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리드 누네즈
뉴욕타임스의 21세기 최고의 책 중 하나로 꼽힌 작품(<친구>. 아직 읽어보진 못했다)의 작가라 언젠가 한 번 읽어보겠다고 하다가 마침 발간된 신작을 읽게 됐다.
분명 소설인데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며 누가 봐도 작가 본인이 200% 투영된 주인공이라 마치 산문을 읽는 것 같다. 소설이니까 굳이 서사를 풀어보자면, 주인공은(누가 봐도 작가 본인) 팬데믹의 절정이었던 2020년 봄에 뉴욕에 살고 있다. 작가는 코로나 대응을 위해 자원봉사를 하러 온 어느 의사에게 자신의 집을 양보한다. 작가의 어느 임신한 지인이 캘리포니아에 방문했다가 락다운에 걸려 돌아오지 못하게 됐는데, 그 지인의 고급 아파트에 혼자 남겨진 금강앵무를 돌보게 되었다. 원래 새를 돌보던 젊은 대학생은 갑자기 집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작가와 함께 지내게 된다. 둘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갈등했다가 조금씩 친해지지만 그게 또 그렇게 막 친해지는 건 아니다. 서사는 이렇지만 중간중간 작가 어린 시절의 이야기와 작가의 친구 이야기 등등 여러 이야기들이 중구난방으로 뒤섞여있다.
1부와 2부 사이에 문학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마구 등장하는 막간이 있는데, 이 부분에서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마구 나열하는 작가의 역량(?)이 가장 빛난다.
루소는 자서전 첫 문장을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는 없을 일을 하고자 한다는 선언으로 시작했고,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든다.
조앤 디디온은 첫 문장의 문제점은 작가가 그것에 얽매이게 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문장으로부터 나머지 전부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첫 두 문장까지 작성하게 되면, 모든 선택지가 사라진다.
시작 전에는 선택지가 너무 많다. 그러다 다음 순간에는 아무런 선택지가 남지 않는 것이다.
밤에 잠이 안 오면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불면증 치료법에 따라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시작하라. 무슨 까닭인지 나에겐 작가의 슬럼프가 일종의 불면증처럼 느껴진다.
노먼 메일러는 작가는 매일 글을 쓰면서 약간의 슬럼프를 겪는다고 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불면증은 망각 불능에서 온다는 말도 있는데, 누가 한 말인지는 기억이 안 난다.
글이 잘 안 써지면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거리를 산책하라. 특정 거리들은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언젠가 나는 한 남자—노숙자 행색을 한—가 쓰레기통을 뒤지는 걸 보았다. 그는 신문 두어 장을 꺼내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쓰레기통에 도로 던졌다. 그는 쓰레기통 속으로 더 깊이 손을 넣어 잡지 한 권을 낚아올렸지만, 실눈을 뜨고 표지를 보더니 도로 던졌다. “젠장, 이제 이 빌어먹을 통들에는 더 이상 읽을 만한 게 없어.” 그가 자리를 뜨며 말했다.
루소는 자신이 인생 이야기를 윤색한 건 그저 기억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서였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물론 그는 그런 데가 어딘지 미리 알려 주진 않았다.
편집자는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은 절대 쓰지 말라고 한다. 작가의 권위가 손상되니까.
하지만 모든 걸 기억하는 것처럼 쓰면 독자는 낌새를 챌 것이다.
내가 맡고 있는 대학원 과정 소설 창작 수업에서 한 학생이 내게 말했다. “선생님 소설들을 읽어 봤는데, 질문하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그중 일부는 지어내신 건가요?” 나는 그 학생이 마음에 든다.
앨런 긴즈버그는 무엇에 대해 써야 하는지 알고 싶다는 10대에게 친구들에 대한 사랑을 글로 쓰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든다.
나는 사랑이 끝난 후 너무 일찍 그 사랑에 대한 글을 쓰는 실수를 범한 적이 있다. 마음이 얼음처럼 차갑게 식은 후에야 글을 쓰라는 체호프의 권고를 잊은 것이다.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위대한 소설가가 될 수 있겠어?” J.M. 쿳지의 소설 속 인물이 존 쿳지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에 대해 한 말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요즘 내가 읽은 책들은, 내 작품을 포함해서 전부 나에겐 너무 긴 것 같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좋다.
보르헤스는 장편소설과는 달리 단편소설은 모든 면에서 본질적일 수 있다고 했는데, 나는 그 말도 좋다.
하지만 “나는 긴 책들은 무례하다고 생각한다.“는 지넷 윈터슨의 말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장편소설은 레이스처럼, 수녀원과 함께 유행이 지난 예술이다.” 라는 루이 페르디낭 셀린의 말도 마음에 안 든다.
나는 필명이라는 것에 갈수록 마음이 끌린다.
컴퓨터로 내 이름(Sigrid Nunez)의 맞춤법 검사를 실행하면 “달콤한 명사들(Sugared Nouns)“로 고쳐 준다.
어떤 작가들은 더 진실할 수 있도록 필명을 사용하는 한편, 어떤 작가들은 더 많은 거짓말을 할 수 있도록 필명을 쓴다.
릴리 톰린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 “다음에 이어질 콩트는 제 부모님 이야기입니다. 신원 보호 차원에서 이름은 바꿨습니다.” 마음에 든다.
장뤼크 고다르는 이렇게 말했다. “픽션으로 시작할 수도 있고, 다큐멘터리로 시작할 수도 있다. 어느 것부터 시작하건, 결국 나머지를 발견할 수밖에 없다.”
그레이엄 그린은 소설가들이 가슴에 얼음 한 조각을 지녀야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 생각이 좋다. 나도 그걸 지니고 있다.
그리고 플래너리 오코너는 소설 작가에게 어리석음이라는 기질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도 그걸 갖고 있다.
앨런 베넷은 작가에게는 그 어떤 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만큼 나쁘지는 않다고 말했다. 아무리 끔찍한 일이라도 작가에겐 유용하게 쓰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음에 드는 말이다.
종양학자는 말한다. “내가 아는 작가들은 그런 것 같지 않다.”
존 밴빌은 앨런 베넷의 말을 이렇게 바꾸어 설명한다. “작가들은 다른 사람들만큼 고통받지는 않는다.”
나는 이 말이 좋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자신이 암 진단을 받은 걸 뜻밖의 엄청난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자서전을 쓰는 원동력이 되었으니까.
H. L. 멩켄은 이렇게 썼다. “종이는 늘 있다. 펜도 늘 있다. 출구는 늘 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너무 오래 살지 않기를 바랐다.
“써야 해… 종이… 연필…” 시인 하이네가 임종의 자리에서 남긴 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물론 하느님은 나를 용서하실 거야. 그게 그분의 일이니까.”
다윈은 말년에 시를 더 많이 읽으며 살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말했다는데, 나는 그 말이 좋다.
케인스는 샴페인을 더 많이 마시며 살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말했다. 그 말도 좋다.
체호프는 “오랜만에 샴페인을 마시는군.” 하고 말한 뒤 잔을 비우고 죽었다고 한다. 나는 그 말도 좋다.
나는 마지막 말이 좋다.
베토벤: “천국에서는 들을 수 있겠지…”
케테 콜비츠: “모두에게 행운을 빌어요.”
고골: “사다리를 가져와. 빨리, 사다리!”
재치 있는 묘비명: “모두가 내 죽음을 슬퍼하지는 않는다는 걸 나도 안다.”
나는 코믹한 소설을 쓰고 싶었고, 내 인생에 대해 쓰면 된다는 걸 깨달았다.
달콤한 명사들(Sugared Nouns): 작가로서의 나의 삶과 죽음.
이탈로 칼비노는 이렇게 조바심쳤다. “일단 자서전의 여정에 오르면, 어디서 멈춰야 할까?”
내 인생 이야기는 네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좋은 시간들, 나쁜 시간들.
레이스 짜는 사람들은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수녀원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내 사랑,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은 영원히 얼음처럼 차가워지지 않을 거야.
이런 느낌이다. 재기 있는 생각들이 빛나지만 쉽게 읽히진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 소설의 영향을 받아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썼을 거라는 옮긴이의 말마따나(부끄러운 일인지 모르겠지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다), 이 책은 팬데믹의 봄이 배경일뿐 작가의 의식의 흐름을 정말 아무렇게나 오간다. 1960년대 히피운동에서 2016년 트럼프의 당선까지, 친구의 딸의 의붓아들이 섹스 스캔들에 휘말린 이야기에서 다른 친구가 어린 시절 사이비 종교 신봉자와 LSD를 하며 자신의 불안정한 심리를 고쳐나간 이야기까지, 혼란스럽게 이리저리 오가는 이야기들이 재미있게 읽힌다. 재미있는 인생을 살아온 어떤 할머니의 과거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다. 할머니가 조리 있고 잘 짜인 서사로 인생 이야기를 풀 가능성은 희박하니 그런가 보다 하고 들어야지.
하지만 이런 식으로 사건의 진행보다 등장인물 머릿속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야 하는 식의 구성이라면, 버지니아 울프 소설까지 읽어보기는... 재미있게 읽을 자신이 없다.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작가의 생각 중 마음에 드는 구절.
우리가 사는 이 반진실의 시대에, 갈수록 노골적인 위선이 판치고 이야기는 현실을 왜곡하고 모호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이용되는 현실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인의 역사와 성찰을 담은 문학일지도 모른다. 직접적이고, 진짜이며, 사실을 세심하게 다루는.
시> 단편소설> 장편소설 순으로 쓰기 어렵다는 작가의 생각. 동감한다.
「왜 소설을 써요?」 베치가 그걸 알고 싶어 했다. 「왜 시는 안 써요?」
나는 그에게 포크너의 가설을 말해 주었다: 소설가는 시를 쓰려다가 실패해서 단편소설을 시도하고, 그것도 실패한 후 마침내 장편소설을 쓰게 된다.
베치는 이해가 잘 안 된다고 했다.
『시가 단편소설보다 쓰기 어렵고, 단편소설이 장편 소설보다 쓰기 어렵다는 말이네요.」
「그렇지. 아니면, 장편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 그보다 어려운 장르인 시나 단편을 쓸 수 있는 사람들보다 더 많다고 말할 수도 있고.」
논란이 될 만한, 결혼제도의 취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작가 친구의 생각. 남편 모르게 하세요...
릴리의 외도 상대가 두서너 명이었다는 바이올렛의 주장은 사실과 달랐다. 그보다 많았다.
“난 늘 결혼을 원했지만, 한 남자와만 자고 싶진 않았어.”
언젠가 릴리가 나에게 한 말이었다. 그녀에겐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한 사람에게만, 하나의 몸에만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인 듯했다.
그녀에게 그건—사람에게 가장 큰 행복감과 활력을 줄 수 있는 흥분과 모험, 인간관계를 비난하는 것은—사회가 지닌 잔혹성의 일환이었다. 그녀는 최소한 자신은 다른 남자들을 포기하지 않고도 남편에게 좋은 아내가 될 수 있다고 추정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의 성적 욕구와 갈망에 대해 보다 솔직해진다면, 그리고 더 자유롭게 행동에 옮길 수 있다면 많은 부부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