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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의 구조와 니체의 즐거운 학문

예술의 형태와 모임의 형태 _표면의 세계

by 아란도




______즐거운 학문/42.일과권태_______


보수를 위해 일자리를 찾는다는 점에서 오늘날 문명화된 나라에 사는 모든 인간들은 동일하다.


그들 모두에게 일은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이로 인해 이들은 일을 선택함에 있어 섬세하지 못하다. 그 일이 많은 수입을 가져다주기만 하면 족한 것이다.


하지만 일의 즐거움 없이 일하기보다는 차라리 몰락하기를 바라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이 까다롭고, 만족시키기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일 자체가 모든 이득 중에 가장 큰 이득이 아니라면 많은 금전적 이득은 아무 소용이 되지 못한다.


모든 예술가와 사색가가 이런 드문 종류의 인간에 속한다. 그러나 그 외에 자신들의 삶을 사냥이나 여행, 혹은 연애와 모험에 바치는 한가로운 사람들도 여기에 속한다.


이들 모두는 그 일이 즐거움과 결합되어 있을 때만 일과 어려움을 원한다. 불가피한 경우에는 지극히 어렵고, 힘든 일일지라도. 그 밖의 경우에는 단호하게 나태를 택한다.


심지어 가난, 불명예, 건강과 생명의 위험이 그 나태와 결합되어 있을지라도. 그들은 권태보다도 기쁨 없는 일을 더 두려워한다. 아니, 오히려 그들의 일의 성공을 위해 권태를 필요로 한다.


사상가와 창조적인 정신을 지닌 모든 사람들에게 권태는 순조로운 항해와 즐거운 바람에 선행하는 유쾌하지 못한 영혼의 "무풍 상태"이다.


그는 이것을 견뎌내면서 그 결과를 끝까지 기다려야 한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범속한 천성을 지닌 사람들이 도저히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수단을 다해 권태를 몰아내려 하는 것은 기쁨 없이 일하는 것만큼이나 천박한 짓이다. 보다 오래, 보다 깊게 휴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시아인들은 유럽인들보다 뛰어나다. 심지어 그들의 아편조차도 유럽의 독약인 알코올의 역겨운 신속함과 비교해 보면 느리게 작용하고 인내를 요구한다.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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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거운 학문은 마치 니체의 에세이 같다.


이 대목을 보며 이런 생각이 스쳤다. 그래서 '권태'를 느끼면 사람들은 '권태'에 대해 쓰나 보다! 나는 지금 물론 권태스럽지 않다. 다만 직업과 일, 즐거운 일... 이렇게 나열한 후 요즘 시대를 상기하면 이 시대가 권태롭게 다가올 따름이다. 이 권태로운 시대를 니체의 말처럼 '권태를 몰아내려' 지나치게 애쓰지는 말고 끈질기게 기다려 그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마땅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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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주일에 두 번 진행하는 '플래시_몹 줌 낭독회'에서 <즐거운 학문> 제1부를 마저 읽었다. 이제 5개월이 되어 가니 그간의 서로의 생각도 이야기 나누어 보았다. 그리고 아래의 생각이 지금 떠올라서 일단 쓴다. 어쩌면 이건 내 안에서 복합적인 의문이었던 것도 같다. 이렇게 풀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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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주가 되어 모임이 만들어지지만, 모임은 언제나 관계가 중심이 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 관계란 것은 형식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사람은 하나의 형식 안에 진입하면 궤도를 돌게 된다. 그리고 그 돌아가는 궤도에 진입하면 일정한 패턴이 발생하므로 그 안에 묶이게 된다. 서로 묶인다는 그 자체가 형식이다. 그 안에서 더 밀접해지는 것이다. 밀접해지면 그것은 안과 밖이 분리된다. 독립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또는 피상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모임'이라는 형태이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 서문에서 이렇게 말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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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리스인들이여! 그들은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는 표피, 주름, 피부에 용감하게 머물며 가상을 숭배하고 형태, 음, 말 등 가상의 올림포스 전체를 믿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피상적이었지만, 그것은 깊이에서 나온 것이었다!


현대 사상의 가장 높고 위험한 정상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고 밑을 내려다본 우리들 정신의 모험가들도 바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이점에서 우리도 그리스인들이 아닐까?


그러므로 형식과 음과 말의 숭배자가 아닐까? 그러므로 예술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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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상적이지만 그것은 깊이에서 나온 것'이 문장에 방점이 찍혀있다고 생각한다. 피상적인 것은 눈에 보이는 것,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모든 사물은 모두 피상적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피상적인 것은 모두 깊이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깊이'는 무엇일까? 정신이며 더 간결하게는 언어일 것이다. 언어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말은 목의 성대를 울리며 얼굴을 공명하여 나오지만, 그 말에 묻어 있는 감정은 신체로부터 비롯된다. 오장육부로부터 피부감각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므로 예술가가 어떤 하나의 형태를 드러내었을 때 그것은 피상적으로 드러난 그 순간에 전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이지 않던 것을 형태로 드러내었으므로.


나는 '모임'도 같은 효과를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그 상태에서 하나의 '모임'으로 형태를 드러내는 그 순간에 전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매번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이를테면 말이다.


그러니 책이 '주'라고 생각한 모임에서 책은 매개할 뿐, 모임의 주인은 '관계''그 자체라는 것이 더 지배적인 생각으로 나를 이끌 때, 나는 갈등하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떤 모임도 마찬가지였다. 피상적으로 드러난 그것에 더 사람은 반응하기 때문이다.


피상적으로 드러난 그것에만 매몰되면 문제이겠지만 니체의 말에 견주어 생각해 보면, 여기에도 예술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분리될 수 없는 것을 분리했기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므로 분리하지 말고, 피상적인 것에서 깊이를 보면 된다. 여기서 깊이는 본질일 수도 있을 것이고 보아야 할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적으로 피상적으로 보지 말라고 보통 말을 하곤 하지만, 때로는 보이는 게 다일 수도 있다. 그것으로 판단해야 하고 느껴야 할 때도 있다. 그것이 예술이고 미학적 관점 아닐까.


어떤 '주'가 되는 것들은 모두 매개할 뿐이었다. '주'가 되는 그 매개물이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오히려 형식이 더 도드라져야 하며 주인인 '관계'는 그때 더 긴밀해져야 한다. 안으로 스며들어야 한다.


그러니 모든 모임은 이원적인 중첩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보통은 하나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두 가지가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두 마리 토끼가 궤도를 돌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한 마리이지만 두 마리이다. 보통 관계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없는 셈 치지만, 우리는 그 관계에 이미 묶여서 돌고 있기 때문에 한 마리 토끼만 보는 것이다.


한 마리 토끼를 더 보는 눈을 얻어야만 사태가 파악되는 것이다. 관계를 매개하고 있는 '책'과 '관계 그 자체'가 모임의 주인이며, 그때 각자의 개인은 없다(관계 안에 포섭된 상태)고 보아야 한다. 여기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제1부 21장 91~94쪽의 내용과 혼동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은 사심 없기를 바라는 글이 아니며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글 역시 아니다. 모든 모임의 메커니즘이 그러하다는 의미이다. 관계가 긴밀하게 맞물려 돌아가므로 인해서 동력이 생성되고 그 궤도가 원활하게 돌면 거기에서 굳이 그 자신에 대해 생각할 이유는 없다. 그저 흐름을 타고 넘으면 되기 때문이다. 파도를 타고 떠가듯이 그렇게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방식이 모든 '모임'의 방식이기에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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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두 마리의 토끼가 궤도를 달리는 그것을 형태로 드러내는 일이지 않을까? 한 마리의 토끼가 궤도를 도는 그 동력은 어디에서 조달되는가? 그 동력이 바로 관계다. 또 한 마리의 토끼다. 이러한 것은 모두 가상이다. 하나의 연극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진지하게 즐겁게 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삶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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