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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문장] 무지의 즐거움

by 아르노


꾸준히 결과물을 내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렇습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매일 ‘판에 박은 듯한 일과’를 반복합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려면 그 이외의 일은 가능한 한 매일 똑같이 반복하는 편이 좋으니까요.


루틴을 지킨다고 해서 결과물의 양이 늘어날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창조하거나 창작하려면 자기 안에서(뇌 또는 신체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배우려는 사람은 ‘오픈 마인드’여야 합니다. ‘자신이 설정한 엄격한 조건을 채우는 사람이 아니면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과 ‘만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각각의 식견을 배우겠다는 사람’ 중 어느 쪽이 지적으로 성숙할 기회가 많을지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겠죠.


‘그 사람의 말이 나에게 ‘이해하라’고 바라는 느낌이 들지만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 불능이 곧 제 학지의 한계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이 적어도 “나는 이것도 알고 있고 저것도 알고 있다”라고 아는 것을 열거하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의 지적 성장에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아마도 제가 속한 집단 전체의 지적 성장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지적 성장이라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가에 관한 앎’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는 ‘난독’亂讀, 즉 손에 잡히는 대로 이것저것 마구 읽었습니다. 고등학생 때부터는 지도를 만들어 지도 속의 빈칸을 메우는 방식으로 ‘체계적 독서’를 했지요. 대학원에서 레비나스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부터는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독서를 하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읽기.

저자를 가상의 멘토로 삼고 읽어 나가기. 내가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것, 나의 생각과는 다른 것을 마크하면서 읽기. 그리고 ‘왜, 어떤 근거로, 어떤 추론을 거쳐 저자가 이런 식견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물으면서 읽게 되었습니다. 이런 ‘무방비innocent 독서’를 지금까지 40년 정도 즐겁게 이어오고 있습니다.


독서에는 세 단계가 있지요. 난독→체계적 독서→자신을 내려놓는 독서, 즉 무방비 독서. 무방비 독서는 난독과 비슷한 면이 있지만 체계적 독서 단계를 거치고 나면 읽을 가치 있는 책과 읽을 가치 없는 책을 구별할 만큼의 안목은 생깁니다. 그 덕에 난독이 되지는 않습니다.


세상이 넓다는 것을 알면 절망스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기뻐지는 법입니다.


우리 비영어 화자들은 모어만으로는 세계 대부분의 사람과 의사소통할 수 없다는 커다란 ‘핸디캡’을 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외국어를 공부하는 강한 동기가 되고, 외국어 공부로 모어의 감옥 바깥으로 빠져나갈 기회가 늘어난다고 하면 그건 결코 결점만은 아닐 겁니다.


본래 과학적 가설이라는 것이 가설을 제시하고 반증 사례를 만나서 그 상황까지 설명할 수 있는 포괄적인 가설로 앞선 가설을 고쳐 쓰는 작업의 반복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자신의 가설을 계속 고쳐 쓰며 진보했습니다. 또 한 번 강조하지만, 학술 활동을 하는 이에게 최대의 기쁨은 자신의 가설을 뒤엎는 반증 사례를 타인에게 지적받기 전에 스스로 발견하는 것입니다. “내가 틀렸다” “내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말았다” “내가 미숙했다”라고 커밍아웃하는 것은 학문하는 사람이 조금도 부끄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랑해야 할 일입니다.


연속적인 자기 쇄신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합기도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시점에 제가 내린 잠정적인 ‘가설’이므로 수련을 거듭하면서 조금씩이긴 하지만 새로운 가설로 고쳐 쓰기를 합니다. 수행修行이란 자기 자신을 연속적인 변화 속에 두는 일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그릇’이 바뀌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눈을 비비고 보지 않으면 같은 인물인지 확신할 수 없을 만큼 사람이 바뀌는 일입니다. 배움이 깊어지면 그 사람의 이야기가 바뀔 뿐 아니라 표정, 목소리, 행동, 옷을 여미는 방법까지 싹 다 바뀝니다.


배운다는 것은 배운 후에 배우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배우기 전에는 자신이 무엇을 배우는지도 몰랐던 것을 배운 후에 회고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 배움의 역동성과 개방성 그리고 풍요로움입니다.


뇌의 기능을 향상하는 데 가장 유효한 방법은 난제에 맞서는 것입니다. 자신의 현재 식견과 신체만으로는 간단히 대응할 수 없는 난제에 과감히 마주하는 것이지요.


프로이트의 말을 빌리면 “내가 어느 정도 그것을 믿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에 관해서 사유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철학이 개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무심’이란 “그래, 이것을 하자”와 같은 자발만이 있고 달성해야 할 목적이 없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그런 일을 하고 싶어졌는지 자신도 잘 모릅니다. 가끔 훌륭한 기록을 세운 운동선수가 인터뷰에서 “이번 경기 결과는 그냥 과정일 뿐입니다”라는 말을 할 때가 있지요. 주변에서 “굉장하군요! 굉장합니다”라며 치켜세우는 것을 신경 쓰지 않고 “그냥 과정일 뿐입니다”라고 별것 아닌 듯 말하는 것은 이 선수가 ‘성공 경험’에 얽매이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목표 달성을 성공으로 간주하고 다른 경쟁 상대에게 ‘이겼다’는 식으로 총괄하면 거기서 발전이 멈춰 버릴 위험이 있음을 선수는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도’道라는 것은 ‘그 전 여정이 지나는 과정과 같은 운동’을 의미합니다. 첫 한 걸음부터 숨이 끊어지기 직전 겨우 내디딘 한 걸음까지 그 모든 것이 ‘과정’이라서 어디에도 ‘완성’과 ‘최종 승리’와 ‘종점’이 없습니다. 그것이 ‘길을 걷는 것’이고, ‘수행’이라는 것입니다.


마음과 직감은 어째서인지 그걸 압니다. “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냐”는 질문을 받으면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때도 있습니다. 머리로 생각해 낸 게 아니라 몸속 깊은 곳에서 떠오른 것일 테니까요. 그런데 그냥 거기 따르면 됩니다. 사람은 왠지 어떤 삶을 살아야 자신의 사는 힘과 지혜가 가장 높아지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마음과 직감에 따르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란 고립을 견디는 데 필요한 자질입니다.


제 일은 극히 단편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제가 살펴본 문헌이나 자료는 제가 직감적으로 손에 쥔 것일 뿐 체계적이지도 포괄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되지 않을까요?

그건 제 고유한 ‘단편성’이니까요. 제가 어떤 책을 읽거나 읽지 않는 것은 제 나름의 무의식적 선택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을 허락한다면 나의 ‘단편성’은 나만의 것이고, 나의 무지도 나만의 것이며, 그 단편성과 무지에는 나의 고유명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고유명이 각인된 무수한 단편성과 무지의 총합으로 집합적인 학지가 성립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느 시기부터 아무리 서툴러도 ‘솔직하게 쓰기’를 가장 우선시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제가 쓰는 것은 모두 긴 ‘단편’이 되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식견이 된 거죠. 그래도 집합적인 학지의 소재 정도는 될 것 같아서 계속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저만의 ‘벽돌’을 손수 만들어 갈 계획입니다. 그것을 후세의 누군가가 주워서 “앗, 이 벽돌은 이 건물 재료로 사용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해 준다면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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