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나 홀로 공부한 그 자체만으로는 자아 발견, 자아 성장 이외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습니다. 때문에 그 다음 단계, 즉 자신의 공부로 이룬 성취를 이 사회를 위해 활용하고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단계가 있어야 합니다. 이 단계를 지나야만 비로소 힘들고 어려운 공부가 개인의 성장을 넘어서는 보람과 기쁨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많은 공부를 하고 그 공부를 바탕으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 어떤 매듭을 짓기까지 긴 시간 공부를 하려면 전략이 필요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어떻게 어제보다 더 나은 나로 만들 것인가’입니다. 오직 결과만으로 인정받는 이 ‘직업’에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자세는 선택이 아니라 힘겨운 과정을 버텨내기 위한 필수 요소입니다.
독서는 인내심과 끈기를 기르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무엇을 해야겠다’,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 되겠다’, ‘어떤 직업을 가져야겠다’ 하는 생각보다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겠다’, ‘이렇게 살아가야겠다’와 같은 생각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됐습니다. 그 결과 직업이 무엇이 되었든 그 직업을 통해 내가 생각하는 좋은 가치를 실현하며 살 수 있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어느 분야에서나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지난한 시간들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합니다.
좌절하지 않는 태도는 겸손함에서 나옵니다. ‘맞아. 솔직히 난 아직 부족해. 더 실력을 쌓아야 해.’ 이런 태도 말입니다. 겸손함은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알고 인정하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아는 것이죠. 실패를 통해 내가 다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잠시 실망하고 좌절감을 맛볼 수는 있지만, 겸손함을 갖춘 사람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진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고 나아가는 겸손함이 공부하는 노동자의 가장 훌륭한 자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분들처럼 되고 싶다는 열망은 가득했지만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습니다. 공부라는 건 그저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듯 묵묵히 해나가야 하는 일이라는 걸 저는 알고 있었으니까요.
노력하는 과정에서 거둔 실패라면 우리는 당당하게 마주할 수 있습니다. 실패했더라도 다시 일어서서 나아가게 되면 훗날 후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게 이른바 성공한 삶이 아닐까 합니다.
자기 공부에 대한 사명이나 당위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방황의 시간 끝에 내린 결론이어야 스스로 납득하게 되고 목표를 달성할 힘도 생깁니다.
하물며 긴 삶 속에서 사람에게 방황이나 실패의 시간이 어떻게 없을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이런 실패의 시간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큰 역경 없이 단번에 이룬 성공은 이후 계속 도전을 받기 때문입니다. 면역이 없는 사람에게 오는 도전, 백신을 맞지 않은 사람에게 오는 시련은 분명 더욱 힘겨울 겁니다.
의지에 반하는 온갖 일들이 자신의 주변에서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주변에 지나치게 관심을 두지 말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것, 그것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상생활을 잘한다는 건 좋은 습관이 몸에 배도록 하는 것입니다.
발레리나 강수진 씨는 “지금까지 제가 가진 모든 성공담, 주변의 찬사는 모두 ‘일상적 반복이 빚어낸 위대한 선물’이에요”라고 말했죠. “보잘것없어 보이는 하루하루를 반복해 대단한 하루를 만들어낸 사람이라는 칭찬이 가장 좋다”는 강수진 씨의 말에 담긴 의미를 우리는 깊게 새겨야 합니다.
몸은 서서히 익숙해집니다. 과연 이게 맞는 방법일까에 대한 의심은 미뤄두고, 일단 매일매일 그냥 해나가다 보면 자기만의 리듬이나 호흡이 생길 것입니다.
해결을 위한 열쇠는 오로지 자신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위로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자신이 해낼 수 있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사람이 결국 끝까지 갑니다.
Omnia disce, videbis postea nihil esse superfluum.
(모든 것을 배우도록 하라. 나중에는 그 어떤 것도 소용없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공부를 하면서 나만의 악보를 써내려가야 합니다.
이것을 하고 나면 딱 저것이 주어지는 그런 삶은 없습니다. 계속 희미하고 알 수 없는 상태지요. 그 희미함 속을 더듬더듬 걸어가며 계속 가능성을 부여하고, 해낼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믿음을 주는 건 공부하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일입니다
운은 미리 생각하는 사람에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자기 에너지를 모두 써서 온힘을 다한 사람에게 선물처럼 찾아오는 것입니다.
저는 행운이 찾아오도록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공부라는 노동을 통해 운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타인의 성공을 시샘하지 않고 행운이 찾아올 때를 기다리는 공부하는 노동자입니다. 운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준비한 이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모든 공부의 시작, 선택의 시작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그 답을 고민하고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는 공부하는 방식, 공부했던 방식에 대한 복기도 포함됩니다. 진정한 답은 타인이 주는 답이 아니라 내 안의 원의, 즉 내 안에 있는 진짜 갈망입니다. 공부는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죠.
어느 한 가지도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이것만은 믿었습니다. 어렵게 열린 길을 포기하지 않고 그 끝에 닿는다면 또 다른 길이 열릴 것임을요.
무언가 사람의 정신세계가 한 단계 성장하고 고양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자유롭지 못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인문학 서적들이 그렇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건 무엇인가? 그게 그렇게 지금 자꾸 생각해야 할 중요한 일인가? 시험의 실패가 인생의 실패인가?’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해주고 해답까지 찾을 수 있게 해줍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 내 모습을 잘 알아볼 수 있는 식별의 눈을 갖게 해줍니다.
학교나 학원, 도서관이나 독서실에서 하는 것만이 공부는 아닙니다. 자신의 환경과 한계를 이겨나갈 수 있도록 돕는 그 모든 것이 공부입니다.
깊이를 만들어가는 것은 오로지 치열하게 사유하는 나 자신의 몫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는 생각하는 공부를 하는 사회인가? 한국 사회에 던져야 하는 질문입니다. 나는 생각하는 공부를 하고 있는가? 타인이 줄 수 없는 깊이를 나는 만들어가고 있는가? 이는 개개인이 자기 자신에게 던져야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철학적 사유는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지금 이 시대에 여전히 유효한 공부일 겁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미래를 준비해나갈 수 있습니다.
공부하는 행위에서 배워야 할 것은 끊임없이 대상화하고 객관화하는 과정입니다.
글을 쓸 때도 독자가 이해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내가 이해하고 쓴 것인지 먼저 생각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면 타인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되는데 타인이 어떻게 내 글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아는 만큼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걸 공부에 적용하면, ‘타인에게 설명할 수 있는 그만큼이 내가 아는 것’이 될 겁니다.
학생이 성장하는 과정에선 가르치는 사람의 성찰이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공부는 무엇보다 내가 나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한 내용을 말로 설명하는 방식은 매우 유용합니다.
어제의 나는 어제에 두고, 오늘 새로운 앎이나 깨달음을 통해 성장한 나로 나아가면 됩니다.
잘하든 못하든 또 다른 매듭을 지어나가야 합니다.
공부하지 않을 때 인간은 늙어갑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생각을 통해 타인을 재단하고 비난하고 비교하는 일에 몰두하기보다, 후회되지는 않을 삶을 위해 공부를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것을 철학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답니다.
여러 명이 돈을 조금씩 모아서 차를 빌려 교외의 산에 갔을 때입니다. 1,500미터쯤 올라가니 평평한 지대가 나왔는데, 그곳엔 작은 야생화들이 들판 가득 피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잠시 쉬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한참을 움직일 생각을 안 하기에 제가 더 안 올라갈 거냐고 재촉하듯 물었습니다. 친구들은 이제 더 안 올라가도 된다고 하더군요. 그때 배낭을 베고 누워 하늘을 바라보던 친구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사무엘, 너 이런 거 해봤냐?” “아니.” “이런 게 인생이야. 우린 ‘이런 시간’을 누리려고 사는 거야.” 그날 그 친구의 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왜 행복하지 않았는지, 제가 가진 절대적인 시간에 분배된 ‘이런 시간’의 총량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제 삶에는 소소한 즐거움과 기쁨,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이런 시간’이 거의 없었어요. 공부하기에도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카푸치노 한 잔을 느긋하게 즐기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시간들이 촘촘히 모여 제 인생을 만들었습니다. 설령 제게 여유가 찾아왔었어도 제 마음이 그걸 온전히 음미하고 즐기지 못했으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공부의 어려움과 지난함 속에도, 매일 그날이 그날 같은 규칙적인 하루의 루틴 속에도 짧고 소소한 일상의 평화나 즐거움은 찾아옵니다. 그런 것들을 모르고 살지 않길 바랍니다.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놓치지 말고 그것이 행복이고 인생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느끼며 다시 공부할 힘을 얻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