 사이에 조절해 놓았다.
나는 너의 현자들 중 '맏이'인 탈레스에게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다르지 않음을 가르쳤다. 그래서 누가 그에게 "그렇다면 왜 죽지 않느냐"라고 묻자 그는 "아무래도 좋으니까"라고 아주 현명하게 답했던 것이다."


* 전체적으로도 그렇지만, 특히 이 단락에서는 '루이스 글릭'의 시적 세계가 겹쳐졌다. 아마도 나는 그때 여기에 몰입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루이즈 글릭의 시를 읽고 있을 때, 한강의 노벨 문학상 소식이 들려왔다. 신기한 경험이었고 어떤 환희가 내 안에 가득 찼었다. 그리고 그 후 내 안에서는 루이즈 글릭과 한강과 니체가 한데 뒤섞였다. 그리고 이 대목에 와서 몽테뉴로 선명해졌다. 문학에서 죽음을 말할 때, 또는 그런 분위기로 압도될 때, 그것은 몽테뉴적 죽음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죽음을 넘어서서 삶을 말하기 위함이지 죽음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문학을 읽는 일은 그 너머의 삶을 제대로 조망하는 것에 있을 것이다.


'너희'라는 루이즈 글릭의 시적 표현에서, 그녀의 시적 세계 안에서 나는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물론 시집 해설서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그때는 루이즈 글릭의 시 세계가 나에게 무중력 상태를 경험하게 하였다면, 강력하게 하나의 막을 형성하는 느낌을 받았다면, 몽테뉴의 산문에서는 마치 기원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단락에서는 구체적으로 '내가'라는 주어가 등장한다.


그리고 루이즈 글릭의 첫 시집 제목도 '맏이'이다. 물론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몽테뉴의 산문에서 영감을 받는 일은 무궁할 것이다. 니체의 책 제목 <즐거운 학문>은 어디서 왔을까?


몽테뉴는 <에세 1> 26장 '아이들의 교육에 관하여'에서 "철학은 즐겁고 유쾌한 것이며, 철학은 사는 법을 가르치며, 사는 기술은 삶을 통해 습득하며, 지혜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지속적인 즐거움이며, 철학의 목적은 덕에 있으며, 그 덕은 학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가파르고 울퉁불퉁하고 접근하기 어려운 산 꼭대기에 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덕은 비옥하고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평원에 살며, 거기서 자기 아래 있는 모든 것을 굽어보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덕은 매끄러운 표면에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니체의 표면과 들뢰즈의 표면은 다르지 않다. 그리고 몽테뉴는 그 표면에 대해 구체적으로 시적 산문으로 표현해 놓았다.


몽테뉴의 산문 모퉁이마다 예학과 미학과 철학이 놓여 있다. 이것들은 모두 삶의 철학들이다. 아름다움이 뭉게구름처럼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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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흙, 공기, 불, 그리고 나의 이 전체 구조를 이루는 다른 지체들은 내 생명의 도구인 만큼 네 죽음의 도구이기도 하다. 왜 마지막 날을 두려워하는가? 그날도 다른 하루들만큼 밖에는 네 죽음에 기여하지 않는다, 마지막 걸음이 너를 피로하게 하는 게 아니다. 그 걸음은 마침내 네 피로를 선언할 뿐이다. 모든 날들이 죽음을 향해 가고, 마지막 날은 거기에 도착한다."


* 이 작은 문단은 따로 떼 내면 그대로 시가 될 것만 같다. 나는 이 단락에서 루이즈 글릭 '시'들이 주는 어떤 초탈적 느낌과 겹쳐졌다. 몽테뉴의 '시적 산문'의 중추가 이 단락에서 강하게 흘러 왔다. 시적 산문의 선구는 몽테뉴로부터. 아마도 또 다른 철학책을 읽는다면 거기서도 이런 이끌림을 받는다면 같은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내 안에서 진동하는 파장은 조금씩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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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분장


"이것이 우리 어머니인 대자연의 선한 충고이다. 그런데 나는 자주 생각해 봤다. 우리 자신이 당하든 남이 당하든 집에서보다 전쟁터에서 죽음의 얼굴이 비할 수 없이 덜 무섭게 여겨지는 것은 무슨 까닭이며(그렇지 않다면 군대는 의사와 울보 천지이리라), 죽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신분이 낮은 촌사람들이 다른 이들보다 훨씬 꿋꿋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하고 말이다.
나는 죽음 자체보다 우리가 그것에 덮어 씌운 무시무시한 얼굴과 치장들이 더 겁먹게 한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완전히 달라진 새로운 생활방식, 어미들, 여자들, 아이들의 울부짖음, 망연자실한 사람들의 방문, 눈물 젖은 해쓱한 얼굴로 둘러선 많은 하인들, 어두침침한 방, 불 켜진 초들, 의사들과 기도사들에게 둘러싸인 베갯머리. 요컨대 우리를 둘러싼 온갖 공포와 질림 등이 말이다. 벌써 우리는 매장되어 땅속에 묻혀 있다.
아이들은 친구라도 가면을 쓰고 있으면 무서워한다. 우리도 그렇다 사람들뿐 아니라 사물들에서도 가면을 떼어 내야 한다. 가면을 떼어 내고 보면, 우리는 그 밑에서 최근의 하인이나 순진한 하녀가 두려움 없이 넘어간 바로 그 죽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저렇게 끔찍하게 분장扮裝할 겨를을, 저 분장 장치들을 준비할 여유를 주지 않는 죽음은 복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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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조금 수정했습니다. 몽테뉴 글을 다시 읽어 본 결과 '분장'에 대한 몽테뉴의 생각은 죽기 직전에 분장을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죽음을 더 두렵게 여기고 다른 세계라고 여기는 빌미를 준다고 여겼다고 보입니다. 분장한 모습이 어색한 것은 당연할 것이고, 다른 사람처럼 보일테니까요. 하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죽은 자에게도 분장을 시키는 것은 풍습이었을 것이므로, 몽테뉴의 생각은 '죽음' 그 자체를 분장시키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었다고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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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마지막 단락을 읽으며 나는 죽음에 대한 선입견이나 오해 등에 대해서 우리가 마치 거대한 연극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어찌하지 못하는 마음 안의 안절부절못하는 그런 심리가 겉으로는 그 시대의 양상에 맞춰 나타난다. 시대에 맞는 교양과 유행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을 다 벗겨내고 몽테뉴는 있는 그대로 마주 선다. 그것뿐인 것이다. 그런데 몽테뉴는 죽음 그 자체와 장례의식은 또 구분하는 듯이 보인다. 그 당시 사람들의 장례의식과 풍습에 대해 고민했듯이, 몽테뉴는 산자들이 알아서 하는 것으로 그 몫을 남겼다. 죽음이 자신이 몫이듯이 그 이후의 절차는 산자들의 몫인 것이다. 그래서 몽테뉴의 산문들의 단편 단편은 서로 때로 내 안에서 충돌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 충돌을 나는 이렇게 다시 정돈해 본다. 아마도 그 당시에는 죽기 직전에 귀족들의 임종 전 풍경은 미리 '분장'을 하여 방문객을 받거나 가족들과 사람들에게 마지막 모습을 보도록 하였던 것 같다. 그것이 그 시대의 풍속이자 예법이었던 모양이다.


몽테뉴는 그러한 과도한 분장이 오히려 기괴하게 보여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한 의미를 삶과 분리시킨 결과를 초래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임종을 맞는 그 순간에 분장을 할 겨를도 없이 죽는 것, 즉 고요히 혼자서.


그래서 몽테뉴는 "나는 사람들이 행동하기를 바라고, 또 생명의 기능을 할 수 있는 한 연장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죽음은 내가 양배추를 심는 중에, 그러나 죽음에는 아랑곳 않고 불완전한 채로 두고 가는 내 밭에 대해서는 더욱 무심히 그 일을 할 때 와 주기 바란다."라고 말했나 보다. 사람은 죽는 그 순간까지 활동하며 살다 가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얼굴에 분장을 한 채 죽는 것이 아니라.


죽기 직전에 분장을 하여 임종의 순간을 사람들이 보는 것을 몽테뉴는 한 존재의 죽음의 본모습을 가로막는 행위라고 여겼던 것 같다. 아마도 임종 직전에도 분장을 하였듯이 이미 죽은 자에게 분장을 시켰을 것이다. 이러한 전반적인 죽음에 대한 분장 문화가 오히려 죽음 그 자체를 산자들에게 두려움을 심었고 어떤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르는 행위라고 몽테뉴는 생각했던 것 같다. 본래의 얼굴 그대로 두는 것이 더 복된 죽음이라고.


하지만 몽테뉴는 장례의식 절차에 대해서 다른 글에서는 산자들이 알아서 하는 편이 더 나을 거 같다고 말했다. 분장을 시도한 맨 처음 의도는 훼손된 시신에 의해서이지 않을까. 가족이나 사람들이 볼 때 온전한 모습으로 보이기를 원해서. 그러던 것이 전체적으로 확산되었던 것이 아닐까? 죽기 직전에 분장을 하지 않아도 죽은 이후에는 분장을 산 사람들이 시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몽테뉴는 죽은 자의 얼굴에 분장하는 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보인다.


분장을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낸 것은 아마도 '드라큘라 백작'일 것이다. 그는 왜 항상 과도한 화장을 한 상태로 언제나 있을까? 영화에서 보면 그렇다. 죽은 자의 얼굴에 입혀놓은 분장은 들뜨고 과도한 화장으로 비친다. 어쩌면 몽테뉴도 이렇게 무대 배우처럼 분장된 얼굴로 죽고 싶지 않았던 것일 것이다. 하지만 산자들의 입장에서는 건강한 것처럼, 혹은 살아 있는 것처럼 분장을 하는 것이 더 보기에 좋거나 고인이 될 사람이나 혹은 고인에 대한 예우이자 산 사람들에게 고인의 얼굴을 보여 주기에 더 적정하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하지만 몽테뉴는 이 장에서는 메멘토 모리에 대해 집중 탐구분석하고 있으므로, 인간이 죽음의 모습을 또 다른 상상과 연계하여 확대 재생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 것이지 않을까? 그것이 결코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므로. 죽음은 인간의 얼굴에 그때 새겨진 그 자체로 있어야 한다고 본 것이 아닐까. 그것으로 삶은 끝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죽음은 그저 하나의 '막'을 넘어서는 것뿐이어서 죽음 자체에 지속성은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철학의 즐거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을 때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넘어서서 그 자신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일 테니 말이다. 죽음은 항상 옆에 있다. 쫓을 수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매 순간 그것을 넘어서고 나아간다. 삶은 그렇게 죽음을 이기지만, 그것은 아직 죽음이 유보된 상태일 뿐이다. 철학은 이러한 것에 대해서 인간을 훈련시킨다.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아름답게 그 자신에게 전달된다면 철학은 즐거운 것이 된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그 감정 안에는 항상 비의悲意도 함께 숨겨져 있다. 그 양가감정을 인간은 "눈물 나게, 가슴 시리도록, 초탈하게, 너무나 아름다운..."이라고 표현하며 아름답다고 느낀다. 이러한 감정들은 시간 안에서 축적되며 그 사이에서 생성되는 감정이다.


철학에서의 '즐거움'은 아마도 이런 의미일 것이다. 삶이 만들어 내는 온갖 일들과 그것에서 비롯된 정념들의 세계가 빚어내어 만든 감정들, 그 감정들의 의미가 한데 모이면 아름다운 것이라고. 그것이 또 삶이고 철학이라고 몽테뉴는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의 모습은 시대를 초월하여 한결같지만, 죽음을 대하는 자세는 시대마다 조금씩 다르다. 그리고 장례 풍습도 다르다. 당시에는 잘 모르지만 장례 풍습에도 유행이 있다.


몽테뉴는 그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할 때, 머리털 없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 그리도록 하였다고 말하고 있지만, 지금에서 우리가 보는 몽테뉴 초상화는 그 시대(16세기의 중세)의 관점과 유행이 담겨 있다. 사색적인 시대의 풍경과 느낌이 그대로 초상화에 담겨 있다. 그 초상화를 그린 이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몽테뉴의 이미지를 그렇게 초상화에 옮긴 것일 것이다. 사색의 시대는 그렇게 한 시대에 이입된 것이다. 풍속도는 그 시대 안에서 만들어진다. 다만 인간은 그 자신이 마음먹은 것을 시대 안에서 행위를 통하여 시도한다.


몽테뉴 그 자신의 존재방식에서 마음먹기와 시도는 그 후 후세에게 전달되었다고 보인다. 또한 그의 교육관은 그의 이전 시대를 총망라하여 집약된 것이라고 보인다. 그는 종합한 것을 그의 방식대로 거른 후 압축하여 산문으로 옮겨 썼다. 철학을 공부함에 있어서 삶으로부터 배우라고 말하는 몽테뉴의 철학은 니체가 말하는 귀족적인 것이다. 몽테뉴가 귀족이어서가 아니라, 몽테뉴 방식이 그 지향점이 고귀하기 때문이다. 즉 소탈함과 한적함 그 자체와 덕을 새롭게 정의한 것 그 자체가 바로 귀족성이라고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귀족적 가치는 단순성과 소탈함과 즐거움plaisir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단순성과 한적함은 몽테뉴가 장례의식 절차를 말할 때처럼 적절성에 있을 것이다. 그 적절성에 대한 감각을 익히는 것이 또한 철학이며 예학일 것이다.


점차로 몽테뉴의 <에세>를 더 읽어 갈수록 몽테뉴의 사유는 변화되어 내 앞에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글쓰기 자체가 바로 그 방식이니까. 그는 그 자신의 내적 변화를 기록한다. 그리고 오래전에 써 두었던 글을 수정하거나 또는 불필요하다 싶은 단어를 삭제하거나, 따로 첨언을 하는 방식으로 그의 글을 완성해 나갔다. 아마도 몽테뉴가 더 길게 살았다면 그 첨언 내용이 더 늘어났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방식은 요즘 시대의 페이스북에서 과거에 오늘 날짜에 쓴 글을 보고 우리가 첨언하거나 코멘트를 다는 방식과 유사한 글쓰기 방식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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