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와 평상심 (3)/ 2022/01/05
* 글이 길어서 숫자로 나눴다. 아래 7번은 지금 새로 써넣은 글이다. 7번 글 자료 부분은 ai가 정리한 것을 옮겨서 붙였다. 2022년에 썼지만 지금 상황과 더 잘 맞는 것 같아서 올린다.
1.
정치적인 ‘중도층’은 무엇일까? 이 ‘중도층’이라는 말에는 어떤 의미가 은폐되어 있는 것일까? 정치와 거리를 두는 회자되는 표현에는 ‘무당층’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무당층은 어떤 형태로든 정치적이다. 이미 무당층이란 말에는 그 자체로서의 색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스탠스를 때에 따라 바꿀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특정 정당을 선호 혹은 배제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은 이미 정치적인 행위이다. 오히려 이러한 극단적인 형태가 더 정치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도층이란 말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이 중도층이라는 말에는 잠재적인 권력과 그 권력 행사에 보이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포괄적인 느낌을 준다. 그러나 보통 중도층은 환상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딴은 그렇다. 잠재적인 것은 일종의 환상적인 형태이기 때문이다. 가능성은 있으나 아직 실현되지는 않은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 잠재적인 가능성을 포기할 수도 무시할 수도 없다. 그 막연함이라는 것은 때로는 공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층’이라는 말에는 어떤 층위의 차원을 전제하고 있는 듯하다. 보통 계층이라는 말을 쓴다. 그렇다면 계층이라는 것에서 보자면 이 계층은 현실화된 계층은 아니고 잠재적인 계층이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잠재적인 계층에 미래를 거는 것이란 무엇일까? 어쨌든 우리는 현재에서 미래를 결정하고는 한다. 지금 바로 여기서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매번 등장하는 것이 바로 ‘중도층’의 선호를 갈구하는 것이다. 이 중도층은 어디에 있으며 그들은 누구인가?
이 질문에는 ‘미래’를 빼놓고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계층의 선호도를 이끌어 내는 것은 바로 미래의 설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는 비전이 반드시 필요해진다. 왜냐하면 잠재적인 계층은 미래의 계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직 실현되지 않는 세계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을 살아야 하는 계층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도층은 현재의 존재가 아니라 미래의 존재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시간을 산다. 시간 안에서 그 자신의 삶을 산다. 그리고 누구나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염원하며 산다.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의 불안과 공포를 잠재적으로 끌어안고 있다. 그러니 그 시간을 지지하는 이들이 중도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전은 바로 그때 빛을 발하는 것이리라.
미래의 계층을 현재에서 찾으려고 하니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모두 비가시적인 형태이며 은폐된 채로 존재하고 있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시간에 투표를 하는 것에서 보자면 그것은 일종의 모험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치에서의 모든 투표는 이 방식을 통하고 있으며, 비전 제시나 일종의 자기 혁신마저도 이 방식을 택하고 있다.
2.
현재에서 잠재적인 계층인 중도층을 추론하자면, 그 계층은 진보도 보수도 혹은 어떤 사회나 환경 운동 등의 색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과 자기 하는 일에 집중해서 살아가는, 그러니까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데에 바쁜 시간을 보내거나, 자기 할 것에 집중하며 사는 사람들의 총칭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모두 미래의 입장에서 보자면 비존재적인 특성을 가진다. 그것은 분명 있는데 없는 것이며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니 마치 허상 혹은 유령 같다. 그렇다. 중도층은 허상적 존재이며 무의미적 계층이다. 그런데 이 허상적 존재이면서 무의미적인 계층은 시간 속에서 존재한다.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며 가능성인 비전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언제든지 색으로 드러날 기회를 엿보며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중도층’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우리는 중도라는 말이 여기와 저기의 딱 절반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럼 무엇일까? 여기에는 모호함이 있다. 어떤 선명성이 가려져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중도적으로 존재한다라는 말 자체가 본질적으로 모호하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맨 처음 이 말을 사용한 이는 그것을 모르고 모호한 용어를 사용했을까? 그렇다면 왜 중용층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을까? 어이하여 또 다른 이름은 없는 것일까? 모호한 대상을 모호하게 지칭하기에 중도라고 부르는 것일 것이다. 그것은 언어의 표현을 벗어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며, 인식으로만 잡히는 것이지 실제적으로 잡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인식으로만 잡히는 그 너머의 선험적인 실재적인 세계에서의 환상인 즉 비전 형태로서의 존재함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끝없이 현상의 세계로 넘어오기 때문이다. 무의미의 의미화로서 넘어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중도의 본래적 의미는 무엇일까? 거기에 해답이 있을 것이다. 중도층에서 층을 제외하고 ‘중도’ 자체만을 놓고 보면, 이 용어는 석가모니가 맨 처음 설법한 초전법륜初轉法輪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석가모니는 중도적인 입장에서 설법을 하였는데 이 초전법륜을 중도대선언中道大宣言이라 한다. 양극단인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 단상중도斷常中道라고 한다. 그러므로 연기법은 곧 중도실상中道實相 이겠다. 한자로는 가운데 중中과 길 도道로 번역되었다. 중도의 산스크리트어 표기로는 madhyama-pratipad마다야마-프라티패드인데, 치우치지 않는 가운데를 의미한다고 한다.
대승불교에서의 중도는 중관학파의 창시자인 ‘용수龍樹Nagarjuna’가 초기불교의 중도사상을 이론적으로 확립했다고 한다.
3.
그 후 각 불교의 종파들에서도 중도를 표현하였는데, 그 중에서 신라시대의 원효元曉 대사는 중도 개념을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 첫 번째 인용문은 금강삼매경론의 해석된 글을 검색해서 가져온 것이며 두 번째 인용문은 <금강삼매경론>의 책 본문을 검색해서 가져온 것이다.
* "무릇 일심의 원천은 유·무를 떠나서 홀로 청정하며 삼공三空의 바다는 진속을 융화하여 담연湛然하다. 담연하여 둘을 융화하나 하나가 아니요 홀로 청정하므로 양변兩邊을 여의었으나 그렇다고 중간도 아니다.
중간이 아니면서 양변을 떠난 까닭에 있음의 법法이 아니면서도 없음에 머물지도 않고 없음의 모습이 아니면서도 있음에 머물지 않는다. 하나가 아니면서 둘을 융화한 까닭에 진眞이 아닌 사事가 아직 속俗이 된 것은 아니며 속이 아닌 이理가 아직 진이 된 것도 아니다.
둘을 융화하면서도 하나가 아닌 까닭에 진 속의 성품이 서지 않는 바가 없고 염染·정淨의 모습을 갖추지 않은 바가 없다.
양변을 여의었으나 중中이 아닌 까닭에 유·무의 법이 이루어지지 않는 바 없고 옳고 그름의 뜻이 두루하지 않는 바 없다.
그러므로 파함이 없으되 파하지 않음이 없고 세움이 없으되 세우지 않음이 없으니 아무런 이치가 없으면서도 지극한 이치이며[無理之至理] 그렇지 않으면서도 크게 그러하다[不然之大然]." [인용문 출처 : https://m.blog.daum.net/bobae5656/991]
* ‘이와 같은 공들’이란 3공(空) 전체를 들어 말한 것인데, 속제의 상에도 머물지 않고, 진제의 상에도 머물지 않고, 그것이 둘이 아니라는 상에도 머물지 않기 때문에 ‘3상(相)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머물지 않음으로써 철저하게 진실을 드러내기 때문에 ‘진실(眞實)이 없지 않다’고 하였다. 진실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진실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문자나 언어로 나타낼 길이 끊어졌다’고 하였으며, 길이 끊어졌다[道斷] 는 말도 붙일 수 없으므로 ‘불가사의(不可思議)’라고 하였다. <금강삼매경론 본문에서> [인용문 출처 : https://m.blog.naver.com/monkmoney/222048071321]
<금강삼매경론>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중도’에 대한 설명 즉 공에 대한 설명은 딱 부러지게 이거다! 라는 형태가 아니다. 그것은 왜 그런 것일까? 사람이 시간 속에서 살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계속 변화하며 계속 움직이며 산다. 그러니 그것은 고정되어 있는 붙박이 존재가 아니다. 계속 움직이며 변화하는 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말이 만들어지지 않고 다만 그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것만이 제대로 보는 것이라고 여긴다. 석가모니는 그것을 연기법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메커니즘을 ‘중도’라고 이름 붙인 것이며, 후에 ‘공’이라고 명명 되었다고 여긴다.
‘중도층’이라는 말은 이 공의 메커니즘과 잘 맞아 떨어진다. 역사적인 정치에서 백성과 민의를 살핀다라는 의미도 바로 그러한 맥락과 궤를 같이할 것이다. 예로부터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의 근원도 이 ‘공’의 메커니즘에 의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변화하고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것을 잡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과 같다. 어떻게 잡는가? ‘중도층을 공략’ 하는 것으로 별을 따는 것이 모든 정치인들의 소망일 것이다. 이리 살펴보니 허상을 잡는 것 같은 그런 표현들은 차라리 허상이 아닌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한국 정치의 ‘중도층’에 대한 개념과 가장 근사치로 가까운 것은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에서의 ‘중도’개념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 이유는 원효의 사상이 민초들의 지지를 가장 크게 받았었기 때문이고 그의 사상은 동북아시아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 정치의 ‘ 중도층’이라는 말에는 원효의 실천사상이 깃들어 있다고 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4.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중도층’은 무엇인가? 글의 서두에서 설명했다시피 중도층은 비존재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용수와 원효는 중도를 공의 사상에 입각하여 설명하였다. 들뢰즈는 중도에 대해 설명한 적은 없지만 그의 철학에서 나는 공에 대한 것을 강하게 자극 받았다. 비존재적이거나 혹은 공허한 무의미 등을 다루는 것에서 그러했다. 공은 비어 있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다. 허공은 비어 있는 것 같지만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다. 무의미는 오히려 의미의 산실이 된다. 비존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단지 손에 잡히거나 보이지 않을 뿐이다. 이러한 것에서 나는 어떤 일치성을 전달 받았고 ‘중도층’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 영감을 받았다.
그렇다면 이 비존재 또는 공한 존재이자 무의미적 존재가 존재하는 지대는 어디인가? 그 지대는 일종의 장소적인 의미와 같다. 그 장소는 바로 ‘강도의 세계’이다. 물론 이 강도는 들뢰즈적 의미의 강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실재적인 형태로서의 강도의 세계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현실의 세계라고 말한다. 그러나 중도층이라고 표현하였을 때 그 중도층의 지대는 실재의 세계가 된다. 이 실재의 세계에 의하여 우리는 어떤 모호함을 느끼는 것이다. 왜 그럴까? 실재는 현실의 동력원임에도 불구하고 눈으로 보이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있는 사물의 세계와 실재적인 세계는 다르다. 실재적인 세계는 어떤 막이 씌워져 있는 세계와 같다.
그러니까 실제의 세계에 실재의 세계는 중첩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우리가 움직이지만 우리가 어떤 자기 안에서 어떤 영상화되는 생각들 즉 마음이라고 하는 것의 도움 없이는 생명이라기보다는 그저 하나의 기계에 불과하듯이, 우리는 육체라는 기관에 마음이라는 것과 중첩되어 있다. 이로써 우리는 비로소 생명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뇌에서 일어난다고 하여도 뇌는 생각하고 상상하는 영상작용을 만들어서 육체를 움직인다. 일종의 환상적인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것은 판타지 형태이기도 하다. 판타지가 반드시 공상영화에 국한 되는 것은 아니다. 뇌의 이런 작용을 투사시킨 것 역시 예술이며 영상 매체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세상은 뇌가 투사시킨 것을 물질화 시킨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승불교의 공사상과 들뢰즈의 철학은 거의 동일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다른 철학들을 살펴보아도 큰 차이는 없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철학은 존재론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본 것이며, 존재하는 인간과 인간 사회적 관계망을 그대로 관찰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 역시 최초의 인류 이래 변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시대나 공자의 시대나 소크라테스 시대나 혹은 들뢰즈의 시대나 달라질 것은 없고, 단지 언어적으로 더 복잡해지고 더 많은 해석적 방법론이 등장 하였을 뿐이다. 더 치밀하게 인간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였고 좀 더 직접적으로 인간을 해석함으로써 더 인간에 대한 묘사가 섬세하게 진행되었을 뿐이다.
들뢰즈 철학은 그 이전의 철학들과 당대의 철학들을 모두 총망라해서 분석하고 참고하였다고 여긴다. 그의 철학은 모두 인간과 사회에 대한 분석이며 그리고 인간을 다시 제대로 조립하여 놓았다고 여긴다. 자연 안의 인간으로 되돌려 놓은 것이다. 선불교가 그러했듯이 그는 인간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간 후 다시 표면으로 복귀하였다. 인간은 표면으로 미끄러질 때 평상심을 회복하게 된다. 우리의 삶은 모두 표면에서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이 표면에서 우리는 동영상화된 생각을 통하여 뭔가를 시도하고 행위하지만, 그럼에도 문득 문득 심연으로 빠져든다. 그럴 때 ‘평상심의 도’인 항상성으로 행위하여야 한다. 움직이는 것으로써 중심을 잡아야 한다. 그리고 강도의 세계에서 그 자신을 연마하여야 한다. 강도의 세계는 행복한 세상일까? 행복하다기 보다는 유쾌한 세상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라! 현실이 마냥 행복한가? 마냥 행복해서 우리는 웃는가? 아니다 웃으니까 웃음이 따라오는 것이다. 현실은 역설의 역설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니 이 현실세계 자체를 ‘강도의 세계’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5.
현실은 강도의 세계 그 자체의 강도를 가지고 굴러간다. 그러니까 현실을 빡센 장소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다시 그 자신들 각자의 강도의 세계가 있다. 그러므로 실존의 세계는 밀도가 강하게 걸려 있는 상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밀도는 강도의 세계들이 무수하게 모여 있기에 형성된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사회에 밀도가 강하게 걸린 것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의 강도가 세기 때문이다. 그것은 각자가 자기 강도의 세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세계들의 강도가 서로 맞부딪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강도는 힘 대 힘의 대결로 나타나지만, 각자의 강도의 세계는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다. 이 각자가 그 자신의 강도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에서 드러나지 않은 지대를 가리키는 표현이 ‘중도층’이라고 여긴다. 왜 드러나지 않을까? 그것은 항상성으로 살아가는 일반적인 모든 사람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원효 대사가 중도를 설명하는 것에서 보자면, 이는 곧 민중의 형태와 그 의미가 흡사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백성이라는 말은 민중이라는 시뮬라크적인 특성을 나타낼 때, 주체가 되어야 할 시물라크르와는 뜻이 잘 부합하지 않으므로 민중이라고 표현함. 시물라크르가 가진 전복의 특성, 즉 무의미적 존재가 의미화 되는 것의 특성, 그러므로 인간의 창작은 이렇게 진행되는 것이며, 그 사회의 변화도 그렇게 진행되는 것.
민중의 특성은 곧 들뢰즈가 말하는 시뮬라크르의 특성과 흡사하다. 잠재적인 특성과 전복의 특성 그리고 무한히 많은 다수의 특성. 심층에서의 모든 것이 뒤섞여 무의미가 된 상태에서 다시 표면으로 미끄러지며 의미가 되는 것들. 강도의 세계에는 심층을 벗어나서 전복을 꿈꾸는 시뮬라크르들이 우글거린다. 즉 이 우글거리는 시뮬라크르는 인간 안에서 어떤 의미들로 화하는 것들이다. 잠재성이 가시화되는 것에서 보자면, 이는 곧 공이 색으로 변화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중도층의 지대’는 ‘공의 세계’라고 볼 수 있다. 즉 색을 드러내지 않는 형태로서의 잠재적인 미래 비전의 유권자 지대이다. 이 공의 지대를 나는 ‘회색지대’라고 부를 것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이 회색지대를 왔다 갔다 한다. 어떨 때는 색을 드러내고 어떨 때는 이 회색지대에 의해 가려지고, 이런 반복을 통해서 사회는 어떤 한 시대의 방향성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이 회색지대는 일상성이 숨 쉬는 혹은 평상심으로 살아가는 다수의 삶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 자신의 삶의 균형을 만드는 시간에서 이 회색지대가 없다면 우리는 모두 완전한 반 토막으로 분리될 것이다. 생명의 기능을 상실할 것이다.
하나의 존재를 유지하는 것은 이 회색지대에 의해 회전하기 때문이다. 이 지대는 들고남이 자유로워서 어떤 통제가 없다. 우리는 모두 이 지대를 넘나든다. 회색지대는 섞여서 부연 안개처럼 모든 것을 식별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 계층 그러니까 이 지대를 ‘중도층’이라고 한다. 공의 지대인 이 지대는 생성의 지대이기도 하다. 이 생성의 지대는 안개처럼 부옇게 가려져 있으므로 회색지대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고 분명 있지만 비존재로써 쉽사리 여론에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회색분자라는 말이 있다. 이제 이 회색분자라는 정치적인 용어는 용도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 회색지대는 일상인이자 생활인 더 나아가면 자연인 더 나아가면 평상심의 지대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회색분자라는 과거 정치적인 용어는 프락치라는 말로 사용되었다. 사상이 불분명하거나 혹은 이중 스파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용어적인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이미 이러한 형태는 색을 드러낸 것에 가까운 것이지 회색지대에 있는 형태는 아니기 때문이다. 사상 검증에 실패한다거나 혹은 검열을 피하였다고 치더라도 이미 어떤 액션을 취했다면 색을 드러낸 것과 같다. 이중 스파이 역시 이미 이중이라는 색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단지 몰랐다는 것으로 회색분자라는 말을 붙이면 그 광활한 지대를 통으로 날려버린 것과 같을 것이다.
6.
회색지대의 의사 표현을 이끌어 내는 것을 정치적으로 보자면 '중도층 공략'이다. 관망하며 지켜보며 정치나 뉴스를 배경음악으로 들으며 관조하는 시간에서 서서히 중도층의 움직임은 어디론가 흐름을 만든다. 자기 안에 오는 자극들을 쳐내면서 표현을 외면하는 시간에서 오는 긴 침묵은 결국 서서히 어떤 방향성을 만들 수밖에 없다.
회색지대라 하여 정치적인 의사표현이 없을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표출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자신들도 어떤 자기 생각을 가다듬으려면 표현과 접촉의 과정에서 다듬어지기 때문이다. 일종의 생각정리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이러한 과정이 여론에 반영되지 않을 뿐이다. 생각정리 기간이 여론에 반영되기는 어렵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인 중도층이면서 동시에 회색지대에 머문다. 이 회색지대에서 우리는 우리를 회복시킨다. 일종의 쉼터이자 생존 터이자 인큐베이터 역할이다. 치유의 역할이자 가능성의 상태를 재점검하여 나아가는 장이다. 그러니 중도이자 평상심은 계속 움직이는 장이면서 생성의 장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중도의 장이야말로 강도의 세계이며 시뮬라크르들이 전복을 꿈꾸는 지대이다. 즉 미래 비전으로서의 가능성의 지대라고 할 수 있다. ‘중도’는 어떤 에너지의 장이면서 동시에 역동적인 현장이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가능태로서 존재하는 중도의 장에서 가능성으로 나아가는 지대이다. 그것은 바로 공의 지대이자 회색지대이다.
모호하게 다가오는 막연한 단어와 개념어를 좀 더 명확하게 삶으로 끌어들여 이해해 보면서 살아 보는 삶의 형태를 만들어 가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중도층’이라는 모호한 말에 내 방식으로 개념을 탑재하여 보았다. 막연하면 막연해진다. 명확하면 명확하게 나아간다. 막연함과 명확함, 모호함과 명징함. 이 둘의 작용은 계속 회전하며 나아간다. 나선형으로 꼬여서 같이 간다. 그 자체가 방향성이며 화살표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특이점들의 선線의 형태는 일의성이다. 일의성이 곧 화살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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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3/저녁 10:16
지금 다시 쓰라고 해도 못 쓰겠다. 길기도 하지만 이 정도 집중력은 그때에만 나오는 것. 글이 나온다는 것은 그때의 환경인 것이다.
이글에 추가하자면, '중도'는 서구의 '피론주의'와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피론(Pyrrhon, BC 360년~BC 270년)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에 함께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왕의 친구들(헤타이로이)’을 하나의 기병 부대로 편성하여 동방원정을 떠났다. 동방원정에 참가한 주축은 왕의 친구들인 장군들과 후계자들(디아도코이)이었다. 거기에 피론도 있었다.
피론은 인도 북부 에서 "인도의 종교 수행자들과 접촉했다고 한다. 쉬라마나(遊行僧)인 불교, 자이나교 아지비카교 고행수도자들과 접촉하면서 인도 종교사상을 배우게 되었다. 불교의 삼법인(三法印)이 그에게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고 한다.
피론은 인도 원정을 다녀온 후 그리스 철학의 데모크리토스 회의론과 불교사상을 접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피론이 인도에서 접한 경험은 육체적 쾌락을 피하고 자연의 관상(觀想)을 주로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여기에서 비술(秘術)·금욕·현자의 도(道)를 배웠다고 한다. 인도에서 돌아와 철학자로서의 생애를 시작했다. 저서는 남아 있지 않지 않다. 피론주의는 그 이전의 회의주의와 구별하여 '피론주의'라고 불린다. 그의 제자인 티몬(BC 320년경~ BC230년경)이 그의 학설을 전했다. 그후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AD 160~210년경)에 의해 '피론주의 회의주의'는 체계화 되었다. 그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고대 그리스 회의주의는 피론에 의해 인도 불교 사상과 만났고 서로 섞여서 '피론주의'가 되었다. 이 피론주의는 다시 인도 대승불교의 '용수(니가르주나, 150~200년경)'에게 영향을 주었고, 중관(中觀·Madhyamaka)사상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서양 불교학자들은 보고 있다고 한다.
중도(中道,Madhyamāpratipadā,마드햐마프라티파다) 개념은 석가모니(고타마 싯다르타)에 의해 확립되었다. 그는 깨달음을 얻기까지 극단적인 쾌락과 극단적인 고행을 모두 경험했지만, 어느 한쪽도 진정한 깨달음으로 이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고락중도(苦樂中道)'라는 실천적 원칙을 세우고, 균형 잡힌 수행을 강조했다.
중도의 핵심 개념
- 고락중도 : 지나친 쾌락과 극단적인 고행을 모두 배척하고, 균형 잡힌 수행을 따르는 길.
- 팔정도(八正道) : 올바른 견해, 사유, 언어, 행동, 생업, 노력, 정념, 정정을 실천하는 수행법.
- 연기법(緣起法)과 중도 : 모든 존재가 서로 의존하고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극단적인 집착을 버리는 태도.
이후 대승불교에서는 중도 개념이 더욱 철학적으로 발전하여 '중관학파'에서 '팔부중도(八不中道)' 개념을 정립했다. 이는 생멸, 단상, 일이, 거래 등의 극단을 떠난 길을 의미 한다.
팔부중도(八不中道)는 용수(龍樹, Nāgārjuna)가 『중론(中論)』에서 설명한 개념으로, 연기(緣起)의 본질을 여덟 가지 부정을 통해 나타낸 것이다. 이는 극단적인 견해를 배제하고, 중도의 입장을 강조하는 불교 철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이다.
팔부중도의 여덟 가지 부정
1. 불생(不生, anutpāda) – 사물은 본래 생겨나지 않는다.
2. 불멸(不滅, anirodha) – 사물은 본래 소멸하지 않는다.
3. 부단(不斷, anuccheda) – 사물은 단절되지 않는다.
4. 부상(不常, aśāśvata) – 사물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5. 불일(不一, anekārtha) – 사물은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다.
6. 불이(不異, anānārtha) – 사물은 완전히 다른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7. 불래(不來, anāgama) – 사물은 어디서 오는 것이 아니다.
8. 불출(不出, anirgama) – 사물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다.
팔부중도의 의미
팔부중도는 연기법(緣起法)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모든 존재는 독립적으로 생겨나거나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사물은 고정된 실체가 없으며, 연기 속에서 공(空)한 성질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희론(戲論, 언어적 다원성)의 소멸'을 통해 분별을 없애고, 궁극적으로 '해탈(解脫)'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용수는 『중론』에서 이러한 중도의 입장을 통해 불교의 핵심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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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론주의의 핵심 원칙
1. 판단중지(Epochē) – 어떠한 주장도 확실하게 증명될 수 없으므로,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
2. 아타락시아(Ataraxia) – 판단을 유보함으로써 정신적 평온을 얻을 수 있다.
3. 트로포이(Tropoi) – 회의주의적 논증 방식으로, 아이네시데모스의 10가지 트로포이와 아그리파의 5가지 트로포이가 있다.
4. 독단주의 비판 – 스토아 학파와 같은 독단적인 철학을 비판하며, 절대적인 지식의 가능성을 부정.
이상과 같이 피론주의에 중도 사상을 대조해 보았을 때, 어떤 유사성이 있다고 보인다. 에포케는 특정하게 무엇이다로 단정지울 수 없기에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고, 추이를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에포케(판단중지) 상태는 어떤 종합적 상태라고 보인다. 많은 것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어떤 사안에 대해서 또는 사건에 대해서는 그 변수 하나만 움직여도 걊은 달라진다.
아타락시아는 에포케 상태에서 얻는 평정심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피론주의는 르네상스에 다시 탄력을 받았다.
그리스 철학과 동방의 철학이 만난 것은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에 의해서이고, 헬레니즘 문화 영향의 연장선에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