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시몹 낭독회 '시즌 7' <에세 2>로 낭독으로 이어가다
낭독 '시즌 7'로 여름의 한복판으로 들어간다. 선거가 끝나고 그다음 주 플래시몹 낭독회도 방학에서 벗어났다. <에세 2>로 낭독을 이어가기로 했다. 요일과 시간을 조정하였다. 매주 수요일에서 매주 화요일로 변경하였고, 낭독 소요 시간은 30분 앞 당겼고, 2시간에서 한 시간으로 줄였다. 대신 칼입장하고 칼퇴장하기로 하였다. 입장과 동시에 한 시간 동안 세 사람이 20분씩 낭독으로 돌아가며 책을 읽고, 끝나면 바로 "안녕"하며 줌 화면을 끄는 것으로. 남은 세 사람은 그다음 주에 낭독으로 읽는 것으로 하였다. 총 6명이니까 매주 세 사람만 읽는 것이다. 일단은 이렇게 해보기로 하였다. 낭독 시간이 줄어든 만큼 한 시간 읽기 낭독에 더 집중하고 듣기에 몰입하는 것이다. 세이브된 늦은 저녁 시간은 아껴서 각자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시간으로 되돌아갔다. (여유 시간 또는 밤이니까 푹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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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글은 '책 속에서'를 대신해서 올린다. <에세 1> 낭독이 끝나고, <에세 2>는 아직 낭독하지 않았으니, <에세 1>에 대한 내 질문과 ai답변으로 대신한다.
* 내 의도 : 몽테뉴 <에세 1>에서, 피론주의라고 바로 알아볼 수 있을 만한 예시를 내가 선정하여 AI에게 질문하였다. 몽테뉴가 피론주의를 받아들였으므로(이미 그렇게 알려져 있으므로), 몽테뉴의 <에세>의 문장이나 글 구성 방식에서 볼 때, 어떠한 형태가 피론주의적 글의 형태인가를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그 설명은 AI가 잘 정리하여 주었다.
* 이러한 피론주의 형태를 보면 '관점주의'의 대두는 필연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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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7> * 내 질문은 <에세 1> 부분 본문 인용 그 자체이다.
몽테뉴 <에세> 14장 p110~120 < 좋고 나쁜 것은 우리 견해에 달려 있다>
<우리는 괴상하게 정신 나간 존재들/ 견해 때문에 번뇌에 빠진다> p110
고대 그리스인들의 격언이 말하기를, 인간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견해 때문에 번뇌에 빠진다. 만일 모든 것에 대해 이 명제가 참됨을 입증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가련한 인간 조건을 완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왜냐하면 불행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이 오직 우리의 판단 때문이라면, 그것을 무시하거나 좋은 일로 만드는 것도 우리 능력에 달린 것으로 여겨지니 말이다.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면 왜 우리가 주인으로서 그것들을 다스리지 않을 것이며,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조절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불행 또는 고통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자체로서 불행이나 고통이 아니고, 단지 우리 생각이 그 사물에 그런 성질을 부여한 것이라면 그것을 바꾸는 것도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러니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고 그 무엇도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는데,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쪽으로 스스로 비끄러매어 병, 궁핍, 멸시 같은 것에 시큼하고도 기분 나쁜 풍미를 부여하는 '우리는 괴상하게 정신 나간 존재들'이다.
우리가 좋은 맛을 부여할 수 있다면, 운명은 단지 재료만 제공할 뿐 그것에 형태를 주는 것이 우리 자신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불행이라고 하는 것이 그 자체로 불행한 것이 아니라거나 또는 적어도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에 다른 맛, 다른 얼굴을 부여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주장'이 유지될 수 있는지 따져 보자. 결국 다 같은 말이니 말이다.
만일 우리가 두려워하는 그런 일들의 고유한 본성이 그 자체의 권한으로 우리 안에 들어올 만한 영향력을 지녔다면 누구에게나 비슷한 모습으로 들어올 것이다. 인간은 모두 같은 종에 속하고, 아주 강한 사람이나 아주 약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동일한 수단, 동일한 기관을 가지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일들에 대한 우리 의견이 갖가지인 것을 보면 그 의견들이 사물과 우리 사이의 조율을 통해 우리 안에 자리 잡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어떤 이는 우연히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지만, 수많은 다른 이들은 그것에 새롭거나 상충하는 본질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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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고통> p111~
우리는 죽음, 가난, 고통을 우리의 가장 큰 적으로 여긴다. 그런데 누가 모르는가? 어떤 이들이 끔찍한 것 중에서도 제일 끔찍한 것이라 부르는 그 죽음을 다른 이들은 이승의 고통이 끝나는 유일한 항구, 자연이 내려 주는 지복, 우리 자유의 유일한 지주, 모든 불행을 한 방에 날려 버릴 처방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어떤 이들이 두려움에 떨면서 죽음을 기다릴 때, 다른 이들은 사는 것보다 더 쉽게 죽음을 견딘다.
“그런 자는 죽음이 쉬워서 불만이다. ”죽음이여, 비겁한 자의 목숨 빼앗기를 경멸하라, 오직, 용감한 자들만의 몫이 되어라! “ -루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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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질문 : 위의 몽테뉴 <에세 1>의 글쓰기 방식과 내용은, 몽테뉴가 피론주의의 에포케에 입각하여 썼다고 보아도 좋은가?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 줘
AI : 몽테뉴의 <에세 1> 14장은 피론주의의 에포케(epoche, 판단 유보) 개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피론주의와 몽테뉴의 사상 연결
1. 판단 유보(epoche)와 사물에 대한 견해
- 피론주의는 어떤 주장도 확신할 수 없으며,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 몽테뉴는 <에세 1> 14장에서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우리의 견해가 번뇌를 만든다”라고 주장하며, 이는 피론주의적 사고와 유사합니다.
- 즉, “우리가 불행을 느끼는 것은 사물 자체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피론주의의 핵심 개념과 맞닿아 있습니다.
2. 죽음과 고통에 대한 태도
- 피론주의는 “모든 사물에 대해 확신을 피하고, 판단을 유보함으로써 평온(아타락시아, ataraxia)을 얻을 수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 몽테뉴는 <에세 1> 14장에서 “죽음과 고통이 본질적으로 끔찍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 따라 달라진다”고 설명합니다.
- 이는 피론주의적 태도와 유사하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통을 견디는 방식이 개인의 견해에 달려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3. 다양한 관점과 회의주의적 태도
- 피론주의는 “모든 주장에는 반대 논거가 존재하며, 따라서 확신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 몽테뉴는 <에세 1>에서 “같은 사건을 겪더라도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이며, 따라서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합니다.
- 이는 피론주의의 회의주의적 태도와 일맥상통하며, 몽테뉴가 피론주의적 사고를 기반으로 글을 썼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결론
몽테뉴의 <에세 1> 14장은 피론주의의 에포케 개념을 반영하고 있으며, 판단을 유보하는 태도를 통해 인간의 번뇌를 줄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특히, 죽음과 고통을 바라보는 방식이 개인의 견해에 따라 달라진다는 주장은 피론주의적 사고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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