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의 계보 서문을 다시 읽다가 드는 생각이다. 일상에서 놓치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 얼마큼이나 접근하고 있는 것일까? 자기 자신이라는 개념조차도 잡고 있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말이란 그 의미를 분명하게 인지하거나 그리고 그런 상황에 대한 체험이 있어야 전자와 후자를 연결할 수 있다. 바로 그때 '자기 자신'이라는 것에 대해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차라투스트라에서는 조금 더 개별적인 단락으로 이 부분을 니체는 인식하게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무의식 상태에 파묻혀 있을 때 인간의 그 무거움은 말로 헤아릴 수 없다.
해안 산책로의 소란스러움을 담당하는 갈매기
요즘은 글로 정리해야 될 것들에 대해 적체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내가 실행해야 하지만 이 적체된 일들은 모두 내 자신의 일이다. 나의 일이기도 하지만 반면에 내 자신의 일이기도 하다. 내 자신의 일을 내가 하지 말아 버릴 때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필연을 결정하는 것일 것이다. 자신의 일을 할 때 필연이 되고 하지 않으면 그냥 삶을 사는 것이다. 편하게 일상을 사라고 남들 사는 것처럼 사라고 하는 말들은 모두 나의 삶이다. 반면에 하기 싫은 것 때로는 귀찮은 것은 모두 자신의 일이다. 그렇다. 자신은 일을 시키는 자이다. 나는 자신의 일을 대행하는 자이다. 자신이 오더를 내리면 뭉기적 거리다가 어떤 식으로든 방법을 찾아 실행해야 한다. 하지 않으면 괴롭다. 실행해야 어떻게든 나와 자신과 일치가 된다. 나의 꿈과 자신의 꿈이 일치될 때 능동적인 삶이 된다. 가벼움이란 무엇인가? 무겁지 않음이다. 가벼움을 알고자 하면 무거워보면 안다. 그런데 이 가벼움은 무중력의 가벼움일까? 유령의 가벼움일까? 이 가벼움은 방향성이 있을 때 나오는 경쾌함일 것이다. 미끄럼 타듯이 내려오는 그런 하강의 순간, 그리고 이내 대지에 발이 땅에 닿는 바로 그런 실질적인 감각일 것이다.
늘 보는 석양인데도 어느 날은 문득 아련한 빛으로 다가 오고...
니체가 서문 1장에서 "그 외의 생활, 이른바 ‘체험’에 관해서라면, 또한 우리 가운데 누가 그런 것을 살필 만큼 충분히 진지하겠는가? 아니면 그럴 시간이 충분한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러한 일에 우리가 한 번도 제대로 ‘몰두한’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거기에 없었다. 거기에는 우리의 귀마저 단 한 번도 있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부분을 다시 살펴보자면, '체험'과 '몰두' 그리고 '진지함'과 '시간의 충분'이다. 무엇인가를 하려면 즉 자신의 일을 하려면 그것은 체험 형태에 자신이 노출되어야 하며, 거기에 몰두해야 하며, 진지하게 그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려면 충분한 시간이 투여되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자신의 일에 자신이 명령하는 일에 자아는 얼마나 복종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일 것이다. 충분한 시간 투여와 진지하게 몰입하지 않고서는 어떤 것에 대해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게 되면 자아는 무거워진다. 무거움을 이끌고 살게 된다. 자신이 강요하는 것을 지성은 탐구하여 해결한다. 그렇게 의식은 확장된다.
소래포구 고등어
고등어와 낙지와 새우를 사들고 돌아오는 길에 일몰이 내려앉고 있었지. 니체는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을 쓰는 것은 본래 한 가지, 즉 무엇인가 '집으로 가지고 돌아가는' 것뿐이다."라고 했는데, 나는 고등어와 낙지와 새우 외에 머릿속에 나 자신이 시키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했어. 그런데도 문득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먼 존재이다"라는 말이 이해가 될 것도 같아. 나와 내 자신에 대해서. 그때 우리는 같이 있었어. 그러면 된 것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