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핵심문장] 더 바이브

by 아르노

세상을 보는 나(I)와 그런 나를 바라보는 나(i), 이 둘은 나의 세계에 늘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항상 함께하는 존재였습니다.


석가는 한마디로 “세상은 환영이다.”라고 규정했습니다. 내 앞에 보이는 세상, 이 우주 삼라만상이 꿈속의 이미지라 말했습니다. 마음속 심상이 세상의 실체라 전했습니다. 꿈속의 이미지와 눈앞에 세상은 같은 것이라 말했습니다.


세상은 심상입니다. 세상은 마음속 이미지일 뿐입니다. 내 마음속 세상을 우리는 매 순간 보고 있습니다. 세상이 내 마음속 이미지라면, 내가 보는 이 세상은 내 마음속 공간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속 공간을 매일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렇다고 믿는 것을 볼 뿐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볼 뿐입니다. 우리 생각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생각이 현실을 만들고, 마음이 만물을 만드는 이유입니다. 사고가 사물을 만드는 진실은 이미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세상의 진리였습니다.


사물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인 것입니다. 있기 때문에 본 것이 아니라, 봤던 기억이 그것을 있게 합니다.


집착하지 않는 눈에는 모든 것이 평화롭습니다. 바라는 즐거움이 아닌, 흘러가는 여유를 느낄 수 있습니다.


과거의 이미지는 사실 미래에서 전달되고 있습니다. 현재가 과거로 연결되고, 미래가 현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재는 미래와 과거의 가교 역할만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본질은 분리에 있지 않습니다. 이원성이 아닌 일원성에 있습니다. 연결되고 통합되는 일원성이 세상이 존재하는 모습입니다. ‘나’는 세상의 한 부분으로 세상과 그리고 타인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언어가 있기에 이미지가 조각으로 분리된 것입니다.


프랑스 사람은 왜 나비와 나방을 구별하지 못할까요? 그들에게는 이 둘을 나누는 언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비와 나방 둘 다 ‘빠삐용’이라는 단어로 불리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나비와 나방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언어가 없으면 세상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언어의 함정에서 벗어나십시오. 그리고 바라보세요. 말에서 벗어날 때, 세상과 연결됩니다. 분리된 언어의 세상이 아닌, 통합된 연결의 우주를 보게 될 겁니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언어가 있을 뿐입니다. 개념만 있을 뿐, 그 개념에 해당하는 그 무엇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간은 환영입니다. 시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오직 지금만이 있을 뿐입니다. 시간이 흐른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십시오. 그 착각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 존재하십시오. 여기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심층 무의식에 각인된 꿈에 대한 규정이 의식의 가장 바깥 표면에 위치한 현재 의식에 투영되어, 현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꿈과 일상은 다르다는 생각이 투영된 것입니다.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라는 관념이 현재 의식에게 전달되어, 꿈과 생시를 구분 짓게 하고 있습니다.


생각은 무의식의 영감을 받아 펼쳐지는 현상입니다. 따라서 심층 무의식에 각인된 꿈에 대한 정의, 꿈에 대한 관념이 바뀌지 않으면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게 됩니다. 꿈에 대한 고정 관념은 더욱 단단해집니다. 그 껍질을 깨는 것이 자신의 생각을 바라보고 그 생각을 일으키는 관념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꿈에서 깨어난 적이 없습니다. 세상은 의식이 만든 신비로운 현상일 뿐입니다. 심층 무의식에 각인된 이미지가 현재 의식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그 이미지 세상을 실체라 착각할 뿐입니다. 세상은 꿈이고 환영이고 이미지입니다.


꿈에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의지대로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꿈의 주인공이 ‘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사실 꿈에서도 나의 기대만큼 꿈이 진행되지 않습니다. 내가 진정한 꿈의 주인이라면 나는 늘 부와 성공을 거머쥔 행복한 꿈을 꾸어야 합니다. 하지만 꿈에서조차 우리는 쫓길 때가 많습니다. 현실만큼 불안하고 공포에 질릴 때도 많습니다. 꿈에 함몰되었기 때문입니다. 꿈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꿈이 꿈임을 모른 채, 꿈에서조차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문득 이것이 꿈임을 알 때가 있습니다. ‘아, 이거 꿈이구나. 나는 지금 꿈 속에 있구나.’ 꿈이 꿈임을 아는 순간입니다. 바로 자각몽입니다. 이때부터 꿈의 양상은 달라집니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꿈의 시간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각성은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각성은 지금이 꿈임을 아는 것입니다. 꿈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이 각성입니다.


우주(Universe)는 바이브(Vibe)와 바이브와 연결된 이미지(Image)의 투영, 즉 ‘U=VI’입니다. 바이브가 세상을 만듭니다. 인생의 다양한 경험은 경험에 대한 느낌을 낳습니다. 그 경험은 나도 모르게 하나의 씨앗(VI)으로 저장됩니다. 상황에 대한 이미지와 그에 동반된 바이브가 각인된 것입니다.


생각을 바라보는 힘은 생각과 동일시된 에고의 탈출에서 시작됩니다. 감정과 하나 된 나는 왓칭하는 ‘눈’을 통해 자유로워집니다. 생각의 굴레를 벗어나고, 감정의 늪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현실을 흘러가게 하는 여유가 생깁니다.


생각은 우리를 가두고 있습니다. 의식의 세상에 우리를 묶어둡니다. 늘 판단하고 분별하는 ‘나’를 만들고 있습니다. 나는 판단합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생각은 떠오르는 것이고 판단은 생각의 부작용일 뿐입니다. 판단은 세상을 허용하지 못하게 합니다.


현상은 허용하는 것이지 판단하고 간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핵심문장] 백만장자 시크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