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호진, 단요
대치동에서 시험문제를 만드는 일을 했던 의사와 소설가가 쓴 현재 수능 제도에 대한 분석. 내가 수능을 본 24년 전과 너무 달라져서, 나는 어떻게 공부했는지 과거를 잠시 돌이켜본다.
나는 대학에 비교적 쉽게 들어갔다고 생각한다. (오래된 기억은 미화되기 마련인가?) 지금 와 돌이켜보면 오히려 뒷바라지하시던 부모님이 더 고생하셨을 거다. 대부분의 자식들은 부모의 은혜를 모르다가 본인이 부모가 되면 그제야 한없는 부모님의 희생에 감사하고 보답하려 하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게 된다. 나 역시 그렇다.
아직 연합고사를 보고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중학교 시절, 반에서 3등에서 5등 정도 했던가? 그러다 중3 때 담임의 추천으로 학교 내부의 은밀한 특목고 준비반에 들어갔다. 꾸준히 공부하는 학생은 아니어서, 매번 중간고사/기말고사 때마다 친구들 필기를 빌려 벼락치기로 공부하고 평균 90점 정도를 유지하는 내 모습에 그 어떤 가능성을 발견했나 보다.
정규수업 끝나고 친구들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거나 학교 앞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고 오락실에 가는데, 난 미술실 옆 다목적실에 전교권에서 놀던 친구들과 함께 모여 연합고사 문제집을 계속 풀어댔다. 그게 묘하게 재미있었다. 평소에 학교 수업 위주로 중간/기말이 나오니 필기와 교과 문제집을 적당히 공부했는데, 연합고사는 뭔가 좀 더 거대한 담론을 그럴듯한 문제로 만들어서 푸는 느낌이었다. 그 문제집들은 운전면허 필기시험 준비하는 문제집처럼 위로 넘기는 식이었는데, 계속 문제만 풀다 보면 어느새 한 권을 다 풀어서 다른 출판사의 문제집을 또 풀고... 그렇게 몇 권의 문제집을 다 푸니 어느덧 시험일이 다가왔다.
본 시험은 내신 시험보다 재미있었다. 한 방에 뭔가 결정되는 시험이라 적절한 긴장감이 뇌의 처리속도를 빠르게 했고, 그동안 풀어온 문제들에서 다양한 유형을 풀어봤으니 일사천리로 모든 과목을 풀었다. 결과는 전 과목에서 한 개 틀려서 200점 만점에 198점. 그렇게 대박이 났고 난 용마산 자락에 있는 외고에 입학했다.
그곳의 생활은 빡빡했다. 아침 5시 반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집에서 나가 6시 15분에 스쿨버스를 타고 잠시 눈을 붙이면 7시 20분쯤 학교에 도착한다. 아침을 먹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매점에 가서 또 뭘 사 먹고, 7시 40분에 간단히 학급 조회를 하고, 8시부터 0교시 시작이다. 정규수업은 보통 7교시인가 8교시인가... 그러니까 오후 4시나 5시쯤 끝나고, 한 시간 정도 자습을 하다가 6시면 저녁식사 시간이다. 밥을 10분 만에 퍼먹고 운동장에 나가서 30분 정도 축구를 하고 돌아오면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다. 야자는 80분 후 10분 휴식 후 70분인가 앉아서 공부를 하고 9시 반쯤 끝난다. 그럼 다시 스쿨버스를 타고 10시 반쯤 도착해서 독서실에 가거나 어딘가 학원에 간다. 집에 보통 자정쯤 돌아와서 바로 잠든다.
외고라서 지원할 때 원하는 외국어를 지망했고, 나 때는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중국어였다. 2학년 때까지 주 6시간 정도는 문법, 회화, 독해를 꾸준히 배웠다. 회화는 각 언어의 원어민 선생님이 회화실에서 가르쳤는데, 내 선생님은 얼굴이 항상 빨갛고 순박하게 생긴 젊은 여자 선생님이었다. 첫 회화 시간에 자기 외국 이름을 정하라고 이름 리스트를 나눠줬다. 난 동네 비디오가게(책대여점이 함께 있는)에 오래 머무는 청소년이었고, 에로 비디오들 제목 앞에 한참을 서있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Emmanuel이라는 이름이 뭔가 끌렸고, 1년 내내 Manu라고 불렸다. 선생님은 내가 그 이름을 고른 이유는 몰랐을 거다. 전공은 전공이고, 2학년 때는 제2외국어를 또 배운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외고의 모든 언어 과정을 성실히 이수한 사람은 모국어 포함 4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 밥벌이하느라 띄엄띄엄 쓰는 영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잊어서 요즘에 들어서야 듀오링고의 도움으로 조금씩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는 중이다.
그땐 토요일에도 학교 수업이 있었고, 똑같이 5시 반에 일어나 스쿨버스를 탔고, 4교시에 수업이 끝나서 점심 급식 없이 하교했다. 다른 반이랑 축구 시합이 있으면 스쿨버스를 보내고 빈 운동장에서 두세 시간 정도 축구를 하고 떡볶이를 먹고 오락실이나 피씨방에 갔다가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갔다.
이런 생활을 3년간 유지했다. 전국에서 날고 긴다는 애들이 모두 모였지만, 그래도 학교는 학교라 노는 애들은 논다. 그게 바로 나였는데, 한 반에 50명 정도 있고 평균이 90점 넘어도 내신 성적은 중하위권이었다. 그래서 내신 과목들 공부는 멀리하게 됐다. 하지만 0교시, 저녁 전 9교시, 야자시간 등 학교에서 자습할 시간이 엄청 길었고, 쉬는 시간에 공부를 해도 꼽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난 1학년 때 문학을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시중에 나온 모든 언어영역 문제집을 거의 다 풀었다. 수학과 과탐은 뼈문과인 나에게 항상 어려웠고, 사탐은 외울 게 많아서 지루했고, 영어는 조금 자신이 있어서 공부를 많이 안 했다. 글 읽는 걸 좋아하는데, 중학교 때보다 훨씬 다양한 주제의 글이 지문으로 나오는 언어영역을 읽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문제 풀기는 덤이었다. 누가 시킨 공부 방식도 아니었고, 그저 내가 좋아하는 공부만 하겠다는 심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려는 습관은 직장생활에서도 계속된다.)
연중 두세 번 보는 모의고사에서 3년 내내 120점 만점에 110점은 항상 넘었다. 그래서 2, 3학년 때는 새로 배우는 문학 작품들만 머릿속 데이터베이스에 업데이트하고 따로 언어영역 문제집을 풀진 않았다. 나중에 수능 때도 110점을 넘었다.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던 습관과 다른 공부를 하기 싫어서 하나만 했던 이상한 공부방식이 운 좋게 먹힌 셈이다.
너무 싫어했던 수학은 학원 주말반을 다녔는데, 1학년 때는 친구들과 함께 학원을 다녔다. 지금도 그런 시스템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30여 년 전에는 단과반이 있어서 강사를 보고 내가 원하는 강사의 수업을 현장에서 신청해서 그 수업 강의만 듣는 시스템이 있었다. 몇몇 단과 학원이 유명했는데, 우리는 예쁜 애들이 많다고 어디선가 소문을 듣고 선릉역 앞에 있는 한국학원에서 주말에 강의 한두 개를 신청했다. 내 기억으론 학원 수업에 실제 출석한 건 반 정도? 나머지는 그냥 학원 앞 오락실에서 놀다가 김밥과 라면, 혹은 햄버거를 사 먹고 몰려다니면서 놀다가 집에 갔다. 그땐 정말 빅맥이 '빅'맥이었고, 세트는 3천 원이었다. 예쁜 애들을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28년 이후에 그 학원이 있던 곳 주변에서 점심을 먹는 직장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40대에 어떤 모습을 살 거라고 생각하는 고등학생은 예전에도 지금도 없겠지만.
아, 그래서 수학은 점수가 잘 안 나왔다. 나중에 다른 친구들과 소수정예를 표방하는 동네 학원에 가서 밀착마크를 받고 나서야 80점 만점에 70점 정도는 나왔다. 언어영역 공부를 더 이상 하지 않던 2학년부터 수학도 언어처럼 계속 문제를 풀었지만, 실력이 확 올라오진 않았다. 그래도 수능 본시험에선 어찌어찌 70점을 넘겼다.
사탐과 국사/일반사회/윤리/한국지리, 과탐은 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 모든 과목을 다 공부해야 했다. 특별히 좋아하는 과목은 없었는데 물리는 정말 싫었다. 아직도 F=ma에서 가속도 개념을 설명하라고 하면 제대로 할 자신이 없다. 우리 아들은 척척 하더라. 이것이 인류의 진화인가. 1학년 때 국사 선생님이 웃음기 없이 특이한 억양으로 수업하는 분이었는데, 칠판에 필기할 때 글씨가 한석봉 뺨치는 명필이었다. 그 선생님이 무표정하게 수업 중간에 얘기해 주는 야사들이 무척 재미있었다. (신라 지증왕 이야기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남녀 합반에서 무표정하게 그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요즘 세상이었으면 바로 형사고발 당했을지도 모른다.)
사탐 과탐 합해서 120점 만점이었는데, 공부를 많이 하고 본 시험은 110점이 넘었고, 그렇지 않을 때는 100점대에 머물렀다. 투입한 만큼 성적이 나오는 과목이라 나중에 고3 때는 이를 악물고 많은 문제를 풀었다. 수능 때는 110점을 넘겼는데, 역시나 물리에서 다 틀렸다. 그 뒤로 시간을 내서 과학 공부를 한 기억은 없다. 아이가 읽다 남긴 과학 만화나 교양 위주의 과학 책을 가끔 읽을 뿐이다. 역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한다. 사탐은 난 그냥 학교 수업 잘 듣고 문제집 열심히 푸는 정도로 준비했다. 몇몇 친구들이 야자 끝나고 지금은 메가스터디 회장님인 손주은의 손선생 사탐을 들으러 다녔는데, 마치 교주님에 가까운 아우라를 풍기며 종종 강한 강도로 사회비판을 했다고 한다.
영어는 수능 기출문제를 다 풀어보고, 모의고사 형식의 문제만 가끔 풀었다. 수학 기초를 잡은 동네 학원에서 야심 차게 섭외한 현직 동시통역사 선생님이 주말마다 타임지 기사를 하나씩 가져와서 두 시간 동안 그 기사로 수업을 진행했다. 처음 보는 단어나 표현들이 많이 등장했고 숙지가 잘 되지 않아 지금도 영문 뉴스 기사는 읽기 어렵다. 시험을 봤던 날인가, 고생했다고 선생님이 고기를 사줬는데 아내분을 데리고 오셨다. 엄청난 미모에 선생님을 다시 봤던 기억이 떠오른다. 하긴, 선생님도 미남이었다. 그 당시 개봉했던 영화 <와일드 씽>에 나오는 맷 딜런을 닮았으니. 그 영화도 몹시 자극적인 스릴러 영화였다. 야한 장면도 있었고.
그때 같이 수업을 듣던 다른 학교의 어떤 여학생과 친하게 지내다가 사귀게 됐다. 학원은 방배동이었고 그 친구 집은 반포였다. 아무래도 학교가 달라서 자주 못 만나니 금세 헤어졌다. 주고받은 편지가 있었는데 남아있진 않다. 같은 대학교에 진학했지만 전공 성격이 완전히 달랐고, 졸업 후 진로도 완전히 달라졌다. 아이 낳고 미국에서 잘 살고 있는 그 친구와는 일 년에 한 번 정도 소식을 주고받는다.
생각의 흐름대로 쓰다 보니 별 얘기를 다 꺼낸다. 어쨌든 영어 공부는 단어나 외우는 정도에 가끔 모의고사 문제나 풀면서 감각만 유지했고, 수능에서는 어이없게 듣기평가에서 한 문제를 틀렸다.
과목별로 대충 공부의 역사를 정리해 봤다. 종합해 보면 언어와 외국어는 따로 시간을 많이 투자해서 공부하진 않았고, 수학은 이를 악물고 열심히 했고, 싫어하는 물리는 적당히, 나머지 과목들에 나머지 시간들을 다 투입했다. 수능 결과는 400점 만점에 385점인가 나왔다. 수능 전 모의고사에서 390점을 몇 번 넘겨서 '혹시 내가 서울대...?'라는 희망을 가졌지만 하늘은 내가 대학에 가서 더 많이 놀게 하려는 뜻이 있었나 나를 신촌으로 보냈다. 그때는 특차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최소한의 내신만 있으면 수능 점수만 가지고 그냥 대학에 가는 것이었다. 점수를 보더니 담임은 "야 넌 고대 법대... 아니다 넌 고시 볼 타입이 아냐. 그냥 연대 가라."라고 했다.
괜히 외고 교장까지 하는 거 아닌가 보다. 그때 법대에 갔으면 아마 고시 낭인이 됐을 거다. 행정고시에 도전했다면 아마 PSAT은 항상 합격인데 2차에서 매번 떨어졌을 거고. 난 꾸준히 공부하는 타입이 아니라 긴 호흡의 시험에는 무척 약하며, 빠르게 읽고 해석해서 순발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험에 잘 맞는 타입이라는 걸 잘 파악한 그때 담임 선생님의 직관이 날 신촌에 가서 한없이 놀게 만들었다.
난 책을 많이 읽어서 쌓인 독서근육(?)이 언어영역을 수월하게 해 줬고, 영어는 어쩌다 보니 수능시험에 최적화된 실력이 쌓였다. 뼛속까지 문과다. 수학은 사교육의 도움을 약간 받았다. 과학은 딱히 학원에 다니진 않았다. 내신은 포기했고, (평균 90점인데 600명 중에 450등) 논술을 준비할 필요도 없었다. 수능점수 하나만 가지고 대학에 들어갔다. 그때도 사교육이 문제였을까? 지금만큼은 아닐 것 같다. 2024년에 사교육비로 26조 원이 쓰였다니 정말 사회적 낭비 아닌가?
책에서 말하는 현재 수능의 현실을 보니 나더러 지금 다시 수능 공부를 하라고 하면 인서울도 장담할 수 없겠더라. 하긴, 회사에서도 저런 소리 많이 했다. (신입사원들의 인생 여정을 듣고 "너희 정말 대단하다... 나더러 지금 입사하라고 하면 떨어졌을 걸?")
책 내용은 따로 정리하지 않겠다. 수능 제도는 또 바뀔 테니까. (작가 인터뷰: [데스크가 만난 사람]“사교육업체에 해킹된 수능, 기괴한 퍼즐놀이로 변질”|동아일보) 지금 수능을 보는 세대들이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이 기회를 살려서 돈을 버는 사람들은 얼마나 영리한지 알 수 있는 것으로 충분히 의미 있는 독서였다. 라테 시절의 수능과 지금의 수능을 비교해 보고 싶은 사람은 한 번쯤은 읽어봐도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