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의 '연구된 죽음'이라는 표현과 존엄한 죽음
몽테뉴의 '연구된 죽음'은,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를 연상하게 한다. 아주 예전에 읽다가 말았다(그때 뭘 알았겠는가만은). 다시 읽어볼까 싶다. 낭독으로 읽어야 그 맛이 더 산다는 데, 낭독으로 읽어도 좋을 듯하다.
( )이 '텅 빔의 존재인 인간 본래의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도 몽테뉴처럼 에세적으로 썼다. ( )에서 다시 산자들에게 회수되는 것은 무엇일까. 이러한 메커니즘 역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인간 사회 자체가 작동하는 방식이자 동력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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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에 대해서 그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그 사람의 전체가 아니다. 그저 아주 작은 한 조각일 뿐이다. 때로는 안다고 하여도 핵심 조각 한 조각을 모를 수도 있고, 모른다 하여도 핵심 조각 한 조각을 알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한 사람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을까?
모든 조각이 맞춰져야만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조각은 맞춰질 수 없다. 우리는 그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말하지 않은 것, 생각, 감정, 정서에 대해서는 그저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한 사람에 대해서 결코 완전하게 알 수 없다. 부분 조각들이 모인다고 하여도 전체를 충족할 수 없는 이유다.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보이는 스펙트럼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나의 애도 역시 나의 한 시절에서 내가 본 스펙트럼에 대한 것뿐이다. 그저 부분 조각 기억에 대해 애도한 것뿐. 더 많은 이들이 모인다면 (하지만 이미 모인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내 기억이 부분 기억이란 것을 알겠다) 더 빠진 부분이 보충되겠지만 그걸로 완성되지는 않는다. 본인이 내놓은 것도 부족하다. 속마음이 혹은 어떤 감정들이나 무수한 일화기억은 빠져있으니까.
사람은 빠진 그 빈 공백을 보통 상상으로 채운다. 그것이야말로 어떤 이입한 감정일 것이다. 인간의 상상력 작동 방식은 그렇게 부재된 상태로부터 기인하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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