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과 번식 확률을 높이는 유전적 특질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차츰 보편적인 특질로 자리 잡는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식물과 동물은 이런 방식으로 각자의 환경에 적응해왔다.
문제는 우리의 선조가 살던 세계나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가 그런 완벽한 세계가 아니라는 데 있다.
짐작하건대 우리의 선조가 처했던 주변 환경은 분명 기회보다는 위협이 많았을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이 어쩌면 더 일반적이었을 수 있다는 점은 대부분의 언어에 긍정적인 감정어보다 부정적인 감정어가 더 많은 이유일 수도 있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면 인간 뇌에서 가장 고도로 발달한 독특한 부분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 그저 진화에 따라 오래되고 원초적인 부분에 의존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스트레스 상황에는 빠르고 강력하게 대처할지 몰라도, 바로 뇌의 ‘생각하는’ 부분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결국에는 문제를 더 키우게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주변의 평가에 본능적으로 민감한 것은 뇌가 아직 현대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또 하나의 사례이기도 하다. 직장에서 프레젠테이션을 제대로 못 했다고 해서 바로 직장을 잃고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러나 우리가 발달시켜온 세계에서는 무리에서 배제되는 것은 생사와 직결되었다. 소속감은 안정감뿐만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외톨이는 살아남는 게 불가능했다.
스트레스를 주던 요인들은 머리 위로 이불을 뒤집어쓴다고 해결될 게 아니다. 그런데 뇌는 이러한 논리를 무시하고 도망치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뇌가 오늘날의 세계에 맞춰 발달하지 못한 탓이다. 대신 회피를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왜냐하면 뇌는 스트레스를 세계가 위험하다는 신호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는 지구상에 인류가 출현한 이래 대부분의 시기 동안 유효했던 스트레스의 의미다.
우울증 위험을 높이는 유전자 중 하나는 뇌에서 세로토닌(serotonin)이라는 물질을 분비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또한 스트레스에 더욱 취약하게 만든다. 인위적으로 이 유전자를 제거한 쥐는 스트레스를 좀 더 잘 견뎌냈다. 애초에 이런 유전자를 왜 만들어냈는지, 진화 과정에서 왜 사라지지 않았는지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가장 강하고 현명하고 스트레스에 강한 사람이 항상 살아남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위험과 갈등을 피하고 감염증을 극복하고 음식이 부족한 세상에서 굶어 죽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우울과 불안에 사로잡히는 중요한 이유는 이것들이 우리의 생존을 도와주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환경과 정보에 목말라하는 도파민 세포의 존재는 뇌가 새로운 것을 높게 평가한다는 뜻이 된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새롭고 낯선 것을 향한 강력한 욕구를 갖고 있으며, 이는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또한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자 하는 우리의 갈망에 영향을 주었다. 어쩌면 이게 음식과 자원이 부족했던 세계에서 우리 선조들이 새로운 기회를 탐구하도록 동기를 부여했는지도 모른다.
뇌의 입장에서는 기대감 속에 미래의 불확실한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 그 ‘길(path)’ 자체가 목표인 셈이다.
동시에 여러 일을 하려고 하지만 결국 과제 사이를 뛰어다니고만 있을 때, 뇌는 그다지 효율적으로 작동하지 못한다. 뇌가 모든 공을 놓치고 마는 형편없는 저글러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뇌는 멀티태스킹을 못하게 우리를 막아야 한다. 그러나 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대신 멀티태스킹을 할 때, 기분을 좋게 만드는 도파민을 분비하여 보상을 한다. 그러니까 뇌 스스로 자신의 기능을 떨어뜨리는 행동을 하는 셈이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 우리가 이곳저곳으로 주의를 분산할 때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는, 우리 선조들이 주변의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자극에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 항상 주변을 경계해야 했기 때문이다. 주의를 흩트리는 아주 작은 거라도 위험이 될지도 모르니 절대 놓쳐서는 안 됐다.
한 그룹에는 미술관에서 예술품의 사진을 찍도록 지시를 하고, 다른 그룹에는 그저 바라보게만 했다. 이튿날 이들에게 일련의 예술품 사진을 보여주고 미술관에서 본 사진을 찾게 했다. 사진 속의 예술품이 실제 미술관에 있는 것과 같은지 아닌지를 기억해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실험 결과에 따르면, 사진을 찍지 않은 피실험자들이 예술품을 더 잘 기억해냈다. 사진을 찍은 피실험자들은 그보다 기억력이 떨어졌다. 뇌가 컴퓨터에 저장되는 문장을 기억하는 데 신경을 쓰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사진을 찍은 예술품을 기억에 담아두지 않은 것이다. 뇌는 대신 지름길을 택한 셈이다. ‘사진으로 찍을 건데 굳이 기억할 필요가 있겠어?’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인간에게 지식이란 사실을 줄줄 외워서 읊는 게 아니다. 당신이 아는 가장 현명한 사람이 세세한 내용을 가장 잘 기억하는 사람이 아니듯이 말이다. 깊이 있게 뭔가를 배우려면 사색과 집중이 필요하다. 하지만 빠른 클릭이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사색과 집중을 놓쳐버릴 위기에 처해 있다! 하루 종일 인터넷 페이지를 넘나들기 바쁜 사람은 뇌에 정보를 소화할 시간을 주지 않는 셈이다.
숙련을 위해서는 연습만이 필요한 게 아니다. 연습과 충분한 수면을 결합해야 한다
우리가 많은 일을 점점 더 휴대전화와 컴퓨터에 넘기다 보면 길 찾기 외에도 다른 추상적인 사고 기능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진취적인 또 다른 뭔가를 사용할 수 있는 지능을 얻는 것은 아닐까? GPS가 길을 찾아주면 우리는 팟캐스트를 듣거나 직장에서 생긴 문제를 생각하는 데 집중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아웃소싱할 수는 없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특정한 지식이 필요하고 비판적인 질문도 던지면서 정보를 평가해야 한다. 점점 더 복잡해지는 시대이니만큼 이런 태도는 더욱 필요하다. 전례 없이 복잡한 사회는 우리를 더 똑똑하게 만들지만(플린 효과), 우리의 정신 능력 중 너무 많은 부분을 컴퓨터와 휴대전화에 넘겨주어 더 멍청하게 만들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이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관찰되는 IQ 하락세의 원인일 수도 있다.
저술가인 니컬러스 카(Nicholas Carr)는 활판 인쇄술이 어떻게 여러 층위에 고도의 집중력을 보급했는지 설명한 바 있다. 책을 펼친 사람은 누구든지 순식간에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여다보면서 저자가 쓴 내용에 집중할 수 있지만, 인터넷은 책과 정반대라고 봤다. 인터넷은 깊은 생각을 퍼뜨리는 게 아니라, 새로운 것과 더 빠른 도파민 주사만을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겉만 훑고 지나가게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게 다 좋은데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아요?”라는 질문에 대답하자면, 자연은 인간에게 오래 유지되는 행복한 감정을 심어주는 데 큰 가치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은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친구들과 어울릴 때, 섹스를 할 때 혹은 직장에서 승진할 때 일시적으로 행복감을 느끼도록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감정들은 더 많은 음식과 섹스, 직장에서 좀 더 높은 자리를 원하는 감정으로 빠르게 대체된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데, 바로 우리를 계속 행동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디지털화는 우리의 정신 능력을 훨씬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도와주며, 정말이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인류의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매일같이 휴대전화를 수천 번씩 쓸어 넘기면서 뇌에 폭탄을 투하하면 반드시 그에 따른 결과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주의 산만한 특성이 일반화되면 우리는 이러한 특성을 따르려는 갈망을 느낀다. 심지어 주의를 산만하게 만드는 게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자꾸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우리가 문자, 트윗, 페이스북의 ‘좋아요’ 같은 작은 정보 조각을 받아들이는 데 점점 익숙해질수록 큰 정보 조각을 받아들이는 능력은 저하된다. 전례 없이 복잡한 세계에서 이 문제에 대처해야 한다. 우리는 디지털 기기를 현명하게 사용해야만 하며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간식 코너의 영양가 없는 칼로리처럼 영양가 없는 디지털 칼로리에 적응해버릴 위험이 있다.
진화론적인 관점은 우리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인류의 본성에 대해 밝혀냈을 때 이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