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신체사유 2

달차와 무의식적 말의 발화

여름에 차를 달이다 / 블랜딩 달차

by 아란도


한 여름에 차를 달인다. 물론 다행히도 전기 포트로 달인다. 여름에 차를 달인 이유는 차갑게 마셔도 좋기 때문이다. 냉장고에 넣어두고 시원하게도 마시고 데워서 따뜻하게도 마신다.


무더운 한 여름을 차 달이며 보내면서 이런 생각했다. 하필 이 무더운 여름에 차를 달이는가? 더 많은 물과 차를 마시기 때문이겠지만, 무엇보다 이건 거의 본능적으로 행하는 노동이라는 생각을 했다. 여름을 더 뜨겁게 보내게 되는 삶의 패턴. 여름은 한가하면서도 바쁜 것 같다.


사람들과 달인 차를 나눠 마시면서, 퍼뜩 무의식적인 말의 발화의 무서움을 알았다. 지난 6개월 동안에 뇌리를 어지럽힌 말들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러한 말들이다.


"이제 빈 병이 없어서 차는 그만 달이려고요. 생수를 사고 집 안의 빈 병을 있는 대로 다 수거했는데도 이제 빈 병이 없어요"


"오늘 나오실 분들이 다 오시지 않아서요. 오늘 모인 인원이 절반이어서 차가 남아서 드린 거예요"


이렇게 나도 모르게 수거와 인원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말을 하면서도 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렇구나! 어떤 말들이 각인되면 저절로 나오게 되는구나. 딴은 내란 이전에도 이 단어들을 사용했었을 수도 있다. 그때는 아무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이 단어들이 말속에 섞여 들어 나오자 순간 흠칫했다. 이 말들에 대해 경계심이 생겨버린 것일까? 아니면 지난 내란에서 이 말들이 불미하게 사용된 그 생경함 탓일까?


언어가 죽는다는 것, 말속에 어떤 말들이 은연중에 배어날 때 놀라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말의 환경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6개월 간 반복적으로 수거와 인원이라는 말이 재차 파괴되었다. 두 말이 죽어버린 것이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아란도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마음에 비치는 것들을 씁니다. 글쓰기에 진심입니다. 이제 봄이고 오늘은 비가 오고 차를 한 잔 마시고 내 안에서 꿈툴대는 언어들을 옮깁니다. 좋은 날이 그대와 나에게도 함께하기를!

151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8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31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