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해 진리는 존재하는가 - 지금까지 오류는 위안을 주는 힘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식된 진리에서 동일한 효과를 기대하며 그것을 이미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다.
진리가 바로 이것, 즉 위안을 주는 것을 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도대체 이것이 진리에 대한 이의 일까? 진리는 괴로워하고 위축되어 있고 병든 인간의 상태와 어떤 점에서 공통점을 갖기에 그들에게 유용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러나 어떤 식물이 병든 인간의 치유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식물의 진리에 대한 반증은 아니다.
그러나 예전에 인간은 자신을 자연의 목적이라고 너무나 확신했기 때문에 인간의 건강에 도움이 되거나 인간에게 유익하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인식을 통해 발견될 수 없다고 가정했으며, 나아가 별 생각 없이 [인간의 건강에 도움이 되거나 인간에게 유익한 것] 이외의 것들은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고 가정했을 정도였다. 아마도 이 모든 것에서 다음과 같은 명제가 따라 나올 것이다.
즉 전체적인 것, 연관된 것으로서 진리는 오직 강력하면서도 순진하고 기쁘고 평화로운 혼들 (아리스토텔레스의 혼이 그랬던 것 처럼)에만 존재한다.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혼들만이 진리를 추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성과 지성의 자유에 대해 긍지를 갖고 있을지라도 진리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치료제를 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학문에 대해 진정한 기쁨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그것의 냉정함과 메마름과 비인간성을 비난하는 것은 이러한 사정에 연유한다.
바로 이것이 건강한 자들의 유희에 대해 병든 자들이 내리는 판단이다. 그리스의 신들 역시 위로하는 법을 몰랐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인들 역시 모두 함께 병들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러한 신들이 몰락하게 된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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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생각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할 때, 니체가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성과 지성의 자유에 대해 긍지를 갖고 있을지라도 진리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치료제를 구하기 때문이다" 라는 이 문장을 비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이 문장을 옹호하고 있다고 보인다. 분명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치료제로 사용하는 이들을 경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니체는 진리가 위로하는 법을 몰라서 몰락했다고 말한다. 오류가 바로 위안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진리는 오류를 배제시킨다.
그 결과 진리는 괴로워하고 위축되어 있고 병든 인간의 상태와 어떤 점에서 공통점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424장의 골자는 오류가 인간에게 위안을 준다는 그 사실이 곧 진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진리는 [인간의 건강에 도움이 되거나 인간에게 유익한 것] 이외의 것들은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고 가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류라는 비진리 역시 진리에 포함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즉 어느 한 면을 배제하고선 진리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오류를 배제한 진리는 절름발이 진리라는 것이지 않을까.
이렇게 보았을 때, 니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은폐된 이면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니체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차이는 바로 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철학이나 과학의 지점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이전을 가리키고 있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 형상 너머를 탐구하는 것이 철학의 입장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기이하게도 이러한 현대 철학의 입장이 오히려 더 형이상학적이 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