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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문장] 돈 말고 무엇을 갖고 있는가

by 아르노


중요한 건 일단 시작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기만의 길을 찾는 것이다. 무엇이든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오늘 시작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고, 대개는 유일한 방법이다.


당장 얻을 수 있는 무언가는 대부분 가짜라는 것, 무엇도 바로 얻을 수는 없다는 것, 반대로 무언가를 얻고자 한다면 시간을 꾸준히 끊임없이 오랫동안 쌓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삶을 만든다.


가만히 있으면, 모든 게 유지되는 게 아니라 잃어간다.


수많은 시도와 실패들이 나중에는 하나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글감이 된다.


나무는 살아 있는 한 성장한다. 인간도 다르지 않다. 살아 있다면, 죽음이 아니라 생 쪽에 속해 있다면, 우리는 시도하고 배우며 극복해가는 길을 택할 필요가 있다. 그 여정이 곧 삶인 것이다.


'나는 안 되는 거야.’ 이런 의문들이 쏟아질 때, 그냥 믿고 계속하는 것이다. 그렇게 중간을 넘기고 나면 서서히 노력의 의미를 만나게 된다.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이해되고, 통합되고, 응용된다. 예전에는 불가능했던 것들이 가능해 보인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의 반응이랄 것을 조금씩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 또 구부능선까지는 달릴 수 있게 된다. 구부능선까지 달리면, 대개 마지막까지 가게 된다.


어떤 일이든 중간의 지옥을 지나보지 않으면, 그 일이 나에게 어울리는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중간의 지옥을 지나고 나서, 그것이 만들어내는 결과나 반응 속에서, 이 일이 내게 어울리는 것이었는지 아닌지도 비로소 알게 된다. 어떤 일을 시작조차 하지 않으면 물론이거니와, 중간의 지옥을 지나지 않고서는 내 삶에 가장 어울리는 방식들을 찾아낼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모든 일에서 슬슬 중간의 지옥이 왔다고 느끼면 이제 곧 이 일의 정체를, 나와의 관계를 곧 알 수 있으므로, 이것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가치를 알려면 오랫동안 끈질기게 그것을 경험해봐야 한다. 피땀 흘리는 듯한 어려움과 크고 작은 기쁨들과 시간과 시간이 엮이는 끊임없는 춤을 온몸으로 경험해봐야 한다. 그러고 나면 그제야 조금씩 알기 시작하는 것이다.


칼럼을 하나 쓸 때도 일필휘지로 쓰고 말기보다는, 그전에 주제와 관련한 기존 담론들이나 자료들을 부지런히 찾아보는 것이 좋은 칼럼을 만든다. 많이 고민하고 많이 읽고 많이 고치면 좋은 글이 된다.


사실상 대부분의 일은 얼마나 적절한 시스템을 만들어내느냐가 관건이다.


어떤 일이든 무언가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단순한 열정, 열의, 에너지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을 지속시키고 지탱해줄 자기만의 시스템, 루틴,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하나의 삶은 내가 그 속에서 어떤 ‘유연한 시스템들’을 만들어나가느냐로 정의된다. 나는 내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시스템, 공부할 수 있는 시스템, 글을 쓸 수 있는 시스템, 육아와 사랑을 할 수 있는 시스템, 독립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시스템 같은 것들을 만들며 산다. 나를 위한 시스템을 만들고, 내 상태에 따라 시스템을 조금씩 유연하게 변형시켜가면서, 그렇게 몇 개의 톱니바퀴가 인생에서 잘 굴러가게 하는 것, 그게 인생의 거의 전부이기도 한 셈이다.


정성은 꾸준한 시스템 안에서, 그 시스템 안의 여백에서 탄생한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유연한 시스템을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삶이란 그냥 두면 손에 잡히는 실체가 없어서 흘러가는 강물이 된다. 그러나 의식과 규칙이 있으면 박힌 말뚝처럼 삶의 준거점이 되어준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들이 결국 그 자체로 ‘성공’할 것이냐 말 것이냐보다는, 오히려 거기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가 언제나 중요하다. 최선을 다해 어느 일에 몰두하면 우리는 그로부터 무언가를 얻는다. 그러고 나서, 그것을 내 남은 인생에서도 쉽게 버리지 않고 어떻게 가지고 갈지를 계속 고민해야 한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우리 삶에는 궁극적인 의미에서 실패란 없는 것이다. 있는 것은 오로지 ‘여정’뿐이다.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우리 삶의 모든 ‘점들’은 언젠가 ‘선’으로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선은 저절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나는 실패를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실패를 여정으로 여기기 때문에 실패를 ‘모르는’ 인간이 된다.


사실 거의 모든 책에 대한 읽기의 태도와도 이어진다. 철학책을 열심히 읽어서 철학 지식만 쌓는 건 별 의미가 없을 수 있다. 결국에는 그 철학을 삶에 체화하여 실천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 소설을 그냥 재미로 즐기는 일이 나쁜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문학이 진짜로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한다면, 우리는 그 문학의 영향을 받아 삶을 사랑하거나 삶의 의욕을 채우는 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책을 읽고 실제로 달라질 삶이다. 책으로 도피하는 게 아닌, 책이라는 창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실제로 더 나은 삶으로 안내받고 나아가는 것이다.


선택보다는 선택에 어떻게 적응하고, 선택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다. 그 선택을 후회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결국 그 선택을 활용하는 나의 방식과 태도인 것이다. 거의 모든 선택에는 그 나름의 장단점이 있다. 관건은 어떻게 나의 선택에서 장점을 뽑아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오히려 자기 삶의 결핍을 인정하면서도, 그런 결핍을 끌어안고 ‘적극적으로’ 감사하는 사람이야말로 그러한 결핍을 ‘개선’할 가능성이 더 높아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결핍을 모르는 게 아니라, 결핍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결핍과 맞서 싸우는 법을 알고, 매일같이 결핍을 조금씩 극복하는 힘을 기르고 있는 것이다.


어려움을 끊임없이 회피하면서 쉬운 쪽으로 가려고 하면 삶은 정체되는 쪽으로 들어설 가능성이 높다. 마치 운동하는 게 어려워서 집에 누워만 있다보면 건강을 해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어려움을 딛고 어떻게든 한 발자국 나아가면, 그것은 삶을 만든다. 그러니까 삶을 만드는 재료가 있다면, 그것은 어려움이라는 재료다. 어려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삶은 만들어진다.


모두가 휴대전화는 전화기로만 써야 한다고 생각할 때, 그 상태를 끊어내고 휴대전화를 컴퓨터처럼 상상할 때 스마트폰이 탄생했다. 창의성은 기존 상태의 연속이 아니라 기존 상태와의 단절이다.


어떤 문제는 시간과 세월이 치유해주지 않는다. 어떤 문제는 장기적으로라도 스스로 해결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부터 그 문제의 일부를 해결해야 한다.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시간들을 쌓아 문제가 해결될 수 있게끔 ‘계산’을 해야 한다.


나는 바로 늘 그렇게 깨어 있고 싶은데, 그 깨어 있음을 위해 글을 쓴다. 적어도 살아 있는 동안은 더 명료하게 깨어 있고 싶어서 쓴다. 계속 쓰는 사람이 잠들 방법은 없다. 어쨌든 계속 쓰면, 나아간다. 그래서 글쓰기는 걸음이고, 잠들지 않음이고,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이며, 나아감이다.


결국 무턱대고 버티거나 그저 괜찮아지기를 막연히 기다리기보다는, 끊임없이 자기를 재위치시키는 시도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를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봐야 한다. 오늘을 이런 관점에서도 보고, 저런 관점에서도 봐야 한다. 삶이란 마냥 잘 굴러가지만은 않는 바퀴 같은 것이어서, 그렇게 바퀴에 기름칠하듯이 의식적으로 애를 써주어야만 한다. 그렇게 어떻게든 굴려가야만 하는 것이다.


스스로 삶의 주도성을 쥐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끝없이 말한다. 주변 사람에게든, 부하 직원에게든, 세상을 향해서든 자기의 비전과 자기의 삶과 자기가 걸어가는 길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은 타인들이 자신을 규정짓고 한계 짓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며, 계속하여 스스로가 규정짓는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나는 그것이 삶을 자기 자신의 삶으로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끊임없이 말하고 선언하고 씀으로써 자기 자신이 된다.


나는 누구나 자기만의 관점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만의 언어를 가진다고 믿는다. 자기만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자기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인생 앞에 나의 시간으로 무엇을 만들 것인지 선택하게 되는데, 적어도 그중 일부는 돈으로 살 수 없고, 대체 불가능하며, 나의 시간으로만 고유해지는 무엇을 가질 필요가 있다.


중요한 건 우리 마음을 끊임없이 다독이면서도, 중요한 것을 잊지 않게 하고, 삶에 대한 생생한 의지를 이끌어갈 수 있는 그런 ‘자기계발’이다. 1등을 하기 위해 소시오패스가 되거나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짓밟고,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도 잊어가는 자기계발이라면 안 하는 것이 낫다. 달리 말하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건 ‘삶을 사랑하는 기술’이고, 바로 그런 기술로 삶의 균형과 이로움에 기여하는 자기계발이다.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그렇게 한 걸음 물러나서 시간을 길게 보고 삶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 걸음 물러나서 바라보기’의 핵심은 삶을 오늘로만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더 긴 시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삶을 계속 ‘긴 시간’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면 오늘의 많은 문제도 괜찮아지곤 한다.


핵심은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리고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다. 믿으면서 계속 나아가다보면, 해결할 수 있다. 이 애씀의 힘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그렇게 차근차근 하나씩 해나가면, 결국 천 리 길을 간다.


적응 가운데 비적응을 발굴하기, 냉철함 가운데 공감 능력을 기억하기, 고집스럽게 한 가지를 파고들면서도 자신을 유연하게 넓혀가기, 바로 이런 양극단을 정확하게 통합하는 힘이야말로 인간이 이를 수 있는 ‘경지’라 부를 만하다. 이런 양극단을 통합하며 성장해가는 걸 흔히 철학에서는 ‘변증법’이라고 부른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다시 이쪽으로, 또 다시 저쪽으로 가길 반복하며 ‘변증법적 성장’을 해나가는 것이다.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들어가지 않으면, 성장과 계발도 일종의 개미지옥이 된다. 그 개미지옥은 타인들의 시선이라는 모래로 이루어져 있다.


다소 어려운 쪽으로 보이는 길을 너무 두려워하지 않고, 타인들의 기준에 맹목적으로 시달리지 않으면서 나의 삶을 살아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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